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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다!"(Time Is Short)

에스겔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318 추천 수 0 2011.03.30 17:11:30
.........
성경본문 : 겔7:1-7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06. 2. 26 김영봉 목사

신년 특별 5회 연속 설교: 새해에 받은 말씀(5) --"시간이 없다!"(Time Is Short)

에스겔 7:1-7; 고린도전서 7:29-31

 

에스겔서 7장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마지막 날,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고 선언하십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 사도는 종말이 임박했으니, 종말에 준비된 자처럼 살아가도록 권고합니다.
1.1. 에스겔 7장 1절부터 7절까지 다시 읽어 보십시오. 마지막 날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유다 백성들은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느꼈을까요?

2.고린도전서 7장 29절에서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3.고린도전서 7장 29절 후반부에 나오는 "이제부터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라"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토의할 질문

1.다음의 명제들을 보십시오.
1) 마지막은 분명히 온다

2) 그 마지막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3)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이 명제들이 옳다면, 마지막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합니까?

2.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면, 물건을 살 때 내 생각과 행동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3.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것을 생각한다면, 나는 과연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어떤 준비가 되어 있는지 말해 보십시오. 
 

1.

예수님은 시한부 종말론자(the one who believes the end of the world is imminent)였습니다. '시한부 종말론'이란 자기가 생각하는 어느 시점에 인류의 종말이 오리라고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몇 년 몇 월 몇 일에 종말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구체적으로 날짜를 거론하지는 않지만, 머지 않아,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종말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시한부 종말론'이라는 단어의 의미상, 두 종류의 믿음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이런 뜻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시한부 종말론자였다는 뜻입니다.

 

지혜의 화신(personified Wisdom)이요 말씀의 성육신(incarnated Word)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신자(religious fanatics)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시한부 종말론자였다는 말이 믿어지십니까? 제가 증거를 하나 제시하겠습니다. 마가복음 9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와 있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마태복음 10장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의 여러 지역으로 내보내어 전도하게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시한부 종말론자라는 증거로서 이 두 말씀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에서 보듯, 예수님은 당신의 생애 안에(within his life-time) 인류의 종말이 오리라고 믿었습니다. 때로는 종말이 아주 임박했다고 믿었고, 때로는 조금 시간이 걸릴 거라고 믿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부인하지 못할 사실은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종말이 오리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었을 뿐 아니라, 그분은 그 믿음에 근거하여 사셨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성자로 유명한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는 20세기 신학사에 길이 남을 예수 연구서에서 예수님의 윤리를 '중간기 윤리'(interim ethics)라고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은 모두 종말을 코앞에 둔 사람들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글자 그대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종말이 속히 오리라는 믿음이 잘못되었으므로, 그 믿음에 근거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아니, 적어도 종말이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된 현대인들에게, 혹은 종말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말씀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종교를 세계 종교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

을 했다는 바울 사도도 역시 시한부 종말론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7장 29절에서 바울 사도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라고 운을 뗍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종말의 때, 재림의 때를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바울 사도는 재림에 대해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적할 것입니다"(17-17절)라고 말합니다. 바울도 자기 생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가르침도 역시 이런 '잘못된 세계관'(misconceived world-view)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할 수 있고, 그러므로 종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바울의 가르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자, 그렇다면,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고 살았던 예수님과 바울은 정말 틀렸습니까? 그분들의 가르침은 종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까? 아니면, 그분들의 가르침을 수정해야 하겠습니까? 그분들이 시한부 종말론자들이었으니, 우리도 시한부 종말론을 선전하는 교회로 찾아가, 모든 것을 접어 두고, 그 날과 그 때를 위해 준비하는 게 옳겠습니까?

 

여기서 기억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종말이 언제라도 올 수 있다'는 긴장감(tension) 속에서 사셨지만, 결코 그 날짜를 추정하거나 계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에 대해 자주 설교하셨지만,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마가복음 13:32)고 분명하게 못박으셨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 때와 시기를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 그러니까, 예수님도, 바울도,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고 사셨지만, 결코 그 날짜를 계산하거나 예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으셨던 것은 바램(hope)이요 열망(longing)이요 기대감(expectation)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분이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면, "예수님이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말이 속히 오리라고 믿고 살았지만, 그것이 어떤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절한 열망에서 온 기대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바울도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종말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므로, 그 종말이 속히 오기를 기대하고, "마라나타"(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 종말이 속히 오기를 기대하고, 그 마지막에 준비된 자세로 살아가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종말에 대해 그렇게 간절한 열망을 품고 사셨지만, 예수님도, 바울도 그 날짜를 계산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1992년에 한국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던 '다미선교회'를 기억할 것입니다.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rapture)가 일어나면서 재림의 드라마(drama of the Second Coming)가 시작된다고 선전하여, 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정과 직장을 떠나게 만들었던 그 사건 말씀입니다. 지금도 제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TV 뉴스를 통해 본 그림입니다. 10월 27일 자정 직전, 다미 선교회 사람들이 휴거를 기다리며 모여있는 장소에 들어가려는 아들을 엄마가 따라가 끝까지 말립니다. 아들은 완력으로 엄마를 밀치며, 홀로 휴거되어 구원받기 위해 그 건물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24시간 동안, 그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날짜가 29일로 넘어갔고, 그들 사이에는 혼란과 절망과 절규가 터져나왔습니다. 얼마 후에, 다미선교회 지도부로부터 "재림이 연기되었다" (the plan has been postponed)는 공식적인 입장이 나왔습니다.

 

불행한 사실은 이런 일들이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와싱톤 지역 안에도 성경 말씀을 제 멋대로 짜맞추어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고 그 날을 준비하자며 성도들을 미혹시키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선전을 하는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는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하여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 틈을 타서 모든 것을 털어내는, 일종의 종교적 위협 전략(religious scary tactics)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단 공포에 질려 이성을 잃어버리면, 사람들은 교주(leader)가 요청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타락한 종교인들(corrupt religious leaders)이 그런 수단을 택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문제는 그런 전략에 넘어가는 성도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조금만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사기극이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패가망신할 정도로 넘어가 버리는 것을 보면, 참으로 딱합니다.

 

단연코 말씀드립니다. 재림의 시기, 종말의 시기를 예언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짜입니다. 제가 제 권위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미선교회'가 한 참 기승을 부릴 때, "그 날과 그 때는 알 수 없다"(마가복음 13:32)는 말씀으로 응수하자, 그 선교회 측에서 뭐라고 답했는지 아십니까? "'그 날과 그 때' 즉 day and time만 알 수 없다는 뜻이지, '그 해와 그 달', 즉 year and month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종말이 몇 년 몇 월에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성경을 잘 연구하면 알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도대체 문법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데, "말씀을 기가 막히게 쪼갠다!"고 느끼고 넘어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3.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종말의 날짜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제 아무리 놀라운 환상을 선전하고 학위를 선전하고 기적을 제시하더라도, 종말의 날짜를 안다고 주장하는 것 하나만으로 가짜임을 단정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지구촌은 더 더욱 다양한 재앙과 테러와 질병으로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이렇게 어수선해질 때마다 "종말의 때가 왔다"고 주장하며 현혹시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단호한 태도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과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마지막 행동을 열망하고 동경하며 그 사건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사셨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다"라는 자세로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는 태도는 광신자의 태도가 아니라 삶의 비밀을 제대로 아는 사람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마냥 지속될 것으로 착각하고, 아무 긴장감 없이, 영적인 잠(spiritual sleep) 속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도, 바울 사도의 말씀도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대두되는 큰 질문은 이것입니다. "누가 잘못된 것이냐? 예수님과 바울이 잘못된 것이냐, 아니면 우리가 잘못된 것이냐?"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잘못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길어봐야 100년도 안 되는 인생을 살면서도 마치 천 년, 만 년을 살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사고 방식이 문제입니다. 인류의 역사에 시작점이 있듯 마침점도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Big Bang으로 우연히 시작된 이 인류의 역사는 웬만하면 이대로 영속적으로 반복되고 순환되리라고 믿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오늘의 태양이 내일도 어김없이 떠 주리라고 생각하고 하루 하루 권태로이 살아가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돈을 많이 벌어 놓았으니 이제는 마음껏 놀고 즐기자고 생각하며, 마치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교만해진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들은 마지막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수 많은 성경의 본문 중의 두 예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통해서 수 없이 반복되는 증언은 "마지막이 있다"는 것이며, "그 마지막이 코 앞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은 개인적으로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국가적인 멸망이 될 수도 있고, 우주적인 종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종말도 미리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것도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듯, 우리의 마지막도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마지막이 올 것인지, 그 마지막이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마지막에 대해 준비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든지 결정하시면 나의 마지막이 됩니다. 그러니 나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이 하루가 나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최상의 방책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사셨던 방법이고, 바울이 사셨던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도, 바울의 가르침도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귀중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오늘도 어제같은 하루가 반복되리라"는 권태감과 영적 수면 상태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깨달아 느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흥청 망청 놀고 쓰고 세월아 네월아 노래할 시간이 없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불현듯 마지막이 오고, 그 마지막에 나의 삶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결산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결산에 대비하여, 하루 하루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깨어있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설 것에 대해 준비하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4.

며칠 전에 우리 교회 교우 중 한 가정이 권총 강도의 위협 앞에 섰던 적이 있습니다. 경찰을 가장하고 집으로 침입한 두 명의 강도에게 3시간 정도를 인질로 잡힌채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부부가 모두 신체적인 피해를 입지 않고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말에 속회원들과 함께 찾아가 같이 예배 드리고 왔는데, 그분들이 온전한 것이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마음에 입은 상처가 온전히 치료되고 회복되려면 더 많은 시간과 기도가 필요하겠지만, 지금의 상태만으로도 감사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여러분들도 경각심을 새롭게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 댁에 심방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성도님께 허락을 받고 이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그분은 경찰이라고 해서 마음 놓고 문을 열어 주었는데, 갑자기 총을 꺼내들고 몰아치는데 정신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되돌아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답니다. 갑작스럽게 총을 마주하고 나니 당황스럽고 떨리고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담담함이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이성을 완전히 잃을 정도로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았고, 그들에게 협조하여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돌아 보면서, "무엇이 나를 그렇게 반응하도록 만들어 주었나?"하고 물어 보았다는 겁니다. 그분의 결론에 따르면,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 성도님은 강도들을 안내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문득 한 쪽 방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아내를 보게 되었고, 그 순간 "아, 그래, 내가 믿는 사람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생각이 자신의 마음을 붙들어준 하나의 기둥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부부가 얼마전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름대로의 물질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준비를 해 두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50을 갓 넘은 그 성도님은 지난 1월에 동생을 암으로 떠나 보냈습니다. 동생의 장례식을 다녀 온 후, 이 부부는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며, 자신들에게도 언제든지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언제 있을지 모를 죽음에 대비해 자녀들을 위해 이런 저런 준비를 해 두고, 자녀들에게도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 둔 내용을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죽음에 대해 정신적으로 준비되었던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지금 죽어도 내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는 큰 문제가 없을 거야.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는 피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마음을 잡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성도님과의 대화를 통해 제가 오늘 전하려는 말씀의 구체적인 예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라도 닥쳐올 마지막에 항상 준비되어 있는 삶!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고, 바울의 삶이었고, 모든 믿는 사람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에 대해 준비되어 있을 때, 현재가 제대로 보입니다. 마지막에 있을 일에 준비되어 있을 때, 비로소 현재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준비되어 있을 때, 현재에 당할 수 있는 모든 환난과 역경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마지막을 당했을 때, 그 공포스러운 현실 앞에 의연히 설 수 있습니다.

 

5.

그 성도 부부께서는 이 땅을 떠날 때를 대비해 아주 잘 준비해 놓으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대한 준비는 두 가지 면에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두고 떠나는 곳에 대한 준비(preparation for the place I am leaving)와 다른 하나는 내가 향해 갈 곳에 대한 준비(preparation for the place I am heading) 입니다. 제가 방글라데시 선교 여행을 갈 때도 두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제가 없는 10일 동안 교회가 평안하도록 미리 모든 준비를 했습니다. 동시에 방글라데시에서 사역하기 위한 준비도 했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가 빠지만 큰 낭패를 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라도 들이닥칠 도둑 같은 마지막을 위해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두고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준비와 함께, 떠나서 만나게 될 그분에 대한 준비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설 날에 대해 어떻게 준비할 수 있습니까? 두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그 날에 우리 곁에 서서 변호해 줄 분을 모시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입니다. 우리의 공로와 업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가 비교할 수도 없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보듬어 안고, "이들의 죄를 내가 대신 지고 죽었으니, 이들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소서"라고 변호해 주는 것뿐입니다. 그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마 10: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준비는 하루 하루의 삶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 우리를 두둔해주고 변호해 주실 것이라고 해서, 그것을 믿고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깨달았으면 깨달은 자답게 살도록,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혹은 우리 인류 역사에 끝은 반드시 있으며, 그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서 결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았다면, 그 사실을 아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달라져야 합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 사도는 마지막에 대해 준비된 사람의 사는 방법을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제부터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되, 그 아내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내를 배우자 이하로도, 그 이상으로도 취급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슬픈 일을 만났을 때, 그것으로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교만해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물질에 사로잡혀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전부로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결국 사라져 없어질 것이므로, 그에 맞게 처우하라는 뜻입니다.

 

이 예는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을 때,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떤 사고를 만났을 때, 마치 인생이 끝장난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기치 않은 질병이, 심각한 질병이 발견되었을 때, 마치 온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강도의 총구를 마주했을 때, 그것으로 끝인 양 무너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진정한 마지막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은, 제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결국 지나갈 일입니다.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 서는 마지막입니다. 그 마지막에 준비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만나는 고난과 환난 앞에서 의연하고 담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 설 마지막을 생각하면, 지금 누리는 즐거움과 기쁨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배우자와 나누는 행복이 참으로 좋다해도 그것에도 끝이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허락된 동안 감사하게 누리지만, 그것이 끝났을 때 마치 인생이 끝난 것처럼 절망하지 않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사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불원간 진수성찬 앞에서 한 숫가락도 들지 못할 날이 올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지금 허락된 음식을 감사하고 누리지만, 언제든 상을 물릴 준비를 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놀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그것에도 끝이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지나치지 않게 절제합니다. 자녀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언젠가 끝날 것을 압니다. 그래서 허락된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하고, 때가 되었을 때 기꺼이 떠나 보낼 수 있습니다.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좋습니다만, 그것도 결국 끝날 것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에서 마음을 떼고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여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관리했는지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날이 있음을 알기에 선한 청지기로서 살아가도록 힘쓰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마지막에 대한 두 번째의 준비입니다.

 

6.

이번에 선교 여행을 하면서 김정환 장로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스키장에 갔는데, 어느 백인 노인과 리프트(Lift)를 같이 타게 되었답니다. 뭐하는 사람인가 하고 물었더니, 은퇴를 했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소일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분의 대답이 "일년에 4개월은 스키만 타고, 나머지 6개월은 골프만 친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김장로님이 "그래, 나머지 2개월은 뭐하시느냐?"고 물었더니, "그 동안엔 vacation을 갑니다"라고 답하더랍니다.

혹시 이런 노후를 부러워하실 분이 계십니까? 제가 보기에, 그분은 마지막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 같습니다. 노후를 내다보고 많은 돈을 모은 것까지는 지혜로왔다고 할 수 있지만, 더 이상의 마지막은 없고, 더 이상의 준비는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같아서, 실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많은 돈으로 자신의 유흥을 위해 소비하는 것 말고도, 얼마든지 유익한 일을 찾아 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혹시나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서 그 탕진(waste)에 대해 책임져야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도 끝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 우주의 역사에도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예기치 않게 닥쳐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 마지막에 대해 준비되어 있도록 하십시다. "아직 마지막이 멀었으니 나중에 하지, 뭐!"하고 말하시겠습니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확보되어 있는 시간은 '지금'밖에 없습니다. 지금을 그냥 지내고 나면 영영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7.

오늘로써 다섯 번의 연속 설교를 마칩니다. 이 다섯 가지의 말씀을 늘 기억하시며 올 한 해를 거룩하게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빕니다. 말씀을 뜨겁게 사모하시고, 이웃과 시대의 아픔을 끌어 안도록 힘쓰십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도록 하십시다.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파괴하여 참된 신앙에 이르도록 힘쓰십시다. 그리고 마지막에 대해 준비된 자로서 살아가십시다. '말씀', '아픔', '증거', '우상', 그리고 '끝'-이 다섯 단어를 기억하시면, 쉽게 '새 해에 주신 다섯 가지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억하실 뿐아니라, 그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충만할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이 신령한 복을 넘치게 부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오 주님,
마지막이 오면
그 때 주님 앞에 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게 하소서.
지금이 그 마지막이요
지금 주님 앞에 서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 마지막에 늘 준비되어 있도록
저희의 삶을 인도하소서.
마지막에 웃는 저희가 되도록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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