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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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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사단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
본문: 창세기 3장 1- 24절
하나님은 아담에게 너희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으나 아담과 하와는 뱀을 통한 사단의 유혹에 넘어지며 타락하게 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솔로몬은 신실한 왕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지만 두 번씩이나 꿈에 나타나셔서 이방여인을 들이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이방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산당을 짓게 하고 하나님외의 말곰과 같은 이방신들에게 제사하는 것을 허락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12제자중의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는 은삼십 세겔을 주겠다는 유대 제사장을 통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의 스승이자 구세주이셨던 예수님을 배반하며 팔아넘기고 맙니다. 이것은 성경의 내용을 예로 든 것이지만 오늘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들의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멀게 하고, 타락한 삶을 살아가게 하며, 하나님을 버리고 결국에는 사망과 멸망의 길에 이르도록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우리들의 영혼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유혹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단은 세상적인 것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접근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소중히 간직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에 눈과 생각을 돌리고 마음을 빼앗기도록 유혹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중심을 이루고 계시지 않는다면, 설령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마음은 더욱 더 쉽게 사단의 유혹에 흔들리고 좌초되며 급기야 넘어져서 못 일어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각자마다 사단은 다른 모양으로 접근하여 유혹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게 하거나 돈과 권력, 명예와 세상의 힘과 능력, 자신의 생각과 판단, 세상의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부인하게 하거나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게 합니다. 사단은 죄의 모습을 마치 선한 것, 죄가 아닌 모습인양 속이고 둔갑을 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그것으로 집중하게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한번 사단이 놓은 덫에 걸려들기 시작하면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벗어나기가 힘들고 사단이 넘어뜨리기 위해 집요하게 접근하여 유혹의 유혹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은 약하기에 한두 번 틈새를 사단에게 보이기 시작하면 자신의 마음으로는 요번 한번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먹지만 또다시 사단이 유혹을 하게 되면 우리들이 먹은 마음은 흔들리고 흔들려 결국에는 사단의 유혹 앞에 두 손을 들고 맙니다.
사단은 세상적으로 볼 때 죄가 되지 않거나, 얼마든지 자신의 입장에서 합리화하면 죄라고 생각되어지지 않고 오히려 어쩔 수 없이 했다거나 해도 무방한 그래서 인간 세상을 살아갈 때 도저히 버릴 수 없거나 아까워서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인 것처럼 생각 들어지게 하며 그 곳으로 점점 깊이 빠져 들게 하거나 아예 머물러 있게 합니다. 결국 사단은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어 하나님과의 벽을 쌓게 합니다. 그리고는 지은 죄를 회개하기보다는 두둔하고 합리화하며 오히려 옹호하게까지 합니다. 그렇게 지은 죄는 쌓이고 쌓여 우리들의 영혼을 병들게 할 뿐아니라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타락하게 합니다. 사단의 유혹이 가장 많이 오기 쉬운 때는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을 의지하게 될 때,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들을 더 의지하고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나 하나님을 포기하고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우상을 섬기게 될 때 라고 봅니다. 하나님께 무관심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사람에게는 사단이 집중적으로 유혹하며 넘어뜨리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열정, 사랑과 봉사, 헌신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사단은 집요함을 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다고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해서,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해서 스스로 교만해 하거나 마음이 높아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단이 노리고 있는 틈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사단에게 틈탈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유혹이 올 때 이러한 유혹을 슬기롭게 물리치고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순종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신갑주를 입는 길만이 사단의 유혹을 피하고 승리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포케 됨을 면하라”(히3:13)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하나님과 메피스토펠레스와의 대화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유혹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마치 사탄이 욥을 유혹하는 것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녀석을 슬쩍 나의 길로 끌어 내리리다.” 하나님이 대답을 하십니다.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그때 메피스토펠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맙습니다. 사실 난, 죽은 놈들하고는 상대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통통하고 싱싱한 뺨을 가진 놈을 가장 좋아하지요. 송장이 찾아올라 치면 난 대문을 걸어버리지요.”
여러분, 유혹을 받는 것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송장을 향해서는 유혹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미 사탄의 손아귀에 든 자에게는 더 이상 사탄이 관심을 표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치열하게 인생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사탄은 유혹합니다. 인생을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살려 하면, 사탄이 유혹을 해옵니다. 그동안 나가지 않던 교회를 열심히 좀 나가보려 하면, 사탄이 더 크게 유혹을 합니다. 기도시간을 열심히 좀 가져보려고 하면 사탄의 유혹이 더 발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살아 있다고 하는 것, 열심히 산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 위에 치열하게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사탄의 유혹을 끌어들이는 자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면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기도의 간구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예수님도 시험에 빠지지 않게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유혹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도 깊게 알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혹 받게 되는 사람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유혹을 향해서 투쟁하면서 살아 나가야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유혹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어떻게 이 유혹자에게서 벗어나야 될지 깊이 생각할 줄 알고, 유혹자의 전략을 알아야 유혹자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손자병법’이 있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가 않다.’ 라는 뜻입니다. 또 ‘불지피지기면 일승일부’ 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적을 모르는데 나만을 알면 한번은 승리하게 되나, 그 다음에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불지피 부지기면 매전필패’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나도 모르고 적대자도 모르게 되면, 싸움을 할 때마다 매번 패배할 수밖에 없다.’ 라는 병법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점에서도 해당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사탄의 전략과 계략을 알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을 때, 우리는 적을 이길 수 있고, 사탄을 물리치고 이 땅 위에서 살면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유혹자의 미혹이 얼마나 거대하고, 치밀하고, 무서운지를 알지 못하고 넘어가고 맙니다. 그래서 실패하게 됩니다. 왜 성경은 창세기 3장에 사탄이 유혹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유혹받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1절 말씀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다고 가르쳐 줍니다. 뱀 자체가 사탄일 수는 없지만, 사탄이 뱀의 모양으로 이 땅에 들어와서 인간을 미혹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2장 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뱀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뱀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혹자의 전략은 무엇입니까? 유혹자는 처음부터 협박으로, 공갈로 유혹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것이 된 다음에야 공갈을 하고 협박을 합니다. 사탄이 처음 인간을 유혹할 때는 아주 부드럽게 친구처럼 대합니다. 사탄의 어투는 이와 비슷합니다. ‘나도 하나님을 알고 있지. 나도 하나님을 두려워해. 나도 하나님께 경배하고 싶어. 하나님은 최고의 신이야.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말씀했는가 한번 되새김질 해 봐. 나도 하나님의 뜻을 옹호하고 있어.’ 그러면서 실제로는 이중인격자인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였던 틸리케는 사탄이 다가오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악마는 수녀보다 더 거룩하게 행동하며, 구약학자나 여호와의 증인들보다 더 성서를 잘 알고 있다.’
사탄은 성서를 모르면서 우리에게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 그것을 뒤집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처음에 우리를 유혹하게 될 때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습니다. 만약 사탄이 여기에 뿔을 크게 두개 달고 있고, 아주 무시무시하게 생긴 모습으로, ‘나는 사탄이다! 내가 너를 유혹하겠다!’ 고 하면, 어떤 사람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사탄은 아주 매력적인 모습으로, 아주 부드럽게 대화하자고 하면서 다가옵니다. 자신이 모습을 숨기고, 속이면서 다가옵니다. 착한 모습으로 겉모양을 꾸며 선한 대리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은 교활한 거짓말쟁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깨달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킨 레닌에 대한 평가를 다양하게 하는데, 그중에 하나로 이런 평가가 있습니다. “레닌은 처음에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러시아인에 불과했다. 그는 노동자가 입는 옷을 입었으며, 농민들의 언어를 구사했다.” 그는 왜 그랬을까요? 그는 자신을 ‘나는 당신들과 같소. 나는 농민들 속에, 농민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이오.’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대중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편안함을 느꼈고, 그도 자신들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이런 부드러운 모습 뒤에는, 항상 대중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했던 영악한 사람의 모습이 숨어 있었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는 대중을 위한다고 하면서, 대중을 억압하는 러시아의 독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탄이란 처음부터 거대하게 우리에게 악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아주 부드럽게, 위장 전술을 쓰면서 다가옵니다. 유혹자가 부드럽게 다가오는 것도 남자가 아니라 여자에게 먼저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여인의 부드러움을 이용한 것입니다. 여성의 장점을 약점으로 공략했습니다. 여성이 상대편의 말에 잘 공감하고, 대화적이고, 감성이 발달되어 남성들보다 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성들은 업적주의적 사고를 통해서 자기 인생을 경영하려고 하지만, 여성들은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기의 인생을 경영하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것이 여성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여성들의 장점을 사탄이 이용하려고 합니다. 실제로, 에덴동산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는 말은 여성이 먼저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남자 혼자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입니다. 아마 하와는 아담을 통해서 이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아담이 혼자 있을 때 창세기 2장 16, 17절을 통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바로 이 말씀을 사탄은 알고 있으면서도 인간이 갖고 있는 허영심을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사탄은 근본적으로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공격하는 것은 사탄적인 모습의 한 행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었습니다. 사탄은 생각합니다.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이다. 인간을 좌절시키는 것,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고, 하나님께 대한 적대적인 행위이다.’ 사탄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인간을 훼방하면서 떼어놓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가장 먼저 취한 방법이 이간질이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을 인간에게서 떼어놓는 방법으로 이간질을 행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고발하면서 양자의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욥기에서 사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이렇게 고발합니다.
“하나님, 욥이란 자를 하나님이 칭찬하시는데, 그것은 부당한 말씀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욥이 재산이 많고, 가족이 많고, 누리는 것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지, 그는 본래부터 의인이 아닙니다. 한번 제게 능력을 주셔서 욥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빼앗게 하옵소서. 욥의 재산을 빼앗고, 가족을 빼앗고, 건강을 빼앗아 보게 하소서. 그래도 욥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그는 결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적대하고, 저주할 것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이간질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충동질했습니다. 그리고 고통 받는 욥을 보면서 또 이간질합니다. “너 이제 몸에 상처뿐이지 않느냐? 네 가족은 다 죽지 않았느냐? 네가 갖고 있는 재산은 다 빼앗기고 이제는 빈털터리인데, 이래도 하나님을 경배하겠느냐? 하나님을 찬양하겠느냐? 네가 의인으로 남는 것이 타당하냐?” 사탄은 그의 아내를 통해서도 욥을 향해 비난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말합니다. “하나님은 잔인한 분 아니더냐?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 아니더냐? 하나님은 사랑 없이 자기 욕심대로 너에게 이렇게 행했는데, 네가 어찌 네 입으로 하나님을 계속 찬양하려고 하느냐?” 사탄은 욥을 향해서 계속해서 이간질을 합니다.
여러분, 인간관계에 있어서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 있고, 사람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이 있고, 사람을 비난해서 그 사람의 인격적인 관계성을 다 무너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못해서 이런 길로 갈 수 있고, 사탄적인 마음이 들어갈 수 있기에 늘 조심해야 합니다. 사탄은 인간 속에 있는 허영심을 끄집어내고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오해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와에게 접근할 때 진지하게 접근합니다. 종교적인 문제를 취급하면서, 하나님을 들먹거리면서 접근합니다. 마치 하와의 심리적인 상태를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정말 이 동산의 나무는 먹지 말라고 하더냐?” 라고 말하면서 “네가 그것을 먹으면, 네가 그 선악을 아는 나무를 먹으면, 네가 하나님처럼 되고, 네가 지혜롭게 될 것이다.” 라고 충동질합니다. 하나님을 경쟁자로 여기게 만듭니다. 사탄은 하와를 향해서 유혹하고,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널 못 먹게 한 줄 아느냐? 하나님은 속으로 인간을 두려워하고 있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뛰어난 존재가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성숙해 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자유로워지고, 지혜로워지고, 네가 모든 것을 갖게 될까 봐 하나님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너와 하나님은 경쟁자다. 네가 하나님처럼 될 수가 있다.’ 이것을 위해서 사탄은 인간에게 의심을 집어넣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니야. 하나님은 네게 악의를 품고 있는 분이야. 하나님은 신뢰할 만한 분이 아니야. 하나님은 믿지 못할 존재야.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집착이야.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하나님이 너에게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억압하려고 하고, 너를 종으로 삼으려고 하고 있어.”
여러분, 인간관계에서 제일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뢰입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믿고, 언어를 믿고, 상대방이 갖고 있는 삶을 믿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제일 소중한 것입니다. 특별히 사랑해야 할 사람, 부부관계가 그렇습니다. 부부간에 문제가 있어도, 가난 때문에 서로가 헤어지지는 않습니다. 부부간에 문제가 있어도, 명예가 없어서 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간에 서로 의심하는 것,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고, 아내가 남편을 의심할 때, 부부가 함께 사는 것이 지옥입니다. 서로가 믿지 못하는 것은 결국 인간을 살 수 없게 합니다. 사탄은 인간의 마음속에 의심을 품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유의 은총을 의심하게 만들었을 때 하와는 어떻게 응답을 했습니까? 하와는 처음에는 정상적으로 응답을 했습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했습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다 먹을 수가 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어. 하나님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셨어.”
그런데 계속해서 하와의 마음속에도 무언가 그 동안에 갖고 있었던 의심이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을까? 하나님이 나에게 자유를 주고 계실까?’ 뱀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너희가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그랬어?” 그러나 본래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했지, 만지지 말라고 이야기 한 적은 없었는데, 하와의 마음속에는 그런 생각이 있었나 봅니다. ‘사실 나는 먹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만지고는 싶었는데.’ 그 말이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명백히 죽는다고 말했는데, 죽을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자기의 심정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자기 속에도 의심이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의 마음을 휘젓습니다. 우리의 의심을 휘젓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불신을 휘젓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허영심을 휘젓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욕망을 휘젓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마음을 뒤흔들어 놓으면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가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이 갖고 있는 마지막 전략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위장술의 천재인 사탄은 본문 4절에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사탄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속임수를 갖는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본문 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이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굴레와 억압을 주신 것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혜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미련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독립성을 다 깨뜨리고,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라고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고, 거짓말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에게 불을 갖다 준 프로메테우스. 너 좀, 한번 프로메테우스처럼 영웅이 되어 봐라. 하나님을 향해서 반란해봐라. 하나님을 향해서 반역해봐라.” 그것이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속이 좁은 분이냐? 아니다, 네가 잘못해도 괜찮을 것이다. 하나님이 완고한 분이냐? 아니다, 하나님이 네게 자유를 주면서 어떻게 그런 한 가지 명령을 금하겠는가? 네 마음대로 해봐라. 그래야 네게 자유가 오고, 네게 평안이 온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 평화가 왔을까요? 인간이 자유자가 되었을까요? 인간이 지혜롭게 되었을까요? 오히려 지혜가 어둡게 되었고, 인간의 평안이 두려움으로 바뀌어졌고, 인간이 갖고 있는 자유가 이제는 사탄이 얽어매는 사탄의 종이 되고만 것입니다. 사탄이 처음에 접근할 때는 부드럽게 접근하지만, 마지막은 우리를 종으로, 노예로 만들고 맙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우리를 접근할 때는 엄하게 접근하시는 것 같지만,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평안과 은총을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보배로운 것인지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거꾸로, 우리를 무너뜨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된 은총을 다 상실하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에게 부딪히는 유혹이 있습니까? 시험이 있습니까? 돈에 대한 유혹이 나를 붙잡고 있습니까? 세상의 명예에 대한 유혹이 우리에게 친구를 팔아넘기는 비참함을 만들고 있습니까? 이성 간에 성적인 유혹이 내가 갖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존감을 다 무너뜨리고, 우리를 육체적 쾌락을 탐욕 하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유혹하고 있습니까?
유혹 자체가 너무 나쁜 것이라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유혹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유혹을 이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다시 주님 앞에 기도함으로 서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말게 우리를 기도하도록 요청하신 주님 이름으로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사시면서 유혹과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사탄이 누구인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승리하셨습니다.
혹 실패 때문에 고통스럽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나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땅 위에서 빛을 발하세요. 주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사람,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사탄의 전략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세움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담의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담이란 말의 뜻은 사람입니다. 아담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첫째 죄는 불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신 다음 에덴 동산의 모든 아름답고 좋은 동물, 식물, 광물을 다 선물로 주시면서 한 가지를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하시니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6).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의 모든 것을 다 선물로 주시고 단 한 가지만 금하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그 금지 명령을 불순종했습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창3:6). 여자가 먼저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자에게 주어 남자도 따 먹게 했습니다.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사람은 만들어질 때부터, 태어날 때부터 불순종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불순종 속에는 불신앙과 교만과 반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불순종과 불신앙과 교만과 반역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피조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피조물인 사람에게는 신적인 요소도 있지만 자연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흙으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고 인간으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심각한 문제는 타락한 천사인 사탄 마귀의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뱀의 간교한 유혹의 소리를 여자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사탄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뱀의 소리는 여자의 미각과 시각과 욕망과 잘 어울렸습니다.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고 했다고 했습니다. 죄는 불순종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하나님께서 칠일이라는 시간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시면서 엿새는 우리의 일을 위해서 마음껏 사용하지만 하루는 우리를 위해서 따 먹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출20:9-10). 그러나 사람들은 그 명령을 불순종하고 주일 하루도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는 불순종의 죄를 짓고 있습니다. 주일 오후와 저녁에 집에서 쉬든지 운동을 하든지 사업을 하는 것이 몸과 집과 사업에 유익하게 보이기 때문에, 주일을 잡아 먹는 것이 먹음직하게 보이기 때문에,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키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탄은 우리들이 몸과 시간과 정성을 다 바쳐 예배 드리는 것을 항상 방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불순종의 죄를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실과나 시간이나 물질을 따 먹는 불순종의 죄를 짓고 있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불순종입니다. 부모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이 죄이고 주의 종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죄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죄입니다.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엡6:1)고 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히13:17)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하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고 했습니다. 죄는 불순종입니다.“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둘째 죄는 책임전가 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의 죄를 지은 아담을 찾아와서 아담의 불순종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창3:11). 하나님은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죄인들이 지은 그 죄를 지적하십니다. 가인이 분노의 죄를 지었을 때 가인을 찾아오셔서 그의 분노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을 어찜이뇨”(창4:6).
그런데 아담은 자기가 지은 불순종의 죄를 인정하거나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의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했습니다. 죄는 죄를 낳습니다. 불순종의 죄는 책임전가의 죄를 낳았습니다. 책임전가는 거짓과 위선입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비겁하고 비굴하고 이기적인 변명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2인칭과 1인칭으로 부르며 사랑했는데 이제는 하와를 보고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라고 3인칭으로 부르며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남자는 이렇게 변덕적이고 위선적이고 비겁하고 비굴했습니다. 아담은 또한 은근히 자기가 지은 죄의 책임을 하나님에게도 전가했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사람은 이렇게 비겁하고 비굴하고 위선적이고 간교한 존재입니다. 하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어 내가 먹었나이다”(창3:13). 여자도 비겁하고 간교합니다. 죄는 책임전가 입니다. 대통령은 자기의 잘못을 국민들에게 전가하고 국민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대통령에게 전가하는 것이 곧 비겁하고 비굴한 이중적인 죄입니다. 주일을 제대로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이 남편 때문이고 아내 때문이고 건강 때문이고 집 때문이고 사업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비겁하고 비굴한 이중적인 죄입니다. 모두가 내 탓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죄에서 벗어나는 길인데 사람들은 그 길을 걷지 못하고 자기가 지은 죄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므로 더 큰 죄에 빠지게 됩니다. 죄는 책임전가입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15:22)
셋째 죄의 결과는 고통과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시며 죽음을 선언했습니다(창2:17). 사도 바울도 나중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죽음을 선언했습니다(롬6:23). 아담과 하와는 이제 불순종과 책임전가의 죄를 지은 결과 고통과 죽음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와는 잉태하는 고통을 지니게 되었고 땅은 저주를 받게 되었으며 아담은 종신토록 고통스럽게 수고하며 일하다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덴 동산에 쫓겨나는 불행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결과는 고통과 죽음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선언하신 것처럼, 사람이 안식일을 범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엄하게 분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찌니라”(출31:12-15). 어떤 무식한 사람들은 이 말씀이 구약에만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청교도들과 프린스턴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촬스 하지는 이 말씀이 구약시대는 물론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영속적인 의미가 있다고 바로 주장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자는 영적으로 죽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그 책임을 전가하는 죄의 결과는 고통과 죽음입니다. 그것이 창세기 2장의 명령이든지 출애굽기 20장의 명령이든지 요한복음 3장 16절의 명령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죄는 불순종이고 죄는 책임 전가인데 죄의 결과는 고통과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결코 용납지 않으십니다. 죄는 생명(피)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게 하고, 숨게 합니다. 어두움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죄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는 소망의 빛을 비추어주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신 다음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죽음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어떤 선행이나 노력이나 공로로 구원 받는 길이 아닌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의 빛을 비추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과 21절에서 그 소망의 빛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유혹한 뱀을 저주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사탄 마귀의 머리를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가 깨트러 부수므로 아담과 하와와 그 후손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요일3:8, 히2:14, 히9:26 말씀 등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4). "이제 그가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9:26). 아담과 하와와 그 후손들이 죄에서 권함을 받을 수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마귀의 세력과 죄의 세력과 죽음의 세력을 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고 믿는 길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물론 구약의 성도들도 죄와 사탄과 죽음의 세력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고 믿는 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다윗도 욥도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고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십자가의 은혜가 십자가 사건 이후는 물론 그 이전까지 미친다고 지적했습니다. 죄인들이 구원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 길입니다. 그 다음에는 불순종과 책임전가의 죄를 계속해서 범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본문 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무슨 뜻입니까?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의의 옷이 벗겨진 아담과 하와에게 양의 가죽으로 만든 새 옷을 입혀주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릴 보배로운 피로 만든 흰 옷을 입혀 주실 것을 미리 가리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으며 예수님의 피로 만든 흰 옷을 입는 것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인간에 대한 처음 이야기는 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태어날 때부터 불순종과 불신앙과 반역의 이야기입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는 그 책임을 다른 사람들이나 하나님에게 전가까지 합니다. 비굴한 위선의 죄까지 집니다. 결국 우리들은 고통을 당하다가 죽을 수 밖에 없는 불행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들이 죄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소망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므로 사탄 마귀를 멸하시고 죄와 사망의 세력을 멸하시므로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만든 의의 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시게 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첫 번 이야기입니다. 오늘 아침 피조물로 태어나서 불순종과 위선의 죄를 거듭해서 짓다가 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마련하신 놀라운 구원의 섭리를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돌립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위해서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피 흘려 만들어 주신 보혈의 흰옷은 입습니다. 그리고 불순종과 책임전가의 죄를 거듭해서 짓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보혈의 흰옷을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불순종과 위선의 죄를 짓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원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뱀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불순종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날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말씀에 불순종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단은 오늘날도 우는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먹이를 찾아다닙니다. 경계하십시오, 우리는 이런 유혹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대적합시다. 마귀의 시험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신 예수님처럼(마4: 1- 11), 우리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사단의 유혹에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 죄를 회개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 많은 사람들이 어서 속히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 사탄의 유혹을 받는 현장임을 저희들이 깨닫습니다. 열심히 살면 살수록,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사탄이 얼마나 강렬하게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하는지 깨닫습니다. 그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검을 삼게 하시고, 사탄의 전략을 꿰뚫어보면서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는, 성령 안에서 이겨나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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