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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비" (Mystery That We Should Seek)
골로새서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539 추천 수 0 2011.03.30 17:21:06성경본문 : | 골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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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6. 5. 7 김영봉 목사
4회 연속 설교: '다빈치 코드 제대로 보기' (3)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비" (Mystery That We Should Seek)
골로새서 2:1-5
1.
소설 '다빈치 코드'가 성경에 대해 제기하는 가장 심각한 혐의는 지금 우리 성경 안에 있는 네 복음서들이 특정한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개작되고 날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와 관련된 ‘가장 은밀한 비밀’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저는 두 번째 설교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오늘 저는 복음서들과 관계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비밀’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비밀은 제가 상상하고 꾸며낸 것이 아니라, 충분한 역사적 증거가 있는 비밀입니다. 이미 역사가들은 알고 있었는데, 일반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비밀입니다.
첫 번째 비밀은 대략 주후 170년에서 175년 경에 타시안(Tatian)이라는 초대 교회 지도자가 네 복음서들을 한데 묶어 ‘통합복음서’를 만든 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 이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네 복음서들이 여러 교회에서 권위있는 성경으로 읽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네 복음서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점들을 자세히 연구하면 충분히 납득이 되지만, 그냥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에게는 그 차이점들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드리고 있는 주기도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6장 9-13절에 나오는 주기도문과 누가복음 11장 2-4절에 나오는 주기도문이 많이 다릅니다. 이런 차이점들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때론 의아스럽고, 때론 혼란스럽고, 또 때론 당황스럽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만나다 보면, 네 복음서를 하나로 묶어서 ‘통합복음서’를 만들고 네 복음서들은 모두 제거시키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렇게 하면 믿는 사람들에게 더 이로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주후 160년 경에 타시안이라는 교회 지도자가 바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디아테싸론’(Diatessaron) 이라고 하는 ‘통합복음서’를 만들었습니다. 불행히도, 이 단권복음서의 원본이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아랍어 본문과 시리아 본문은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그 원래 모습이 어땠는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유세비우스(Eusebius)라는 교회 역사가의 기록을 보면, 이 단권복음서는 만들어진 지 200여년이 지난 다음에도 여러 교회에서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결국 단권복음서라는 간단한 해법을 버리고 네 권의 복음서를 성경으로 택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저는 이 결정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결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초대 교회와 고대 교회의 정직성을 증명해주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고대 교회가 '다빈치코드'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뭔가를 은폐하고 조작하는 조직이었다면, 당연히 단권복음서를 택하고 나머지 네 복음서들을 폐기시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때로는 혼란을 주고 때로는 당황스럽게도 하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네 개의 복음서를 그대로 묶어 성경으로 편찬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당장의 편리를 위해 진실을 해쳐서는 안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2.
복음서와 관계하여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두 번째의 비밀은 이것입니다. 단권복음서 ‘디아테싸론’이 만들어질 즈음에, 마르시온(Marcion)이라는 또 다른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네 복음서를 개작하는 일에 손을 댔다는 것입니다. 마르시온은 ‘영지주의’ (Gnosticism)라고 부르는 사상을 기독교에 접목시키는 일에 큰 역할을 했고, 이 일로 인해 이단자로 배척당한 인물입니다.
자, 여기서 잠시, ‘영지주의’라는 사상에 대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영지주의는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부터 지중해 연안에 유행하던 종교 철학 사상입니다. 물질과 육신을 악한 것이라고 믿고, 참된 구원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데 있다고 믿는 사상입니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을 얻으려면 깨달아 ‘영적인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상을 영지주의라고 부릅니다. 이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지식을 찾아 이 종교, 저 종교, 이 지도자, 저 지도자를 전전합니다. 그리고는 뭔가 해답을 발견했다 싶으면 그 종교를 자기들의 사상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기독교도 이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았습니다. 기독교는 물질과 육신을 악한 겻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물질과 육신을 전부로 여기지 말고 영적인 차원이 있음을 믿으라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물질과 육신을 악하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영지주의 사상을 경계했습니다. 신약성경의 증거로 볼 때, 이미 50년에서 60년 사이에 영지주의적인 사상이 기독교 안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곳이면 어디든 이미 영지주의 사상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완전히 떨쳐버리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마치, 기독교 복음이 우리 나라에 전해질 때, 아주 쉽게 미신적인 믿음과 섞였던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물질과 육신은 악하고,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며, 영적인 지식을 얻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는 그리 큰 문제가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은 결과, 그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빠졌습니다.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육신을 무참히 학대하는 금욕주의로 흘렀습니다. 악한 육신을 학대하는 것만이 영혼을 잠시나마 자유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지를 얻어 이미 해방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육신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미 얻은 구원을 해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대로 행동했습니다. 특히 성적인 타락이 심했던 당시 사회에서 이 사람들은 마음껏 성적 부도덕을 즐겼습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들의 자유요 특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대 교회가 영지주의를 반대했던 것은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같은 이단적인 경향들은 기독교 2천년 역사 중에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이런 사상에 빠져 버립니다. 제가 그 동안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도 "나는 이미 초보적인 수준을 뛰어 넘었으니, 도덕률에 저촉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욕구를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종파에 속아서 그렇게 믿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혼자 책을 읽고 생각하다가 그렇게 오도된 것입니다.
반면, 그렇게 가르치는 종파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오랫 동안 문제가 되어 왔고 지금도 그 영향력을 계속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소위 ‘구원파’가 그 예입니다. 이 종파에서는, 사람이 일단 죄사함의 원리를 깨달아 ‘구원’을 받으면 양심의 모든 죄책감에서 해방을 받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하는 거짓말이나 육신적인 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구원은 영혼이 받았으므로 육으로 하는 것은 영혼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깨달았으면 다시 범죄도 없고,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며, 생활에서 짓는 죄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를 약속하는 ‘복음’처럼 들리지만, 실은 초대교회로부터 기독교가 싸워 온 이단 사상입니다.
3.
마르시온은 기독교를 영지주의 사상으로 변질시켜 꽤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정통 기독교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정통 기독교가 자기의 추종자들을 빼앗아가지 않도록 뭔가 장치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르시온은 경전을 편집하여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가 만든 성경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구약성경은 모두 금지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물질과 육신을 만든 악한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독교인들이 읽고 있는 네 개의 복음서 중에 ‘구약의 악한 신’과 관련성이 깊은 마태복음서, 마가복음서, 요한복음서를 제외시켰습니다.
셋째, ‘구약의 악한 신’과 가장 관련성이 적은 누가복음서만을 성경으로 택하되, 그 내용 중 ‘구약의 악한 신’과 관련되는 내용들은 모두 삭제했습니다.
넷째, 바울이 쓴 편지들을 하나로 묶되, 역시 ‘구약의 악한 신’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모두 삭제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르시온은 ‘복음서와 사도서’ (The Gospel and the Apostle)라는 ‘그들만의 성경’을 편집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 동안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진짜 비밀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복음서에 손을 댄 사람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아니고, 고대 교회 감독들도 아닙니다. 영지주의의 지도자였던 마르시온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들의 사상을 담은 복음서와 편지들을 창작해 냈습니다. 나그함마디(Nag Hammadi)에서 발견된 복음서들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창작된 것들입니다. '다빈치코드'에서 사용하고 있는 '빌립 복음서'와 '마리아 복음서' 그리고 다른 모든 문서들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서들은 예수님을 영지주의자로 만들고, 기독교를 영지주의로 만들기 위해 창작된 것들입니다.
자, 사정이 이렇다면, 어디에 더 믿음을 두시겠습니까? 단권복음서를 물리치고 살아남은 네 복음서입니까? 아니면, 자신들의 사상을 위해 철저하게 재편되고 창작된 영지주의 복음서들입니까? 단순한 해법을 거부하고, 있을지도 모를 혼란을 감수하고, 진실을 선택한 정통 교회입니까? 아니면, 자신들의 사상대로 예수님을 재해석한 영지주의입니까?
'다빈치코드'에서 자주 나오는 말 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승리한 사람이 역사를 쓰면서 자신을 진리의 사람으로 정당화시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말하는 진리의 사람이 언제나 진리의 사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통 기독교가 승리자가 된 것은 진리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힘을 빌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정통 기독교는 진리이고, 영지주의는 이단이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통 기독교와의 싸움에서 밀려난 영지주의적 기독교가 더 진리에 가까웠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가 이단으로 밀려난 것은 정통 기독교인들과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사상 논쟁을 하던 두 편 중 한 편이 힘을 얻어 다른 편을 이단으로 몰아세우고 단죄하고 박해하는 일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요즘도 자주 신학교수들이 이단으로 몰려 해직당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신학 사상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권을 가진 사람들이 경쟁 세력을 축출하는 수단으로 '이단'이라는 말을 오용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하지만 모든 이단 논쟁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난 1 세기 동안 한국 교회는 수많은 이단 종파와 씨름을 해 왔습니다. 그들 중, 실제로 기독교의 사상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사람들을 오도하여 패가 망신하게 하는 사이비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비 종파들이 모두 힘이 없어서 이단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4.
제가 소설 '다빈치코드'를 읽고 느끼는 염려 중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이 소설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사실들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왜곡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만, 이 소설의 또 다른 차원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소설은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 독자들에게 영지주의와 유사한, 아주 위험한 종교 사상을 퍼뜨릴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형편없이 날조된 기독교의 대안은 ‘시온수도회’ (the Priory of Sion)가 행하고 있는 신비적인 종교의식인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소피(Sophie)는 우연히 시온수도회의 수장(grand master)인 자기 할아버지가 다른 추종자들과 행한 비밀스러운 종교 의식(a secret religious ritual)을 목격하게 됩니다. 외부인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남성 회원들은 검은 색, 여성 회원들은 흰색의 가면과 가운을 입고 노래하며 춤을 춥니다. 그러는 가운데, 소피의 할아버지와 어느 여인이 중앙에서 성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이 모습을 본 소피는 도망쳐 나오고, 그 이후로 할아버지를 더 이상 만나지 않습니다.
소피는 역사학자 레이 티빙(Leigh Teabing)를 통해 그 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그에 의하면, 헬라어로 ‘히에로스 가모스’(Hieros Gamos)라고 하는 이 집단적인 성교 의식은 변태적 행위가 아니라 아주 신성한 의식입니다. 성욕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신비로운 전통으로서, 신을 경험하는 가장 확실한 통로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생명을 창조하는 여성의 능력은 여성을 신처럼 신성하게 만들고, 따라서 성적인 관계를 통해 남성은 그 여성을 통해 영혼의 완벽함을 되찾고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신을 경험하는 통로를 독점하기 위해 이 의식을 금지시키고, 성을 더럽고 불결한 행위로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설명을 듣고 나자, 소피는 할아버지가 어느 여인과 연출했던 그 부정하고 추한 장면이 신성하게 느껴졌습니다.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chapter 74, 74장).
제가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시겠습니까? 이 소설은 분별력이 없는 젊은 독자들을 신비주의적이고 혼합주의적이며 반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종교 사상으로 오도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날조와 은폐와 위선으로 얼룩진 제도적 종교를 버리고, 모든 사회적 규율과 도덕률을 초월하여 자유를 누리도록 돕는 종교를 찾도록 오도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히에로스 가모스라고 묘사되어 있는 그 비밀 성교의식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가장 성스러운 종교 의식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거의 모든 종교를 타락시켰던 병적인 타락 현상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대개의 사이비 종파들은 성적인 부도덕을 거룩한 것으로 미화시키고, 마침내는 집단적인 혼음 사건으로 파국을 맞곤 했습니다. 오늘 날에도, 소위 ‘수준높은 영성’ 혹은 ‘열린 영성’을 표방하면서 사람들을 호도하여 타락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사이비 종교 운동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히, 제도적 종교가 점점 매력을 잃어가는 이 미국 안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이 소설이 이같은 사이비 영성 운동에 대한 경계심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젊은이들을 오도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아, 그건, 수준 낮은 사람들이 범한 실수이고, 우리같이 수준 높은 사람들은 본래의 의미를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그 교만입니다. 그 영적 교만이 바로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참된 종교는 때로 도덕을 초월하지만, 도덕을 역행하지는 않습니다. 참된 종교는 때로 사회 규범(social norm)을 초월하지만, 그것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참된 종교는 절대 진리를 추구해 가면서 사회의 도덕과 규범을 깨우고 변화시키지, 그것을 무참하게 짓밟지 않습니다. 참된 종교는 역사를 초월하지만 역사로부터 도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거대하고 거시적인 비전을 마음에 품고, 역사 속으로 들어가 역사를 변혁시키기 위해 헌신합니다. 그것이 참 종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한 장소에 자신들만의 천국을 만들어놓고 비밀스러운 의식을 행하는 것은 참된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는 일반 사회와 분명히 다릅니다. 하지만 종교가 바깥 사회로부터 뭔가를 숨기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 종교는 이미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신비의 종교입니다만, 그 신비는 드러내고 나눠야 할 신비지, 감추고 은폐할 신비가 아닙니다. 그런 신비를 추구한다는 것은 이미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참된 신비, 참된 비밀을 전하고자 합니다. 물론, 그 비밀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감추어져 있던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가 알고 있었고 들었던 것인데,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추어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우리 중에 일하고 계시며, 모든 진리가 그분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읽은 골로새서의 말씀으로 눈을 돌리겠습니다. 2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선교하고 있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가 이 글을 쓸 때, 영지주의의 위협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아십니까? 영지주의자들은 ‘비밀스러운 지식’ 즉 ‘영지’를 추구하여 깨달으라고, 그것이 참된 자유와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면서 골로새 교인들을 현혹시키고 있었습니다. 이 유혹에 대해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단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지를 찾아, 신비를 찾아, 비밀을 찾아 우왕좌왕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마주하고 있던 위험이 오늘날 우리가 혹은 우리 자녀 세대가 마주하고 있는 위험과 얼마나 비슷한지요! 영지주의의 위협은 시대를 지나면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더 논리적이며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 교묘한 말로써 우리를 속여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일을 방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지 못하면, 우리의 삶도 온전한 모습을 잃어버립니다. 겉으로는 ‘깨달음을 얻는 자’ 혹은 ‘구원받은 자’ 혹은 ‘수준 높은 자’라는 허울을 표방하고, 속으로는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사는 것을 자유의 삶으로, 구원의 삶으로, 깨달음의 삶으로 미화시킵니다. 소위 ‘깨어있는 종교인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에게 진실하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명분에 자신을 내어주고는 속으로 은밀한 쾌락을 즐깁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사이비 영성의 위험입니다.
바울 사도는 5절에서 "나는 육체로는 비록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으며, 여러분이 질서 있게 살아가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믿음이 굳건한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서 있게’라는 말과 '굳건한'이라는 두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군사 용어입니다. 적군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대오를 흐뜨르지 않고 견고하게 서서 대항하는 모습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적군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상황입니다. 이 공격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대책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 대오를 다시 짜고, 우리가 선 자리에서 견고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참된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붙들고, 그분의 진리 안에서 참된 삶을 살아가면, 이 공격은 결국 멎을 것이고, 진리의 빛은 다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일반 운동 경기에서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라고 말하지만, 진리의 싸움에서는 "방어가 최선의 공격이다"라는 말해야 합니다. 참된 진리 위에 굳게 서서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공격은 없습니다.
여러분, 이 혼란한 시대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바울 사도가 권고한 것처럼,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참된 그리스도인로서의 온전한 삶에 더욱 정진하는 것이 가장 바른 길이요 가장 효과적인 대책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드러나지 않게, 우직하게, 진실하게 진리의 길을 가는 성도들을 이 시대에 더 간절히 찾으시는 것 아닐까요?
하늘의 비밀이신 주님,
저희를 흔들려는 교묘한 속임수에 흔들리지 않게 도와 주소서.
거짓 비밀을 찾고
거짓 신비에 홀리지 않게 하소서.
참된 비밀이신 주님을 찾고
주님 안에서의 신비로운 삶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영적 교만이 있다면 허물어 주시고
영적 불안이 있다면 고쳐 주소서.
주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우직하게, 겸손하게, 진실하게, 정직하게
진리의 길을 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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