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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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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계속 거절당할 때
출7:1-7
어제 제가 알고 있는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문자가 와서 통화를 하였습니다. 믿음이 신실하신 집사님이셨는데 병원을 접고 선교사로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의사 생활을 포기하고 늦은 나이에 말도 잘 통하지 않고 힘들고 어려운 가난한 나라 선교사로 떠나는 것이 쉽지 않은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 성도님을 하나님이 가난한 아프리카 잠비아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편한 생활, 가지고 있는 재산, 사회적인 지위 다 내려놓고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서 굶주림과 질병, 고통 속에 신음하는 자들을 고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을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제까지 너와 자식들을 위해 살았으니 이제 남은 생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 전적으로 사용하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아원 선덕원 원장으로 헌신한 정은득 원장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이화여대와 미국 시러큐스대학원 졸업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유학하던 3대 독자인 오빠가 25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답니다. 여고 교사였던 어머니는 이 일로 실신하여 쓰러졌답니다. 권사인 어머니는 새로운 소명을 받고 그 후 집에 25명의 고아들을 데려다 자식처럼 길렀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께서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다 54세의 젊은 나이로 과로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답니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어머니를 다시 살려주세요." 그렇게 울며 기도했음에도 어머니는 싸늘한 시신으로 자신을 맞으셨다고 합니다. 그 후로 하나님을 의심했다고 합니다. 아이들 때문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이 미워졌다고 합니다. 고아원일을 어머니 대신 자신이 맡아야 하는데 외면해 버렸답니다. 남편은 미국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자신은 대학에서 근무하면서 아들과 딸을 낳고 세상 사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답니다. 교회에는 나가지 않고 오히려 교회 나가는 친구들을 주일날 쇼핑 가자고 꼬드겼다고 합니다. 물질적으로 많이 쌓는 것이 인생 최고의 성공이라 여기며 좋은 차를 사고 집안을 꾸미고 애 키우는데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빠져 지냈고 신앙은 그저 액세서리에 불과했답니다. 그런데 이모에게서 편지가 왔다고 합니다. "은득아. 이 선덕원이 어떻게 생긴 것이냐. 오빠의 죽음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네 어머니가 피땀흘려 가꾸어 온 고아원이 아니냐. 그런데 주인이 없으니 배가 산으로 가고 있다...선덕원을 네가 맡든 아니면 아예 정리하든 해라. 여기는 이렇게 엉망인데 너만 미국에서 잘 먹고 잘 살면 하늘에 계신 네 엄마가 어떻게 생각하겠니.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결정하길 바란다."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절했답니다. 편지를 무시하고 서랍 속에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 같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하겠습니까? 안락한 모든 삶을 버리고 고아을 위한 소명에 응답하겠습니까?
이 일이 있은 지 1년이 지난 후 꿈을 꾸었답니다. 큰 쟁반 저울의 한쪽에 우리집 남매가 올라가 있고 반대쪽에 단발머리를 한 아이들 수십명이 올라가 있는데 저울은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평행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꿈을 한 번도 아니고 대여섯 번을 똑같이 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부르심을 거절했답니다.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선덕원 원장으로 세운 뒤 돌아오리라 다짐하고 미시간대학에서 2주 휴가를 받은 후 한국 땅에 왔다고 합니다. 4살쯤 된 여자애가 잽싸게 품으로 파고들기에 무릎 위에 앉혔답니다. 20여분이 지났을 때 갑자기 치마가 축축해졌답니다. 앉은 채로 아이가 오줌을 싼 것입니다. "화장실 가지 왜 그랬니"라며 아이를 나무라자 아이는 울먹이며 "제가 화장실 가면 이 자리 뺏기잖아요. 딴 아이가 앉잖아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과 같은 충격이 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했답니다. "하나님, 정말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을 외면했으니까요. 나만 알고 나만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때 하늘에서 엄청나게 큰 붉은 해가 떨어져 온몸을 휘감았다고 합니다. 뜨거워 펄쩍펄쩍 뛰면서도 눈물의 기도를 멈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고아원 일에 헌신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천 전에 살았던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팔십세의 나이입니다. 이제 다른 나라 땅이지만 이미 미디안 광야가 익숙해졌습니다. 자식들을 낳고 안락하게 살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노예로 고난받고 핍박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것입니다. 군대도 있는 것도 아니고 독립 자금도 주신 것도 아니고 80대 단신으로 가서 이 일을 하라고 하니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계속 거절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출 4:10)” 하나님이 설득하여 바로에게 보내었지만 바로에게 막상 가보니 바로는 더욱 포악해져서 백성들을 더 괴롭힙니다. 바로에게 괴롭힘을 당한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래도 애굽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고 말씀합니다. 이 때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6장 12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다시 똑같은 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절합니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출 6:12)” 하나님은 다시 설득합니다. 바로가 듣지 않고 백성들이 너를 비난하여도 너를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너는 바로를 찾아가 하나님의 명령만 다 고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 모세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6장 3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고하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를 들으리이까 (출 6:30)” 동일한 말로 거절을 합니다.
1. 거절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왜 이렇게 집요하게 거절하였습니까? 성경에서 거절의 이유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는 자신은 그 일을 하기에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6:30). 계속해서 거절하는 이유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강퍅한 바로와 완악하고 무지한 백성을 설득해야 하는데 설득할만한 언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를 때 때때로 능력문제로 핑계를 대며 거절합니다. 저는 돈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습니다. 그 일을 할 만한 재능이 없습니다. 전도할 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성가대를 할 만한 목청이 못됩니다. 새벽에 기도로 사명을 감당할 만한 건강이 없습니다.
둘째는 일의 결과에 대하여 부정적인 예측을 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말을 한다하여도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라는 것입니다(6:12). 강퍅한 바로가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6:30). 하나님 말씀대로 해 보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과는 바로는 더 걍퍅해저 백성들을 더 괴롭게 하고 백성들은 원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또 나간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이 아닙니까? 그 일을 하면은 손해 볼 것 뻔한데 왜 그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면 인정을 받는 것보다는 비난만 받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쌓아 놓은 돈의 양이 줄어들고, 좀 더 멋진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인생은 초라해 진다는 것입니다. 기도해 보았는데, 헌신해 보았는데, 전도해 보았는데, 도움을 주어 보았는데, 순종해 보았는데, 결과는 오히려 손해만 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의 부정적인 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 일을 하는데 다가오는 고통의 과정이 싫어서 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나아가면 모든 것이 잘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가서 말하자마자 바로는 강력하게 반발하였습니다(5:2-9). 신하들을 시켜 벽돌을 만드는데 이제 짚도 주지 않고 만들라고 합니다(출5:7). 백성들이 채찍에 맞으며 더 고통을 당합니다(출5:14), 그에 따라 백성들은 불평(5:21; 6:9)하였습니다. 좋은 일 하다가 비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오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었다고, 죽게 만들었다고 비난을 당합니다. 마음은 상해 버렸고 일은 더욱 혹독해져 버렸습니다. 모세는 다시 또 그런 고통을 당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도 도망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쫓기는 자로 살았는데 또다시 그런 고통을 받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성도님이 사장인데 과장에게 일을 시킬 때 이렇게 거절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 번도 아니고 계속 반복적으로 같은 이유를 들어 거절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성도님이 대통령인데 장관이 이런 이유로 거절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람은 이 정도 거절하면 분노하고 그에게 일을 맡기기 않습니다. 그와 함께 일하지 않습니다. 장관직을 사임하게 하고 과장직을 박탈해 버립니다. 조금만 힘이 있으면 내 마음대로 해 주지 않으면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 게 인간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거절하는 모세를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모세의 찢기고 상한 마음을 위로하시고 새로운 소망을 주시며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2. 하나님은 거절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십니까?
첫째 능력이 부족하다고 거절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어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모세가 자신은 말하는 능력이 없어 강퍅한 바로를 설득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바로가 듣지 않는다고 말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사람의 삶의 태도는 달라집니다. 너의 능력 없음을 보지 말고 너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말을 듣지 않는 바로를 보지 말고 바로를 굴복하게 하는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해야 할 일을 결국 누가 이룬다는 것입니까? 계속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라는 말이 짧은 본문 가운데 몇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까? 말씀할 때 마다 하나님 계속 내가 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너를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당시 바로는 백성들에게 신처럼 행세했습니다.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최고의 부자입니다.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도 가보니까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자신은 바로 앞에 가니 참으로 미약한 존재입니다. 바로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힘이 없습니다. 바로를 설득한 바로를 굴복시킬 권력의 힘도, 돈의 힘도, 명예의 힘도, 지식의 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이야를 부르실 때 예레미야고 거부합니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렘1:4-10) 기드온도 삿6:11-24에 "나는 약하고 적다"고 거부합니다. 우리고 힘이 없다고 능력이 없다고 재능이 없다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힘 있는 바로의 강력한 반발로 모세 네가 무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여 그를 바로에게 ‘엘로힘’ 전능하신 하나님처럼 바로에게 하나님과 대등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요10:35) 바로를 지배할 수 있는 신적 권세와 능력을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는 바로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하늘의 권세를 가진 모세 앞에 굴복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어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넘어야 할 높은 산과 건너야 할 넓은 강 앞에서 능력이 없다고 두려워하며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재능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감을 가지고 건너가고 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 힘으로만 한다면 그것은 내 일이이지 어찌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스롭바벨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 4:7)”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세계무역 센터(WTCA) 수석부총재인 이희돈 박사의 간증을 들어 보았습니다. 교회에서 장로님으로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한국인으로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주역 중의 한분입니다.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영국 옥스퍼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공부하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원에서 교수, 옥스퍼드대학교 종신 교수가 된 분입니다. 그는 꿈을 품고 유럽으로 유학으로 떠나게 되었답니다. 어머니가 아주 믿음이 좋은 권사님이신데 편도 비행기 표를 끊어주며 공항에서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비행기 속에서 봉투를 열어 보았는데 그 속에는 돈은 없고 달랑 편지 한 장만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 편지에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리라'라는 말씀이 적혀 있었답니다. 그렇게 파란만장 한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답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 가고 싶은 꿈이 있었답니다. 옥스퍼드대학을 찾아가 이틀 동안 여리고성 돌듯이 계속 그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기도드렸답니다. 이틀 후에, 교수를 만나러 올라가니까 비서가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왔습니까?”라고 물었답니다. 입학을 거절당했답니다. 거절 당하여지만 낙심하지 않고 운동장을 여리고성을 돌 듯 돌았답니다. 나이든 비서가 불쌍하게 보였든지 불렀답니다. “학장님을 만나서, 왜 입학이 안 되는지, 그 이유라도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여 결국 학장을 만났다고 합니다. 학장은 “옥스퍼드는 대단히 비싼 학교다. 그리고 우선 여기서 공부할 실력이 되느냐?”라고 물었고 그는 “실력은 있지만, 만약 모자라더라도, 학생이니까 배우러 온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러면 공부할 돈은 있느냐?”라고 묻자 그는 “이 학교에서 제게 장학금을 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하여 결국 그는 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에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에서 미국에 가기가 쉽지 않을 때였답니다. 그는 '내가 미국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10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편지와 함께 미국 비자를 신청합니다. '내가 늦으면 늦을수록 미국이 손해다'라고 비자 신청서류에 쓴 자신의 글에 대하여 현지 영사가 '정말 미국이 당신을 필요로 합니까?'라고 묻자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답변합니다. 그의 믿음은 미국 영사의 마음을 움직여 불가능 하게 보였던 미국 비자를 3시간 만에 받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양말을 팔면서 공부할 때, 함께 이웃하여 장사하시던 한국 분이 그가 미국 주류사회에 도전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란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깨뜨리는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 하나님이 주신 비전, 하나님이 주신 계획은 우리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말씀합니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107:30)”라고 말씀하십니다. 위험 부담이 있고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는 되지 않을 것 같지만 믿음 가지고 법궤를 매고 들어가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법궤를 매고 여리고성을 돌면 위에서 불화살이 떨어질 것같지만 내 힘으로 무너뜨릴 수 없는 여리고성이 무너집니다.
둘째는 일의 결과를 부정적으로 예측하는 사람에게 일의 결과를 긍정적으로 보게 하시고 그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모세는 일의 결과를 부정적으로 예측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거절했습니다. 설령 말을 한다하여도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라는 것입니다(6:12). 강퍅한 바로가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6:30). 일의 결과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래 네가 말 못하여 바로의 마음을 녹일 수 없고 백성을 설득할 수 없다고 부정적으로 예측하고 있는데 네 형 아론이 네 대언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대언자 ‘나비’란 ‘예언자, 선지자’라는 말로 아론이 모세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해석해 주는 대변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예측하는 바로나 백성들에게 말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예측되는 형 아론에게만 말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다시 거역할 것을 염려하여 거절 안하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일이 진전된다는 것입니까? 아론은 모세의 말을 거역하지 않고 바로에게 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론의 말을 들은 바로는 결국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 말씀, 소명은 결국 그 말씀에 순종하면 긍정적이 결과나 나타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렘 29:11)”
요셉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형들의 시기를 받습니다. 노예로 인신매매 되어 팔렸습니다. 억울하게 아녀자 폭행죄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들어갔다면 그 때마다 얼마나 미래의 삶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예측했겠습니까? 요셉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꿈대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인생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 39:2)” 노예로 팔려갔지만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3)”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지만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창 39:23)”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미래를 부정적으로 예측하면서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면 시간 손해고,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면 물질 손해고, 건강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 건강 손해고, 지식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 지식 손해고, 권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면 권력 손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희돈 장로님의 간증 중에 이런 간증이 나옵니다. 아내가 미워졌을 때 두 번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와서 어렵게 공부하여 대학 교수가 되었을 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어느 날 “형제님”하며 불렀답니다. 가장 좋을 때 하나님께 헌신하여야 한다고 당신이 가르쳐 주었는데 이때가 선교사로 헌신해야 할 때라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멕시코 선교사로 헌신하자고 했답니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답니다. 그 좋은 대학교수 직장을 놓아두고 선교사로 왜 나가냐는 것이었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데리고 오지 선교사로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음의 위기에 쳐했다고 합니다. 조사 나온 경찰들 죽었다고 했답니다. 의사도 소망이 없다고 했답니다. 그럼에도 부부는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했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났답니다. 그 딸이 별 실력도 없는데 의대에 들어갔답니다. 딸은 자신이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을 고쳐주어야 하겠다는 비전을 갖게 되었답니다. 의대에 들어갈 실력이 전혀 되지 않았는데 그 때 자신이 죽음의 위기에 서 겪었던 이야기를 “은혜 이야기”라는 에세이를 대학에 제출하여 그것을 본 교수가 감동이 되어 실력은 부족하지만 의대에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둘째가 좋은 집을 팔았을 때였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정말로 폭포가 정원에 있는 부자 동네에서 가장 좋은 집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집을 마련하자 집값이 엄청나게 올랐다고 합니다. 세계 무력센타에 근무하기 때문에 집을 이사하여야 하기 때문에 집을 팔았답니다. 많은 이익이 남아 너무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오자 아내가 “형제님”하고 또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아내는 믿음이 신실하였는데 하나님 앞에 따져보자고 말할 때 남편을 “형제님”이라고 불렀답니다. 불로 소득은 다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형제님이 성경공부할 때 가르쳐 주었는데 그것 하나님께 다 드리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여 다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돈이 중국에서 농장을 마련하여 탈북자들의 안식처가 되었는데 그곳에 온 편지를 보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붙들고 나가는 것은 결과가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막 9:41)”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8)”
셋째, 고통의 과정을 회피하기 위해 거절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고통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모세는 고통의 과정을 또 다시 격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절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표징과 이적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주는 바로에게 하나님은 표징과 이적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많이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연속적으로 더욱 강력하게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로가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를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닫아 버리고 버틴다는 것입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의 진행이 순탄치 않다는 것입니다. 시작하자마자 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강퍅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강퍅하게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악을 조장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아 이미 마음이 부패하고 강퍅하여 자신을 살아 있는 신이라 할 정도로 교만한 자입니다. 안하무인입니다. 거만이 하늘을 찌를 듯 한 자입니다. 자신의 권력, 자신의 부, 자신의 자식, 자신의 명예 앞에 모두 무릎 끓기를 원하는 자입니다. 조금만 무엇이 주어지면 인간은 얼마나 교만해집니까? 고대 왕국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는 왕입니다. 얼마나 강퍅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고 그 상태로 유기해 버렸다는 말입니다. 교만한 마음 그대로 방치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로마서 1:28에는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이 때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이라는 바로의 용광로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이를 분만하고 싶은데 10달 몸에 품고 입덧을 해야 하고 해산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힘겨운 것입니다. 좋은 대학은 가고 싶은데 공부하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사명이 고통을 삼켜버리지 못하면 사명 앞에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는 바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 오만 방자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라고 말씀합니다. 그 고통의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냥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 하셔도 좋을 텐데 꼭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리는 각종 재앙을 직접 체험한 후에야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완악하여 그 과정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후에 자만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이 노예의 연약한 신이 아니라 유일한 참 여호와 인 줄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다가 고난의 현장에 있습니까? 포기하거나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폭풍이 지나간 후 바다는 더 정결해집니다. 비온 후에 새순은 더욱 자라납니다. 진주는 고통의 산물입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뒷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후렴)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수 있잖아요”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잃은 것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모세가 만일 거절함으로 끝났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역사 속에 이름도 남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삶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용기와 격려를 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 오경을 기록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생하게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통이 있다고 하나님의 일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가정이 행복하게 만들어지는데는 누군가 썩어져가는 고통을 짊어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교회가 부흥되고 아름답게 세워지는데는 누군가 고통을 감수하고 희생하여 거름이 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사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회사를 이룬 창업주들은 수많은 고통을 참고 견디며 회사를 이룬 것입니다. 나라를 세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분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 없이 어떻게 인류 구속사역을 이루었겠습니까? 다윗이 고난의 과정이 없이 어떻게 성군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야곱의 고난의 과정이 없이 어떻게 말년에 그렇게 인격이 성숙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수많은 고난의 강을 건너고 고통의 산을 넘어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고난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각자에게 가정과 직장, 교회와 민족 앞에 주어진 사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부족하다고 거절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어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일의 결과를 부정적으로 예측하면서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국 일의 결과를 긍정적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고통의 과정을 회피하기 위해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고통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8.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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