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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515:1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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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중표 목사 |
참고 : | 한신교회 |
2000년 5월 7일(2부)
그 아버지와 그 아들
누가복음 15:18-23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은 엄청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역사 속에 대리자로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로 부름을 받는 것 자체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버지가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직장생활 하는 것도 어렵고 재능을 가지고 일을 성취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곧 하나님의 성품을 지녀야 되고 또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자녀에게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역사 속에서 인류를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면 자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바로 부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님을 닮고 있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됩니다.
최근에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런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 이 운동은 전 세계적인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960년대 이후에 남성들이 산업 사회에 몰입하면서 가정에서 아버지들이 자녀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잃어버리고 저들의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가정에서는 아버지 없는 가정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여자들의 자연히 커지게 되고 남편들은 가정에서 그 권위를 서서히 상실해 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남성들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졌습니다. 그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므로 말미암아 사회 전반에 걸쳐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전 세계 10대 청소년들의 범죄와, 폭력과, 사생아의 출생률, 낙태율, 10대 자살의 증가 등 겉잡을 수 없는 사회 문제로 온 세계는 기초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권위가 상실되면서 이 역사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 아버지가 제 위치에 돌아와야 한다.’는 부르짖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쓰여진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세상을 다 돌볼 수 없어서 이 땅에 아버지를 두기로 작정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삽니다.
미국 텍사스의 크리스토퍼 베이컨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국의 아버지들이 가정에서 제 권위를 회복하는 날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계의 굶주림을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몇 몇 가정들이 절대 빈곤 이하로 침몰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동 지역의 평화는 가져오지 못한다 할지라도 거리의 갱단 소굴에서 자녀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인구 폭발을 완화시킬 수는 없을지라도 10대 임신모는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제 위치를 찾을 때 10대 범죄율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의 위기는 곧 아버지의 위기입니다.
오늘날 아버지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과거의 아버지들이 가졌던 권위를 감지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존재가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권위와 자신감을 상실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은 곧 가정을 살리는 것이며, 역사를 살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이삭과 야곱, 야곱과 그의 아들들, 다윗과 그의 아들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아버지와 아들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를 우리에게 설명해 준 하나의 사례가 누가복음에 나온 탕자와 그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내용도 되지만 가정 사역자들이 보는 시각은 아버지의 가장 아름다운 상, 또 다른 말로 말하면 위기에 처한 청소년들을 아버지가 어떻게 치유해주며 따뜻한 사랑으로 안아줄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전부 질 수는 없습니다. 불량한 아버지 안에서 성자같은 자식이 나오는 수도 있습니다. 성자같은 아버지에게서 불량한 자식이 나와서 평생 그 아버지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남편은 인자하고 자비로운데 악덕한 아내를 만나서 평생 시달리는 남편도 있습니다. 어떤 아내는 불량배 같은 남편을 만나 그 남편을 성녀처럼 받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런 면에서 획일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많은 면에서 자녀들이 아버지를 닮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녀들로부터 아버지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하늘의 사람으로 그 앞에 나타나 주어야 된다는 사실을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요청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의 몫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 아들은 그것을 가지고 먼 곳으로 가서 창기와 더불어 먹고 마시고 술 취하고 방탕해서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돼지 치는 집에 들어가서 돼지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배를 채우려고 하나 그것도 채울 수 없는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배고파 견딜 수 없고 영양실조에 걸려 견딜 수 없어서 ‘내가 아버지 집에 가야 되겠다. 아버지 집에 가면 얼마나 먹을 것이 많은가 품군이 많은가 내가 아들 노릇은 못하더라도 이 집의 품군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해야지’ 하고 그는 아버지 집에 돌아옵니다.
한편 아버지는 자나깨나 그 아들을 기다리다가 멀리서 걸어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상거가 먼데 달려가서 입을 맞추고 껴안았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분명히 그는 아버지 앞에서 회개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듣기도 전에 측은히 여겨서 그를 얼싸안고 울면서 종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빨리 좋은 옷을 내다가 입혀라. 가락지를 끼워라.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라 우리 먹고 즐거워하자”
가출한 자식이 돌아온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는 아들을 믿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철저하게 아들을 믿어주고 있습니다. 이 아들이 어리기 때문에 재산을 관리할만한 자질이 없다는 것을 그 아버지는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에게 재산의 몫을 줍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너는 재산보다 더 큰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 자식에게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재산을 통해서 아들 됨을 알게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버려야만 아버지와의 관계가 정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 재산을 탐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재산을 잃어버려야만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재산을 안주고 있으면 아버지와 아들이 원수가 됩니다. 돈으로 아버지를 보고서는 관계가 정상화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재산을 다 잃어버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너는 이 재산을 잃어버려라 그리고 내 아들로 순수하게 돌아오라’ 이것이 아버지의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들을 믿어주는 아버지를 통해서 위대한 아버지 상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들을 내 기준에서 평가하고 나의 입장에서 성공을 생각하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는 교훈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들로서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만 아들을 아들되게 만들어주면 됩니다. 아들을 아들되게 만들어주는 아버지는 모든 재산을 다 그에게 주어서 그 재산을 잃어버리고서야 아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위대한 점이었습니다.
이북에서 피난 나와서 알뜰하게 재산을 모아 자수성가 한 권사님이 계십니다. 이 권사님은 큰 빌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있는 자식이 성장하면서 사업을 한다고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합니다. 몇 번 어머니가 안된다고 해도 빌딩이 있는 것을 아니까 막무가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할 수 없이 주었는데 사업이 잘못 되어서 빌딩이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그 자식이 하는 사업이 안될 것을 아셨습니까?” “예, 알았죠.” “그런데 왜 주셨습니까?” “주어야 합니다. 안주면 원수가 되니까요. 제가 망할 것을 알면서도 준 것은 망해서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봐야 이 자식이 효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 때문에 고생하시는구나! 청상에 과부되어 자수성가 해서 빌딩을 만들었는데 내가 망해서 나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고생하는구나!’ 이 때에야 비로소 이 자식은 어머니를 어머니로 아는 것입니다.
돈 많을 때는 돈 많은 과부로 알았습니다. 그 빌딩 여주인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돈을 빼앗아 가려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자식에게 빌딩을 다 팔아서까지 주어놓고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에게 이것을 주는 것은 부모와 아들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주는 것이다.’
저는 그 어머니를 보면서 참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마음은 하늘이 준 마음이었습니다. 돈 보고 따라 다니는 사람은 돈 떨어지면 다 떠난다는 사실을 탕자는 몰랐습니다. 돼지 회사에 가서 밥 얻어먹다가 그것도 안되니까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얻어먹는 인간 이하로 전락을 한 후에야 자기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의 품군으로 일하기 위해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드디어 아버지와 아들이 상봉을 하게 됩니다. 이때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만나는 것도 아니요, 아버지 집을 만나는 것도 아니요, 아버지 집의 먹을 것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로 위대한 분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자녀를 만날 때 순수한 아버지로 만나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부모입니다. 공부로 만나지 말고 순수한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로 만나십시오.
아이들이 10대가 되면 반항하고 때로는 집을 나가려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10대가 되니까 집을 나가서 며칠씩 안들어 오는 때도 있고 그래서 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목회는 끝났구나! 성스럽게 살려고 했던 일생이 자식 때문에 어려워지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훗날 주께서 이 종의 마음을 감동하시는 것은 “나는 탕자같은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을 버리고 땅에 와서 십자가 상에서 온갖 수난을 당하고 머리에 가시관 쓰고, 손과 발에 못박히고 창에 찔리는 아픔을 겪었다.” 이것이 바로 어버이 사랑이며 부모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함께 산다는 사실 한가지만으로 만족하는 데까지 자기 자신을 낮춰버리면 그때 마음에 평화가 오고 자유함이 옵니다. 그리고 그 자식을 껴안는 사랑이 분출합니다. 인간적으로 자기 자신의 위치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자식의 입장으로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고 할 때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둘째, 아버지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절). 이것이 사랑의 극치입니다. 돈 안들이고 최상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포옹입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축복할 때 안수 축복을 해야 됩니다. 목회하면서 안수 잘하는 목사의 교인들은 다 순합니다. 설교만 근사하게 하는 교인들은 드셉니다. 안수 목사에게서 안수 받은 장로는 그 목사에게 대드는 법이 없습니다. 안수 안받은 교인이 대듭니다. 안수 받고 자란 자식이 대드는 반역자가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3-24절).
이 아들이 살았지 죽은 일이 없거든요. 그런데 죽었다가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아들에 대한 하늘나라의 소망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21일)
재산을 잃어버리고 나아가 탕자처럼 되어서 얻은 것은 죄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깊은 신앙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잃었다가 얻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바로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정립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돌아오는 것에서 최후의 모든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이 아들이 성공해 돌아온다는 기쁨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부모에게 선물 사온다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영혼이 하나님의 아들로, 잃어버린 영혼이 하나님 앞에 회복된 그 기쁨을 여기에서 아버지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재산 잃어버리고 탕자가 되어서 돌아온 자식이 뭐 기뻐할 일이 있겠습니까 보통 부모 같으면 ‘이 자식아,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때부터 네 싹수가 노랗더라 재산 다 탕진하고 거지같이 창피하게 돌아왔냐 살짝 캄캄한 밤에나 돌아오지 환한 대낮에 돌아왔냐’ 이렇게 한마디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돌아온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잃었다가 얻었으며 죽었다가 산 아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먼훗날 우리는 하늘나라에 갈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 앞에 설 때 부자가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대리자로 이 자식을 주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할 때 “너는 분명히 내가 너에게 맡겨진 아버지 역할을 잘했노라. 칭찬을 받으라”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아버지는 아들에게 소망의 아버지 상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어린 자녀들을 땅에서 공부시키고 출세도 시켜야 되며 대학도 보내야 되고 이 아들이 잘 살도록 유산도 주어야 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잃어버렸던 아들을 찾고 죽었던 아들이 돌아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믿음과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늘나라에 가는 기쁨을 내 마음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 위에 서서 자기가 과연 아버지로서 좋은 아버지인가 한번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선언문이 최근에 이렇게 발표되었습니다.
아동기 자녀에게는 손을 잡고 무등을 태워주며 귀찮을 정도로 많은 사소한 질문에도 마치 웃어주면서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청소년 자녀에게는 최근 유행하는 노래를 같이 부르고 또 어머니 모르게 용돈을 주어 목욕탕에 가서 대화하고 숙제도 할 수 있는 어버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청년 자녀에게는 당당하게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기쁨과 울분을 함께 하면서 자신과 나라 미래를 예견하며 대화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장년 자녀에게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경험을 자녀와 회상하며 작은 일이라도 뜻을 합해 정의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노년 시대는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춤추며 노래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며 농익은 삶의 지혜를 나누는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늙어서는 천국을 생각하면서 하늘나라에 가서 함께 만나는 부자가 되자고 서로 하늘나라를 꿈꾸며 얘기하고 남은 모든 재산과, 생애를 선한 일에 써야 한다고 대화할 수 있는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부모가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이며 자랑이 될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제시한 가장 이상적인 아버지 상이 됩니다. 우리는 자녀를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의 모든 허물과 잘못을 끌어안고 용서하며 끝까지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천국에서 만날 유일한 소망을 가지고 잃었다가 얻었다, 죽었다가 살았다 이 기쁨을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부모와 아들, 이것을 생각하고 미리 예견하면서 살아가는 아버지는 참으로 위대한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그 아버지의 위대한 상으로 역사에 하나님 아버지의 믿음을 이어가는 위대한 족장 가문을 형성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아버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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