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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한 세가지 금은 황금, 소금, 지금 이라고 한다. 나도 좋아하는 세가지 금이 있다. 현금, 지금, 입금 이다 ㅋㅋㅋ(햇볕같은이야기 사역 후원 클릭!) |
사장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어느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이 부동산에 볼일이 있어서 갔습니다. 집 매매 문제로 상담을 하고 있는데 멀쑥하게 차려입은 중년 신사 한 분이 문을 열고 들어 왔습니다. 주인은 그 신사를 보더니 상담하는 손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사장 목사님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집사님은 자신이 교인이므로 "사장 목사님"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니 목사님이면 목사님이었지 어떻게 그 앞에 사업을 하는 사장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장 목사님이 부동산 랜드를 떠난 후 집사님은 부동산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아 그런 것 있어요, 신경쓰지 마세요." 그래도 집사님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부르십니까? 그리고 그렇게 부르는데도 왜 그 목사님은 웃으면서 무안해 하지 않습니까?" 부동산 주인은 왜 자신이 그렇게 목사님을 부르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시내 모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라고 했습니다. 꽤 많은 성도가 나오는데 부동산을 이곳 저곳에 많이 사놓았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부자들 보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어 매매 관계로 자주 자기네 부동산에 들리는 단골 손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이목도 있고 해서 그저 부르기 좋게 사장님이라고 불렀는데 실수하여 오늘은 '사장 목사님'이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사장"과 "목사"라는 말은 잘 어울리지 않는 말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그리 썩 안어울리는 말도 아닌 것 같습니다. 농경 사회가 아닌 도시에서는 한 지역에 여러 교회가 세워질 수밖에 없고 목회자들은 목회적 성공을 지향
하게 됩니다. 물론 성공이라는 것이 꼭 물량적인 것만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양적 성장이 곧 성공이라는 도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공식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량적 성공에 촛점을 맞추다보면 종교에 자연스럽게 사업이라는 단어가 수식되어 지고 사업의 원리가 스며들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정당한 사업의 원리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겠지만 도덕성을 잃어버린 사업의 원리로 성장을 시키고 그 후 물량적 성장이 모든 과정을 정당화시켜 버립니다. 그러므로 종교성이나 목사의 도덕성 보다 사업가적 기질이 있는 목회자일수록 성도를 많이 모으고 교회를 크게 확장시키게 됩니다. 물론 그 원리가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인을 수천, 수만명씩 한 교회에 모이게 하는데는 도덕성보다는 사업성이 더 우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단순한 예로 기독교의 대표적인 윤리인 사랑의 실천을 적용해 본다면 쉽게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기독교의 윤리적 가르침입니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는 것이 기독교의 윤리입니다. 이 윤리를 실천한다면 옆에 10여명의 교인과 굶주리며 고난 가운데 생계 때문에 염려하는 목회자가 있는데 단순히 그 목회자의 무능력을 탓하며 자신은 전속 기사를 두고 재벌 총수처럼 부족함 없이 살아가면서도 대형 차량을 동원하여 그 동네 교회 식구까지 수송해 간다면 어찌 하늘이 웃지 않겠습니까? 사업적 기질을 가지고 목회의 성공을 이루어 나가는 목회자들의 모습은 겉으로는 잘 포장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사업적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진짜보다도 더 진짜같이 위장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그들은 설교를 하는데도 비서를 두고 합니다.
그리고 지나간 설교들을 책으로 만들어 교회 출판사에 모든 경제적 부담을 주고 종교적 거래를 위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증정을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신변잡기 같은 글을 모아 교인들에게 강매를 합니다. 물론 종교적으로 타당한 명분을 붙입니다. 선교을 위한다거나 장학 사업을 위한다거나 뭐 그런 것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사업적 명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를 압니다. 그래서 종교적 명분을 세울 만한 곳에는 과감히 투자를 합니다. 그 투자는 기독교적 윤리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사업을 위하여 투자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구제를 하고 장학사업을 하는 등 겉으로 보기에는 기독교적 윤리를 실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기는 오직 성장을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결국 내면 깊숙이 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명예욕, 출세욕이 꿈틀거릴 뿐입니다. 자동차를 팔기 위하여 텔레비젼에 그 자동차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종교적 사업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교회를 선전하는 선전술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다른 교회에 가서 구제에 대하여 헌신에 대하여 강단에 올라가 불같이 외칠 줄도 압니다. 그러나 돌아갈 때는 최고급 승용차를 끌고 전속 기사가 모시러 오고 그의 안주머니는 두둑한 수표로 채워집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 말씀을 들은 그 어떤 교인들보다 더 호화로운 주택에 들어가 편안한 잠을 잡니다. 그들이 사무를 보는 당회장 실은 웬만한 재벌 총수의 방보다 호화롭고 필요한 것이면 마음대로 꾸밉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청빈하게 꾸미기도 합니다. 그들은 결코 손수 운전을 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교회 운영방식은 하나님을 앞세워 초 독재를 지향합니다. 인사권과 재정권을 한 손에 쥐고 마음대로 사람을 돈을 쓰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비유를 거슬리면 그 직위를 박탈해 버립니다. 그들은 자신의 비도덕성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하여 물질에 영안이 흐려진 교수나 유명인을 청빙하여 자신의 나팔수로 사용합니다. 어떤 때는 악덕 기업주보다 더 윤리성이 없는데도 그들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 말고는 그들의 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종교와 윤리로 위장합니다. 좋은 말을 합니다. 목소리도 잘 가꿉니다. 늘 웃음이 있습니다. 열심도 남다릅니다. 그러나 실상은 회칠한 무덤일 뿐입니다. 목사는 사장이 아닙니다. 결코 목사 앞에 사장을 부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도 바울도 수 천명, 수 만명의 교인을 거느리고 부족함없이 노후보장 받으며 사장 목사님 행세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장 목사는 교인을 위해 죽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교인을 이용하여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 교인을 이용하여 출세하고 예수님 팔아 잘 먹고 잘 사는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근본적으로 생명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1-12)".●980215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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