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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2: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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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아브라함의 소명과 복
창세기 12장 1- 20절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것은 바벨탑이 무너진 후 인간의 언어가 혼잡하게 흩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입니다. 성경의 연대를 살펴보면 노아의 연대가 주전 3,000년 전이요,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대가 됩니다. 그런데 그 중간 시대에 바벨탑을 쌓았던 기록이 있습니다. 이미 바벨탑 시대에 벌써 달과 별을 숭배 하는 우상종교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성경 여호수아 24:2에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하신 말씀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와 그 가정들은 열심히 우상을 섬겼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 지방의 문화는 그 시대에 벌써 상당한 수준에 있었고 그들의 물질생활의 수준도 유복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영적으로는, 우상 종교의 암흑시대요 크게 부패한 시대였던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고향 땅의 이름 우르는 그 명칭 자체가 본래 빛 혹은 불이란 말로서 그것은 불을 숭배하는 우상종교의 의식에서 생겨진 말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떠하든간에 앞서 인용한 여호수아의 말만 보더라도 그 시대는 우상을 지극히 섬기던 타락한 시대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그 시대가 전 혀 하나님을 모른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노아시대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는 알았으나 그 하나님을 배반했던 것 같이 아브라함 시대도 그러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하신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배반한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환경 중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죄악이 관영했던 그 시대에 노아를 불러 방주를 짓게 하시던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케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 24)
창세기 11:31에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 데라와 그 아내 사래가 조카 롯과 더불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가고자 하더니 도중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려 했으나 도중 하란에 머물고 만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 아버지 데라 때문이었을 줄 압니다. 그는 육신의 아버지 때문에 가나안 땅과 고향 땅 우르의 중간 지점인 하란에서 머무른 줄 압니다. 늙은 아버지를 봉양할 것인가 버리고 갈 것인가. 이것은 그에게 큰 시험이 생겼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오직 고요히 기다리며 기도할 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루어 주십니다. 비록 더디더라도 참고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때는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아 하란을 떠날 때의 그 나이는 75세 였습니다 (창12:4).
사도행전 7:4절에 "아브라함이 갈대아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 (가나안)으로 옮기셨느니라" 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 그대로 하란에서 그 아버지 데라가 죽으므로 아브라함은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희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11:8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으며..." 했습니다. 여기에서 어떤 분은 의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는 분명히 하나님의 [지시하는 땅] (가나안을 가리킴) 이라고 했었는데 히브리 기자는 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했을까요? 그러나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가는 목적지가 가나안임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벌써 가나안으로 가려는 마음으로 하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창11:31 참고) 그러나 목적지가 분명하다고 해서 가는 길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느 방향으로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몰랐으나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그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험준한 산을 넘어야 했고 깊은 강 (유브라데서)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러한 길을 그는 믿음으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 믿음은 이루어져서 그는 드디어 가나안 땅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슬프다! 가나안 땅이 그를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7:5에 보면, "그러나 거기에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그에게 주지 아니하시고... 했음을 봅니다. 낯설은 그곳에 무서운 기근이 들었습니다. 살길이 막연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닥친 큰 시험이었습니다. 그는 이 시험을 어떻게 이겼어야 했었을까요. 오직 믿음으로 참고 견디며 기다렸어야 했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슬프게도 창12:10에 보면 "애굽으로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애굽이란 말이 여기에 맨 첫 번 나옵니다. 애굽은 구약 성경에 흔히 혈육의 나라 우상의 나라로 대표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31:1에 보면 "도움을 받으려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찐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아내와 롯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아니었더라면 (창12:17) 그는 거기에서 아내를 잃어버렸던가 또는 자기의 생명을 잃었을 뻔 했었습니다.(창12:12-2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다시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소유까지도 풍성케 했습니다.(창13:16).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돌보심이 이러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사람들은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복 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하는 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귀영화, 자손번영, 장수(長壽), 건강 등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복(五福)이라고 하지요. 특히 사람들은 부자되기를 원합니다. 돈이 많아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가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돈, 명예, 건강, 부모님 이 네 가지 중에서 반드시 하나를 버리라고 한다면 무엇을 버리겠는가? 그런데 대다수 학생들이 명예를 버리겠다고 하고 심지어 부모를 버리겠다고 합니다. 돈을 버리겠다는 학생은 별로 없어요. 오늘날 상업주의로 인한 배금주의, 황금만능주의 사상은 매우 심각합니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돈 보다 귀하고 중요한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간입니다.
흔히 Time is Money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돈보다 귀합니다. 죽음을 앞둔 부자에게 물어보세요. 돈은 잃었어도 다시 되찾을 수 있지만 시간은 한 번 잃으면 되찾을 수 없습니다. 명예도 돈보다 귀합니다. 성경 잠22장 1절을 보세요 “명예는 많은 재산보다 소중하고 존경받는 것은 금은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건강도 돈보다 귀하고 가치있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고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다. 장애인들에게 물어보세요. 돈과 건강 중에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를. 그리고 부모님과 자식은 얼마나 소중합니까? 부모와 자녀를 돈과 바꿀 수 있습니까? 또 지혜는 돈보다 귀합니다. 성경 말씀에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3:15) 하였고,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잠16:16) 하였습니다. 지혜는 보석보다 값집니다.(잠8:11)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자 덤으로 부귀영화까지 주셨습니다. 돈보다 귀한 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고, 지혜를 주며,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며, 나로 형통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눅11:28). 또한 돈보다 가치 있는 것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돈은 있는데 믿음이 없다면 가진 돈은 근심과 불안덩어리 일것이요, 사람이 희망이 없다면 돈은 무가치 한 것이요, 세상은 어두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돈은 분쟁과 다툼을 낳을 뿐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이밖에 돈보다 더 가치하고 귀한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모든 것이 귀하고 소중합니다만 그 무엇보다 귀하고 가치있는 것은 생명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음 앞에서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슈바이처 박사를 존경합니다. 그 분은 음악박사요, 철학박사요, 신학박사요, 의학박사로서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지만 당시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다 버리고 당시 암흑의 땅으로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십니다. 그런데 저는 저의 생명보다 더 귀하고 가치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찬송가 94장(구102장)을 우리 함께 부르겠습니다.
♫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1.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2.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3.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후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
그렇습니다. 예수님보다 귀한 것은 없고, 예수님은 나의 생명보다 소중한 분이요, 최고의 가치입니다. 금은보화 다 준다해도 예수님만 못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세상 허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세상의 것은 일장의 춘몽입니다.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립시다. 세상 영광 다 준다해도 주님과 못 바꿉니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일까요? 최고의 가치있는 것을 소유한 사람이 최고의 복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오복(五福)을 진정한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8복입니다. 8복을 보세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고,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고,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고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 최고의 복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고,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아니하시고 심령을 감찰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언행은 그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옵니다. 즉 그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에게서 나오는 말과 행실도 악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마음과 정신자세를 갖춘다는 것은 실로 중요합니다. 즉 마음은 나의 주인이요, 근본이고 정신은 인생의 방향타요, 운명의 운전수요, 생활의 지배자입니다. 인생은 마음을 갈고 닦는 도장이요, 정신을 다듬는 수련장입니다. 칼이 의사의 손에 쥐어지면 사람의 생명을 건지는 수술도가 되고 어머니의 손에 쥐어지면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강도나 도둑놈의 손에 쥐어지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흉기로 전락합니다. 칼이 선의 도구가 되느냐 악의 도구가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칼 자체가 아니고 칼을 쓰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9)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리심이라"(빌2::5- 8)
오래전에 전도지 한 장을 받았는데 그 전도지에는 사람이 그려져 있고 사람의 가슴에는 뱀, 돼지, 늑대, 개, 여우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니까 온갖 악한 동물들이 다 도망가고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거하고 하늘나라가 마음속에 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눅17:21)
여러분! 최고의 복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즉 교만과 음란과 거짓과 탐욕과 나태와 분내는 마음을 버리고 우리의 마음이 거듭나고 변화되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타나게 합시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을 보십시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5복(五福)도 뒤따릅니다.
천국가는 사람이 최고의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태복음 13장 44절을 보세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에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사람들은 밭에 보화가 감추어 있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최고의 보화,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 최고의 가치있는 것을 발견한 우리는 그것이 숨겨있는 밭을 사기 위해 내가 그동안 가치있다고 생각한 것을 팔아서라고 그것을 소유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에 가장 가치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더러운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우리가 더 나은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덜 가치있는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34절을 보세요.“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가치를 알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최고의 복을 누리려면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최고의 가치요, 최고의 복이신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나눠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최고의 복을 얻고 최고의 가치있는 분을 쫓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마가복음 8장 34- 35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우리가 최고의 복을 누리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고 천하보다 귀한 생명까지도 버릴 각오로 예수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면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도여러분 모두가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똑바로 깨닫고 최고의 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나아가는 자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내려놓을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하십시오.
아브라함이 큰 축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상숭배의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옛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된 옛 습관과 가치관을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것에서 떠나야 합니다. 현재의 육신적인 평안함에 안주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으로 개혁하고,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내가 가는 곳에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서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7- 8절) 우리도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곳으로 변화시키고, 축복된 자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갈등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사업이 왜 실패하는 걸까? 예수를 진실히 믿는 사람인데 왜 병에 걸릴까? 자녀가 왜 대입시험에서 실패할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한 땅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지독한 기근을 맞게 됩니다. 할 수 없이 기름진 땅 이집트로 장막을 옮겨갔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대로 순종하였는데도 왜 기근이 왔는가?"하는 갈등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무런 질문도 원망도 없이 자기가 찾아가야 할 길을 갔습니다. 이집트는 곡식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막상 이집트에 도착하자마자 심각한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의 궁궐에 사라가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사라가 아름다워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이집트 사람이 묻거든 "나를 오빠라 하여라"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이 거짓 증거 탓에 아브라함은 주린 배를 채울 수는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믿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불신자가 번영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되고, 올바르게 살아도 어려움이 계속되나 도리어 악인이 잘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악인의 번성을 보고 흥분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온유한 신앙이 땅을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편37: 1- 11)
오늘 우리는 경제 지상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만 해결되는 길이 있다면 뭐라도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엄중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얻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사람의 뜻대로 나아가는 길은 불안과 두려움과 자기 상실의 결과를 얻게 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아갈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 71)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땅에 계실 동안 사람으로 형언할 수 없는 많은 슬픔과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난이 얼마나 컸던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처참한 고난을 당하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걷는 우리를 구원하고 돌보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난과 슬픔 가운데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고난과 슬픔을 다 아십니다. 아실뿐 아니라 여러분을 은총의 길로 이끌어 주기 원하십니다. 요셉의 고난과 승리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엄청난 고난에 휩싸일 때가 많습니다. 그때 해답은 보이지 않고 고통만이 엄습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그 뒤에 나타난 부활을 바라보고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선으로 바꿔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요, 주를 믿는 사람들이 받아 누릴 특권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은 고난을 당할 때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해를 갖다 준 사람에 대해 원한을 갖거나 분노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양식으로 삼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소망과 믿음을 갖고 "온 세상이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난 중에 있습니까? 병들었습니까? 타인으로 인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까? 매우 궁핍한 중에 있습니까? 멸시를 받고 있습니까? 소외를 당했습니까? 가정에 위기를 당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해를 선으로 바꿔 주실 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영원토록 사랑해 주십니다.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나아가는 삶속에서도 고난과 역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도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사람이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기도 :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주님,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고, 저희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고난도 유익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고난당할 때에 원망하는 대신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주님 안에 있을 때 고난까지도 축복의 통로가 됨을 기억하며, 세상을 좇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지혜로운 자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삶이 되게 하소서.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주님의 깊은 뜻을 발견하고 가치 있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시고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기뻐하게 하소서. 오늘 우리가 최고의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시고 이 복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팔복을 생각하고 마음속에 새기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소금과 빛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또한 만복의 근원이 되신 예수님을 널리 전하여 우리가 세상의 모든 민족의 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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