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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5:1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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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흔들리지 않고 걷는 십자가의 길
막15:16-32
신앙생활을 하시는 어느 교수님이 한 여학생을 상담했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학생에게 말했답니다. “십자가는 앞에 달고 다니는 장식품이 아니라 뒤에 지고 가는 삶의 짐입니다.” 그러자 이 여학생이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뛰어가면 가끔 뒤로 돌아가요.” 이번 주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는 고난 주간입니다.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메고 다니십니까? 아니면 삶의 무게로 지고 다니십니까? 피터팬 증후군(Peter Pan Syndro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담회피 증후군입니다. 성장하면 마땅히 책임 있는 행동을 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책임을 회피고 현실을 도피하여 동화 속 어린 아이로 안주하고 싶어 하는 심리를 말합니다. 최근에는 "키덜트(Kidult)" 란 단어도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키덜트는 키드(kid·아이)와 어덜트(adult·어른)의 합성어로써 20∼30대의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이 분위기와 감성을 간직하고 추구하는 성인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진지하고 무거운 것 대신에 유치하고 재미있는 것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무엇이든 부담 갖는 것을 싫어하다는 것입니다. 직장인은 부담스런 직장을 회피합니다. 결혼 정년에 있는 젊은이들은 부담 없는 배우자를 원합니다. 며느리도 부담 없는 시부모를 원하고 시부모 역시 부담 없는 며느리를 원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부담이 없는 선생님을 원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들도 부담 없는 교회, 부담 없는 설교를 원합니다. 그래서 조금마한 부담만 주어지면 교회를 떠나고 신앙생활 자체를 회피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부담을 지기 싫어하셨다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피해야할 부담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인류 구원 사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가셨는지를 본문을 통해 살펴보면서 유혹 많은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가야할지를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처절한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길을 걸어가면서 처절한 육체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채찍을 맞았습니다(15). 로마 군인들이 사용한 채찍은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끈에 납덩이를 매달거나 날카로운 뼈나 못을 박아 만든 것이었답니다. 한번 칠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혈관이 터지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유대 율법에서는 40대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로마인은 힘이 있을 때까지 때렸답니다. 이러한 매질은 십자가 처형에 앞서 죄수의 힘을 빼기 위해서 시행하였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어떤 때는 매질만으로 사람이 죽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참기 힘든 고통이었겠습니까? 몸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17). 로마 군인들은 왕권을 상징하는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워 고통을 주고 조롱하였습니다. 가시가 머리를 찌르는 고통을 얼마나 감당하기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을 감당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갔습니다. 양팔을 고정시킬 가로로 대는 나무를 지고 걸어가게 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빌라도 관저에서 골로가 까지 끌려가는 ‘고난의 길(비아 돌로롯사)’에서 14번이나 쓰러지고 멈추었다고 합니다. 도저히 안 되어 5번째 멈춘 곳에서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손이 십자가에 묵이고 못을 양 손목에 박았습니다. 발목에 못을 박았습니다. 거대한 쇠 대못이 손목과 발등에 박힙니다. 뼈가 으스러집니다. 정맥과 신경계를 뚫고 지나갑니다. 힘줄이 끊어집니다. 벌어진 양팔과 탈골된 어깨 때문에 극도의 호흡장애가 왔을 것입니다. 숨을 쉬려고 움직이면 발목뼈와 손뼈는 으스러지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움직일 때 마다 매를 맞아서 찢긴 등이 십자가에 긁히는 고통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옆구리에 창을 받았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시편 기자가 십자가의 고통을 이렇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시편 22편 14절로 15절입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은 필설로 표현할 길이 없는 가장 극심한 고통 중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시세로는 십자가형을 인간이 고안한 형벌 중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이라고 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심각한 고통을 잊게 하기 위해 마취제인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러한 고통 앞에 그 고통을 다 감당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육체적인 고통을 받았습니까?
그 이유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치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당하여야 할 고통을 십자가에서 다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을 대신한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불순종의 죄인, 배신자, 배은자, 배반자, 배역자들의 길을 가버린 죄인들이 죄 값으로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인한 대리적 고통이었습니다.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한 대속적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갈 때 조그마한 고통이 온다고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와 가정, 회사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가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져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다 비난하고 조롱하는데 한 사람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지쳐 십자가를 지을 수 없으니까 로마 군병들은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워 줍니다. 그는 처음에는 왜 내가 수치스런 십자가를 지어야 하느냐고 원망도 했을 것입니다. 영광의 길이 아닙니다. 죄수의 길입니다. 환경의 길이 아닙니다. 조롱받고 비난받는 길입니다. 재수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창피했을 것입니다. 억울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내동댕이치고 군중 속으로 도망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평생의 한번 있는 순례길을 망쳤다고 한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우리는 삶 가운데 원치 않는 십자가가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고난과 고통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하다가 졸지에 경제적 고통이 다가 올 수 있습니다. 선교지에 갔다 뜻하지 않게 육체적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의 십자가를 지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면 기쁨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신실한 신앙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시몬을 소개할 때 그의 아들, 알렉산도와 루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미 마가복음을 기록할 때 그 아들이 신앙인으로 그 만큼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롬16:13에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께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라고 말할 정도로 신실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므로 성경에 기록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해도 예수님의 고통에 비하면 큰 고통이 아닐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처음 읽었던 초대 교회 성도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 때문에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형을 당하였습니다. 짐승의 밥이 되어야 했습니다. 자식들이 눈앞에서 화형당하는 처절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고통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하늘의 지극히 크신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6-7)
2. 예수님은 참을 수 없는 정신적 모독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참기 힘든 것을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이 확정되자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마치 도축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다루었습니다. 인간 이하의 대접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마음대로 총독의 관저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빌라도가 유월절 기간 동안 예루살렘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가이샤라에서 데려온 군인 600명을 만약을 위해 다 모았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아마 헤롯이나 빌라도가 입다가 버린 옷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기 위해서입니다. 조그마한 권력을 가지고 만왕의 왕을 조롱합니다. 노리갯감으로 삼습니다. 가시관을 씌우고 로마 군인들은 조롱하듯 무릎을 꿇고 경배하였습니다. 황제하게 하는 말투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매도하고 빈정거리며 모독하였습니다. 왕권을 상징하는 홀 대신에 갈대를 손에 들려주고 빼앗아 가시관을 쓰고 있는 예수님의 머리를 여러 차례 타격하였습니다. 경멸한다는 의미로 예수님께 침을 뱉었습니다. 군중들 앞에서 옷을 벗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겉옷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히브리어와 로마어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붙였습니다.
지나가던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였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동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는 어쩌면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은 38년 된 병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외아들이 살아난 부인도 있었습니다. 혈루증으로 고침 받은 여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중풍으로 쓰러졌으나 고침 받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죽을 위기에서 구원받은 여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혈루증에서, 한센씨 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 떡을 배불리 먹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지지해주고 변호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예수님을 보고 조롱하고 멸시하였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하하! 꼴좋다.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더니! 그런 이적을 보일 수 있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목숨이나 구해 보시지.”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도 둘러서서 조롱하며 저주하였습니다. “남은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31) 이봐,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어 드리지” 하고 빈정거렸습니다. 진정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옴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비웃습니다.
심지어는 양쪽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까지도 예수님께 욕을 퍼부었습니다. 유대인도, 로마인도, 지나가는 나그네도,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조롱과 모독, 비아냥거림, 비난, 빈정댐을 다 참고 견디며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만왕의 왕 예수님이 왜 이런 수모와 조롱과 빈정댐을 묵묵히 참으며 십자가의 길을 갔겠습니까?
마태복음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8:17)”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당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값으로 당하여야 할 수모와 조롱과 비난과 모독을 다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요즈음 청와대 행정관이라는 사람 얼마나 수모를 당하고 있습니까? 어떤 연예인과 관련있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조롱을 받고 있습니까?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수모와 조롱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당하신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 침묵하며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말이 정당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고통과 비난의 현장에서도 강도를 행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 모든 조롱과 비난, 수모를 참으시고 하셔야 할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약합니까? 십자가를 따르다가 조금만 자존심 상하면 십자가를 내팽개쳐 버립니다. 자신을 조금만 인정해 주지 않아도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조그만 부당한 대우를 해 주어도 마음에 분노와 복수심을 품습니다. 조금만 자신의 원하는 신앙의 색깔에 맞지 않아도 정죄하고 비난하고 매도해 버립니다. 심적 부담 앞에서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목사의 직분도, 권사의 직분도, 장로의 직분도, 안수 집사의 직분도 헌신짝처럼 버려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허물이 있어 비난받고 정죄 받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으로, 능력이 없어 갖은 수모와 비난도 참고 견디어야 하지만 예수님은 만왕의 왕입니다. 하늘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 우리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당하시기 위해서 그 모든 수모와 비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 당하는 조롱과 모독, 비난과 비아냥거림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조롱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처럼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조롱하는 군인들처럼 우리 주변에는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적 이권에 밝은 산헤드린 공회원처럼 시기하며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적 타산에 밝은 빌라도 같은 사람이 힘을 가지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혹하는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어 이유도 모르고 조롱하고 비난하는 우매한 대중 같은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있습니다. 권력의 하수인이 된 군병처럼 남의 고통을 희롱거리로 삼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를 만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 스스로가 세련된 기독교 문화만 즐기려는 종교 향락주의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로마 군인처럼 타인의 고통에 무정한 냉혈족이 되어 타인의 비통한 죽음을 비웃고 조롱하며 옷을 나누는 철면피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시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죄를 만들어 뒤집어씌우고 자신들은 선한 체 위선을 떠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이 안 됩니다. 정치적 유익을 위해 진리 편에 못서고 무리를 만족시키고자 양심을 팔아먹는 빌라도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 몇 푼에 신의를 저버리고 모든 의리와 정을 끊어 버리고 배신하는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의 고통이 두려워 배신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나약하고 비겁한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닷새 전에는 소리 높여 호산나하며 환영하다가 여론 조작에 휩쓸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친 군중들처럼 영적으로 무지한 기회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상시는 모르지만 예나 지금이나 십자가 앞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처 작은 아버님께서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목사님이십니다. 한 평생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분이셨습니다. 큰 교회를 이룬 것도 아닙니다. 이름을 알린 분도 아닙니다. 아내가 연탄가스에 죽었습니다. 자식을 연탄가스로 먼저 보내야 했습니다. 목회자의 가정에 이런 일이 일어나니 사람들이 얼마나 조롱하고 비난했겠습니까? 수많은 어려움과 조롱과 비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었습니다. 큰 집 작은 집, 누이집 가족들에게 전도하여 온 집안 식구를 예수 믿는 가문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를 세 개나 개척하여 세웠습니다. 한 곳에 머물러 평안한 목회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가정에서 장로님이 나왔습니다. 그 가정에서 목사님 두 분이 나왔습니다. 그 가정에서 선교사님이 나왔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라는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마지막 숨을 멈출 때까지 또 학원에서 교회를 하시며 지난 주일까지 설교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사역을 다 마친 후 조용히 천국에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당하는 비난과 조롱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를 위하여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며, 비난 받는 것 결코 우리 하나님이 잊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쉽게 의리를 저버리고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우리의 눈물을 다 닦아 주실 날이 올 것입니다.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 10:29-30)”
3.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영적 분리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유대인, 이방인, 제자, 심지어 강도에게까지 배척을 받았습니다. 온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서 가장 참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침묵하시던 예수님은 외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육신적인 죽음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을 당하여야만 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왜 이런 처절한 죽음으로 버림을 당해야 만 했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값으로 버림받아야 할 것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우리가 당해야 할 지옥 가는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당해야할 저주를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담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방법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십자가에 있었습니다.(고전 1:23)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십자가를 통해 실현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버림 받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단번에 희생 제물이 되기시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딤전2:6).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고 말씀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심으로 우리를 씻어 깨끗하게 하였고(히9:23), 심판을 면하게 하였으며(출12:13) 하나님께 버림받음으로 피의 언약을 성취해 주셨습니다.(마26:28) 죄를 징계해야 할 하나님의 공의가 십자가를 통해 성취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완전히 죄의 삯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롬6: 6) 우리의 육체의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갈5 :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의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갈2 :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재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래 우리는 진리 안에서 죽음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돌아가시면서까지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버림받은 우리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납니다.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그렇게 되면 십자가는 짐이 아니라 능력으로 내 인생에 나타납니다. 고린도 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수치가 아니라 우리의 죄와 슬픔과 질병을 해결해 주시는 능력이 됩니다. 십자가는 절망에서 소망을 주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부담이 아니라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선물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38년 된 혈루증 환자가 소망을 찾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났고, 소경이 눈을 떴으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렸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고, 불안, 긴장, 불면증, 우울증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십자가를 통해 원수가 형제가 됩니다. 질병 때문에 고통하고 있으신 분 있습니까? 육체의 고통 때문에 근심 걱정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마음의 고통으로 근심하며 사시는 분이 계십니까? 버림 받았습니까? 나의 질병의 문제, 나의 근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질병, 그 근심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십자가의 피 묻은 손으로 우리를 안수하여 주셔서 우리의 질병을 낫게 해 주시고 우리의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원수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에 참된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세상에 용서받지 않고 살만큼 의롭게 사는 사람들 없고 십자가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있는 사람 없습니다.
고난이 다가오고 고통이 홍수처럼 밀려와도 억울한 일, 조롱당하는 일, 감당하기 힘든 삶의 좌절, 남모른 사연과 아픔이 다가 온다해도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매년 마다 다가오는 고난 주간입니다.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십자가가 내 인생에 중심에 서야하겠습니다. 장식품이 아니라 짊어지고 좇아가는 십자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진센돌프 백작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살지만 십자가의 감동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미술관에 갔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림을 보고 감동이 되었답니다. 그가 그림을 보는 순간 그것은 그림이 아니라 진짜 피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생동감이 있었답니다. 이 그림은 독일의 스텐버그라고 하는 유명한 화가가 그린 작품이었답니다. 그 그림에는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 주었건만 너 날 위해 무엇 주느냐?"는 글이 쓰여 있었답니다. 그는 백작이었습니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건강도, 큰 영지도 있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그 그림과 글을 읽는 순간 '내가 주님을 위하여 지금까지 한 것이 무엇이냐?'는 생각에 빠졌답니다. 회개합니다. 남은 십자가의 고통을 지기로 마음먹답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소유하고 있는 넓은 영지를 사람들에게 개방하였답니다. 그 때 북쪽에서 난리가 일어나 피난민들이 많이 내려와 있는 상태였는데 이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영지를 경작케 하였답니다. 약 오백 가정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함께 모이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농부들에게 "우리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려 외국에 선교사를 보내자." 제안 합니다. 열 가정마다 선교사 한명 씩을 보내 50명을 보내게 됩니다. 경건 운동을 펼칩니다. 나중에 모라비안파 교회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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