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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출5: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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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좋은 일 하다가 비난이 다가오면
출5:4-9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시골에 늘 비난하기를 좋아하는 아주머니가 살았답니다. 장을 보러 가는데 동네 버스 정류장에 허름한 버스가 서 있었답니다. 옛날 시골 버스가 와야 할 손님이 오지 않으면 기다리는 것처럼 손님을 더 태우려는지 계속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늘 비난하기 좋아하는 이 아주머니가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아 기사 양반, 이 똥차 언제나 가유?!"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기사가 하는 말이 "똥이 차야 가지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회는 비난 문화, 악플 문화가 지나칠 정도로 널리 퍼져있습니다. 인터넷 신문을 보면 대부분의 기사들에 비난들이 달려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들이 막말을 하며 독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상대 당을 비난하며 비난 전쟁을 벌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내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실체 없는 비난이 난무합니다. 비난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비난 중독자들, 흉보기 중독자들, 비난 생산자들이 있습니다. 뇌에 사탄이 비난이라는 집을 지어 놓았는데 그걸 헐지 못하고 즐기고 삽니다. 10가지 중 9가지는 잘하고 1가지가 부족해도 그 한 가지를 보며 비난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숨 쉬는 욕구, 식욕, 성욕, 수면욕과 같은 것은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그런데 비난 욕구를 기본적인 욕구로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난하지 않으면 입이 근질근질하여 견디지 못합니다.
이 비난의 판단이나 비판, 비평과는 다른 말입니다. 우리말 큰 사전에 판단이라는 말은 "근본을 따지어 사물의 가치와 관계를 결정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선악을 판단, 잘잘못의 판단, 가치의 판단 등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비판과 비평이라는 말이 비슷하게 사용되는데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비판은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지적함을 말하고 비평은 옳고 그름 따위를 가리어 논란함을 말합니다. 평론 즉 문예비평, 문명비평, 인물비평 등을 말합니다. 그러니 판단은 비판과 가치중립적인 비평의 기본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비난은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하는 것입니다. 터무니없이 사실과 전혀 맞지 않게 헐뜯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느끼는 분노를 직설적으로 표출합니다. 부정적 표현 욕구를 거역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난의 몸짓, 표정, 말을 통하여 상대방에게 미움, 분노, 경멸, 부정적인 평가를 퍼부음으로 받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고통을 줌으로 자신의 복수 욕구를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비난함으로 자신을 차별화합니다. 비난받는 사람에게 분노, 공포, 수치심, 자괴감, 배신감을 느끼게 합니다. 선한 의지를 꺾어 버립니다.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특히 좋은 일 하다가 비난을 받으면 얼마나 낙심을 합니까? 좋은 일 하시다가 비난을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좋은 일 할 때 누가 우리를 비난합니까?
1. 좋을 일 할 때 누가 비난합니까?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좋은 일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가게 하는 일, 경제적 불평을 해소하고 잘 살게 만드는 일, 자유와 평등,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는 좋은 일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좋은 세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비난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8, 9절을 보십시오. 애굽의 왕이 비난합니다. 외부적인 비난입니다. 대적자의 비난입니다. 좋은 일을 하는 데 방해자의 비난입니다. 힘있는 자의 비난은 실제적으로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형벌이 따르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한 번 비난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불 단지의 전봇대가 잘 못 서있다고 비난하면 그에 따른 조치가 내려지는 것입니다.
어떤 형벌이 따랐습니까? 6절 7절을 보십시오. 백성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을 통하여 강제 노역을 더 강화합니다. 벽돌을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짚을 공급하지 않고 스스로 돌아다니며 조달하게 합니다. 일이 잘되지 않자 때리며 재촉합니다(10-14). 우리가 좋은 일을 하려면 늘 이런 비난자들은 있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방해하는 대적자들이 있습니다. 사탄의 손에 조정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이상히 여길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8)”
날씨는 비난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좋은 일 하면서 비난자들에 마음을 고정시키지 않으면 비난자들의 포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기 힘든 비난의 대상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 참 견디기 힘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동지들이 비난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입니다. 중간 지도자들입니다. 내적인 비난입니다. 마땅히 지지자가 되어야 할 사람들의 비난입니다. 사업을 같이 해야 하고, 건축을 같이 해야 하고, 프로젝트를 같이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좋은 일을 같이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비난을 합니다. 그러면 쉽게 무너집니다. 포기해 버립니다. 내부 분열이 생겨 좌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었던 사람들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아꼈던 사람들이, 피를 나눈 형제들이 비난한다고 좋은 일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커틴이 더러워 갈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권사님이 왜 그런 색깔로 했느냐고 비난을 합니다. 어려운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열심히 선교합니다. 장학금을 주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열심 있는 교인들이 비난합니다. 그 돈 있으면 노숙자 주라고 비난합니다. 사탄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다윗이 나아갑니다. 그 때 골리앗이 비난합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삼상 17:43-44)” 그런데 이렇게 골리앗만 비난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형들이 비난하였습니다. 큰 형 엘리압이 비난합니다.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삼상 17:28)”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벽을 건축하려고 할 때 산발랏과 암몬 사람, 아라비아 사람들이 업신여기며 비난합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도와주어야 할 선지자 스마야가 악한 말을 지어 비방하려 합니다(느6:13).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 사역을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로마인들도 비난하지만 혈육으로 같은 백성 유대인들이 비난합니다. 자칭 유대인으로 왕이라고 비난합니다. 침을 뱉으면 비난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예수님의 친족들이 비난합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막 3:21)”
바울을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비난합니다. 사도적 권위가 없다고 비난합니다. 설교를 잘못한다고 비난합니다. 돈을 좋아한다고 비난합니다. 인격에 대한 모독도 받았고 목회에 일관성이 없다는 비난도 받습니다. 기원전 750년경에 아모스는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로부터 먹고 살기 위해 설교하는 삯군 선지자라고 비난을 받았습니다(암7:12).
좋은 일 하다가 우리가 믿었던 사람들에게 이런 비난받을 받으면 얼마나 낙심이 됩니까? “이 사람이 비난할 줄이야, 내가 그렇게 잘 해 주었는데, 그렇게 믿었던 사람인데.”라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좋은 일 하면서 가까이에 있는 사람, 아군에게 비난받는 것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비난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맡겨준 일 포기하면 안 됩니다. 좋은 일, 선한 일, 아름다운 일, 위대한 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자신을 마땅히 지지해 주어야 할 지도자들이 비난해도 민족 해방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형이 비난해도 적을 물리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생명처럼 사랑하며 양육했던 교인들이 비난하여도 복음 증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마땅히 도와주어야 할 제사장이 자신을 삯꾼으로 비난해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족이 비난하고 동포가 비난해도 인류 구원사역을 포기하지 않고 다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 6:26)” 인간을 가장 구속하는 감옥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면 금방 정서는 스커트 미사일을 맞은 것처럼 낙심해 버립니다. 그러나 좋은 일 하면서 비난에 무릎꿇지 말아야 합니다. 집단에는 언제나 지지하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 그저 묵묵히 제 일만 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비난하는 사람이 떠나면 또다시 비난을 사명으로 살고 사는 사람이 생깁니다. 어차피 집단 구조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비난을 담아 두지 않으면 그 비난이 나를 포기하지 못하게 합니다. 노예 해방을 시키면서 수많은 비난을 받은 링컨은 "나에게 가해지는 모든 비평에 일일이 신경을 쓰거나 그 내용을 읽어 볼 생각이라면, 지금의 일은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내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 그렇게 할 것이다. 그 결과가 좋다면 나에게 가해진 비평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결과가 좋지 않다면 열 명의 찬사가 내 정당성을 입증해 준다 해도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맥아도 장군도 전쟁 중에 자신의 책상에 붙여 놓았꼬 윈스턴 처칠도 액자에 넣어 자신의 서재 벽에다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산은 바람에 움직이지 않습니다.
2. 좋은 일을 하는데 사람들이 왜 비난합니까?
대적자 바로의 비난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가 왜 비난을 했습니까?
첫 번째 비난은 4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백성이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느냐 ? 어서 물러가서 너희가 할 일이나 하여라. "고 말합니다. 60만 장정은 엄청난 인력 자원인데 왜 선동하여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고 있냐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이나 행위가 자신에게 손해가 있을 때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는 마땅히 이스라엘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존재들입니다. 메시야를 탄생시키고 성경을 기록하여 인류 구속의 구속사를 이루어야 할 민족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지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에 반대될 때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면 전체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난합니다. 자기 입장에서, 자기 이익에서, 자기 자리에서 보고 비난합니다. 사람이나 그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유리창이 더러워 빨래가 더럽게 보이는 것을 모르고 빨래만 더럽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비난은 과장하기를 좋아합니다. 아주 과장하여 비난하는 것입니다. 5절 보십시오. "그들이 이집트 땅의 백성들보다도 더 불어났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들이 하는 일을 중단시키려 드는구나. " (출 5:5)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많아도 이집트 사람보다 많겠습니까?
두 번째 비난은 8절에 나와 있습니다. 왕이 자신이 부리는 감독관들에게 비난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처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에게 월급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특수한 이해관계로 인하여 자신의 비난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비난하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난할 때는 서로 동조해 주는 끼리끼리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오래도록 관계가 지속되지 못합니다. 비난 동료는 결국 분열되어 버립니다. 무엇이라고 비난합니까? “그들이 게을러서, 그들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하면서 떠든다.(출 5:8)” 제사드리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논리에도 맞지 않는 명분을 달아 비난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일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드릴 것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과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예배를 드리는 이스라엘 사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일을 느슨하게 하기 때문에, 일하기 싫어서 하나님께 희생드릴 것을 요구한 것입니까? 예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본질적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더 중요시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를 비난하는 것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예배를 받는 자이고 자신이 판단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우습게보기 때문에 쉽게 비난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장애나, 능력 부족, 성격 등의 결함을 통해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비난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를 자신보다 낮게 보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상대에게 뒤집어씌워 버립니다.
세 번째 비난은 9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을 거짓말로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다는 비난입니다. 마땅히 비난받을 만한 말과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이 거짓말의 대가입니다. 자신이 신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고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무례에 의한 비난입니다. 모세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방과의 관계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무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는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이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판단 대상자인 것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상대의 눈에 있는 티끌만 보는 것입니다. 다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 딸로 불러 준 사람들입니다. 내 아들 딸 비난하는 소리 들으면 좋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비난받는 것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속담에 '문 바른 집은 써도 입바른 집은 못 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같은 비난의 주인공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을 비난하다 자식도 없이 남편의 사랑도 잃고 불행한 일생을 살다가 최후를 맞았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전서 3:8∼14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모든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십시오. 손해를 입었다고 보복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현대어성경).
3. 이런 비난을 받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크게 두 종류입니다. 비난을 파괴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이 있고 비난을 창조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비난을 파괴적으로 대처하는 방법
비난에 대한 이스라엘의 중간 지도자들의 대처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중간 지도자들, 작업반장(패장)들이 어떻게 합니까?
파괴적으로 비난을 해결하는 사람들은
첫째 문제 해결자를 잘못 선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문제를 가지고 누구에게 갑니까? 비난의 당사자인 바로에게 갑니다. 15-16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저희 종들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 저희 종들은 짚도 공급받지 못한 채로 벽돌을 만들라고 강요받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희 종들이 이처럼 매를 맞았습니다. 잘못은 틀림없이 임금님의 백성에게 있습니다. "
이렇게 비난자를 찾아가 항의한다고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따진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아닙니다. 더욱 관계만 나빠지고 더욱 인간관계는 힘들어 집니다. 더 힘들어 집니다.
둘째 비난을 비난으로 푸는 방법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바로에게 비난받고 형벌을 받자 모세와 아론을 비난합니다. "주께서 당신들을 내려다 보시고 벌을 내렸으면 좋겠소. 당신들 때문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있소. 당신들은 그들의 손에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칼을 쥐어 준 셈이오" (출 5:21)
세 가지로 모세와 아론을 비난합니다.
① 자신들을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만든 사람이 바로 모세와 아론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전략에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 일을 시킨 모세와 아론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② 모세와 아론이 바로의 손에 칼을 쥐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박해의 명분을 모세와 아론이 주었다는 것입니다. 죽일 수 있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에게 벌을 내리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당신들만 제거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괜히 일을 벌여 왜 사서 고생하게 만드냐는 것입니다. 그저 이대로가 좋은데 왜 부담을 주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비난을 해결하는 파괴적인 방법입니다.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탄의 분열책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민족해방이라는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다 함께 섬기는데 방해하는 것입니다.
2)비난을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방법
모세와 아론의 대처 방법입니다.
첫째는 문제를 해결할 바른 대상자를 찾는 것입니다.
이들은 누구를 찾아갑니까? 하나님을 찾아 갑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하신 분은 하나님 홀로입니다. 바로의 비난을 받고 자기 백성 중간 지도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모세와 아론은 어떻게 합니까? 22절 2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우리의 억울함과 분노, 한을 풀어 주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한나가 브린나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민족의 지도자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모세는 끊임없이 백성들의 비난을 때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비난 받아 억울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그 문제를 토설해야 합니다.
둘째 비난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바로의 비난을 비난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중간 지도자들의 비난을 책망하거나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비난의 폭탄을 다시 그들에게 던져 주지 않았습니다. 비난하는 바로도 하나님이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비난하는 패장들도 한 백성입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람의 감정과 생각, 가치기준은 항상 변합니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억지로 변명하고 대적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적도 변합니다. 주님의 당한 비난에 비하면 우리가 받는 비난은 별거 아닙니다. 주님은 갖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비난하는 자를 용서하기를 거부하고 감옥문을 스스로 단단히 걸어 잠그면 안됩니다. 비난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원수 시 삼으면 결국 사탄에게 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사탄과의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입니다. 비난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을 적으로 원수로 만들면 안됩니다. 바로를 다시 만나지 않을 원수로 만들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겠습니까? 우리가 살아서 일하기 때문에 비난과 공격을 받게 됩니다. 서양속담에도 ‘죽은 개는 차지도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난받는 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비난 받는 것을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비난하는 사람을 역할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셋째 비난을 통해 비난만이 주는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세는 호소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주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괴로움을 겪게 하십니까 ?“ 비난받게 하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비난에도 다 교훈이 있습니다. 고통에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애굽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입니다. 아마 순조롭게 나아갔다면 조그만 어려워도 국민투표해서 다수결로 애굽으로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질리게 합니다. 비난 앞에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해 보는 것입니다. 비난에도 다 교훈이 있습니다.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았다면 모세와 아론의 교만이 하늘을 찔렀을지도 모릅니다. 부당한 비난을 제지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상처를 입느냐, 안 입느냐는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비난을 마음에 새기고 비난의 포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비난을 통해 교훈을 받으면 됩니다. 비난을 받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하다면 타당한 비난을 수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영적인 사람이라도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비난받을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옳다면 비난을 절대 두려워하지 말고 틀렸다면 비난을 절대 묵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위치에 있든지 자신도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비난을 받을 때 내가 그러한 환경을 만들지 않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비난을 무조건 변명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난하는 사람이 내가 보지 못한 어떤 면을 보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비난은 오히려 지도자로서 더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비난이 있으면 더욱 겸손해져야 합니다. 안일과 나태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해 줍니다. 비난받을 때 오히려 감사하면 삶은 더욱 성숙합니다. 비판 방식에 신경 쓰지말고 그속에 있는 귀중한 제안을 찾으면 됩니다. 그리스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앞뒤에 하나씩 자루를 달고 다닌다. 앞에 있는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모아 담고 뒤에 있는 자루에는 자기의 허물을 주워 담는다."
뒤에 있는 자신의 허물을 담는 자루는 자기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반대로 남들 눈에는 잘 보인다는 것입니다. 근거있고 사실적 비난을 받으면 분노하며 변명만 하지 말고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넷째 비난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사명감을 더욱 견고히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호소합니까? “정말, 왜 저를 왜 이곳에 보내셨습니까 ?” 하나님께서 보내실 때 이미 이유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이 사람과 결혼하게 하였습니까? 왜 이 학교에 들어오게 하였습니까? 왜 목사가 되게 하였습니까? 그럴 때 비난의 과정을 통하여 더욱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물어 분명한 사명감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개가 아무리 닭은 보고 짖어도 달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비난 때문에 인류 구속사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 수많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복음 전파사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비난 가운데서도 성벽 재건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비난을 내 가슴에 담지 않으며 그것은 우리의 사명을 좀먹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하고 있었답니다. 한 남자가 그 앞에서 입에 담지 못할 비난을 하였답니다. 그 때 설교자가 물었답니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당신이 받지 않았다면 그것은 당신의 것입니까 아니면 선물을 준 사람의 것입니까?" 남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선물을 준 사람의 것이겠지" 그러자 설교를 하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당신의 비단을 받지 않을 테니 당신이 한 비난은 모두 당신이 다시 가져 가시오." 내가 받지 않은 비난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다섯째 비난을 좋은 일을 성취하고 그 일을 이루는 자신의 성장과 성숙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세는 기도합니다. “제가 바로에게 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뒤로는 그가 이 백성을 더욱 괴롭히고 있습니다.” 자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자신이 순종하면 형통의 길이 열리고 좋은 일에 더 잘 되어야 할텐데 더 나빠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주의 백성을 구하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계십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노력에 비해 주님은 해 주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희망의 씨앗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순종의 마땅한 댓가는 비난이 아니라 격려와 해방, 좋은 것으로 와야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기도에 대하여 6장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절을 보십시오. 결국 바로가 보내어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보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비난하며 보내주지 않는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난의 과정을 통해 좋은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 중에는 바로의 비난도 이스라엘 중간 지도자들의 비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미 모세에게 말씀해준 것이 있습니다. 출애굽기3장 19-20절 말씀입니다.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좋은 일을 하면서 우리는 비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상처를 받으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토머스 하디는 비난 때문에 영원히 소설을 쓰지 않게 되었고, 영국의 천재 시인 토머스 채터튼은 비난 때문에 자살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입니다.
어제 일간지에서 [거지에서 성자(聖者)가 된 김선태 원장]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실로암 안과병원 김선태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각장애 3만 2,000명에 빛을 선물햇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58년째 앞을 못보고 있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열흘 만에 부모가 북한군의 폭격으로 사망해 고아가 되었다고 합니다. 20일 뒤 자신도 수류탄이 폭발해 두 눈을 잃었다고 합니다. 고모에게 찾아갔으나 수많은 비난을 받고 거리에서 동냥하였다고 합니다. 친구 8명은 다 죽었는데 자신만 산 것입니다. 사람들은 비난했답니다. “버러지에 불과한 놈"'급살맞아 죽을 놈', '벼락맞아 죽을 놈' 갖은 수모를 겪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고모 집에서 학대당할 때 허리끈을 풀러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그 때도'죽지 마라! 네가 자라서 옛 이야기하고 사는 날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우물에 빠져 죽으려 할 때는 '참아라, 빨리 나오너라' 하는 목소리도 들었다고 합니다. 곽안련 선교사의 아들인 곽안전(알렌 클라크) 선교사를 만나게 되고 공부하여 대학에 진학하고 신학대학원을 나오고 목사가 된 뒤 미국 맥코믹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제가 부산 라이트하우스에서 냉대를 당할 때 바다 앞에서 기도를 한 적이 있어요. 하나님께 물었지요. '제가 박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요. 그 때 '될 수 있다'는 답을 듣고 결국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처럼 눈을 뜰 수 없는 사람을 위해 한 평생 산 것입니다. 2000년에 제가 뇌가 부풀어올라 병원에 입원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답니다. 의사가 '5년 살면 많이 사는 것'이라고 했답니다. "하나님께 기도 드렸지요. 제가 할 일이 많으니 살려달라고요." 하나님은 살려 주어 좋은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하다가 비난하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난 앞에 기도하는 모세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6장 1절 말씀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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