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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깨우는 나팔소리

빌립보서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487 추천 수 0 2011.03.30 17:24:30
.........
성경본문 : 빌2:6-11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06. 5. 14 김영봉 목사

4회 연속 설교: '다빈치 코드 제대로 보기' (4) "우리를 깨우는 나팔소리"

--빌립보서 2:6-11

 

1.

"성서는 하늘에서 팩스로 도착한 것이 아니야" (1권 350쪽). "The Bible did not arrive by fax from heaven" (원작, p. 231).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역사학자 레이 티빙경이 한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성서는 신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이란 말일세. 구름에서 기적처럼 떨어진 것이 아니라, 격동의 시기에 인간들이 만들어낸 역사적 기록이란 말이지. 그리고 그것은 무수한 변형과 첨가, 개정 작업을 거치며 진화해 온 것이라네. 성서는 역사상 한 번도 결정판을 가져 본 적이 없어.

The Bible is a product of man, my dear. Not of God. The Bible did not fall magically from the clouds. Man created it as a historical record of tumultuous times, and it has evolved through countless translations, additions, and revisions. History has never had a definitive version of the book.

"성서는 하늘에서 팩스로 도착한 것이 아니야." 여러분,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이 말을 듣고 놀라실 분이 계십니까? 이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인 소피는, 마치 성경을 ‘ '하늘에서 온 팩스’로 알아왔던 사람처럼, 레이 티빙의 말에 크게 놀랍 니다. 여러분도 그런 느낌이십니까? 여러분도 성경을 그렇게 여겨오셨습니까?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어떤 사람이 갑자기 성령에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받아 쓴 하늘의 계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충격을 좀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레이 티빙이 한 이 말은 진실입니다. 성경은 하늘에서 보낸 팩스 메시지가 아닙니다. 요즘 세대의 표현으로 한다면, 성경은 '하늘로부터 다운로드 받은 문서’(down-loaded document from heaven)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인할 수도 없고 부인해서도 안 되는 사실입니다. 제가 그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의 처음 시작 부분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엮어냈습니다. 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써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각하께서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한 사실임을 아시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눅 1:1-4).

 

이 서문에서 누가복음 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료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이성을 활용하여 정밀하게 조사하여,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 힘쓸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안에 포함된 여러 편의 편지를 쓴 바울 사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편지를 시작할 때마다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고전 1:1). 이 증거는 무엇을 뜻합니까? 성경은 무아지경에서 하나님이 부르는 대로 받아쓴 것이 아니라, 인간 저자들이 제 정신을 가지고 쓴 글이라는 뜻입니다.

 

2.

그런데 이 지점에서 조심할 일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쓴 것이므로 하나님의 진리와는 상관 없다"고 단순하게 결론 지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레이 티빙이 이어서 던지는 말이 그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성서는 신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이란 말일세"(The Bible is a product of man, my dear. Not of God.)?이 말은 진실의 반쪽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인간 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라는 점에서 이 말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지 않다’는 의미를 깔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위험한 발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통해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 이르니, 지금은 돌아가신 어느 장로님과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신학대학에서 가르칠 때 같은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던 분인데, 그분이 가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원고 설교를 반대합니다. 강단에 올라가서 성령께서 내려주시는 말씀을 전해야지, 미리 준비한 원고를 가지고 올라가 읽으면 되겠습니까? 그건 인간의 말이죠! 준비 기도를 충분히 하고 나서 강단에 올라가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해야, 그게 진짭니다." 직업 군인 출신이셨던 그 장로님은 마치 절대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확언하셨습니다. 그분의 확신이 워낙 강해서 대꾸해 봐야 소용이 없으리라고 느꼈기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그냥 웃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또 그런 말씀을 하셔서, 이렇게 반문한 적이 있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은 성령께서 강단에서만 활동하신다고 믿으십니까? 설교자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설교 준비를 하는 동안에는 성령께서 활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의 지식과 생각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바를 분별하면서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더 진짜 아닐까요?" 그랬더니 그분이 "아, 그래도, 강단에서 말씀을 받아 선포하는 거, 그게 진짭니다. 목사님도 그렇게 한 번 해 보세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렇지, 쓸 데 없는 말을 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그리고 깊이 퍼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들과 만나 이야기를 해 보면,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명한 음성을 듣기를 기대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는 중에 깨달음을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시합니다. 형제 자매들과 영적 교제를 하는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도 무시합니다. 마음을 잠잠히 하고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주변을 살펴 보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는 귀를 막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명료하게 듣기를 원합니다. 병에 걸렸을 때도 그렇습니다. 기적적으로 한 순간에 깨끗이 치료되는 것만을 하나님이 주시는 치료라고 생각합니다. 병원 치료를 통해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치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매사를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을 구분해 놓고, 하나님의 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인간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레이 티빙이 한 말 즉 "성서는 신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일세"라는 말이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 쓴 것이니 신의 것일 수 없다는 말에 숨겨져 있는 함정에 빠지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한 순간에 떨어진 팩스 메시지여야만 하고, 만일 그것이 인간에 의해 쓰여졌다면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착각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성경을 그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성경이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저자에 의해 쓰여진 것이며, 그 안에는 인간적인 요소들이 담겨 있음을 애써 부정하면서, 눈을 질끈 감고,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불러주신 말씀(dictated by God)으로 믿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엄연한 진실을 무시하고 제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은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이 강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무너지기 쉬운(vulnerable) 믿음입니다. 이런 분들의 경향을 보면, 눈을 질끈 감고 무턱대고 믿거나, 눈을 뜨고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하려 합니다. 눈을 뜨고 믿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3.

기독교 신앙은 눈을 뜨고 믿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현실을 무시하고 믿자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눈을 뜨고, 현실을 보고, 그 현실을 전부로 알아, 믿음을 포기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되, 그 너머에 있는 영적 실체를 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고는, 교묘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견고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진정으로 강한 믿음입니다.

 

성경은 한 순간에 하늘에서 떨어진 팩스 메시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권력자가 혹은 어느 종교 단체가 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킨 인간적인 문서도 아닙니다. 소설 '다빈치 코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에서 인간 예수를 신의 아들로 둔갑시키고, 인간이 쓴 문서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승격시킨 것처럼 오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후 325년 즈음에 이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네 복음서들은 모든 교회에서 성경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주후 100년 경부터 네 권의 복음서들은 함께 묶여 여러 교회에서 읽히고 있었습니다. 그 책들이 하나님의 영감(inspiration of God)을 담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영지주의자들만이 예외였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들도 그 시기에 여러 교회에서 성경으로 읽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거나 지시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교회에서 그 책들을 읽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교회들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된 것입니다. 다만, 유다서라든가 요한계시록같은 책들은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책들이 신약성경 안에 포함된 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결정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네 복음서들과 바울의 편지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손을 쓰기 훨씬 전에 벌써 모든 교회들로부터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고백도 그렇습니다. 소설 '다빈치 코드'는 마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인간이었던 예수를 신으로 승격시킨 것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내 말을 잘 들어요. 종교들을 섞으면서 황제는 새로운 기독교 전통을 강화할 필요를 느꼈소. 그래서 소집했던 것이 ‘니케아 공의회’라고 알려진 교파를 초월한 그 유명한 회의란 말이야. 이 회의에서 기독교의 많은 부분이 토론되고 투표에 부쳐졌어. 부활절 날짜와 주교의 역할, 종교 성사의 행정 체계, 그리고 물론 예수의 ‘신성’까지. …… 신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위상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되고 ‘투표’에 부쳐진 것이었어. 그리고 상대적으로 근소한 차이로 [예수의 신성이 결정되었지]. (번역본, 1권 353쪽)

Indeed, during this fusion of religions, Constantine needed to strengthen the new Christian tradition, and held a famous ecumenical gathering known as the Council of Nicaea. At this gathering, many aspects of Christianity were debated and voted upon the date of Easter, the role of the bishops, the administration of sacraments, and, of course, the divinity of Jesus. …Jesus’ establishment as ‘the Son of God’ was officially proposed and voted on by the Council of Nicaea. [And the decision was made by] a relatively close vote. (p. 234)

 

이 말에 의하면, 주후 325년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예언자 혹은 위대한 교사로 믿고 따랐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 회의에서 예수님을 신으로 승격시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을 잠시만 살펴 보아도 이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신적인 존재로 고백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네 복음서보다 더 일찍 쓰여진 바울 사도의 편지들을 보면 사정은 더 분명합니다. 바울의 편지들은 대략 4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쓰였는데,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적인 존재로 고백하고 가르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더구나, 바울의 편지 안에는 바울보다 훨씬 먼저 믿은 사람들이 만든 찬송시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것은 어떤 권력자나 공의회의 결정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을 알지 못할 수 많은 초대 교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체험하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오늘 본문으로 읽은 빌립보서 2장 6-11절입니다. 다시 한 번, 눈여겨 보십시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찬송시는 바울 사도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 이미 만들어서 예배 때 사용하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빌립보서가 쓰여지기 훨씬 이전에, 이름 모를 초대교인들이 그들의 신앙 체험에 기초하여 이 노래를 썼다는 뜻이 됩니다. 결국, 예수님을 신으로 믿는 믿음은 후대에 정치적 목적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초대 교인들의 삶 속에서 자발적으로 터져 나온 고백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습니다.

 

4.

기독교 신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들에 의해 경험되고, 고백되고, 확인되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와 신약 성경들이 그렇습니다. 이 책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쓰였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면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한 지역, 한 교회에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지중해 연안에 있는 여러 도시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약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렇게 읽혀지고 검증되고 시험되었습니다. 이렇듯, 오랜 기간 동안 믿음의 선배들의 검증 과정을 거쳐서 전해진 것이기 때문에, 저는 성경을 더 사랑하고 믿습니다. 저는 인간을 통해 활동하시고 역사를 통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 전통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 신앙의 전통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근소한 표 차이로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이 때에 예수님의 신성을 투표에 부쳤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 아리우스(Arius)라는 탁월한 신학자가 출현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론을 펴서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니까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투표를 한 것은 아리우스의 신학에 대해 찬성할 것이냐 반대할 것이냐를 물은 것입니다. '다빈치 코드'는 이렇게 실시된 투표에서 근소한 표차이로 예수의 신성이 결정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318명의 감독들이 모인 그 회의에서 다섯 명만이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정치적 목적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들의 체험에 근거하여 고백한 믿음입니다. 그 경험은 한 두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동일한 경험을 하였고, 그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도마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교회 지도자들이 신학 이론을 정립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이름을 알지 못할 보통 사람들의 일치된 고백을 자료로 삼아 정리했을 뿐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신학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과 고백이 먼저 옵니다. 신학은 체험과 고백을 해석하고 정리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이 신앙의 현장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험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은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시다"라는 니케아 신앙 고백을 귀하게 여깁니다. 거기에 모인 감독들이 절대 다수의 투표를 통해 확정한 교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때까지 거의 3백년 동안 수많은 신자들에 의해 체험되고 고백되고 확인된 바를 정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탁월한 신학자의 말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된 고백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깁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가르침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통해, 역사 속에서 오랫 동안 검증되고 확인된 진실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깁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바로 오늘 제가 그리고 제가 아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바와 일치되기 때문에 귀하게 여깁니다.

 

5.

이제, 네 번에 걸친 설교 시리즈를 마무리합니다. 긴 여행에 동참해 주신 성도님들께, 그리고 방송을 통해 혹은 인터넷을 통해 관심을 가지고 이 여행에 동참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어려운 기간이었을지 모릅니다만, 여러분의 인내로 인해 많은 분들이 좋은 안내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로 인해 감사하게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장로님께서 제게 물으셨습니다. "이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을 권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반대하시겠습니까?" 답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이나 영화를 주제로 하여 신앙의 문제에 대해 누군가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소설도 읽고 영화도 보기를 추천합니다. 물론, 이 설교 시리즈를 모두 소화하는 일도 필수적입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누구와 만나 대화를 하더라도 좋은 결실을 얻을 것입니다. 다만, 논쟁을 통하여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태도로 임하지 마시고, 베드로전서 3장 16절에서 권고하고 있듯이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임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뭐, 좀, 재미있는 거 없나?"하는 심정으로 이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려는 분이라면, 그 시간에 다른 책을 읽거나 다른 영화를 보라고 권고합니다.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에 마음을 팔 여가가 없습니다. 흥미진진하면서도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유익한 책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에 대해 혹은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해 주는 영화가 얼마나 많습니까? 굳이 신앙에 관계된 영화만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영화도 그렇고, 미국 영화도 그렇고, 잘 분별해 보면, 유익한 것들이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빈치 코드 신드롬’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몇 가지 생각해 보고 마치려 합니다. 제가 이 시리즈 설교

를 마련한 것은 일방적으로 이 소설을 공격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이 신드롬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에 있어 무엇이 제일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바로 ‘진실’입니다. 이 소설은 종교가 얼마나 허위로 만들어질 수 있으며, 종교인들이 허위에 깊이 빠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이 소설이 그리는 것처럼 그렇게 거짓된 조직체가 아닌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그리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날조되고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교회와 성경과 믿음이 진실 위에 세워진 것임을 확인하면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인하지 못할 일은, 교회가 비록 진실에 기초하여 시작되었으나, 때때로 이권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버린 일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 개인들도, 진실을 앞세우기 보다는 눈 앞의 이권을 위해 거짓을 택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일들이 오늘도 자주 일어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오도된 신앙인들(misguided believers)이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니, 바로 여러분과 제가 그런 잘못을 범하게 되지나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경각심을 겸손하게 받아들이십시다. 어떤 희생과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하나님께서 이끄시는대로 진실을 따라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그리고 우리 교회가 진실을 가장 우선하는 교회가 되도록, 함께 기도하며 노력하십시다.

 

6.

둘째, 이 신드롬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전통과 정신을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우쳐 줍니다.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고는, 기독교에 대해 늘어놓는 근거도 없는 이론들 때문에 지진을 만난 사람처럼 흔들린다는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 인들의 믿음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반증해 줍니다. 사실, 이번에 시리즈 설교를 하면서 저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설교를 통해 ‘은혜만 받으려는’ 성도들의 습성 때문이었습니다. 설교 중에 우리의 믿음과 관련된 역사적 진실들을 다루어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은혜가 없다"는 불평이 나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6회 정도 하려 했는데, 4회로 줄인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강단들이 소위 ‘은혜스러운’ 이야기만 하다 보니, 믿음의 기초를 다지는 일에는 소홀해왔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 이 정도의 허무맹랑한 이론에도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여러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고전 3:2).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신앙의 수준에 따라, 아직도 젖만 먹어야 하는 분들도 계시고, 죽을 먹어야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중 대부분은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견실한 건강을 다질 수 없습니다. 설교를 통해 재미와 은혜를 찾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고 들어가는 일도 필요합니다. 설교자인 저에게도 그런 노력이 필요하고, 여러분에게도 그런 음식을 반기고 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셋째, 이 신드롬은 우리의 신앙 전통과 정신을 확인할 뿐 아니라, 그것이 지금 우리의 삶을 통해 진가를 드러내도록 힘쓰라는 도전을 던져 줍니다. 기독교 신앙이 시온수도회가 행하는 ‘히에로스 가모스’만도 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가르쳐 온 영성의 삶은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사이비 영성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심오하고 매력적이며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에게 비추어진 것은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교회가 거의 매력을 잃어버렸고, 미국에서도 제도적 교회가 점점 더 매력을 잃어갑니다. 한국에서도 비종교인들에게 가장 매력이 없는 종교가 바로 개신교라고 합니다. 인터넷에서 가장 활발한 안티 싸이트가 바로 기독교라는 사실도 우리의 경각심을 깨워 일으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딱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장 귀한 보화를 담고 있는 기독교가 가장 매력 없는 것으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지금 불고 있는 ‘다빈치 코드 신드롬’은 이러한 반기독교적 분위기에 힘을 입은 바가 큽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소설과 영화에 대한 가장 좋은 선전자(promoter)가 된 것입니다.

 

7.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근본 정신을 외면하고, 우리의 욕구에 맞게 왜곡하여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을, 예수의 보혈로 인해 죄 사함받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성령의 능력으로 복을 누리며, 죽고 나서 천당에 가는 것으로 축소시켜, 이기적 기독교, 현세적 기독교, 기복적 기독교로 변질시킨 까닭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은 어떻든지 상관하지 않고, 홀로 잘 믿어 홀로 복 받고 홀로 천당가겠다는 태도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님처럼, 현세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비전으로 현세를 변혁시키는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의 삶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징표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의 영과 혼과 육 전체가,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 전체가, 우리의 경제생활, 부부생활, 여가생활 전체가 성령에 의해 사로잡혀, 예수님의 주권이 내 삶 전체를 통해 드러나지 못한 까닭이 아닙니까?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없기 때문(딤후 3:5)이 아닙니까?

 

만일 이토록 질적으로 다른 삶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드러난다면, 누가 감히 우리가 믿는 신앙을 비웃고 폄하하겠습니까? 아니, 그런다 한들, 누가 거기에 동조하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렇게 살았더라면, 소설 '다빈치 코드'는 수 많은 소설 중 하나로 묻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 그러니 더욱 안타깝습니다. ‘다빈치 코드 신드롬’ 은 실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나팔소리(clarion call)인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나팔소리입니다.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라는 나팔소리입니다. 이번 기회에 대오각성하고,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 분명히 하고, 우리가 사는 바에 대해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한 소설가가 택한 잘못을 통해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희망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이 여정을 같이 하신 여러분이 희망입니다. 여러분이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교황이 하겠습니까? 감독이 하겠습니까? 신학자가 하겠습니까? 대교회 목사들이 하겠습니까? 누가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열심으로, 참된 교회가 되려는 열심으로 더욱 진지하게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 성실할 때,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모든 일을 바로잡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주님,
저희를 깨워 일으키시니,
감사합니다.
깨어나, 깨어 있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혀
진정한 영성의 삶에 이르게 하소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이
참된 생명의 길임을
저희의 삶으로,
저희의 말로,
저희의 표정으로,
저희의 발걸음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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