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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4:66-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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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실패를 통해 배우는 교훈
막14:66-72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도 베드로가 신앙생활에 실패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합니다. 아마 베드로의 기억에서 가위질을 하고 싶은 내용일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렇게 실패한 내용을 마가는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베드로가 아들처럼 아낀 인물입니다. 아버지같은 베드로의 실패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가복음을 처음 받는 네로 밑에서 핍박당하는 성도들, 핍박을 참지 못하고 배교한 성도들, 핍박 앞에 흔들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이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도 교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롬 15:4)”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1. 우리는 실패를 하나님의 주권적 관점(이루심)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를 해석할 때 그 실패라는 것은 과거적 사건입니다. 오늘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실패가 과거적 사건입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되기 적어도 3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과거에 무수히 실패를 한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자녀교육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가정생활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대학진학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직장 생활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덮어 두고, 무시하고, 위장하려고 해서 그렇지 정직하게 과거를 살펴보면 실패했던 경험들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그 과거의 실패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연히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끝없는 죄의식과 열등감에 사로 잡혀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패의 원인이 그 원수같은 사람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끝없이 그를 원망하고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내 인생을 처절하게 실패하게 한 그 인간만 생각하면 피가 역류합니다. 그 실패의 경험으로 불면증에 시달리고, 죄책감, 분노와 원한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실패경험의 결박되어 포로가 됩니다. 실패의 시간에 갇혀 미래를 향해 전진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인생은 그 실패의 경험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우리 신앙인은 실패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실패를 통해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이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 아마 베드로는 살아 계셨을 것입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듯 베드로를 따랐습니다. 오순절 성령충만을 경험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였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기적으로 옥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로마의 권력으로부터 핍박받는 자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과거 예수님이 심문받던 날 밤에 대제사장의 여종 앞에서 비겁하게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적도 없다고 부인합니다. 저주까지하면서 부인합니다. 이 사실을 아들같이 따랐던 마가가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치스러운 실패의 경험입니다.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 실패의 경험입니다.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실패경험입니다. 인생에 있어 편집하고 가위질하고 싶은 시간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실패의 경험을 마가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발하기 위해서이겠습니까? 비난하기 위해서이겠습니까? 정죄하기 위해서이겠습니까? 베드로를 흠집내기 위해서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나 마가의 관점으로 실패를 접근했으면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실패에 대하여 예수님이 이미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했다는 것입니까? 막14장 30절을 보십시오.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힘주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일이 있더라고 저는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맹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루도 못되어 부인, 부인, 부인 거듭 부인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베드로의 실패에 대하여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의 실패에 대하여 예수님이 이미 말씀했고 그 말씀대로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실패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루심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했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마 10:29-30)”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되어진 과거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이루심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두 가지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되어진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에 대한 해석입니다. 주어진 환경 때문에 우리는 많은 실패를 하게 됩니다. 태어난 환경 어떻게 우리 마음대로 합니까? 태어나 보니 아버지가 술중독자였습니다. 태어나 보니 가정이 너무나 가난하였습니다. 태어나 보니 부모님이 이혼해 있었습니다. 태어나 보니 외모가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어쩔 수 없이 처하는 환경을 하나님의 주권적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는 변화시킬 수 없는 지나간 과거를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우리의 실패를 그대로 방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인생의 쓴 맛을 보았습니까? 그러나 그는 어떻게 고백합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 50:20-21)”
하나님의 이루심이라는 새로운 각도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성품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실패는 거침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실패는 독약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약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마가가 베드로의 생생한 현장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당당하게 자신의 실패 경험을 간증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실패를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자신의 연약성을 당당하게 밝힌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실패를 이야기 할 때 분노하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실패를 통해 교훈받기를 원했습니다. 아담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다윗도, 솔로몬도 다 실패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로 끝난 인생이 아니라 실패를 딛고 일어선 인생입니다.
2. 우리는 실패를 하나님의 다루심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넘어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예수님은 실패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 넘어가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여종과 무리들을 통해 베드로를 실패의 현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드로를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를 다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실패라는 과정을 통에 무엇을 훈련시켰습니까?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는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테스트하여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고는 사람은 실감도 하지 않고 인정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연약함을 적나라하게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호언장담하였습니다. 다 부인한다하여도 자신만큼은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과신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일이 있어도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하루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당당했던 베드로가 나약한 여종의 말 한마디에 흔들립니다. 우리는 대단한 것 같지만 말 한마디에 얼마나 흔들립니까? 말 한마디에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말 한마디에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말 한마다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이 다니던 사람”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당황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바깥뜰로 도망가 버립니다. 얼마나 인간이 연약합니까? 우리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약합니까? 환경이 좋고, 잘 될 때는 목숨까지도 바칠 것같던 사람들이 환경 나빠지고 나빠지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돌아서는 것이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사람들을 보며 “뭐 그 정도로 실망하느냐? 믿음 가지고 살면 하나님께서 다 선으로 갚아주신다”고 말하지만 막상 자신이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 정도로 부족했습니다. 여종은 그대로 멈추지 않습니다. 다시 베드로가 서있는 것을 보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틀림없어요” 예수님의 제자라고 정곡을 찌릅니다. 자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들러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가장합니다. 베드로는 다시 부인합니다. 여종처럼 하이에나처럼 한 번 붙들면 끝장을 보려고 덤벼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하자 무리들이 떼로 달려듭니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니 예수와 한패라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증오하고 복수하고 더 나아가면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어떤 목사님은 너무 괴롭히는 성도가 있어 같이 죽으려고 몽둥이를 차 속에 1년 동안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다윗을 괴롭히는 사울 왕을 보십시오. 다윗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하나님을 괴롭히는 브닌나를 보십시오. 바로와 자기 백성을 피해 도망자가 된 모세를 보십시오. 날마나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 테스트하기 위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 66:11-12)” 우리 앞에 그물을 두었다고 합니다. 어려운 짐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냥 통과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용하는 도구라고 우리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실패라는 용광로, 고통의 과정을 통해 우리를 정금처럼 빛나게 합니다. 산모는 분만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고 배 속에만 넣어 두고 있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병을 치료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수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수술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장하는데는 성장통이라는 고통이 늘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곤충학자 찰스 코우만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고치구멍을 뚫고 나오는 광경을 오랫동안 관찰했다고 합니다. 작은 구멍을 뚫고 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나비가 안쓰러워 가위로 고치구멍을 조금 넓혀 주었답니다. 그러나 큰 구멍으로 쉽게 빠져나온 나비는 날지를 못하고 날개를 질질 끌며 바닥을 왔다갔다 하다가 죽어버렸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시련 없는 삶, 실패 없는 삶을 동경하지만 개인이나 조직에 시련과 역경과 실패는 변장된 축복일 수 있습니다. 혹독한 겨울이 있기 때문에 봄은 화려한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고통이란 귀먹은 세상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잘 나갈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쉽게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패의 고통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기 시작합니다. 실패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실패의 고통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합니다. 실패는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오라는 신호입니다. 실패는 실패의 원인을 깨닫게 하는 기회입니다. 실패는 인생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는 용광로입니다. 베드로는 평생 호언장담하며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연약한 존재인 것을 알고 겸손하게 신앙생활을 하였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따르고, 기적을 베풀며 전할 때 늘 부인했던 과거의 실패의 경험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이 문서화 되어 읽혀졌기 때문에 더욱더욱 겸손하게 사역했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았을 것입니다. 네로의 핍박을 받는 사람 중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막상 어려움 당하자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했을 것입니다. 당시 마가복음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이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다루심에 공감하고 위로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실패를 통해 우리를 다루십니다. 그래서 실패를 두려워하며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도 자신의 실패를 당당하게 간증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부끄러운 수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데 공무한 사실을 숨김없이 간증합니다. 선과 악의 싸움에서 실패했던 자신의 모습을 거짓 없이 밝히며 ‘호오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실패의 고통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갑니다. 그런데 일 주일만에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40년 광야 훈련을 받게 합니다. 실패의 과정,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는 낮추고 시험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게 하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 8:2)”
둘째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3)”
셋째는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 8:16)”
3. 우리는 실패를 십자가의 관점(돌보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청합니다. “주님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주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인간편에서만 생각하는구나.(마16:23)”라고 책망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수님께서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힘주어서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했습니다.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저주까지 하고 부인했습니다. 첫 번 닭이 울 때는 몰랐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양심의 소리, 영의 소리를 듣지 못한 것입니다. 두 번째 닭이 울었습니다. 이 때 심문을 받던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눅22:61에는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책망의 눈초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랑의 눈초리, 인간의 연약함을 안쓰럽게 보시는 자비의 눈초리였을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연약함, 실패와 실수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시각으로 실패의 현장을 보아할 것을 교훈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장담을 하고 다짐을 해도 베드로의 힘으로 안되는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네가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하겠다고 합니다(68). 그러다 저주까지 하며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 말하며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베드로가 대단한 것같지만 얼마나 연약합니까?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지만 얼마나 연약합니까? 물위를 걷다가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걸어 오라고 하자 걸어갔지만 파도에 놀라 무서워하며 물속에 빠졌습니다. 그는 믿음에 실패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책망합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마14:31)” 우리가 대단한 믿음이 있는 것같지만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하는 순간이 오면 믿음 약함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베드로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 제 발을 씻기시다니 말도 안됩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씻기시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안됩니다. 주님 제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합니다.” 혼자 잘난 체 다하지만 실패합니다. 게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에 실패합니다. 잠만 잡니다. 그러다 결국 혈기를 부리며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네로의 핍박 가운데 부인하는 성도들을 위해 십자가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은 그 어떤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정죄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로 나올 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과거에 어떤 죄로 말미암아 실패가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 나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실패는 십자가 앞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를 통해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현세 지향적 삶에서 내세 지향적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잠깐 지나는 세상을 영원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영생의 세계, 천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세상 지혜 중심에서 하나님의 말씀 중심 세계로 바뀌어야 합니다. 실패를 통해 세속 중심에서 교회 중심의 삶의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인간은 실패를 통해 뼈저리게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를 느끼게 됩니다. 실패를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고 십자가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용서하며 용서받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롬6:6) 우리의 과거의 모든 실패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의 변호사입니다. 내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실패를 딛고 일어 설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오면 모든 실패는 파괴적 힘이 아니라 창조적 힘으로 사용됩니다. 십자가 앞에 나오면 실패를 감추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를 살리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실패를 다루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실패가 인생의 패배가 아닙니다. 실패로 인하여 열등감과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실패를 나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패배를 특별한 것이 아닌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입니다.
십자가 만큼 위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는 죽음의 속박에서 죽음을 이기고 죽음을 초월한 인생을 살게 합니다. 십자가는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며 살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권력을 자랑하던 로마가 복음 앞에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인육을 먹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지존파를 아실 것입니다. 철저하게 실패한 인생들입니다. 세상을 저주하며 압구정동 야타족을 못 죽인 것이 한이라고 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변화되었습니다. 무엇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1471번 김현양은 변화되어 교도소에서 30명 이상을 전도하고 천국에 갔습니다. 자신에게 넣어준 영치금은 전도한 사람들에게 주석 성경을 사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형이 집행되는 날 할렐루야를 외치며 천국에 갔습니다. 그가 형장에 벗어 놓은 흰 운동화에는 성경 두 구절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눅23:43)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말씀이었습니다. 3888번 기환군은 유서를 남겼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먼저 가는 불효자를 용서하십시오. 피해자와 그분들의 가족과 모든 분들게 사죄드립니다. 보살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집은 교회 설립하는데 시신은 의과 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하겠습니다. 무엇이 철저하게 실패한 그들을 그렇게 변화시키겠습니까? 살인자들이, 찌르면 피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변화가 됩니다. 양민 35명을 죽여 세상에서 최고 악당이 되겠다던 온보현, 살인마 고재봉이 무엇으로 변화되었습니까? 고귀한 철학으로 변화를 시키겠습니까? 세상의 권력으로 변화를 시키겠습니까?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변화가 됩니다. 얼었던 양심이 풀기기 시작합니다. 우울증에서 죽음을 그리워하던 사람이 새 소망을 얻습니다. 절망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모르던 가정에 길이 열립니다. 자신에 대한 태도가 변화됩니다. 자아관이 바뀝니다. 자존감이 생깁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한 베드로는 고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합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6-7)”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9.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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