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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89:1-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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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교회 http://www.wordspring.net/ |
以信稱義(이신칭의)-오직 믿음!
시89:1-52(특히 16절)
1. 들어가는 이야기
매년 10월 31일은 종교개혁기념일입니다. 우리 개신교회가 이 날을 기념하는 이유는 비텐베르그 신학부 교수 마틴 루터(1483-1546)가 1517년 10월 31일 로마 교황청이 판매하는 속죄권(면죄부)의 부당함을 반박하는 95개조문을 대학 정문에 붙인 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의 95개조문의 핵심은 인간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 근거는 속죄권(면죄부)을 산다거나 선한 행동을 한다든가 하는 외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각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 직접 참회하는 내적 조건에 달린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루터의 95개조문은 당시 구텐베르그(1397-1468)의 금속 활자 인쇄술 발전에 힘입어 전 유럽에 퍼졌고 이에 공감하는 제후-귀족-학자-개혁주의자들이 힘이 결집하여 로마 교황청의 갖가지 위협-협박-권모술수-전쟁까지도에도 불사하고 극복하여 1555년 슈말칼트 동맹(Schmalkald League) 결성으로 개신교 제후국 내의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였습니다. 영국은 1588년 5월 무력으로 영국을 가톨릭화 하려던 스페인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후 개신교의 자유를 획득하였고, 프랑스에서는 1598년 낭트 칙령으로 개신교의 자유가 확보되었습니다. 독일은 그후 성만찬 문제와 교회 재산 분할 문제로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나 혼란에 휩싸였다가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개신교의 자유가 확립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은 중세를 마감하는 시대의 흐름으로 독일의 마틴 루터를 필두로 스위스-스코트랜드-프랑스-네덜란드 등 유럽 전체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종교개혁운동이었습니다. 루터와 함께 쯔빙글리(1484-1531), 요한 칼빈(1509-1564) 등은 종교개혁 운동의 3대 중심 인물 이었습니다.
2. 종교개혁 운동이 남긴 것
종교개혁 운동이 유럽 사회에 남긴 위대한 유산은 첫째, 인간의 구원은 교회 제도나 착한 행동 같은 외적 요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개인의 내적 믿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믿음의 신앙을 확립하였다는 점입니다. 둘째, 성경 해석의 권위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천부적으로 심어두신 理性(이성)의 자율성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는 점입니다. 이 사상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로 철학적-논리적 기초가 확립되었습니다. 셋째, 개신교회의 발전(장로교회-회중교회-퀘이커-재세례파 등)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봉건주의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감당하였다는 점입니다.
3.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以信稱義)-Sola Fide!
첫째. 마틴 루터는 구원의 확신 문제로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는 매일 참회하고 금욕하고 로마 교황청에 있는 참회의 계단을 맨 무릎으로 오르내리는 고행을 하였으나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처절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 서기가 두려워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조차 피하였습니다. 이런 루터를 지켜보던 그의 스승 스타우핏츠는 “참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이라” 고 충고하였습니다.
그 후 루터는 시편을 묵상하던 중 “종일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며 주의 의로 인하여 높아지오니(시89:16)” 하는 구절에서 강력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루터는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義”는 하나님 자신이 義(의)로우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근본적으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이신 하나님이 그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義(의)라는 것을 깨닫고 구원의 확신을 얻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즉, 사람은 원초적으로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제도나 선행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회개하는 사람을 의롭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을 廓徹大悟(확철대오)한 것입니다.
둘째.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 정문에 95개조문을 붙인 후 교황청으로부터 엄청난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은 외적 제도와 선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Sola Fide!)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 위에 굳게 서서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520년 12월 교황청의 파문장이 도착하자,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 교정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문장을 불태움으로써 로마 교황청과의 결별을 선언하였습니다(이 얼마나 위대한 용기인가!). 152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촬스 5세가 “루터 문제”를 해결하고자 웜스(Warms)에서 어전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그가 쓴 모든 저서를 폐기한다면 지난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는 교황청의 말을 듣고 그는 저 유명한 “루터의 웜스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한 웜스의 모든 벽돌들이 나를 덮친다하여도 나의 주장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입장입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Gott hein mir. Amen)
셋째.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라는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참 회개한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절대 자유인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기도 하다. 믿는 사람은 율법에 의하여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이웃에 봉사하는 책임을 지녔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즉,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9:23-24) 하신 말씀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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