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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자유를 위한 부르심

출애굽기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057 추천 수 0 2011.03.15 23:28:25
.........
성경본문 : 출5:1-3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예배의 자유를 위한 부르심
출5:1-3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던 어떤 40대 남자가 늙으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교회 가기 싫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왜 교회를 가기 싫으냐고 물었답니다. 아들은 교회에 나가기 싫은 세 가지 이유를 말했답니다.
첫째는 주일날 늦게까지 잠을 자고 싶은데 일찍 일어나야 하니 가기 싫다고 했답니다. 둘째는 성가대가 불협화음으로 찬양할 때 정말 듣기 싫어 교회 가기 싫다고 했답니다. 셋째는 장로님 기도가 너무 길어 그것 듣기 싫어 교회 가기 싫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늙으신 어머니가 세 가지 가야할 이유를 말했답니다. 첫째는 교회는 사람보고 가는 것이 아니니까 가야되고, 둘째는 예배드리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니까 가야 되고, 셋째는 네가 그 교회 담임 목사니까 가야된다고 말했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예배드리는 것이 부담이 됩니까? 기쁨입니까?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습니다. 예배가 부담이 되어 차라리 중환자실에 누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성도님 계십니까? 예배드리기 싫으니까 차라리 예배의 자유가 없는 북한이나, 베트남, 미얀마, 중국, 이란, 수단, 에리트레아,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성도님 계십니까? 우리가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나라에 태어났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예배드릴 수 있는 건강이 있고 신앙이 있어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을 아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하나님은 오늘날도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권력 있는 자, 아름다운 자, 지식 있는 자, 돈 있는 자, 유익을 주는 자, 기쁨 주는 자를 일평생 찾고 다니지만 우리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이렇게 자유과 좋은 조건들을 주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켰습니까?

1.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드릴 수 있도록 구원해 주셨습니다(1).
그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이겠습니까?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서이겠습니까?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한 말을 보십시오.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하십니까? 1절 같이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보내라”라고 말씀합니다. 바로의 노예로 있어야 할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원 소유주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보내라는 것입니다. 왜 보내라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절기 지키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짐승을 잡아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로부터 탈출 시킨 가장 궁극적인 이유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모세나 아론이 바로를 설득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에게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를 달라고 하면 보내 주지 않을 것 같으니까? 가나안 땅에 간다고 하면 보내 주지 않을 것같으니까 거짓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장 12절을 보십시오. 애굽에서 인도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희생을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지시를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10장 9절도 보십시오. “모세가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 (출 10:9)”라고 바로에게 말합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이유는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주기 위해서인 것도 맞습니다. 경제적으로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한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단이고 본질적인 목적은 신앙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목적은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유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노예로 살 때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집회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희생제물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동물을 숭배했기 때문에 동물을 죽여 드리는 예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애굽은 우상숭배가 번성한 다신교 나라였기 때문에 신앙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주어 자유롭게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그들을 출애굽 시켰습니다. 바로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가나안 땅의 삶의 터전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소산으로 그들이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 소산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하였습니다. 흠 없는 짐승으로 제사 드리길 원했습니다. 첫 소산물로 제사 드리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유를 주니까 그 자유를 욕망을 발산하는 도구로 사용해 버립니다. 주신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바알 신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물질의 신 맘몬 신을 왕으로 모시고 삽니다. 그 소산물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삼습니다. 오히려 바알을 섬기는데 사용합니다. 소산물이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수단이 행복을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희생 제물이 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여 우리를 사탄의 노예로부터 죽음의 노예로부터 두려움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길과 진리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어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자유를 가지고 예배하기 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그 자유를 다시 잃어 버렸습니다. 앗시리아의 포로가 됩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주신 축복의 땅을 모두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쾌락의 포로가 됩니다. 죄의 포로가 됩니다. 안식이 없어지고 두려움과 걱정의 포로가 됩니다. 사탄의 포로가 되어 어둠을 즐기며 삽니다. 진정한 자유를 상실해 버립니다. 약속의 땅을 잃어버리고 바벨로 포로로 잡혀갑니다. 나라가 망해 버립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기업을 주고, 직장을 주고, 지식을 주고, 명예를 주고, 권력을 주고, 자녀를 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계속해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것을 목적으로 그것에 인생을 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방해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식 때문에, 직장 때문에, 명예 때문에, 지식 때문에, 권력 때문에, 부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방해 요소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오히려 더욱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와 가나안이 주어질 때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국의 명재상이었던 글래드스턴은 “나에게는 예배석이 대영제국의 수상석보다 더 존귀하다”고 말했습니다. 예배의 자리가 어떤 자리보다 더 존귀한 자리입니다.
미국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헌법에 의거,1849년 3월4일 대통령에 취임해야 되는데 그날이 주일이라 취임을 거부하여 에치슨 상원의장이 24시간 대통령 임무를 대신했습니다. 주일 예배가 대통령 취임식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토저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셔서 먼저 예배자로 만드시고 그 후에 일하는 자로 만드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삶의 가장 우선순위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시95: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99:5)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찌어다” “(시96: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시66 : 4)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찌어다”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시5 :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 우리에게 자유도 젓과 꿀이 흐르는 가안땅도 주셨습니다. 외국 격언에도 “햇볕이 있을 때 건초를 말리라.”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예배 드릴 수 있는 자유와 가나안을 주셨을 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의 방해자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2).
바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아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게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목회자에 대한 불신, 예배 필요성의 상실, 헌금에 대한 부담, 사람에 대한 기피, 게으름, 바쁨, 자만, 산만함, 욕망, 자기만족, 무관심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오늘 성경에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자기 교만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비소 섞인 독설입니다. 막강한 전제 권력을 가진 군주의 교만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타락한 인생이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완고함을 스스로 드러낸 말입니다(롬 1:21). 내가 애굽의 신으로 숭배 받고 있는 바로인데, 세계 패권국의 왕인데, 노예들이 섬기는 신이 누구관대 그 말을 듣겠냐는 것입니다. 바로는 애굽의 여러 신들 중의 하나로 숭배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자기가 신으로 숭배받기 때문에 노예들이 믿는 신을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자기 교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믿는 신, 권력 없는 자들이 믿는 신, 무식한 자들이 믿는 신이라고 가볍게 보는 것입니다. 조금 권력이 있고, 명예와 인기, 지식과 부가 쌓이면 하나님을 자신의 지위보다, 자신의 명예보다 자신의 부도다 자신의 지식보다 못하게 보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기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조금 주어지는 것 잠깐입니다. 영원한 것 아닙니다. 다 놓고 떠나야 합니다. 나폴레옹 권력이 주어지니까 영원할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배를 드린 생활을 했지만 권력을 잡으니까 예배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워털루 전쟁에서 참패하여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 평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한참 눈을 감고 회상을 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전투가 치열하던 어떤 주일이었죠. 그때 나는 졸병이었지만 아침에 철모를 벗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린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가 내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예배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지금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처럼 유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 10:4)”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려고 합니다.(겔 28:2) 매일 텔레비전에서는 자아를 만족하는 삶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최고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8)”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 4:6)”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입니다.
“나는 여호와을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단언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아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여호와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니 그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여호와라는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노예의 신인 여호와가 애굽의 신인 바로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내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권위와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만 지식이 주어지면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조금만 권력이 주어지면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진정한 주인을 아는 사람은 최우선 순위를 예배에 두고 삽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 보십시오. 대통령 만나길 좋아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지미 카터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서도 참으로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 선거 유세를 하고 있을 때,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는 그 바쁜 일정에도 고향으로 돌아가 조지아주에 있는 작은 교회, 자기 나가던 교회에 나가서 23년 동안을 개근하여 아이들을 가르쳐 왔는데 20명을 앞에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 앞에 경건히 예배드렸다고 합니다. 기자들이 70명이 몰려왔답니다. 기자들과 만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찾아 주시니 고맙기는 합니다만은 다음 주일부터 다 당신들이 나가는 교회에 나가십시오."라고 부탁했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주가 되시므로 예배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시45:11)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찌어다”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므로 예배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시95:6)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모든 신의 신이 되시므로 예배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시97:7)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히9:14) 인격적으로 존재하시며 예배자들의 삶의 방향과 내용을 주관하시며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예배자들의 심성을 아시고(행1:24; 롬8:27)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받으시길 원하십니다.(요4:23) 하나님은 예배자들을 가까이 부르십니다(사1:18; 약4:8) 예배를 통해 용서해 주시고 용기와 소망을 주기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매주 자기 교만을 자복하고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3.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드리면 징계가 아니라 유익을 주십니다.(3)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예배 드리게 놓아 주면 자신에게 불이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예배 드리지 않는 것이 자신들에게 불이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다시 바로에게 간청합니다. 고센 지역에서 사흘 길쯤 가는 곳 즉 시내산에 가서 희생 제사를 드리기를 원한다고 간청합니다. 만약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온역과 칼로 치실까 두렵다고 고백합니다. 온역의 악성 전염병입니다. 칼은 전쟁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질병과 전쟁으로 징계할 수 있으니 보내달라고 강청했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어느 편에 속한 것같습니까? 바로 편입니까? 모세와 아론 편입니까?
예배드리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시간 낭비, 물질 낭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드리지 않는 것이 손해입니다. 아이들 대학 시험을 앞에 놓고 시간 아끼기 위해 예배까지 드리지 말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드리는 것이 유익입니다. 세계 기독교 인구가 21억이나 됩니다. 우리 나라 국회의원 299명 중에 118명이 기독교인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신앙인이 있습니까?
실제로 조사해 보니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 오히려 성적이 높다고 합니다. 미국 아이오와대 사회학과 제니퍼 그랜빌 교수의 연구 결과 교회에 다니는 10대들의 성적이 높게 나왔다고 합니다. 미국학교 7학년부터 12학년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에서 매주 교회에 다니는 학생들은 중퇴 비율이 낮았다고 합니다. 종교 예배에 참석하는 10대들은 전혀 참석하지 않은 10대보다 높았다고 합니다.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평안하게 살겠습니까? 예배드리지 않고 세상 쾌락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평안하게 살겠습니까?
정신위생계에 있어서 세계적인 학자인 데이비드 핑크 박사는 "안정을 위한 4박자 균형"이라고 하는 논문에서 정신적 요소가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네가지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첫째가 일, 둘째가 놀이, 셋째가 사랑, 넷째가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네 요소 중에 예배가 가장 근본적인 요소라고 말합니다. 예배를 정신안정의 절대 필요 불가결한 요소로라는 말입니다. 수면제 먹고 신정 안정제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배라는 말입니다.
예배 드리는 사람이 건강하게 살겠습니까? 예배 드리지 않고 산으로 들로 건강을 찾아 떠나고 쉬겠다고 집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겠습니까?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는 등 규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사망위험이 약 20%가량 낮다고 합니다. 미국 뉴욕 예시바대학 연구팀은 9만 2,395명의 50∼79세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 결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가족이나 친구 등의 사회적 지지가 강하고 담배를 덜 피우고 술을 마시지 않는 등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고 있어 사망위험이 낮을 수 있지만 이런 요인 말고도 신앙생활 자체가 사망 위험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영국 'The Times'의 보도에 의하면 최소 한 매주 한 차례라도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7년이나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조지 W. 컴스톡 박사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에 비해, 전혀 참석하지 않는 사람이 치명적인 심장병에 걸릴 위험률이 거의 두 배나 높은 반면, 규칙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신앙인이 주요 질병의 낮은 발병률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건강에 상당히 유익한 투자라는 것입니다.
예배드린다고 경제적으로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18세기 말 경 프랑스 혁명 후 무신론자들에 의해 프랑스에서는 10일 휴일제가 실시된 적 이 있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이 제도가 국가 산업발전을 위한다고 하였으나 그 결과는 실 패로 끝났습니다. 오히려 이 기간 동안 산업재해가 급증하고 생산량도 40%나 감소되어 프랑스는 다시 7일 휴일제로 환원하였습니다. 소련에서 공산혁명을 일으킨 무신론자 레닌은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하루 분의 일을 더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8일 휴일제를 채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생산성은 그 전보다 30% 감소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고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쉬라고 하셨습니다. 예배하는 날로 정하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날 예배드리지 않고 새벽에 남침을 시도하여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킨 북한을 보십시오. 사망한 김일성의 외가 쪽이 기독교 집안이었습니다. 김일성이 다녔다는 숭실중학교는 기독교학교였습니다. 김일성 외가 쪽의 외삼촌들이 기독교 목사가 있었습니다. 김일성 어머니 이름이 강반석입니다. 반석은 베드로 이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고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우상화시켰습니다. 기독교의 시스템을 도용하여 월요강연회 수요학습회 그리고 토요생활총화와 같은 의식을 치릅니다. 토요생활총화 때에는 수령님의 교시록 이라든지 김정일의 말씀록을 가지고 일주일간의 생활을 반성하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는 큐티와 같은 것입니다. 김일성, 김정일 찬양 가는 성경의 찬송가와 비슷한 멜로디와 비슷한 형식으로 불러지고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 시스템을 모방한 사이비종교국가로 전략시켜 놓았습니다. 잘 사는 것이 압니다. 행복한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우리는 예배를 통해 참된 안식을 누립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46:1)” 우리는 예배를 통해 새 힘을 받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 8:17)” 우리는 예배를 통해 존귀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사 55:7)” 우리는 예배를 통해 진정한 용서를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2-3)” 우리는 예배를 통해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고 영혼이 소생함을 누립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고 지혜와 부귀영화를 받았습니다.
삼하24: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셔서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치고 구원 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사기 6장24절에는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았을 때 3백 명으로서 모래알 같은 미디안 군사와의 싸움에서 승리 할 수 있었습니다.
대상21:22 다윗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니 온역이 백성 중에서 그쳤습니다.
대상21:26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픈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예배시간에 나와 삶에 지친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으면 우리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고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주셨습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싫증이 나면 설교가 어떠한가를 말해 주는 것보다 우리의 마음 상태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흥미가 없거나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설교 때문이 아니라 우리 마음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드리는 것은 받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빌리 그래함목사님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주일에 소가 우물에 빠지면 건져야 합니까, 건지지 말아야 합니까?" "물론 건져야죠, 그러나 그 소가 주일마다 우물에 빠진다면 그 소는 팔아 치우십시오". 우리를 예배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다시 종살이 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을 과감히 제거해야 합니다. 만약 계속 그것이 목적이 된다면 우리 하나님이 강제로 예배에 나오지 않고는 못견딜 정도로 강제로 거두워 버릴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것처럼 하나님 이 백성에게 예배의 자유를 빼앗아 버린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합니까?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삶의 목적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예배는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 감격하여 기쁨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들어주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과 결단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구원역사와 은혜의 말씀에 대해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더불어(With God),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Unto God)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란 우리의 마음과 뜻, 몸과 시간, 지성과 감성, 우리의 태도 등,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배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축하하는 기쁨의 축제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우리는 성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의 자유는 예배를 위해 주신 것이며 우리에게 주신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도 예배를 위해 주신 축복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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