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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있는 믿음

마태복음 한태완 목사............... 조회 수 2908 추천 수 0 2011.03.25 14:25:03
.........
성경본문 : 마14:22-33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용기 있는 믿음

본 문 : 마태복음 14 : 22 ∼ 33

일제 때 가장 고난 당한 부류는 아마도 기독교인들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적 이유 때문에 대부분 고난을 받았습니다. 어느 노 신앙인도 신앙적 이유 때문에 상당한 아픔을 당했습니다. 매일 신사참배 강요를 감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노인은 신경통으로 무릎관절을 심하게 앓고 있었습니다.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면 감옥에 가야 합니다. 엄동에 감옥에 가면 신경통이 악화되어서 병신이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평생 걷지도 못 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심각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 기도에 시원하게 응답이 주어질리 없습니다. 생각 끝에 노인은 단호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갔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용기 있게 감옥행을 결심한 것입니다. 그 해 추운 겨울을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우려했던 무릎은 아무 염려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좋다던 약을 써도 낫지 않던 신경통이 감옥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말끔히 나아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으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사상가인 엘튼 투루블러드 박사는 ‘희망의 표적’이란 책에서 20세기 후반의 불안과 위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오늘의 현실은 아무리 보아도 물을 뿌리고 깨끗이 청소한 정원은 아니다. 기아와 수용소, 흉년과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찬 세상이다. 평화 대신에 폭력이, 자유 대신에 세속적 권력의 압박이 난무하여 안정 대신에 염려만이 풍토병처럼 만연하고 있는 시대이다” 이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진단한 고백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는 조용한 날이 없습니다. 어느 철인의 말처럼 “과학에 의해서도 목표를 잃었으며 폭발한 인도주의에 의해서도 영웅을 잃었으며 논리에 의해서도 앞이 막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은 가장 솔직한 고백인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갈릴리 바다를 건너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사납게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배에 탄 제자들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의 노련한 어부 출신들이므로 그 정도 풍랑에 두려워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재주와 기술로 노를 저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만은 달랐습니다. 굉장한 광풍이며 사나운 물결이었습니다. 일생을 통해 배우고 익혔던 경험과 억센 근육의 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주무시는 예수님께로 눈을 돌렸습니다. 의식의 전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절규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외칠 수 있는 절망적 언어입니다. 이것은 인간 실존의 본질적 고백입니다. 모든 노력과 의지를 포기한 인간 존재의 외침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하시며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바다에 명하여 풍랑과 파도를 잔잔케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은 응용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응용이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며 신앙의 힘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응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은 장식이나 추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생을 몰고 가는 힘입니다. 신앙이 우리 생활의 기초가 되고 생애에서 실재적으로 응용될 때 산 믿음이며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 그 신앙을 생활 속에서 응용해야 합니다.
풍랑을 만나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믿음을 실생활에 응용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갈릴리 바다를 고요하게 하신 주님은 우리 인생의 바다도 고요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세 종류의 장애를 이겨낸 헬렌켈러 여사가 자기 삶을 되돌아보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안정성이란, 미신과도 같은 것이다. 위험을 피하는 일이 위험에 철저하게 노출되는 것보다 결코 더 안전하지 않다. 인생이란, 과감한 모험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특별하게 인생을 산 사람만 인생이 모험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서도 인생이란, 모험입니다. 인생이란, 도전하는 것입니다. 모험 없는 인생이란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나오는 그 순간부터 인생은 모험의 연속입니다. 어떤 친구를 만날 것인가? 어떤 학교를 결정 할 것인가? 어떤 직장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릴 것인가? 인생은 모험이라고 하는 이 놀라운 도전에 연속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가장 큰 모험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갖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약속의 말씀을 향해서 내 인생 전체를 그분에게 던지면서 시작하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깜깜한 밤중에 바다 위에 서는 베드로 그것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삶의 사건도 아닙니다. 자기의 삶 전체를 내건 모험적인 결단이고 실존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어떤 성격의 소유자이었을까요? 다혈질 적인 사람입니다. 소위 말하는 화끈한 성격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었습니다. 근데 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먼저 선택하셨을까요? 갈릴리 바닷가에서 나를 따라오라고 했을 때 자기의 직업과, 그물과, 부모를 내려놓고 따른 첫 번째 인물이 베드로였습니다. 가이산의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냐?” 하고 물으실 때 가장 먼저 손을 들고 “당신은 그리스도시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한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다른 모든 제자들이 다 버릴지라도 나는 죽기까지 따라가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그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저는 복음서를 읽다보면 아마 예수님이 베드로가 없으셨으면 무척이나 심심하지 않으셨을까? 하나님 나라 운동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곧장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이 질문만 하시면 언제나 먼저 대답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다른 인물보다도 그 마음속에 이 모험적 정신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캄캄한 새벽이었습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 가운데 베드로는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다! 두려워 말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알고 베드로는 당참 발언을 합니다. “만약 당신이 주님이시면 나로 물위로 걸어 오라” 명하셔서 어떤 동기로 이렇게 했을까요? 호기심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처럼 한번 똑같은 행위를 해보겠다는 도전일까요? 기백일까요? 분명한 것은 그 속에 주님 때문에 시작하는 모험적 정신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이란, 새로운 모험의 출발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신앙을 갖은 그 자체가 모험 그 자체입니다. 베드로의 행위를 우리의 눈으로 보면 결코 용기라고 할 수 없는 만용입니다. 이성적으로 볼 수 없는 미친 짓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라고 하는 말씀 한마디의 자기 삶 전체를 내건 그 베드로는 용기 있는 인물입니다. 배 밖을 향하여 자기의 사람 전체를 건 모험하는 인간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모험하는 사람을 좋아하시는 사람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아니, 뒤집어서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택하신 사람을 아예 모험 속에 끼여 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시지 않는가? 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런 점에서 모험하는 백성이었습니다. 정겨웠던 애굽 땅에서 그것은 노예이긴 했지만, 그런 대로 먹고 살수가 있었습니다. 불만족 하지만 그런 대로 인생을 한세상 살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애굽을 떠나라고 말을 합니다. 새로운 가나안 땅을 비전으로 주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라고 그곳을 향해서 가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냥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야 됩니다. 광야라고 하는 들판을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그곳을 향해가라고 모험을 시작하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 이셨습니다. 우리가 잘아 는 신앙의 아버지인 아브라함도 모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실 때에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본토를 버렸습니다. 친척을 버렸습니다. 아비의 집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의 약속을 위하여 그의 삶 전체를 내걸고 나아가는 모험하는 인간이 아브라함의 생애이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나그네적 방랑의 길일지라도, 지금 현재는 암울할지라도, 지금 현재는 보장이 없는 것 같을지라도, 지금은 흔들리는 삶의 여건일지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것만을 바라보고 그의 생을 걸을 수 있는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의 첫출발이란 이른 것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걷는 것처럼 신앙이란 낯선 땅이 드려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아깝던 그것! 그것보다 우리 하나님이 더 위대한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가장 소중한 분임을 내 삶 전체로 깨닫는 여기에 신앙이 시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런 낯선 곳에 물위에 선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베드로는 그냥 뛰어 든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를 향해서 “나다! 두려워 말라.” 라고 말씀하시는 그 분의 초청 때문에 이 모험적 신앙의 길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나다…….’ 누구의 이야기일까요?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서 ‘나다!’ 바깥에서 그러면 여러분들 문을 여러 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남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일 것입니다. ‘나다’라는 그 말속에는 함께 삶을 나눴던 사랑과 친교와 만남의 내용들이 들어가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갖고 사실은 모험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다’라고 하는 그 말은 사실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창조주의 언어입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 가운데서 ‘나다! 두려워 말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래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말씀하실 때 사용한 언어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풀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친히 만나게 됩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라. 모세는 두렵습니다. 도대체 누가 보냈다 그렇게 이야기 하리이까, 나한테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다……. 나는 나다! 나는 설명 할 수가 없다. 나는 역사 속에서 행하는 것을 보아야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 네가 나를 알려고 하면 내 말씀대로 역사 속에서 순종해봐라. 내가 출애굽을 하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네가 알 것이다.” 그 때 말씀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당신이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이란,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오시는 하나님 때문에 시작하는 모험과 용기입니다. 이 모험과 용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시작이 됩니다. 말씀 없는 인생의 모험은 상상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말씀 없는 우리의 열심은 우리의 신념일 뿐입니다. 말씀 없는 우리의 행동은 이기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우리는 말씀 때문에 시작했습니다. 나를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시작한 모험적 인물들입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서 물위로 걷습니다. 그리고 물위로 몇 발자국을 주님을 향해서 걸어갔습니다. 신앙이란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을 도전하는 게 신앙일까요? 비이성적인 것을 향해서 무모한 짓을 하는 행위가 신앙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기적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뒤따르면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현장을 목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뒤바뀌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말씀과 현실이 갖고 있는 현장에 위험성이 놓여져 있습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 위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곳입니까? 신앙과 불 신앙이 교차되는 곳입니다. 한편으로는 의심하고 한편으로는 믿는 그런 곳이 바로 베드로가 서 있는 물위입니다. 29절과 30절에 보니깐 이렇게 베드로가 갖고 있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니, 베드로의 문제가 뭘까요? 주님 때문에 배에서부터 떠나서 몇 발자국을 걸었습니다. 근데 이제는 주님이 보이지 않고 폭풍우 치는 파도가 그를 향해서 달려오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다시 자기가 돌아온 배를 향해서 뒤돌아보았습니다. 근데 너무 많이 왔습니다. 이젠 되돌아 갈 수가 없어요. 베드로가 갖고 있는 위기입니다. 주님 때문에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내가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현실이 폭풍우가 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믿기 전에 어느 정도의 불안도 있었습니다. 문제도 있었습니다. 죄의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즐기면서 살수가 있었습니다. 배 안에 있는 제자들처럼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그것을 너무 알 수는 없었던 그 실존…….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실존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진리와 생명 예수님에게 있는 것을 알고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앙을 시작했는데 나의 연약함이 더 많이 보입니다. 나의 죄악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 믿는 동료들의 부족함과 완악함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교회 안에도 어려움이 있고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내가 사랑했던 주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이 갖고 있는 위기입니다. 이때 우리가 다시금 확실하게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더 문제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들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됨에 축복을 끊임없이 경험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게 사실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보면서 배에서부터 한 발자국을 내 놓을 때, 그 때 파도를 안 봤을까요? 그 때도 파도가 일고 있었습니다. 그 때도 폭풍이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때문에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될 때 인간의 연약성을 몰랐었습니까? 인간의 완악성을 몰랐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 속에 얼마나 하나님 기뻐하지 않는 모습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가 모르셨습니까?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다 알면서 예수님이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님만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참된 구원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시작한 우리들의 신앙의 모험이 아니었습니까? 환경 때문에 우리가 침몰 당해서는 안됩니다. 흔들리는 풍파 때문에 우리가 무너져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의 모험은 실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망가지게 영원히 우리를 망가트릴 수는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순례보다 바람이 더 무섭게 될 때 빠져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면 다시금 회복되어 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목사가 됐다고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장로님이 됐다고 권사님이 됐다고 안전판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늘 말씀을 다시금 되새겨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시작했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물위를 걷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주님 앞에 갈 때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잃어버린 순간에 베드로처럼 깊은 물 속에 빠지게 됩니다. 어떻게 될까요? 신음해야 될까요? 탄식해야 될까요? 발버둥 쳐야 될까요? 길은 오직 한 길입니다. 나를 초청하신 그 분을 향하여 기도에 부르짖음을 하는 거기 밖에는 우리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 영혼아 너는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는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려는 몸짓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까지도 상실합니다. 손에 쟁기를 쥔 자는 뒤를 돌아봐서는 안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한 사람들은 롯의 아내처럼 다시금 소돔과 고모라를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 분이 우리를 초청했습니다. 신앙적 모험은 두려움이 없는 신앙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것, 그 사실 때문에 달려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분이 우리를 향해서 초청하고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고 계십니다. 나이가 많이 드셨어도 괜찮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면 순종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달려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란의 유명한 부흥사인 코리텐 붐 여사의 간증입니다. 붉은 혁명이 일어나 직후 소련에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목숨을 건 모험일 만큼 기독교에 대한 국가의 박해가 극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적은 무리가 비밀리에 모여 조심스럽게 예배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몇 십 명의 교인들이 지하에 숨어서 비밀리에 예배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손에 기관단총을 든 소련군인 몇 명이 문을 박차고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꼼짝하지 마라~ 이 자리에서 너희를 즉결 처분하겠다. 그러나 단 한번의 기회를 주겠다. 이제라도 예수를 배반할 사름은 즉시 나오라."
그러자 벌벌 떨던 몇 사람이 일어나 걸어나왔습니다. 군인들이 그들의 등을 떠밀며 "어서 빨리 이곳을 나가라. 만일 여기에서 어물거리면 너희도 죽여버리겠다."라고 소리치자 그들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하지만 더 살고 싶은 놈은 어서 나오라는 군인들의 소리에도 대다수의 교인들은 창백해진 채 죽음을 각오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들은 지하의 문을 닫고 쇠고랑을 채운 후 모두 총을 내던지고 교인들을 얼싸안고 외쳤습니다.
"반갑습니다. 우리는 혹여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가짜 교인이 있을까봐 일부로 총을 들고 행패를 부린 것입니다. 많이 놀라셨죠? 용서하십시요. 이제 그들은 모두 도망했고 들킬 염려가 없으니 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시다."
그들은 크게 안도하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렇듯 환난은 참 신앙인과 거짓 신앙인을 구별케 합니다.
동물학자 E.마레이즈는 아프리카 개미를 둔 흥미 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 개미집 둘레에다 둥그렇게 홈을 파 물을 대놓음으로써 개미집과 외부를 차단시켰습니다. 물론 개미집에는 개미가 들어있었고 그 일부는 먹이를 찾으러 밖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마레이즈는 그 차단한 홈의 한 군데에 가느다란 짚으로 외다리를 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서 관찰을 한 것입니다. 집에 있던 개미는 밖에 나가기 위해 외다리를 건널 생각을 않고 예외 없이 되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외다리라는 위험부담을 안고 밖에 나갈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한데 먹이를 마련해 갖고 돌아온 밖의 개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서 집으로 찾아 들었던 것입니다. 나가는 개미에게는 찾아볼 수 없던 용기와 모험을, 들어오는 개미는 서슴없이 부렸던 것입니다. 마레이즈는 이 실험 결과를 예시하고 동물이 집에 돌아오는 귀소심리의 크기를 입증한 것이었습니다.
집에 들어가려는 개미의 용기와 모험심을 가져야 할 자들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러 가는 자들의 자세입니다. 주님을 만나려고 본향 집에 가려는 자는 개미의 귀소본능에서 오는 용감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방해하는 환경적 요인을 극복하기 위해 개미와 같은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와 같은 모험적인 신앙, 용기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하는 주님,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두렵고 떨며 무서워 할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를 오라고 하신 주님, 나다! 두려워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 앞에서는 그 날까지 달려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용기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2부: 분반공부 자료

1. 말씀: 용기 있는 믿음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비웃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 본진랜드 장군은 성실한 크리스천이었다. 하루는 신하들과 같이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왕의 천한 야유가 시작되었다. 그리스도 예수를 비웃는 말이었다. 그래서 온 장내는 그런 분위기로 되어가고 있었다. 이 때에 엄숙한 표정을 한 본진랜드 장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왕폐하! 대왕께서는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나는 전쟁터에서 대왕을 위하여 38번 싸워서 이긴 것입니다. 저는 이제 나이 많은 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머지 않아 지금 대왕이 웃으시는 나의 구주 그리스도를 만나 뵈러 가게 됩니다. 나이 많아 영원을 바라보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대왕보다 더욱 위대한 분인 것을 압니다. 폐하, 소신은 이제 물러가려 합니다." 이 엄청난 태도와 말에 온 장내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장군을 즉시 처형하라는 추상같은 대왕의 명령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대왕의 떨리는 음성이 다음과 같이 들려왔다 .
"본질랜드 장군! 내가 잘못했소. 나를 용서하시오!" 우리는 조만 간에 꼭 주님을 만나 뵙는 날이 있음을 기억하고 항상 담대하고 용기 있게 믿음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2. 묵상 및 토의
0 나는 불의를 보고 대항해 싸울 용기가 있는가?
0 나는 진리로 인해 담대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0 내게는 죄악의 여러 단계를 과감히 끊어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0 나는 어떠한 계획을 이루어나갈 때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까?
0 나는 최악의 곤경가운데서도 낙심치 않고 주를 바라보는가?
0 나는 부정한 것들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는가?
0 나는 쉽사리 좌절하거나 원망하는 습성의 소유자가 아닌가?
0 용기와 사랑은 새로운 도전의 추진력입니다. 나의 삶에 옷니엘 같은 용기와 사랑이 있습니까?

3. 예화: 신앙은 모험

신앙은 목숨을 건 모험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여러 가지 난관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이때는 모험적 신앙이 필요하다. 청교도들은 범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그들은 신대륙 아메리카의 건설자가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건너가 탐험하며 복음을 전파한 리빙스톤은 만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미개한 대륙에 폈다. 그는 그의 일생을 아프리카 선교에 바쳤다.
중국 내지 선교에 담대히 들어가 선교회를 조직하고 복음을 전파한 허드슨 테일러는 아무 후원자도 없이 오직 하나님만 믿고, 그 믿음으로 중국 내지 선교를 성사시켰다. 이것은 모험적 신앙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홀로 아프리카 정글 속에 들어가 흑인들의 병을 고쳐 주며 봉사하던 알버트 슈바이처는 백인들의 흑인들에게 저지른 죄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선교와 봉사에 생애를 바친 성자이다. 신앙은 이 같은 모험을 감행할 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생의 험한 길을 무릅쓰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지 않는 신앙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할 수가 없다.

4. 찬송: (395장) 너 시험을 당해

1.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쳐라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2. 네 친구를 삼가 잘 선택하고 너 언행을 삼가 늘 조심하라 너 열심을 다해 늘 충성하고 온 정성을 다해 주 봉사하라
3. 잘 이기는 자는 상주시리니 너 낙심치 말고 늘 전진하라 네 구세주 예수 힘 주시리니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후렴]
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

5. 성경연구: 성도가 가져야 할 용기
1) 죄를 책망하는 용기(엡5:11)
2) 위선을 고발하는 용기(마23:25,26)
3) 성도의 잘못을 꾸짖는 용기(고전6:1-8)
4) 진리를 증거하는 용기(갈2:11-14)
5) 대적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빌1:28)
6)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밝히는 용기(벧후2:1-22)
7)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딤후4:5-8)

6. 용기를 주는 성경말씀:
0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수1:6)
0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신31:6)
0 여호수아가 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수10:25)
0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4:17)
0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시60:12)
0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롬5:7)
0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시31:24)
0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28:1)
0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몬1:8)
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10:19)
0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3:13)
0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빌1:14)
0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도다.(고후7:4)
0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6:12)
0 말할 때에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오는지라 아도니아가 가로되 들어오라 너는 용사라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오는 도다(왕상1:42)

7. 금언:
0 죽는 날까지 자기의 용기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아누이)
0 참된 용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일에 용감하다.(필립 시드니 경)
0 용기는 경외심을 주고, 방어할 힘이나 사랑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보호를 약속한다. 이것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남자들에게 권위가 있게 한다. (월리엄 템플 경)
0 경건과 용기가 함께 이룩한 진지한 노력은 은총을 받기 마련이다.(죤 드라이든)
0 용기보다 더 나은 것은 신중이다.(윌리엄 세익스피어)
0 용기로 인해 받는 칭찬을 믿는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어떤 다른 선으로 받는 칭찬을 받는 사람보다 우수하다.(죤 드라이든)
0 아무도 자신이 위험에 처해 보기 전까지는 용기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없다.(둑 드 라 프랑수아 로슈푸코)
0 항상 당신의 일을 대담하게 하라.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의 척도가 되느니라.(찰스 시몬스)
0 당신이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악행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악을 용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악으로 인한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항상 두려워만 하고 있는 사람은 겁쟁이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진실로 용기 있는 사람이다.(프란시스 콸스)
0 무가치하고 비천한 일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용기이며,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을 때 그것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을 참는 것 역시 용기이다.(벤 죤슨)
0 진정한 용기의 중용은 비겁함과 성급함의 양극 사이에 있다.(세르반테스)
0 용기가 이성을 삼켜 버릴 때 그것은 들고 싸우려던 칼을 삼켜버린 것이다.(윌리엄 세익스피어)
0 옳은 것을 보고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의 부족이다.(공자)
0 많은 재능이 작은 용기의 부족으로 이 세상에서 상실되어 가고 있다.(시드니 스미스)
0 용기는 자기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에머슨)
0 용기는 종종 공포심에서 유발된다.(프랑스 격언)
0 용기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에머슨)
0 용기에도 다른 미덕과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다.(몽테뉴)
0 행운은 대담한 자와 친구를 맺는다.(죤 드리이든)
0 선에 기초를 둔 진정한 용기는 강하므로 모든 사건들의 결과는 꼭 같다.(데이빗 마린)
0 큰 일을 성취하는 사람은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는다.
0 용기, 그것은 미덕의 아름다운 색이다.(디어게네스)
0 용기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타키투스)
0 용기는 모든 것을 정복한다. 또한 나약한 육체에 힘을 더해 준다.(오비디우스)
0 용기는 무기뿐만 아니라 바른 눈도 있어야 한다.(토마스 풀러)
0 용기는 악운을 무찌른다.(세르반테스)
0 용기는 언제나 허세의 옷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요란한 나팔소리와 함께 하는 행군도 아니다.(로드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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