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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9: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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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무지개 언약과 노아의 실수
본문: 창9: 1- 29
뉴질랜드만큼 무지개를 자주 볼 수 있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비만 왔다하면 거의 무지개가 뜹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주 봐도 질리지가 않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무지개가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홍수 이후 하나님과 인간은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이후에 인간과 새로운 생명의 언약을 맺으며 언약의 증표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홍수 이후에 인간은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으며 산뜻한 새 출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또 다시 실패하고야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서글픈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에게 새로운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모든 축복을 아끼지 않고 베풀어 주셨으며, 약속의 증표로 무지개라는 매체까지 주셨습니다. 무지개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며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었듯이 무지개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실패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노아의 부패한 심성은 그로 하여금 실패와 좌절로 치닫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쏟아지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연약하여 넘어지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심히도 부패하고 부족하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그런 연약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시119;49)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면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우주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수하게 많은 혜성들과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혜성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그러한 혜성들이 지구나 다른 별들에 충돌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목성을 비롯한 행성들에 있는 많은 자국들은 혜성이 충돌해서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지구에도 그러한 자국이 150개 이상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은 과거에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앞으로 지구에 혜성이 충돌한다면 지구는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앞으로 한 달 후에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습니다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을 것을 사서 집에 쌓아두고 그것을 먹으면서 죽음을 기다릴 것입니다. 멸망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에 절망에 빠져 울부짖으며 공포에 떨면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 무지개 언약
여러분은 무지개 보셨지요. 무지개는 꿈과 희망의 상징입니다. 어렸을 때 무지개를 보면서 그쪽으로 뛰어가 본 경험이 있습니까? 성경은 무지개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홍수로 땅의 모든 것이 죽은 뒤에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때 하나님이 다시는 땅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시는데 무지개가 하늘에 걸립니다. 그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물로 세상이 다 멸망당했습니다. 물이 휩쓸고 가고 난 뒤의 광경을 어떨까요. 물이 빠지고 난 땅은 참담하고 처참합니다. 노아의 가족들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막막했을 겁니다.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에 걱정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무지개가 뜹니다. 하늘 전체에 걸리도록 쫙 펼쳐집니다. 그때 쌍무지개가 떴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지개가 하나님 것이라는 기록입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무지개는 꿈, 목표, 비전의 상징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그것을 가지려면 하나님과 가까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죄를 보고 벌을 주십니다. 하지만 벌주면서 꼭 하시는 게 있습니다. 위로와 격려입니다. “힘내. 이제는 괜찮아. 잘 살 수 있어!” 벌을 주시지만 미래의 꿈도 약속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벌을 받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추방되는 벌을 받지만 하나님은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 표를 주십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못할 때 혼을 내지만 그 후에 자녀를 격려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확신하고 실수하고 실패했더라도 다시 힘을 내어 사시기를 바랍니다.
(1)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
본문 1- 7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땅의 모든 짐승과 땅에 모든 기는 것과 공중의 모든 새와 바다의 모든 물고기를 붙이셨습니다.(2절) 그리고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 것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고귀함과 존엄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를 먹는 것을 허용하면서 피째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4절) 이는 피를 쉽게 흘리고 먹는 악한 습관을 방지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모든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피와 생명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피는 속죄의 방편으로써 사용되는 실물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거룩한 의미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2) 안심하라.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땅이 무섭게 폐허가 되어버린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난 여름 폭우로 동해안에는 많은 논과 밭이 완전히 자갈과 모래로 덮여버렸습니다. 지금도 그런 곳을 볼 수 있는데,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무서웠겠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홍수심판으로 온 세상이 그러한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철저하게 황폐되어 버렸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막막함과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노아가 두려워하고 불안해 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노아는 홍수심판으로 세상이 완전히 멸망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견고하게 서있던 산들이 가라앉아 버리고, 안전할 것 같던 땅이 꺼져버렸습니다.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바닷물이 밀려들어와 온 땅을 덮어버렸습니다. 하늘에 있던 물이 한꺼번에 몽땅 쏟아져 내렸습니다. 홍수심판은 단순히 비가 많이 와서 세상이 물에 잠긴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중단되어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고 노아가 깨달은 것은 세상이 안전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산이 또 언제 가라앉고 땅이 또 언제 꺼져 버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또 언제 바닷물이 밀고 들어와 온 세상을 덮어버릴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늘의 엄청난 물들이 또 언제 한꺼번에 쏟아져 내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빗방울이 떨어지면 다시 홍수가 일어나 세상을 쓸어버리지 않을까 불안하고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천둥이라도 치는 날이면 금방이라도 세상이 다시 멸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를 찾아오셔서 이 두려움과 불안감을 씻어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11절)
(3) 두려워 말라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이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이것이 심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립니다. 사람들은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해서 진찰을 받게 되면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자녀들 입시를 앞두고는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큰 어려움을 당하면 두렵고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 두려움과 불안감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유일한 해결책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우리를 안심시키시기 위해서 많은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면 안심할 수 있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오늘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담대하고 평안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언약
황폐한 세상에서 새 삶을 시작하면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노아를 안심시키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 언약을 '노아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창9:8-11)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은 매우 강하고 견고한 계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언약'이라는 말은 칼로 자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언약을 맺을 때 짐승을 죽여서 반으로 쪼개어 양쪽으로 벌여놓고 언약의 두 당사자가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그 언약을 어기는 자는 이 짐승처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구약에는 이러한 언약이 많이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그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2-3)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확실히 하시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짐승을 잡아 둘로 쪼개어 양쪽으로 벌여놓고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캄캄한 밤에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15:17-18)
그 타는 횃불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반드시 지키실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걸고 맹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은 절대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도 언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언약은 역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 즉 홍수로 세상이 망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언약을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한 번 말씀하시면 그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굳이 언약이 필요하겠습니까? 이것은 순전히 노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그냥 말만 가지고는 잘 믿지를 못합니다. 뭔가 확실한 장치가 있어야만 안심을 하지요. 예를 들면, 남의 집을 세로 얻어 살 때 반드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언제까지 살아도 좋다고 해놓고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당장 집을 비우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약서를 작성하면 안심하고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언약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말씀만 하셔서는 지키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노아를 안심시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언약을 주셨기 때문에 노아는 이제부터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앞으로는 세상이 홍수로 멸망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것은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고 안심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5) 언약의 증거 - 무지개
노아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 언약의 증표로 무지개를 주신 것으로 더욱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창9:12-17)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언약의 증거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무지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비가 온 후에 하늘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무지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을 보여줍니다. 이제 장마철이 되었습니다. 무서운 폭우가 쏟아지고 세상이 온통 물바다가 되어버릴 것만 같을 때도 있습니다. 앞으로 비가 몇 mm만 더 오면 한강이 범람할 것이라는 다급한 뉴스를 들을 때 우리는 두렵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햇볕이 나면서 하늘에는 어김없이 무지개가 나타납니다. 그 무지개를 볼 때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면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비가 와서 세상이 멸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지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무지개가 있는 한 세상은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세상이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이상 기온이 심해져도 세상이 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해가 심해져서 대기와 수질 오염이 심각해진다 해도 세상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과 러시아가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가 지구를 몇 번이나 멸망시킬 수 있는 양이라 해도 지구는 그렇게 멸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무지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존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는 세상이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지개가 그것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6)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무지개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주어집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무지개를 보고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주십니다. 이렇게 주시는 은혜를 일반은총이라고 합니다. 일반은총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에게나 동일하게 햇볕을 비춰주십니다. 비와 공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족과 건강과 직장과 이성과 지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내려주십니다. 이러한 일반은총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지도,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만 이러한 은혜를 주신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믿음이라야 진정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렇게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늘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며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전적으로 그 은혜를 힘입어서 살아왔습니다. 진정으로 뜨겁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무지개를 보고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낭만적인 감상에 젖거나 신기해할 따름이지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지각이 둔해져서 이러한 하나님의 일반은총만으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반은총 외에 특별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특별은총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감화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셨고 믿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먼저 말씀을 듣고 믿은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들도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신 특별은총까지 받은 자들입니다. 더욱 감사하면서 복음 전하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7) 언약의 증거 - 십자가
노아는 구름 사이에 나타난 무지개를 보고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절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의 증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무지개보다 훨씬 크고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노아 언약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영원히 보존하시겠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죄가 가득 차면 다시 심판이 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불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7) 마지막 불심판은 홍수심판보다 더 철저하고 무서운 심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언약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지개가 있다고 해서 세상이 영원히 보존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증거인 십자가는 영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마지막 불심판이 와도 결코 멸망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역경과 시험도 성도를 망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며,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가 풀리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되고 안심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나타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안심하며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름이 되면 더워서 힘들고 지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방학이 있고 휴가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에도 방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이제 좀 쉬어도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방학을 선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8월까지는 가정교회도 좀 쉬고, 큐티와 새벽기도와 심야기도회도 쉬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영적으로 침체되고 넘어지게 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방학도 없고 휴가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신앙생활 열심히 했다고 해서 방심하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즉시 틈을 타서 공격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던 믿음의 사람 노아, 홍수심판을 이겨낸 노아가 방심하여 넘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긴장을 풀어서는 안됩니다. 여름은 신앙의 방학이나 휴가를 가지는 계절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말씀과 성령 안에서 힘을 다해 봉사해야 하는 계절입니다. 여름을 시험에 빠지는 계절로 삼지 마시고 영적으로 더욱 무장하고 성장하고 충성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2. 노아의 실수
노아는 대홍수 후에 농사하는 일로 정착되었고 첫 농사로 포도를 수확했습니다. 노아는 여기까지는 의로웠습니다. 노아가 자기가 경작한 열매를 먹는 것도 문제될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제하지 못해서 지나치게 포도주를 마심으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어찌 보면 나이 많은 노인네가 어쩌다가 맛있는 포도주를 계속 마시다가 의식을 잃고 입에 담기가 민망한 수치를 당했습니다. 노아의 일반적인 성품으로 보면 실수는 부주의요 방심정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본문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나이나 성품도 시험의 때에 자신을 보호하는 안전장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거의 500년동안 깨끗하고 순결하고 의롭게 산 노아가 그토록 수치를 당할지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술 취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술이 죄라든지 술이 악이라든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술은 자기 통제능력을 잃어버리고 죄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며 무엇 때문에 경건한 삶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모든 악에서 우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파수꾼이 깨어 있는 군대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만이 자신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 성경은 어느 인간을 영웅으로 만들어 예찬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세상의 영웅전기라면 그의 공적생애뿐 아니라 그의 사생활까지 미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철저하게 인간의 내면의 죄와 실수까지 기록해서 하나님만이 참되시며 인간은 모두가 허물과 죄로 별 수 없이 죽었고, 하나님만이 구원자인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진리이며 성경계시만이 하나님은 누구시며 인간과 구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계시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 본문의 메시지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은 축복을 받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실수와 범죄는 노아가 했는데 느닷없이 불똥은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떨어진 것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서 벌거벗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자기 집에서 입든지 벗든지 자유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본문의 내용은, 술을 과음해서 옷을 다 벗고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민망한 장면을 보였습니다.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시면 부끄러움을 모르게 됩니다. 일단 술에 취하면 윤리니 도덕이니 경건이니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게 됩니다. 사실 노아에게는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온 신앙의 여정으로 보나 경건한 신앙생활로 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 보기에도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토록 방주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그대로 보인 것이 되었습니다. 노아는 그의 신체의 수치스런 부분만 드러낸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마음속에 있는 수치를 드러낸 것입니다.
(1) 방심한 노아
홍수 심판이 끝나고 처음 방주에서 나왔을 때 노아는 세상이 완전히 황폐된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또 홍수가 터져서 세상이 다시 멸망을 당하지 않을까 두렵고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노아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세상을 물로 멸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증거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맹수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여 공격하지 못하게 하셨으며, 사람에게 육식을 허용해주셨습니다. 또 사람을 죽이는 동물이나 사람은 반드시 죽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노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홍수심판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동안 노아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삶은 안정되었습니다. 비가 와도 하늘에 무지개가 나타나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농사도 잘되고 아들들도 자녀들을 낳으며 문제없이 잘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안정되고 평안해지자 노아는 점점 긴장이 풀리고 방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2) 노아의 실패
노아는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만들었는데, 어느 날 노아는 포도주를 너무 마셔서 심하게 취하게 되었습니다. 술에 취한 노아는 옷을 다 벗어버렸습니다. 술에 취하면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이 많아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곯아떨어집니다. 술에 취하기만 하면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술에 취하면 노아처럼 옷을 벗는 사람들도 있습니까? 노아의 경우는 술에 취해서 나타난 단순한 술버릇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왜 옷을 다 벗어버렸을까요?
술에 취한 노아는 추하고 죄악된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물론 노아가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포도주를 한 번 맛보기만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심한 노아는 포도주를 맛보는 순간 절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술에 취해 부끄럽고 죄악된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요, 심판을 이긴 자요, 두 번째 인류의 시조였던 경건한 의인 노아는 이렇게 해서 초라하고 수치스러운 죄인의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수치스런 모습을 보고 조롱하며 정죄했으며, 하나님의 종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노아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방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방심하면 넘어지게 됩니다. 그래도 이번 여름에 신앙생활의 방학을 가져야겠다고 고집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방심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도 노아처럼 실패하게 됩니다. 신앙의 긴장을 풀지 말고 항상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함의 행동
노아가 술에 취해서 벌거벗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은 둘째 아들 함이었습니다.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고하니"(22절)
함이 아비의 하체를 보았다는 것은 그냥 우연히 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생각이나 의도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상상하면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어떤 성적인 연상을 하면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은 이런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장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짧은 치마를 입고, 속이 비치거나 드러나는 옷을 입고 다닙니다. 성적인 매력을 강조하고 과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섹시하다고 하면서 선망하고 추구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현대인들은 여자나 남자를 보고 속으로 음욕을 품고 즐기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거나 나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정죄하셨습니다.
함이 벌거벗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는 우연히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민망해서 얼른 아버지를 이불이나 옷으로 덮어드리고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벌거벗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정욕적이고 부끄러운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서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서 아버지를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함은 자신의 내면에서 부끄러운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숨기고 오히려 아버지를 비난하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항상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때로 부끄러운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회개하면서 거룩하고 정결한 마음을 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속으로 이런 죄악된 것들을 즐기면서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한 모습입니까? 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4) 셈과 야벳의 행동
함으로부터 아버지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있다는 말은 들은 셈과 야벳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아버지가 실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여전히 존경하고 아버지의 실수를 덮어드리고자 했습니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창9:23)
이들은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으려고 일부러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버지의 추한 모습은 잊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여전히 경건하고 의로운 분으로, 하나님의 종이요 선지자로 기억하기 원했습니다. 셈과 야벳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의 실수로 인하여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함의 태도와는 얼마나 다릅니까?
함은 아버지의 실수를 보고 마음속으로 범죄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부끄럽고 악한 생각 품은 것을 회개하지 않고 그것을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아버지를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실수를 핑계로 하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우리는 함의 후손인 가나안 족속들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극도로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5) 믿음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핑계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단한 사람들을 간혹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떠난 이유는 대개 비슷합니다. 목사에게 실망을 했다든지, 장로나 집사 때문에 시험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교회 나가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안타깝고 그렇게 만든 그리스도인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교회나 다른 사람들에게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만일 형제 중에 하나가 자기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합시다. 그런 경우에는 그 형제를 낳은 부모님과 관계를 끊어야 할까요? 우리는 교회나 다른 성도들의 실수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이 얼마나 모순된 핑계에 불과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가 온전치 못하다거나 믿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이유가 될 수가 있습니까? 진짜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고 그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떠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핑계거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실수를 비난하면서 그것을 핑계로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이 문제를 정확히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핑계는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통할 수 없습니다.
오늘 형제의 실수를 볼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 정도의 죄와 잘못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형제가 실수를 했을 때 자기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를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은 정말 악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악하고 추한 생각을 내놓고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의 실수를 덮어주어야 합니다. 형제가 실수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여전히 사랑하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가장이나 목사가 실수했다 하더라도 그를 위해서 더욱 기도하며 여전히 사랑하고 존경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성도는 남의 실수 때문에 시험에 들거나 범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형제가 실수했을 때 먼저 자신을 살피고 내 안에 있는 악한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형제의 실수를 덮어주며 여전히 형제를 사랑하는 성숙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6) 노아의 예언
본문은 이런 일이 있은 후 노아가 자녀들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9:24-27)
이 말씀은 마치 노아가 술에서 깨어난 후 둘째 아들 함이 한 행동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저주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괜히 자기가 실수해놓고 자식을 저주하는 아주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부당한 저주가 이루어지게 하실까요? 이 말씀은 노아가 술에 취해 실수한 것과는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노아는 지금 선지자요 설교자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에 그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오해를 하기 좋게 된 것입니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이것은 괘씸한 아들에게 복수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언이요 설교요 경고였습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은 성에 대해서 지나치게 호기심이 많고 문란한 성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함의 경우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나안을 보고 노아는 경고를 했던 것입니다. "네가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살면 너는 망하게 될 것이다."
가나안이 노아의 설교를 잘 받아들였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은 할아버지의 예언을 무시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 맘껏 죄를 지으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노아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던 당시에 가나안 족속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으며, 특히 성적으로 매우 문란하고 타락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노아는 셈과 야벳을 축복했습니다.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9:26-27)
노아는 셈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과 계획을 깨닫게 되자 먼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셈의 계통을 통하여 택한 족속을 보존하시고 메시아를 보내셨습니다. 셈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고 있습니다. "셈의 하나님!" 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축복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에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으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기뻐하시겠습니까? 막내 아들 야벳은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살게 될 것이며, 셈의 장막에 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영적인 방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아무리 덥고 휴가철이 온다 해도 신앙생활의 방학을 계획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방심하게 되면 반드시 넘어지게 됩니다. 항상 깨어 기도하며 말씀에 굳게 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넘어진 것을 보거든 자신을 돌아보고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형제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시기를 기뻐하실 만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홍수가 끝났습니다. 노아는 포도농사를 지었습니다. 술이 과했습니다. 술에 취해서 옷을 벗은 지, 입은 지도 모르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의 둘째 아들 함이 이를 보고 그의 형과 동생에게 소문냈습니다. 그는 이 일을 감쪽같이 처리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어디 소문 낼 사건입니까? 그게 어디 가문의 영광입니까? 그래서 그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지혜롭게 아버지의 수치를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세상 살다 보면 남의 약점, 허물이 너무 크게 잘 보입니다. 이것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요즈음은 인터넷이라는 정보수단이 있습니다. 여기 올리면 세상 사람이 다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약점과 허물과 죄를 덮어주고 사랑하고 용서합시다. 못볼 것을 보고 못들을 말을 들었다고 동네방네로 돌아다니면서 말을 일으키고 그것을 확대 해석해서 부풀려 말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셈과 야벳의 태도에서 보듯이 아비의 실수와 부끄럼을 조용히 덮어주어야 합니다. 부부간에, 부모와 자녀간에, 동료끼리, 성도끼리 허물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심판주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심판하시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만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남의 허물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한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서 자자손손 불행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아비의 허물을 덮어준 셈은 종교적인 민족, 하나님의 계시의 수호자로 축복을 받았고, 야벳은 땅 위에서 물질의 축복을 한없이 받았습니다. 노아의 실수와 죄에도 불구하고 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그 자손들을 통해서 여전히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의 허물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리워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항상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인격을 존중해야합니다. 평가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옆 사람과 협력해서 같이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셈과 야벳 형제는 뒷걸음질하여 아버지의 옷으로 허물을 가려주었습니다. 아주 작은 일인데도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우리도 주 안에서 승리합시다. 저와 여러분도 작은 일에 충성하여 천국 잔치에 참예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의 하나님, 만물을 생동케 하시는 위대하신 능력과 은혜로 우리에게 귀한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비전을 따라 살게 하옵소서. 오늘도 아버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소서. 가정과 학교, 직장과 사회에서 하는 일들을 통해 귀한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실망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섭리를 기대하며 인내하고 승리하게 하소서.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어둠의 영이 사라지게 하소서. 미신과 우상숭배,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 사상과 사탄의 더러운 영들을 물리쳐 주소서.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시고 절망과 혼란에 빠진 심령들 속에 생명의 역사를 이뤄주소서.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며 매사에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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