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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위해, 진리를 따라"(For Truth and By Truth)

요한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670 추천 수 0 2011.03.30 17:14:34
.........
성경본문 : 요8:31-38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 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06. 4. 23 김영봉 목사

4회 연속 설교: '다빈치 코드 제대로 보기' (1) "진리를 위해, 진리를 따라"(For Truth and By Truth)

--요한복음 8:31-38

 

예수님은 참된 자유를 얻는 길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1. 자유를 얻으려면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32절)

2. 진리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1-32절)

3. "나의 말에 머물러 있다"(31절)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토의할 질문

1.'다빈치 코드'를 읽었습니까? 당신의 느낌을 말해 보십시오. 이 소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뭐라 하던가요?
2. 오늘의 설교 내용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빈치 코드'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당신의 믿음을 시험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어떻게 응답하겠습니까?

3. '진리의 사람'으로서 당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십시오. 당신은 얼마나 진리를 알며 진리를 살며 진리를 추구하고 있습니까?
 


1.

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 '다빈치 코드' (Da Vinci Code)에 대해 4회 연속 설교를 시작하면서 분명히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앞으로 4주 동안, 저는 소설 '다빈치 코드'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하여 설교할 것입니다. '다빈치 코드'에 대해서만 말하고 만다면,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강연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한 소설가가 꾸며낸 이야기에 대해 말하느라고 이 거룩하고 귀한 설교 시간을 다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이 소설과 (앞으로 개봉될) 영화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사회 현상이 되었고, 기독교의 진실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제기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제기한 문제들을 성경 말씀의 관점에서 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필요성 때문에 시리즈 설교의 제목을 '다빈치 코드 제대로 보기'라고 잡았지만, 실제로는 '기독교의 진리 제대로 보기'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네 편의 설교는 설교가 가져야 하는 본질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빈치 코드' 이야기는 마치 설교 속에 사용되는 예화와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은 "한낱 소설을 두고 왜 이렇게 난리 법석인가?"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 소설은 '한낱' 소설이 아닙니다. 최근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팔려나간 소설이며, 이제 5월 19일에 개봉될 영화도 역시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울 '블락 버스터'(Block Buster)가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틀(plot)은 교회가 지난 2천년 동안 비밀스럽게 은폐하고 날조해 왔다고 하는 한 가지 사실을 추적해 가는 추리 이야기입니다. 그 대강은 이렇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세계적인 종교 기호학자 (religious symbologist)인 로버트 랭던(Robert Langdon)이 파리에 왔다가 우연히 한 사건에 연루됩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Louvre Museum)의 유명한 큐레이터(curator) 자크 소니에 (Jacques Sauniere)가 엽기적으로 살해를 당했는데, 그가 죽어가면서 남긴 메모에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고 썼기 때문입니다. 랭던은 이 사건의 내면으로 점점 끌려 들어가는데, 결국 그 사건은 기독교가 2천년 동안 감추어 온 '성배'(the holy grail)에 관한 음모와 투쟁으로 인해 발생한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 그는, 성배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눌 때 사용했던 포도주 잔을 가리키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비밀을 지켜 온 '시온수도회' (the Priory of Sion)의 내막을 탐색하면서, 성배는 포도주잔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한 피를 담았던 한 여인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로버트 랭던은 결국 그 비밀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가 확인한 비밀은,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고, 돌아가실 때 막달라 마리아의 태에는 예수님의 씨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씨앗을 잉태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했고, 그래서 아무도 몰래 막달라 마리아를 프랑스 남부에 있는 한 마을로 피신시켰습니다. 마리아는 때가 차서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의 이름은 사라였고, 예수님의 딸 사라는 나중에 프랑스의 메로빙거 왕조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는 이 비밀을 처음부터 철저히 은폐하고 억압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증거를 모두 없애 버리고,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둔갑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시온수도회'라는 비밀 단체를 통해 그 비밀이 지켜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비밀은 비록 지금까지 완전하게 폭로되지 않았지만, 지난 수 세기 동안 각종의 미술, 문학작품, 음악 등을 통해 끊임없이 암시되고 전해졌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시온수도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고, 그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에 여러 가지 암호를 그려 넣었습니다. 교회 전통은 예수님의 오른 편에 앉아있는 사람을 사도 요한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은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은 제자였으며, 연인이었으며, 아내였습니다. 주인공인 로버트 랭던은 수 많은 우여곡절을 거처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2.

읽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 번 잡으면 손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 진진하게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문학적인 비평을 할만한 안목이 제겐 없기 때문에 그 면에 대해서는 침묵하겠습니다. 평범한 한 독자로서의 느낌을 말하자면, 이렇게 흡인력이 강한 책을, 영어 표현으로 page-turner라고 하는데,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왜 그런 표현이 생겼는지를 처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소위 '기독교의 숨겨진 진실'에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예수의 결혼설 외에도 이 소설은 기독교에 대해 여러 가지의 혐의를 제기합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기독교에 대한 대목들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는 이교도였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짜맞춘 것이거든"(번역본 1권, 351쪽, 원작, p. 231 ).

"기독교에 있는 것은 다 원래 기독교의 것이 아니야. …… 심지어 기독교의 주일이라는 것도 이교도에게서 훔쳐온 것이라네"(번역본 1권, 352쪽,원작 p. 232).

"역사상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한 사람의 예언자일뿐이었어. 위대하고 힘 있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결국 죽음을 면할 수없는 '인간'일뿐이지. …… 신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위상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되고 '투표'에 부쳐진 것이지……그리고 상대적으로 근소한 표 차이로 예수의 신성이 결정되었지"(번역본 1권, 353쪽, 원작 p.233).

"콘스탄티누스는 새로운 성서 제작을 의뢰하고, 재정적으로 뒷받침했어.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특성을 얘기하는 복음서들은 모두 빼버리고, 그를 신처럼 묘사한 복음서만을 골라 아름답게 윤색한 거야. 초기 복음서들은 금지되거나, 모아서 불태워졌소" (번역본 1권, 355쪽, 원작 p.234).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 아버지들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의 모든 것이 가짜라는 거야" (번역본 1권, 356쪽, 원작 p. 235).

"보시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 은폐를. 예수 그리스도는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였어" (번역본 2권, 21쪽, 원작 p. 249).

"각색되지 않은 복음서들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기독교 교회를 세우라는 지시를 내린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였어" (번역본 2권, 18쪽, 원작 p. 248).

 

자, 어떻습니까? 이 발언들을 모두 합해 놓으면, 정통 기독교는 당장 허물어져야 할 것 같아 보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은 모두 거짓이 되어 버리고, 기독교에서 가르쳐 온 모든 신학과 전통은 이방 종교들로부터 배워 조합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의 모든 믿음은 다 거짓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즐거웠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에 대해 별로 믿음이 없던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얼마나 당황을 했겠습니까? 실제로, 저는 이 소설을 읽고는, 마치 지진을 만난 사람처럼, "이게 다 웬 소리입니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발언들 중에 진실은 하나도 없습니다. 앞으로 차차 안내해 드리겠지만, 저는 성서와 기독교 기원에 대해 오랫 동안 연구해 왔기 때문에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저자는 성서와 기독교 기원에 대해 기본적인 연구도 하지 않은채, 떠도는 소문들을 조합해서 부정확한 정보를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저는 더욱 불편했습니다. 게다가 위에서 인용한 말들은 모두, 등장 인물 중 하나인 레이 티빙(Leigh Teabing)이 한 말인데, 이 소설에서 티빙은 영국 왕립 역사학회(Britisch Royal Historian)의 회원으로 소개됩니다. 마치, 역사에 대해 그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인 것같은 인상을 풍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내용들이 얼마나 근거없는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독자들은 그의 말들을 진실로 느끼게 되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이 소설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치 이야기된 것들이 모두 정확한 역사적 진실인 것처럼 독자를 속이는 이 소설의 힘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그 영향력은 더욱 강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저자가 치밀하게 그렇게 꾸민 것입니다. 2년 전에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저는 그냥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시리즈 설교를 위해 연구하는 중에 저자인 댄 브라운 (Dan Brown)의 정직성에 대해 점점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홈 페이지에서 그는 온갖 말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정직한 구도자(honest seeker)로 소개하고 있지만, 제가 볼 때는 상업주의와 센세이셔널리즘(sensationalism)에 물든, 오염된 작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그는 소설의 서두에 '사실'(fact)라는 제목으로 한 쪽을 사용하여 '시온수도회'와 '오뿌스 데이' (Opus Dei)에 대해 소개하면서,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덧붙입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예술작품과 건물, 자료, 비밀 종교의식들에 대한 모든 묘사는 정확한 것이다." (All descriptions of artwork, architecture, documents, and secret rituals in this novel are accurate.) 이 문장은 처음부터 독자를 오도하기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이 문장과 이어지는 소설의 구성적 특징은 독자로 하여금 마치 등장인물들까지도 생존하는 인물들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레이 티빙이라는 역사학자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는 역사적 진실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는 소수의 권위자이며, 그가 기독교에 대해 하는 말이 모두 진실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마지막 문장이 얼마나 독자를 속이고 있는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새 드러납니다. 저자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소설에 언급된 예술 작품과 건물, 자료, 비밀종교의식이 모두 실재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주는 인상은 그것들에 대한 해석도 모두 정확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저자로서는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에 나오는 내용들이 진실과 다르다는 지적을 받고, 저자인 댄 브라운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다음의 대화는 댄 브라운의 공식 홈 페이지에 올라있는 대화록에서 따온 것입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묻습니다. "이 소설 중 얼마만큼이 진실입니까?" (How much of this novel is true?)

댄 브라운의 대답입니다. "'다빈치 코드'는 소설입니다.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뜻이지요. 이 소설의 등장 인물들과 행동들은 모두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만, 여기서 언급된 예술작품이나 건물, 자료, 비밀의식 (예컨대, 다빈치의 그림, 영지주의적 복음서들, 히에로스 가모스 같은 것) 등은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가상의 인물들이 실재하는 이 대상들에 대해 해석하고 논쟁을 벌입니다. 가상의 인물들이 제기한 이론들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만, 독자는 스스로 이 이론들을 검토하고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 바램은 이 소설이 '믿음', '종교' 그리고 '역사'라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촉매가 되는 것입니다. (The Da Vinci Code is a novel and therefore a work of fiction. While the book's characters and their actions are obviously not real, the artwork, architecture, documents, and secret rituals depicted in this novel all exist (for example, Leonardo Da Vinci's paintings, the Gnostic Gospels, Hieros Gamos, etc.). These real elements are interpreted and debated by fictional characters. While it is my belief that some of the theories discussed by these characters may have merit, each individual reader must explore these characters' viewpoints and come to his or her own interpretations. My hope in writing this novel was that the story would serve as a catalyst and a springboard for people to discuss the important topics of faith, religion, and history.)

이어서 질문하는 사람이 다시 묻습니다. "하지만 '사실'이라고 하는 페이지는 이 소설 안에 담긴 단어 하나 하나가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 아닙니까?" (But doesn't the novel's 'fact' page claim that every single word in this novel is historical fact?)

 

댄 브라운의 대답입니다. "'사실' 페이지를 보면, 당신은 이 소설에서 언급된 문서, 의식, 조직, 예술작품 그리고 건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임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페이지는 등장인물들이 제기하는 이론에 대해 그 어떤 입장도 표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론들을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죠." (If you read the "FACT" page, you will see it clearly states that the documents, rituals, organization, artwork, and architecture in the novel all exist. The "FACT" page makes no statement whatsoever about any of the ancient theories discussed by fictional characters. Interpreting those ideas is left to the reader.)

 

이 즈음에 이르니,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지금은 은퇴할 나이에 이르신 그 목사님은 젊은 후배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는 인격자요 사상가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젊은 시절에는 술과 담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까지 그것을 끊지 못하고 있었답니다.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인터뷰를 거쳐야 하는데, 그분이 인터뷰를 위해 선배 목사님들 앞에 앉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도중에 한 분이 그 목사님께 묻습니다. "그래, 술과 담배를 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그 목사님은 이렇게 답하셨답니다. "지금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답으로 그분은 합격이 되었답니다. 그분은 지금 생각해 봐도 자신이 너무나도 기가막힌 대답을 했다고 농담을 하십니다. "지금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인터뷰 자리에서 하지 않고 있다는 뜻으로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런 뜻으로 대답했고, 심사위원들은 "과거에는 했지만 지금은 끊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매우 교활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댄 브라운이 이 소설을 통해 시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에게는 기독교를 해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단지, 그는 자신의 소설이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구도를 짰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하고, 많은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소설과 영화의 성공으로 그는 거대 갑부의 자리에 올라갈 것입니다. 이 성공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는 앞으로 또 어떤 음모설을 사용할지 자못 기대가 됩니다. 다음에는 이슬람교에 대해서 같은 시도를 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루시디 살만(Rushdie Salman)의 경우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죽음의 시' 라는 책에서 그가 이슬람교를 비판했다는 이유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살만에 대한 암살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그는 지금껏 숨어 다니고 있습니다.

 

4.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상업주의와 성공주의에 빠진 한 작가가 다른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무참히 모욕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한 예를 보았습니다. 댄 브라운이 가상의 등장 인물을 통해 기독교 신앙과 성경과 예수님에 대해 제기한 내용들은, 그것이 진실이라면, 마땅히 확인되고 공개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실도 아니요 진실도 아닌 것들을, 어떤 이권을 지키기 위해 은폐하고 날조하고 억압해 왔다는 혐의는 참으로 심각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우리의 모든 믿음의 근거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등장인물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모두 가짜인 것처럼 말해 놓고는,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발뺌을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는 소설가로서의 상업적 성공보다는 문학가로서의 진실의 추구에 더 관심을 두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그는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 더 철저히 공부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는 이처럼 거짓 정보들을 흘려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은폐해 온 역사의 진실을 그가 발견했다면, 소설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탐구를 통해서 밝혀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 소설에 대해 제가 가지는 불만이요 아쉬움입니다.

 

이 소설이 독자의 마음에 던져주는 기독교의 모습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음모와 모략과 수단이라도 가리지 않는 집단입니다.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혐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기독교가 2천년의 역사 속에서 그런 잘못을 종종 범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기독교가 대략 300년 중반 이후부터 로마 제국의 기득권자가 되면서 그런 잘못은 더 빈번해졌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를 통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던 이 시기를 기독교의 타락의 전환점으로 해석합니다. 기독교회가 재산과 권력과 폭력을 손에 쥐면서 기독교 정신이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기독교회가 혹은 그리스도인이 물질이나 권력이나 폭력에 의지하는 순간, 그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잃어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그토록 자주 경계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실수를 많이 범해 왔습니다.

 

저는 지난 수난 주간에 멕시코 선교지를 돌아보면서 유카탄 반도(Yukatan Peninsula)에 있는 이짜말(Isemal)이라는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타운은 전체가 '성전 도시'(temple town)였습니다. 프랜시스칸 성전(Templo Franciscano)이라는 천주교 성당을 중심으로 모든 집들이 빽빽히 연결되어 있고, 타운 전체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남미에 와서 세 번째로 세운 '식민 도시'(colonial city)라고 합니다. 저는 그 성당의 규모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 성당의 주교 신부라면 하늘 나라가 부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타운을 돌아 보면서, "그래, 이 정도의 기득권을 지키자면, 교회가 폭력을 써서 힘 없는 민중들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는 '모두', '언제나' 그랬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모두' 그렇게 이권에 눈이 어두웠던 사람들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이권의 추구에 있지 않고,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듯, 진리를 찾아가는 일에 있습니다. 교회가 자주 잘못을 범해 왔지만, 지난 2천년 동안, 교회 안에는 언제나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교회는 그러한 예언자들의 피와 눈물로 인해 오늘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복음의 장사꾼'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퍼런 의식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예언자들을 끊임없이 보내 주셨습니다. 그들은 어떤 기득권도, 어떤 명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직 진리를 추구할 뿐이었습니다.

 

1517년, 당시 타락하고 부패했던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교리들을 낱낱이 조사하여 95개 항목의 개혁안을 제시했던 가톨릭 수도사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기억하십시다. 그 일 이후로 그는 기득권을 수호하려던 교권으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위협에 자주 떨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성직을 빼앗겨도, 목숨을 잃어도, 진리를 떠날 수 없다는 결의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보름스(Worms) 의회에서 최후의 재판을 받기 위해 가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전능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제가 싸우는 이 싸움이 얼마나 이상한지요! …… 세상이 찾는 것은 오직 빛나고 강하고 크고 높아 보이는 것 뿐! 제가 그것에 눈을 돌린다면 망해 버렸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 오 하나님, 오 나의 하나님, 오 나의 하나님, 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논리에 맞서 제 편에 서 주소서. 당신이 그래 주셔야 합니다. 사실, 이 싸움은 제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의 문제입니다. 저 자신만 따진다면 세상 권세 잡은 자들과 맞설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저도 편안하고 조용한 나날을 지내고 싶습니다. 이 싸움은 당신의 싸움입니다. 의롭고 영원한 것을 위한 싸움입니다. 하오니, 제 곁에 서 주소서……. 주님, 어디 계십니까? 제게 오소서. 제게 오소서. 저는 희생양처럼 이 의로운 일을 위해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싸움은 당신의 의로운 뜻을 위한 것입니다. 저는 영원히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비록 지금보다 더 많은 마귀들이 대적하더라도, 비록 당신이 지어 주신 제 몸이 소멸하더라도, 세상의 압력에 밀려 제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당신의 이름으로 허락하소서. ('기도선집', 463-4쪽)

 

5.

실로, 기독교 신앙은 댄 브라운이 말하는 것처럼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폭력으로 인해 오늘의 모습을 이룬 것이 아니라, 마르틴 루터처럼 생명을 내걸고 진리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 역사를 거쳐 끊임없이 나타났습니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이름을 남기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억에 이름을 남기는 것에 대해 괘념치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하나님 앞에 이름을 남기는 일뿐이었습니다. 진리를 따라, 진리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삶이 곧 하나님께 이름을 남기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진리를 따르고 진리를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득이 아니라 진실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31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첫 번째 요건은 그분의 말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머물러 있다'라는 말은 지속성(continuity)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늘 배우고 늘 생각하여 그것이 몸에 배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제자로서의 자격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돈을 많이 법니까? 만사 형통합니까? 시험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시험에 합격합니까? 실력이 없는데도 경쟁에서 이깁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32절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며, 진리를 알게 되면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소설은 참된 신앙에 대해 역설적으로 교훈을 던져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더 없이 명료하게 정의하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진리, 진리,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진리만을 찾아가는 진지한 구도자들로서 우리 자신의 정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위해, 진리를 따라, 진리의 방법으로 살아가기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진리가 아니라면 언제라도 이 신앙을 버릴 용의가 있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믿음이 진리인 한, 어떤 희생도 무릅쓰고 이 길을 가려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분명히 압니다. '다빈치 코드' 신드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지만, 이것도 역시 한 번 지나가면 잊혀지는 해프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진리는 영원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헛된 이야기들은 오래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도전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무장해야 할 것은 논리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이 소설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가지고 우리 신앙에 대해 도전해 오는 사람들이 있다면, 사실 여부를 따져 가며 논쟁을 벌이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진리의 사람이 되어 진리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는 논쟁으로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삶으로 드러날 때 진리는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며, 그 앞에서 모든 논쟁은 힘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더욱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할 때입니다. 더욱 참된 제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때입니다. 이 소설과 영화의 도전 앞에서 겸손히 물러 앉아 스스로를 돌아볼 때입니다. 교회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도전을 받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존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찮아지고 우스워졌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교회가 진리의 공동체로서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사람들로서 사는 데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소설을 통해 오늘 우리를 깨워 일으키십니다. 무엇을 왜 믿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더 큰 도전도 있을 것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 깨우침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 깨질 준비가 된 사람은 과연 누구입니까?

 

진리의 주님,
헛된 호기심으로부터 저희를 구하소서.
아무 목적도 없는 논쟁을 즐기는 죄된 습성으로부터
저희를 구하소서.
오직 주님의 말씀에 붙들리게 하시어
진리를 알고 진리를 살게 하소서.
그 무엇도
진리의 길에 선 저희의 걸음을 흔들지 않게 하소서.
진리의 영이시여,
이 시대의 정신을 붙들어 주소서.
거룩한 것을 조롱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고 이득을 찾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거룩한 것을 거룩히 여김으로 얻는 기쁨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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