|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4:16 |
---|---|
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교회 http://www.wordspring.net/ |
자기 規例(규례)대로
눅4:16
1. 들어가는 이야기
좀 전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성서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케리그마(Kerygma) 예수” 와 “역사적(Historical) 예수” 문제입니다. 케리그마란 케리세인(keryssein)이란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임금의 명령 혹은 어떤 공적(公的) 권위를 위임받은 전령자가 자기에게 위탁된 메시지를 公衆(공중) 앞에서 분명하게 외쳐 선포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국회가 “2008년 1월 1일부터 모든 농가 빚은 탕감한다” 라는 법령을 공표하였다면 그것이 곧 케리그마입니다. 신약성경의 모든 메시지는 철두철미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메시야=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케리그마” 로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케리그마로서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라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믿음이 온전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케리그마와 더불어 그 역사성이 확립될 때만이 온전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불교-유교-도교-마호멧교도 마친가지입니다). 역사적 근거가 없는 신화-전설-영웅담 등의 케리그마에 기초한 이시스-미트라-디오니소스-오르페우스-베스타 등 고대 신앙은 그 신앙의 하부구조가 되는 역사성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미신-우상-맹목적 신앙으로 변질되다가 마침내 소멸하였습니다. 역사적 예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 기독교 신앙이 신화-전설-영웅담 등 허구의 이데올로기적 케리그마가 아니고 예수라는 역사적 근거가 분명한 인물에 근거한 케리그마인 것을 밝히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2.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의 근거
신약성경의 기록 순서를 대략적으로 보면 바울 서신(AD 48-68)-마가복음(AD 70)-마태복음(AD 80)-누가복음(AD 90)-요한복음(AD 100)입니다. 바울 사도의 모든 서신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케리그마적 예수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후 복음서 기자들은 역사적 예수 문제를 절감하고 케리그마적 차원을 견지하면서도 “역사적 예수”를 증거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의 근거는 4 복음서 특히 공관복음서(마가-마태-누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공관복음서 중에서도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그리스도” 라고 하는 케리그마적 의식 없이 무의식적 행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대목들, 즉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마9:36)-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셨다(마4:38)-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눅13:10)-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눅14:1)-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마12:1) 등의 기록에서 이 땅에 발붙이고 사셨던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 오늘은 “자기 규례대로(눅4:16)” 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3. 본문 말씀(눅4:16)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He went to Nazareth, where he had been brought up, and on the Sabbath day he went into the synagogue, as was his custom. And he stood up to read 눅4:16).
우리는 본문 중 “규례대로(as was his custom)” 라는 말씀에서 생생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없었더라면 “규례대로” 라는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표현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규례대로” 라는 말은 “일상 생활에서 오랜 동안 어떤 행동을 한 결과 그 행동이 몸에 배여 버릇-습관-관습이 된 상태” 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본문을 다시 읽으면 “예수께서 어느 날 그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에 가셨을 때 평소 나사렛이 아닌 그 어느 곳에서라도 안식일이면 언제나 회당에 가셔서 성경을 읽으시던 그 습관대로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 라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동은 구체적인 일상생활에서 몸에 배여 나타난 행동이지 이 날 갑자기 특별히 나타난 행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문은 역사적 예수의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작은 규례-습관-관습-버릇-무의식적으로 몸에 배여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예수님의 행동을 전혀 비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하였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人子(인자-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안식일의 습관뿐만 아니라 평소 일상생활에서도 예수님 나름대로의 어떤 습관(천지자연의 변화-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현실-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의 가르침과 행동-죄인들의 심리 상태-농부, 장사군, 종, 임금이나 관원들의 일상생활 등을 유심히 관찰하셨다든지 하는)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좁게는 본문에 나타난 대로 안식일-주일을 지키는 예수님의 규례와 우리(나-가정-구역-교회)의 규례는 어떠한가? 넓게는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매일의 생활에서 예수님의 규례와 우리의 규례는 어떠한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우리들 스스로 반성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입니다(Custom is a second nature). 습관은 운명을 바꿉니다. 김유신의 斬馬碑(참마비: 김유신이 평소 습관대로 기생 천관의 집으로 향한 말의 목을 베었다는 고사)가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것-하늘의 것-위에 것-하나님 나라-영원한 것을 생각하고 사는가? 아니면 부정적인 것-땅의 것-세상의 썩어질 것-육의 것을 생각하고 사느냐? 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다음 주에는 이 습관의 문제를 좀 더 묵상하기로 하겠습니다.
자기 規例(규례=습관버릇=Custom)의 힘
눅4:16
1. 들어가는 이야기
우리는 지난 주일 2000년 전 이 땅에 발붙이고 사셨던 역사적 예수님도 사람이셨기에 예수님 나름의 자기 규례-습관-버릇이 있었다는 사실을 묵상하였습니다. 구약 열왕기9:17-20에 어떤 사람이 미친 듯이 병거를 모는 모양을 보고 파숫군이 병거 모는 자가 “예후”인 것을 알아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듯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독특한 자기 규례(Custom)-습관-버릇이 있습니다(Every one has his peculiar habit). 자기 규례(as was his custom)란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정한 생각이나 행동을 계속 반복 되풀이 한 결과 그 생각이나 행동이 몸에 배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은 신앙적 측면에서 이 자기 규례-습관-버릇의 문제를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2. 자기 규례(Custom)-버릇-습관의 힘
규례-습관-버릇은 각 사람의 일상생활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말버릇-잠버릇-술버릇-옷 입는 습관-밥 먹는 습관-운전하는 습관-명절 쇠는 관습-일을 대충대충 혹은 꼼꼼히 하는 습관-돈 쓰는 습관-몸을 씻는 습관-여행, 메모, 취미, 운동하는 습관- 스트레스 푸는 습관-사람을 대하는 습관 등이 모두 그러합니다.
그런데 동서양을 무론하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제 버릇 개 못 준다-한 번 신사는 영원한 신사다(Once gentleman, always gentleman)-猛將(맹장) 아래 弱卒(약졸) 없다-한 번 몸에 배인 습관은 버리기 어렵다(Old custom die hard)-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긍정적-바람직한-건강한-유익한-도움이 되는 플러스적인 습관과 부정적-너절한-악한-비열한-조잡한-마이너스적인 습관의 차이는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만큼 하늘과 땅 차이라는 말입니다.
서양 속담에 "습관은 모든 일을 쉽게 한다(Custom makes all things easy)" 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규례-버릇-습관은 인체의 간-위-심장-창자-혈관 등을 움직이는 자율신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일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국가 경제발전의 흥망이 국가의 기반 시설(Infra-structure-도로-전산-유통-항만 시설-치안-의료 등)의 유무에 달렸듯이 사람의 행-불행이 그 사람의 규례-버릇-습관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속된 말로 버릇이 개판이면 인생도 개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Custom is a second nature), 습관은 운명을 바꾼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바람직한 신앙적 규례-습관-버릇은 어떤 것일까? 하는 문제를 묵상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3. 선하고 바람직한 신앙 습관 몇 가지
첫째. 안식일-주일을 특별한 자기 규례-습관-버릇으로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는 사회적-교회적-문화적으로 모든 권위-전통-전승(교회적으로 목사-신부-장로-당회-예배 형식-교회의 각종 교리와 제도 등)이 붕괴되거나 해체 중에 있습니다. 물론 붕괴될 것은 붕괴되고 해체될 것은 해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붕괴되고 해체된다고 하더라도 일주일의 첫날 주일 만은 각 사람이 저마다의 “자기 규례”를 세워 오히려 더욱 옹골차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냈다”는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주일을 주일답게, 하나님의 날을 하나님의 날답게,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천지가 무너져도 붕괴되거나 해체될 수 없는 신앙적 진리입니다.
둘째. 신앙의 대를 잇는 규례-습관-버릇을 길러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긍정적 의미에서 貫祿(관록-일정한 일에 경력이 쌓이어 몸에 갖추어진 위엄이나 무게감)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여, 네 속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던 그 믿음인 줄 내가 확신하노라(딤후1:5) *디모데여, 장로와 집사를 세울 때는...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딤전3:6), 요한 사도는 *내가 네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1:4) 라고 하였습니다. 대를 잇는 신앙의 관록을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대를 잇는 신앙은 생일-명절-결혼식-장례식-추도식 등 모든 가족이 모였을 때 신앙의 어른이 의례적인 예배 순서 외에 각 가정의 형편에 맞는 특별한 신앙적 규례를 만들어 지킴으로 전승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이웃에 대한 깊은 관심과 작은 선행을 규례-버릇-습관화 하여야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제일 큰 이유가 교회 사람들이 “짜다! 쩨쩨하다! 이기적이다!” 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행2:47)고 하였고 바울 사도는 외인에게도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딤전3:7). 이제 우리 교회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라도 평소 일상에서 만나는 세상 사람(직장 동료, 동네 시장 상인, 목욕탕-이, 미용실-슈퍼-택시 기사 등)들에게 좀 넉넉하게 대하여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지 사람이 참 좋아!” 라는 소리를 들어야지 “저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데도 사람이 참 좋아!” 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다니는지” 와 “다니는데도” 의 차이는 얼마나 큰가!).
이웃에 대한 관심과 작은 선행도 습관입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 혹은 “없다” 와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 “냉수 한 그릇” 베푸는데 경제적 여유가 있다 없다가 무슨 문제가 됩니까? 아니 그러합니까? 그러나 습관이 안 된 사람은 “냉수 한 그릇”도 베풀 줄 모릅니다.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습관-버릇-규례가 몸에 배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후 우리 모두 아름다운 신앙적 자기 규례-버릇-습관을 몸에 익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축원! 축원! 합니다.
격변하는 시대와 자기 規例(규례)
눅4:16
1. 들어가는 이야기
서구 사회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합리론(Rationalism)의 창시자-프랑스의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의 유명한 철학 명제 “Cogito, ergo sum(고기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후 각 사람은 더 이상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국가-영주-교회-집안)에 종속된 사람이 아니라 각 사람이 저 마다 독립적인 個人(개인)으로서 주관적-주체적-개인주의적(individualism) 인간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서양의 개인주의적 인간관은 자유주의-자본주의-민주주의-정보의 세계화 바람을 타고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도 보편적 가치관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는 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 강원도 동해시에 사는 30대 중반의 한 간호사의 말에서 그런 개인주의적 인생관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고 그 날 모인 사람들 모두 공감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4 남매 중 셋째다. 엄마는 입만 열면 ‘나는 너희들 키우느라 못 입고-못 먹고-못 쓰고 살았다’ 고 푸념한다. 나는 내 엄마를 존경하지만 엄마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내 힘닿는 대로 내 아이에게 잘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 처럼 내 인생을 내 아이에게 올인(all-in)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리고 미안하지도 않다. 내 인생은 내 인생이고 아이 인생은 아이 인생이다. 나는 우리 부부가 번 돈으로 충분히 잘 먹고-잘 입고-잘 쓰고 즐기며 살고 있다. 훗날 내 아이는 나의 이런 인생관을 충분히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2.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신토불이라고 해서 상투 틀고 팔자 걸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아니 되는 시대입니다. 시대를 거슬리는 사람은 그 사람 자신도 괴롭고 그 주변 사람도 고통스럽습니다. 누군가 한 때 부모는 자식을 정성스럽게 키우고 자식은 나중에 늙으신 부모께 효도하는 것은 서양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우리 한국 최대의 미풍양속이니 년년세세 잘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요즘은 그런 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는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면 그 방법도 달라져야 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자식에게 올인하고 후회하는 부모도 많고, 자식은 올인 받은 만큼의 생산성을 내지 못하였거나 달라진 문화 때문에 부모와 갈등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변하는 것(variant)과 변하지 않는 것(invariant)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 요소인 음식-옷-집-차-화장실-예절-인간 관계-효도-가정의 형태-종교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형식-방법-종류-기술-유행-절차 등은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그렇다면 격변하는 시대를 거슬리지 않고 언제나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을 수 있는 자기 규례의 지혜는 무엇일까?
3. 격변하는 시대에 자기 규례를 세우는 지혜는 무엇인가?
첫째. 東西古今(문자 그대로 동양 서양 옛날이나 지금이나)을 통하여 어느 시대에서든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역사에 이름을 남긴-성공적인-의미 있는-바람직한 인생을 산 뛰어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PASSION"입니다. "Passion" 이란 말에는 “뜨거운 열정-정성-관심 + 고난-수고-연습-노력” 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격변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도 그러합니다. 학문-스포츠-정치-경제-사랑-예술-놀이-장난-싸움-장사-연구-운동-풍류 등 그 무슨 일을 하든지 "Passion" 을 가진 사람만이 성공-성취-보람-재미-의미를 누릴 수 있습니다. "Passion" 이 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된 사람 대부분도 로또 복권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우리 시대의 흐름(Trend)은 “재미” 입니다. 1960년 대 국민소득 200 달러-생존 자체가 위협 받았던 우리 할머니-할아버지-어머니-아버지가 살던 시대의 화두는 “하기 싫어도-재미 없어도-지겹고 괴로워도 자식 키우고 먹고 살아남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곧 생존이 문제 였습니다. 그러나 국민소득 20,000 달러인 우리 시대의 화두는 “내게 맞는 재미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곧 재미가 문제입니다. 우리 시대는 집도 절도 없어도 굶어 죽을 염려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 사람들은 “If It is not fun, why do it?-재미 없는 일을 왜 해?” 라고 합니다. 그 결과 우리 시대는 마침내 “재미의 철학(Fun Philosophy)” 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불행한 사람은 못 입고-못 먹고-못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재미를 모르고 열정이 없이 시시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경제적 여유가 없어도 스키-스노우 보트-트레킹-NGO 활동-여행-도서관을 이용한 독서-각종 동호회 활동 등으로 재미나게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지금 재미 있게 살고 있는가?
셋째. 격변하는 시대에 가장 기본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건강한 것입니다. 나는 정신적-영적 운동보다 육체적 운동이 우선한다고 생각합니다. 건전한 정신에 건전한 육체가 깃드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듭니다. 육체적 운동에 대하여는 말씀의 샘물 최근호(514-517호)를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육체와 마찬가지로 정신과 영혼도 운동을 해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육체는 규칙적으로 꾸준히 걷기만 하여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정신과 영혼도 그러합니다. 규칙적으로 꾸준히 앉아만 있어도 우리의 영혼과 정신은 건강해 집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坐一走七(좌일주칠-이른 아침 잠깐 고요히 앉아 묵상한 힘으로 온 하루를 주도적으로 산다)이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육체적 운동도 영적 운동도 “규칙적으로 꾸준히!” 라는 이 쉽고도 어려운 고비를 넘느냐? 못 넘느냐? 에 달렸습니다.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바라옵기는 우리 모두 “규칙적으로 꾸준히!” 라는 이 고비를 잘 넘어 육체와 영혼이 강건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