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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의 예배

창세기 복음............... 조회 수 4361 추천 수 0 2011.03.16 20: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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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4:1-26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가인과 아벨의 예배

본문: 창세기 4:1- 26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목회지로 섬겼던 곳은 경기도의 한 농촌교회였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40년쯤 되었으며 마을이 그리 크지 않아서 작은 규모로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아름다운 공동체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던 중 잊지 못할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느 여름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농촌교회는 보통 여름철이면 밤 9시나 돼야 성도들이 일을 마치기 때문에 그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날 따라 예배시간이 되었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크지 않았어도 열댓 명 이상은 모여 늘 예배드리곤 했는데 그 날은 한 번도 빠지지 않던 몇 분의 권사님들 마저 볼 수 없었습니다. 결국 5분쯤 더 기다리다가 단 한 명의 신도만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묵도를 하고 찬송을 하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의 회중인 성도가 대표기도를 하고 나는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한 사람을 놓고 설교를 해보았습니다. 예배당 마루에 한 사람, 강대상 위에 한 사람, 설교를 계속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둘이 전부라는 사실에 웃음도 나고 성도가 없다는 생각에 가슴도 아프고 그렇게 설교를 시작한지 채 5분이 못되어 목이 메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설교하다가 한 사람의 청중 앞에서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계속 설교를 해야 할지, 그리고 이렇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젊은 목회자로서 패기가 꺾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 예배는 그렇게 끝까지 드려졌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나는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많은 것을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목회자에게 성도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준 시간이었고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심을 더욱 깊게 가르쳐준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아픔이 있었지만 “두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리라”는 하나님을 말씀을 체험할 수 있었던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예배를 평생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투르고 보잘 것 없는 젊은 목회자가 단 둘이 드렸던 예배에 임재하신 하나님 그분을 기대하며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이렇게 예배드리러 나오셨습니까? 예배시간이 지루하고 따분하게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혹시 예배에 빠지면 벌을 받을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나오지는 않습니까? 오늘 찬양대의 입례송 가운데 "예배드림이 기쁨 됩니다"라는 가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배가 기쁨이 됩니까?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새로워집니까?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여러분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얻고 돌아가십니까? 무엇보다 여러분이 드리는 이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낙원에서 쫓겨난 후 아담과 하와는 처음으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이 아들은 특별한 축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들의 출생은 그들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시작된 새로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암시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새 생명의 탄생에서 그들이 낙원에서 추방당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약속의 성취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은 후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득남하였다"라고 말했습니다(1절). '가인'이라는 이름은 '얻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비록 범죄하고 타락했을지라도 그들의 모든 소망과 신뢰를 하나님께 두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두 번째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아벨'이라고 했습니다. '아벨'은 '하찮음' '무의미' '한숨'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인생의 고난과 노력에 대해 깊은 자각을 하게 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본 절은 두 아들의 직업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사람이었고, 아벨은 양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직업은 모두 선하고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들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낙원에서 범죄했던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을 것입니다. 믿는 부모들이 가정에서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애굽의 철저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품에서 젖을 먹으면서 배운 신앙이 모세의 인생을 결정지었습니다. 자녀들이 어렸을 적에 부모가 그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부모들로부터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범죄한 자들을 구원해주시는 분이라는 것과, 공의로우셔서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는 아들들에게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법을 가르쳐주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본문은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순전한 믿음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의 표시로 이 제물을 당신께 드립니다." 이런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가 봉사하며 헌금 드리는 자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랍습니까? 이제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과 나의 생명까지 주님께 드리기를 결단하며 헌신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배는 바로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1. 가인과 아벨의 제사

가인은 땅에서 나는 곡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본문에는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4에서 우리는 그 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그 답은 '믿음으로'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가인은 제사드릴 때가 되니까 관례대로 드렸습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제사입니다. 이러한 제사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무 쓸모가 없고 오히려 가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형식이 아무리 거창하고 엄숙하고 아름다워도 믿음 없는 제사는 헛됩니다.

제물과 그 제물을 드린 사람이 아울러 언급되고 있는 것을 주의해서 보십시오(4-5절). 첫째는 사람이요, 그 다음이 제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만일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면 그 제물은 하나님께 열납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2.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제사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예배와 감사와 신앙고백이 없었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자기가 가진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께 어떤 선물을 기대하는 제사였습니다. 믿음 없는 제사는 마치 뇌물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으시고 복을 주시고 화를 면하게 해주시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제사를 드림으로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나 이방종교에서는 통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태도는 매우 악하고 가증한 행위가 됩니다. 이것은 이방종교의 제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당을 불러다가 액땜 굿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이런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제사를 받으시겠습니까?

오늘 우리 가운데 이러한 생각으로 예배에 나오는 성도는 없습니까? 예배에 빠지면 벌을 받을까 두렵고 불안해서 할 수 없이 나오는 성도는 없습니까? 예배를 드렸으니 하나님도 나에게 복을 주시고, 잘못이 있어도 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성도는 없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흥정하려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다. 가인이 드렸던 제사가 바로 그런 제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제사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선지자들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1-13)

한국교회는 지난 30년동안 경아적인 성장으로 세계 교회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는 데는 전혀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겉모습만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나빠지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거부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예배가 거부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통적으로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가인의 제사가 거부된 이유를 피의 제사가 아니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의 예배가 반드시 ‘피의 제사’라는 선입견을 갖고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모세오경 중에서 구약 예배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레위기의 제사법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피의 제사 뿐만 아니라 곡물의 제사도 열납하셨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창세기 4장 3절의 문맥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란 말씀을 히브리어 원문성경에서 직역을 하면 “날들의 끝”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추수 때를 지나서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 두 형제가 드렸던 예배는 속죄제가 아닌 감사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을 치는 아벨이 동물제사를 드린 것과 농사짓는 가인이 곡물 제사를 드린 것은 자신들의 직업에 의한 열매를 드렸기 때문에 그 제물이 어떠한 것이냐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거부된 근본적인 이유는 믿음이 없는 제사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믿음이 결여된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예배가 믿음의 예배이겠습니까? 가인이 드렸던 예배는 종교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종교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을 찾고 싶고 신께 나아가고 싶은 본능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이 종교적 본능이 때때로 인간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종교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하고 종교생활을 하게도 됩니다.

그러나 종교적 본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다고 할지라도 그 종교성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예배를 드릴 때에만 그가 가지고 있는 종교성이 진가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의 예배란 무엇일까요? 사무엘 선지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믿음의 중요한 모습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생활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지식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바로 그러합니다. 여호와의 계명을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시인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면서 그 말씀들을 삶 가운데 실천하는 삶을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적 믿음의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점은 예배 이후의 삶에 실패했습니다. 창세기 4장 5절에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는 내용대로 가인은 분노하며 안색이 변했습니다. 성경은 분노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분노 하셨다는 말이 350번 나옵니다. 언제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만 분노하십니다. 가인이 자신의 믿음 없는 형식적이며 위선적인 신앙생활 그 자체에 분노하여 오히려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일에 그의 분노가 긍정적으로 반응을 보였다면 그의 삶의 방향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

진정한 제사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 그리고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시며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나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소망이 없음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내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는 헌신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것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히 복종과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예배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이며, 하나님께서 이러한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내가 드린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셨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만나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내 마음이 완전히 변화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무거운 짐이 다 없어져버립니다. 근심과 걱정이 사라져 버리고 완전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짜증나고 조급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분노와 미움이 다 없어집니다. 내 마음이 완전히 새로워졌음을 자신이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는 병이 나아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하늘의 은혜가 내 마음 속에 가득합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예배를 드리면서 이러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예배시간에 아기와 눈을 맞추며 웃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못된 일입니다. 예배시간은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심지어는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조차도 자기가 아기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 시간에 영광의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에 나와 하나님 사이를 방해하는 것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늘 예배가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습니까? 아니, 하나님을 만나 뵈었는데 어떻게 달라지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해주셨고, 나를 기쁘게 받아주셨는데 어떻게 변화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는데 어떻게 변화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 변화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벨이 드린 제사는 바로 이런 제사였습니다.

 

  4. 가인의 분노

예배를 잘못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고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더욱 범죄하고 불행해지기까지 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5절). 그는 하나님이 부당하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잘못된 제사를 드린 것에 대해서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분노가 합당치 않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6절). 그리고 해결책을 제시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7절). 선을 행하라는 것은 합당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가인의 제사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제사를 드릴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잘못했을 때 우리를 깨우치시고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겸손히 순종하여 우리의 태도와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받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죄가 맹수처럼 문에 엎드려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회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가 없다면 죄는 단번에 달려들어 우리를 삼켜버릴 것입니다. 이렇게 문에 엎드려 우리를 노리고 있는 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는 죄의 소원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욕망을 따라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이기려면 선을 행하고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올바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내 마음을 새롭게 해주셔야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게 되면 큰 기쁨과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거운 짐과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죄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우리는 변화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죄짐이 벗겨지고 우리의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이렇게 예배하며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되면 우리는 가장 복된 사람들이 됩니다. 예배드리는 일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나오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믿음으로 나와야 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반드시 하나님을 뵙고 은혜를 받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절감하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뜨겁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할 것을 다짐하는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나와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황송하게도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시고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를 사로잡아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주십니다.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항상 이러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도 누군가를 향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주목합니다. 나를 복받을 대상으로, 은혜받을 대상으로, 평강받을 대상으로 주목하십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콤플렉스라는 그릇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 복은 구하면서도 우리 그릇은 콤플렉스 그릇이란 말입니다. 은혜는 구하면서도 우리 안에 콤플렉스는 해소가 되지 않고 있는 이런 모순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은혜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평강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됩니다. 우리 그릇을 준비해야 됩니다. 여호와의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 은혜를 담을 수 있는 그릇, 평강을 담을 수 있는 그릇,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주목하는데도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도 자꾸 남을 주목하고 환경을 주목하고 타자를 주목하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주목하는 이 시간에 우리 자신들은 그를 향하여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눈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시선, 삶의 시선을 타자로부터 내 자신에게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가인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복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5. 자기 파멸을 낳는 질투

본문 8절을 읽겠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희랍의 어느 도시에 경기에서 늘 우승하는 육상 선수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선수로 말하면 국내의 경기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이름을 날리며 공을 세웠기에 나라에서 동상을 세워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그와 맞먹는 또 다른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운이 없는 탓인지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실의에 빠져 지나가다가 경쟁 선수의 동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맞았어. 바로 저 친구 때문에 내게 승리가 돌아오지 못하는 거야. 저 친구만 없애버리면...' 이러한 마음을 품고 있던 그는 그날 밤부터 매일 동상을 찾아가 조금씩 구멍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동상이 쓰러지는 날, 네 놈도 끝장이다. 이젠 내가 승리자가 되는 거라구.'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동상에다 대고 분풀이하던 그가 마침내 동상을 쓰러뜨리고 말았습니다. '아 !' 하는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동상의 조각들이 그의 몸을 덮어 버리고 그는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욥5:2)

성경상에 나타난 시기와 질투의 사례 몇 가지를 보면

1) 가인이 동생 아벨의 재물은 하나님이 열납하셨으나 자기의 재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지 시기함으로 아벨을 죽입니다.(창4:3-8)

2)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여종 하갈이 먼저 잉태하여 자기를 멸시하자 이를 시기하여 하갈을 학대하므로 하갈이 결국 도망하게 됩니다.(창16:4-6)

3) 야곱의 처 라헬과 레아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므로 여종들을 야곱과 동침하게 만듭니다.(창30:1- 15)

4) 요셉의 형들이 아비가 요셉을 그들보다 더 사랑함을 알고 시기하여 애굽의 종으로 팔아버립니다.(창37:4- 11)

5) 사울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는 여인들의 소리를 듣고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합니다.(삼상18: 7,8)

6) 바벨론의 방백들이 다니엘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합니다.(단6:3,4)

7)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박도록 고소합니다.(막15:9,10)

8)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시기로 비방하고 핍박합니다.(행13:45, 행17:5)

 

6. 세속적인 인간 문명의 태동

본문 19절을 읽겠습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라멕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부일처의 신성한 결혼제도를 육신의 안목과 정욕으로서 파괴시킨 최초의 인물입니다. 타락한 인간문화는 라멕 이후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정욕을 좇아 일부다처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본문 20- 22절을 보겠습니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레멕의 장자 야발은 양떼를 방목하며 사육하는 기술과 방법을 개발하고 터득하여 후손들에게 전래시킨 목축민의 조상이 되었으며, 차자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되었습니다. 따라서 야발은 재산 축적의 길을 터놓았고 그의 아우 유발은 향락과 즐거움의 길로 이끈 것입니다. 그리고 두발가인은 금속으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대장장이의 조상이었습니다. 즉 그는 금속 기술의 선구자로서, 농기구를 비롯하여 전쟁도구들을 발명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들의 문화 문명은 세속문화로서 자기만을 아는 문화이며 어두움과 타락의 길로 이끕니다. 그러나 하나님 문화는 함께 세워가는 문화요, 살리는 문화이며 빛의 문화입니다.

우리는 삶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부와 쾌락만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삶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7. 공적인 예배가 시작됨

본문 25, 26절을 보겠습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이 에노스를 나은 후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씀은 그 때부터 그들이 공적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허무함을 느낄수록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는데, 그러한 그들의 신앙을 공적인 예배로 나타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공적으로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사람들 앞에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가운데 세상이 허무한 것을 알면서도 소망을 하나님께 두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성도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못하고 썩어질 세상에 기대를 걸고 살아간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고 불행한 일입니까?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 방황하는 삶을 살았지만 셋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으로 가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온 것을 보니 가인의 자손이 아니고 셋의 후손인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즐거워하는 셋의 후손된 것을 기뻐하며 감사하십시오.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worthship(가치가 있는 것이란 뜻)’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구약의 예배는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아벨의 예배(첫 새끼와 기름의 번제)와 가인의 예배(땅의 소산의 소제)에서 시작합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 때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말씀한 것으로 보아 제물을 바치는 제사(예배)를 드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세 때에 와서 이 예배는 여러 가지의 형태로 변화되었습니다.

구약의 예배는 레위기에 가장 분명하게 그리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위 5대 제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레위기 1장에는 번제, 2장에는 소제, 3장에는 화목제, 4장에는 속죄제, 5장에는 속건제가 나옵니다.

번제는 헌신과 순종을 말하고 소제는 봉사를 의미하고 화목제는 평안을 뜻하고 속죄제는 대속을 의미하고 속죄제는 만족을 말합니다. 이 5대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온전히 드리라’는 데 있습니다.

신약의 예배는 구약의 예배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특징되고 있습니다. 신약의 예배는 영적 복음서인 요한복음에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4장 23∼24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그러면 참된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영어로 예배를 ‘worship service’ 혹은 그냥 ‘service’라고 부르는데 그 말속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즉, 예배는 생활과 봉사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자기 어머니 화장대 위에 청구서 비슷한 글을 하나 적어놓았습니다. 엄마 없을 때 동생 돌봐준 값 500원 방 청소한 값 500원 아빠 구두 닦아 준 값 500원 엄마 심부름 한 값 500원 산수시험 100점 맞은 것 1000원 합해서 3000원 그리고 밑에 쓰기를 내일까지 꼭 주시기 바랍니다. 이 아이가 학교에 갔다 돌아오니 아이 책상 위에 어머니의 편지가 놓여있었습니다. 아들아 너를 내 뱃속에 넣고 열 달 동안 고생한 것 공짜 7년 동안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 것 공짜 네가 아팠을 때 너를 업고 어두운 밤길을 달려가 응급실에 데리고 간 것 공짜 네가 공 차다가 뒷집 유리창을 깨뜨려 물어준 것 공짜 앞으로 너에게 들어갈 학비 모두 공짜 그리고 밑에 쓰기를 아들아 나는 너에게 청구할 것이 하나도 없다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셨습니까? 이 초등학교 1학년 아들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는 아니하셨습니까? 하나님 제가 오늘 다른 곳에 갈 수도 있는데 특별히 하나님을 생각해서 눈이 많이 내렸지만 이렇게 예배드리려 나왔습니다. 무슨 복을 주시겠습니까? 저는 다른 성도들 보다 일찍 나와 찬양연습을 하고, 찬양을 하는데 저에게는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저는 십일조를 열심히 드렸는데 무슨 복을 주시겠습니까? 저는 눈이 많이 쌓인 오늘 새벽에도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어떤 복으로 저에게 채워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요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너에게 생명주고 건강 준 것 공짜 너에게 한평생 마실 공기 주고 마실 물 준 것 공짜 너의 죄를 다 용서해준 것 공짜 사랑하는 나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해서 너를 내 자녀로 택하여 구원 한 것 공짜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예배드릴 마음이 생기는 때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복이요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것임을 내 마음속 깊이 깨달을 때입니다. 그때부터 찬송이 나오고 그때부터 감사가 나옵니다. 내게 주어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될 때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와 감사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요셉 케이보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주의 통치하에 있을 때 아주 유명했던 인물입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공산주의를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어릴 때 그는 주일 아침이면 3시간동안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갑니다. 교회에 가서 2시간30분 동안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마치면 공원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에 다시 2시간30분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다시 갑니다. 그리고 3시간 걸려서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힘을 쏟아야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1주일에 예배 한번 드리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일입니다. 한 번의 예배를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예배를 드리러 가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즐겨해야 합니다. 예배하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예배하러 가는 것은 그 자체가 가치입니다.

"생명의 삶"에 나온 글입니다.

러시아에서 한 교회의 주일 아침 예배 설교를 부탁 받았습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나뿐 아니라 여러 명이었습니다. 예배는 거의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뒤 그 교회 목사님과 잠깐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배가 긴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교인들의 열의에 더욱 놀랐습니다. 3시간 내내 그들은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지루한 기색도 없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도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운을 떼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요, 예배가 한 시간이 넘으면 여기저기서 시계가 삑삑거립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신앙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게 허용되지 않았고, 발각되면 모두 감옥에 들어갔지요. 지금 이런 일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 질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저 행복한 겁니다. 그리고 어떤 앞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매주일이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겁니다.”

그동안 나는 예배를 너무 건성으로, 느긋하게, 습관적으로 드렸던 게 아닌가? 이 사람들은 예배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초를 당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다시 감내할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갈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죽을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한평생 살면서 예배만큼 귀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도 예배가 이토록 큰 의미와 중요성을 갖고 있는 가요?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워털루 전쟁에서 참패하여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당신 평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한참 눈을 감고 회상을 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전투가 치열하던 어떤 주일이었죠. 그때 나는 졸병이었지만 아침에 철모를 벗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린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가 내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예배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지금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처럼 유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여야 합니다. 아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순간이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순간입니다. 예배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최고의 행복이요, 가치요,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예배를 회복하고 존중히 여기십시오.

로마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했습니다.

로마서의 구조를 살펴보면 1장부터 11장까지는 무엇을 믿느냐 믿음에 대한 말씀이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장 1절, 2절은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하는 첫 부분으로 총론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예배를 생활의 가장 중심부에 두고 살아야합니다. 예배가 최우선이 되어야 하고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성도는 주일에 드리는 예배를 중심으로 하여 1주일동안의 모든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여행 중에도 주일에는 꼭 돌아와 예배를 드리고 부득이 돌아올 수 없으면 어디에서든지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예배를 중심으로 사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예배는 드리되 그것이 생활의 첫째는 아니라는 생각으로 사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등산가자고 하면 산으로 가고 낚시하러 가자하면 낚시터로 가고 비가 오고 눈이 내려 갈 데가 없으면 예배드리기 위해 옵니다. 이런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그 생애 중에서 첫 번째 우선순위가 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만사를 제하고 예배는 꼭 드려야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예배에 의해서만 살 수 있습니다. 예배에 몇 주일 빠지게 되면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를 의심하게 되고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예배가 없는 성도는 영적으로 죽은 성도입니다. 영적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가족이 함께 예배시간마다 꼭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예배가 중심입니다. 예배가 중심이어야 합니다. 예배가 최우선임을 명심 또 명심해야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영적예배라고 했습니다. 헬라어로는 합리적 또는 영적이라는 뜻입니다. 외면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영적예배이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당연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우선해야 하기 때문에 합리적 예배입니다. 이와 같이 예배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교육도 하고 봉사도 하지만 예배 없는 봉사 예배 없는 교육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배 없는 봉사는 위선을 초래합니다. 모든 것의 핵심은 예배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합니다. 예배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 2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드리는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지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그 발에 입 맞추며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귀담아 듣고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다짐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구약에서 예배는 곧 제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양을 잡아 바치는 희생입니다. 신약에서는 구속하신 은혜를 찬양하는 잔치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섬기고 찬양하며 섬기고 기뻐하며 섬기고 말씀을 순종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입니다.

신학자 몰트만은 “예배를 메시야적 잔치”라고 정의했습니다. 찬송은 아주 귀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오직 찬송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새롭게 한다는 말은 질적인 새로움을 말합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이 예상 밖으로 길어져 희생자가 많아지자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동족끼리 싸워서 하루에도 수백 명씩 젊은이들이 죽어갑니다. 마음이 괴로운 링컨은 집무실에서 하나님 앞에 두세 시간씩 엎드려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대통령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본 장관들도 문밖에서 기도하다가 대통령이 문을 열고 나올 때에 장관들이 송구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우리도 문밖에서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대통령이 깜짝 놀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달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나는 지금 내가 하나님 편에 섰는가가 걱정하고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그것을 걱정하고 있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중 일세 참으로 귀한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예배 전에 가졌던 마음 즉 소원이 많습니다. 건강도 물질도 명예도 지위도 그러나 그것은 예배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소원 성취하겠다는 마음은 예배드리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알 수 있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해야합니다. 이것이 예배드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나의 의견과 마음의 소원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 바치는 제사행위였습니다. 제사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사 우리는 이미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만나실 때에는 제사를 통하여 만나고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제사를 통하여 나아갑니다. 제사 드릴 때 첫째 제물이 온전해야 합니다. 흠이 있어서는 안되고 부분을 드려서도 안되고 전체를 드려야하고 건강한 것을 드려야 하고 최상의 것을 드려야합니다. 우리 생애의 일부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생을 모두 드려야하고 전체를 드리는 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둘째 제물은 깨끗하고 정성이 담겨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올 때에는 의복에서 마음까지 다 깨끗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올 때 자세가 분명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양이 문제가 아니고 질이 문제입니다. 구약에 보면 부유한 사람은 소를 제물로 드리고 좀 못한 사람은 양을 드리고 그보다 못한 사람은 양의 새끼를 드리고 그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드렸습니다. 자기의 수준에 맞게 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오늘 본문 4장에 보면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이 드린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이 드린 제사는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한 일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가인의 제사는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어떤 학자는 가인은 성격이 악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제사의 차이는 아벨은 피 흘리는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피는 생명이므로 피를 흘렸다는 것은 생명을 죽였다는 것이고 피를 드렸다는 것은 생명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신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벨은 제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죄를 범한 자기 생명을 죽여 바치는 마음으로 짐승을 죽여 바쳤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가 더 나은 제사이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제사에 대한 평가 기준은 제물의 성격과 많고 적음에 앞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믿음에 있습니다.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고 가인은 믿음이 없이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레위기 10장 1절 2절에 보면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하나님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하나님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하나님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죽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예배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예배에 달려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이교도의 사원과 예배당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이교도인 팜프스와 예수를 믿는 키루스가 사원과 예배당에 가는데 팜프스는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제물을 바칠 짐승을 가지고 가고 예수 믿는 키루스는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예배당에 갑니다. 팜프스가 키루스에게 묻기를 야, 너는 예배드리러 가면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느냐 나는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예배드리러 간다. 그런데 너의 손에는 왜 아무것도 없느냐 그러자 예수 믿는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다른 어떤 제물이 아니라 바로 가장 귀한 ‘나 자신이다’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물질이 아니고 짐승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거룩하게 살아있는 채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집사가 퀘이커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다들 기도만 하고 있고 예배가 시작되지 않아 옆에 있는 교인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예배를 시작합니까? 그 교인이 당신이 예배당을 나가는 순간부터 예배가 시작됩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성도는 공장 작업대가 예배실이고 마트를 운영하는 교인은 마트의 계산대가 예배실이고, 사무 보는 사람은 사무실이 예배실이고, 부엌에서 일하는 주부는 부엌의 조리대가 예배실이고, 의사는 진료실이 예배실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그 자리 내가 일하고 있는 그 자리 내가 만지고 있는 그 물건 그것들이 삶의 자리가 예배를 드리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는 말은 구체적인 생활을 말하고 우리의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생활을 가리킵니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할 것 없이 전체를 다 모아서 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한 것은 늘 감사하고 늘 찬송하고 늘 새롭게 헌신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 죽어지는 시간이고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은혜 안에서 생명을 다시 찾는 시간입니다. 생명의 약속을 재확인 받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살아가는 삶이 예배입니다.

곽선희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부흥회가 끝나는 시간에 어느 집사님의 부인이 이불을 들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 집사님은 교회에서는 천사 같은데 집에만 오면 사람이 달라지니 아예 교회에서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이불을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생활과 교회 밖에서의 생활이 일치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활 전체로 기도해야합니다. 생활 자체가 다 기도이어야 영적 예배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합리적 예배자로 살아야합니다.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로마서 12장 2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별 할 수 있어야합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할 때 그 사랑하는 사람의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면 우선 그 사람의 식성이나 성향이나 취향도 다 알아야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자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장 2절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헬라원문으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엉뚱하게도 열심히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보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을 더 많이 합니다. 선한 일을 할 때도 정말 누구를 더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는지 구별이 안될 때가 많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나 불쌍한 사람을 도울 때 내 기분을 위해서 즉 즐기기 위해서 하는 도덕적 향락주의에 빠지는 위험도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을 영어성경에는 유행을 따라가지 말라고 했고 변화를 받으라는 말은 다른 방향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헬라원문의 뜻을 본받지 말라는 말은 형식을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말이나 행동이나 모든 면에 있어서 이 세대에 대해서는 항상 역설적으로 살아야합니다. 열심히 유행을 따르다 보면 자연히 문제가 생기게 되고 신앙생활에 유혹을 받기가 쉽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관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있으므로 오직 예배드리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항상 찬송과 감사만이 있을 뿐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나의 주 하나님 아버지, 온전한 예배에 어울리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고, 예배에 성공한 삶을 살게 하소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더 깊은 헌신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게 하소서. 예배가 진정 나의 기쁨과 의미가 되게 하시고 늘 결단과 새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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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3 창세기 아담의 후손들 창5:1-32  한태완 목사  2011-03-17 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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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1 창세기 사단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 창3:1-24  한태완 목사  2011-03-16 2553
4910 출애굽기 메뚜기 재앙의 교훈 출10:1-20  김필곤 목사  2011-03-15 3468
4909 출애굽기 우박 재앙이 주는 교훈 출9:13-35  김필곤 목사  2011-03-15 2310
4908 출애굽기 독종 재앙의 교훈 출9:8-12  김필곤 목사  2011-03-15 2453
4907 출애굽기 악질 재앙의 교훈 출9:1-7  김필곤 목사  2011-03-15 2265
4906 출애굽기 파리 재앙의 교훈 출8:20-32  김필곤 목사  2011-03-15 2606
4905 출애굽기 이 재앙의 교훈 출8:16-19  김필곤 목사  2011-03-15 2308
4904 출애굽기 개구리 재앙의 교훈 출8:1-15  김필곤 목사  2011-03-15 2475
4903 마가복음 부활의 소망으로 일어섭시다. 막16:1-13  김필곤 목사  2011-03-15 2818
4902 마가복음 흔들리지 않고 걷는 십자가의 길 막15:16-32  김필곤 목사  2011-03-15 3338
4901 마가복음 바른 판단을 하려면... 막15:1-15  김필곤 목사  2011-03-15 2169
4900 마가복음 실패를 통해 배우는 교훈 막14:66-72  김필곤 목사  2011-03-15 2451
4899 마가복음 결정적 순간에 가져야할 신앙인의 태도 막14:43-52  김필곤 목사  2011-03-15 3249
4898 마가복음 큰 일이 앞에 있으면(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막14:32-42  김필곤 목사  2011-03-15 2908
4897 마가복음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는 예수님 막14:27-31  김필곤 목사  2011-03-15 3429
4896 마가복음 영원히 사는 음식 막14:22-26  김필곤 목사  2011-03-15 2436
4895 마가복음 주신 은혜를 복되게 하려면 막14:17-21  김필곤 목사  2011-03-15 2653
4894 마가복음 준비케 하시는 예수님 막14:12-16  김필곤 목사  2011-03-15 2275
4893 이사야 성벽 위의 파수꾼(파수꾼의 사명) 사62:6-12  김필곤 목사  2011-03-15 2962
4892 이사야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62:1-5  김필곤 목사  2011-03-15 2362
4891 이사야 더 좋은 내일을 기대하는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 사61:4-11  김필곤 목사  2011-03-15 2008
4890 이사야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사60:15-22  김필곤 목사  2011-03-15 2065
4889 출애굽기 섬기고 의지해야 할 하나님 출7:14-25  김필곤 목사  2011-03-15 2055
4888 마태복음 성탄의 기쁨 마2:1-12  김필곤 목사  2011-03-15 3571
4887 출애굽기 계속 거절당할 때 출7:1-7  김필곤 목사  2011-03-15 2143
4886 출애굽기 침체에서 비상하기 출6:1-9  김필곤 목사  2011-03-15 2255
4885 출애굽기 좋은 일 하다가 비난이 다가오면 출5:4-9  김필곤 목사  2011-03-15 2242
4884 출애굽기 예배의 자유를 위한 부르심 출5:1-3  김필곤 목사  2011-03-15 2057
4883 역대하 위기 앞에서 감사 대하20:20-26  김필곤 목사  2011-03-15 2559
4882 출애굽기 앞서 준비하시는 하나님 출4:26-31  김필곤 목사  2011-03-15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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