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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택

창세기 복음............... 조회 수 5246 추천 수 0 2011.04.02 07:03:07
.........
성경본문 : 창13:1-18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믿음의 선택

창세기 13: 1- 18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주일 저녁에 두 명의 젊은이가 타락하기를 작정하고 도박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도박장 바로 옆에는 한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도박장으로 들어가던 두 청년 중 한 명은 우연히 교회 입구에 적혀있던 그 주일의 설교 제목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다'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글귀를 보자 그 청년의 마음에 갑자기 죄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른 친구에게 "야, 우리 오늘 도박장에 가지 말고 교회에 가자" 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한번 결심을 했으면 가야지. 교회라니 무슨 소리야" 라며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결국 한 사람은 처음 결심한 대로 도박장으로 갔고, 다른 사람은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 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청년은 설교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때 회심한 청년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유명한 클리브랜드(Cleveland) 대통령입니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는 그 순간, 30년 전 도박장을 선택했던 젊은이는 감옥에서 자신의 친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친구의 취임 소식을 듣고 가슴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한 순간의 선택이 자신들의 삶을 얼마나 다르게 만들었는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상품 광고에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내용이 있지만 우리 인생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영원이 좌우됩니다. 클리브랜드 대통령이 도박장과 교회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어려운 갈등에 놓였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갈등에 끊임없이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대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잠언 14:16 )

 

  인디언들이 아메리카 서부의 대평원을 거침없이 누비던 시절에 "죽음의 계곡"이라는 골짜기가 있었습니다. 용감한 개척자들, 탐험가들이 말을 달려 이 계곡으로 가기만 하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날센 젊은이가 그 이유를 알아보기로 굳는 결심을 했습니다. 인디언들은 그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약해지지 않고 어느 화창한 여름날 계곡을 향하여 말을 달렸습니다. "죽음의 계곡" 근처까지 왔으나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젊은이가 계곡의 굽이까지 왔을 때 두 갈래의 길이 있었습니다. 한 길은 사람이 지나가기에 편한 길이고 다른 한 길은 나무가시와 덩쿨로 무성하게 얽혀진 길이었습니다. 양편 길 모두 계곡아래 강으로 통하는 길이었습니다. 이 젊은 탐험가의 첫 번째 유혹은 넓고 쉬운 통로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심성 있는 젊은이는 나뭇가지를 꺾어 넓은 길 강을 만나는 지점에 던져 보았습니다. 놀랍고 두려운 사실이 일어났습니다. 나뭇가지는 땅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모래펄이었습니다. 마침내 젊은이는 많은 사람이 돌아올 수 없었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 넓은 길은 보기에는 쉽지만 죽음의 계곡으로 직통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칼을 꺼내어 좁은 길을 막고 있는 가시덩쿨들을 잘라내고 강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길의 마지막 끝에 통나무가 모래펄 위에 놓여진 것을 발견하고 이 통나무를 타고 계곡 건너편으로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세상으로 통하는 넓은 쉬운 길을 택하시렵니까? 좁은 길로 방향을 돌리십시오. 그 길은 예수님께서 안전하게 만드셔서 영생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

우리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넓은 길과 좁은 길, 세상과 하나님, 하나님과 재물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입니까? 둘 다 겸하여 섬길 수는 없습니다. 후회 없는 선택을 하는 지혜로운 성도 여러분이 모두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지니라 하니...”(왕상18:21)

 

  본문 6-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어떤 집에 뜻밖에 케이크가 선물로 들어왔습니다. 그 집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케이크를 보자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고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가 제안을 했습니다. 형이 케이크를 반으로 자르되, 선택은 동생이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 형은 케이크를 어떻게 반으로 잘랐을까요?

소유는 언제나 인간관계에 위기를 가져옵니다. 아브람과 롯의 소유가 많아 그들이 가진 소유가 갈등을 야기하게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아브람은 롯에게 양보합니다. 자신에게도 필요한 좋은 땅을 양보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같이 있을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비가 적게 오는 곳이므로 물이 적고 따라서 풀이 적기 때문에 가축을 키우는데 풀밭과 물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 때문에 목자들이 서로 다투게 되고 이로 인해서 주인 아브라함과 롯의 마음이 서로 상했습니다. 더구나 그곳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적대시하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얼마나 마음이 쓰여졌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꼴이 되었으니 자신들의 위치가 위험도 했을 뿐더러 그들이 비웃을 생각을 하니 망신스럽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한 골육 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와 서로 다투지 말자. 네 앞에서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본문 10- 13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롯이 그 삼촌 아브라함를 떠날 때 그가 무엇을 선택했는가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롯은 지금까지 자기를 돌보아준 아브라함을 떠나는 것이 사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다는 마음의 표현이 있어야 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경우가 아닙니까? 또 경우로 말하면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선택을 하라고 말했지만 그 선택권을 다시 아브라함에게 양보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의 내용으로 보아서 어디서도 롯이 그의 삼촌인 아브라함에게 복종하거나 존경하거나 양보하는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제안했을 때 롯은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없이 그대로 했습니다. 정욕과 이기심이 앞서게 되면 사람을 이렇게 경우도 없게 하고 버릇도 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롯은 소돔 땅의 비옥함을 유의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을 바라보았다고 했는데 그곳은 소돔 평야였습니다. 그 땅은 롯이 감복할 만큼 온 땅에 물이 넉넉해서 롯이 그 모든 들을 택하였다고 했습니다. 에덴동산과 같은 그 계곡은 이제 그에게 지극히 즐거운 전망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가 보는 대로 그곳의 조건이 매우 좋았습니다. 거기서는 행복하게 만족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처럼 비옥한 땅에 살면 분명히 번창하여 매우 부유하게 될 것이며 안락하게 정착하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롯이 본 전부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 매일의 생활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옷을 입을까? 생각하고 옷을 선택해서 입습니다. 주부가 오늘 저녁 반찬은 무엇을 할까? 무엇부터 할까? 하는 것도 선택입니다. 오늘 누구를 만날까? 무엇부터 할까? 어디를 먼저 갈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매일매일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둘 가운데 하나를 혹은 셋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학생의 생활도 그렇습니다. 내가 어느 학교에 갈까? 대학 같으면 어느 과에서 공부 할까? 어떤 분야를 특별히 배울까? 어떤 취미를 가지고 살아갈까? 이런 모든 것도 선택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청년시대에 있어서는 더 중대한 선택을 할 일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일생 동안 어떤 방면에 헌신할까? 사업을 하면 무슨 사업을 할까? 직장 생활을 하면 어떤 직장에서 일할까? 혹은 결혼기가 되면 내가 어떤 배우자와 결혼을 할까? 이런 모든 것은 일생에 크게 관계되는 중대 한 선택들입니다. 가령, 배우자를 택하는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옛날에는 그저 부모님들 이 알아서 배우자를 택해 주면서 같이 살라고 했습니다. 본인들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행한 일도 많이 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인들의 마음에 선택의 자유가 있고 부모의 동의하에서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이 가운데도 장래를 생각하고 이성 교제를 하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통으로 배우자를 택하는데 조건이 남자 편에서는 여성의 미모, 여자 편에서는 남자의 경제력을 본다고 합니다. 물론 아름다운 것이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겉모양만 보면 실패하기 쉽습니다. 그 사람됨을 보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것도 얼마 가지 못합니다. 얼마 지내다 보면 겉모양은 다 낡아집니다. 남자의 경제력이 물론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보통으로 고생하기 싫어하니까요. 돈이 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것을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보고 택하는 것이 아니라 돈보고 택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특별히 청년시대는 우리 일생의 분수령과 같습니다. 분기점입니다. 어느 길로 가느냐 하는 것을 정하는 때입니다. 청년시대에 방향을 옳게 잡으면 일생을 옳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년시대에 방향을 잘못 잡으면 일생을 그르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시절은 일생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의 분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4- 25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는 애굽 왕 바로의 궁중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장성한 후에 남다른 고민이 그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바로 왕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호화롭게 자라며 공부하며 모든 애굽의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차차 알고 보니 자기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그때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을 가진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냥 애굽 사람들과 이 궁전에서 남아 있을 것이냐? 그렇지 아니하면 아무리 핍박을 받는 민족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을 가졌으니 이스라엘 사람으로 그들과 운명 을 같이하며 살 것이냐? 이 두 가지 갈림길 가운데서 모세는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세는 자기가 애굽의 궁전에 그냥 남아 있으면 물론 호화로운 생활과 평안하게 살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을 내던지고 자기의 민족과 같이 고생과 희생을 택하기로 각오하고 그 형극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결국 이 중대한 선택이 모세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롯은 그와 반대의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인 롯에게 선택을 먼저 하라 고 했는데 롯이 눈을 들어보니 저 동남편으로 소돔과 고모라 뜰에 푸른 풀이 우거졌는데 가축을 먹이기에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 푸른 풀과 넉넉한 물만 보고 얼른 대답하는 말이 예, 저는 저 소돔들로 가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순전히 풀만 보고, 물만 보고, 소돔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 그 런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갔습니다. 갔더니 오래되지 않아서 큰 전쟁이 일어나 여러 왕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습격해서 많은 재산과 왕들과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가는데 롯과 그 가족도 전부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아브라함의 군대가 가서 겨우 빼앗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뿐입니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악했는데 전혀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 악의 양이 차서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멸망시킬 때 간신히 자기 생명을 구하려 달아나려고 했지만 그의 아내는 그만 희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푸른 풀만 보고 선택한 결과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롯이 소돔 사람과 함께 사는 동안 그들과의 교제로 자기 의로운 영혼은 번민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불을 그 도성에 불사르고 부귀와 쾌락을 멸했습니다. 롯을 산으로 도망하게 하기까지 그는 단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육욕적인 선택은 죄의 선택입니다. 이해관계나 직업 안정을 택하는 일에 있어서 육신이나 눈의 욕망, 또는 이생의 교만에 따라 이끌리면서 영혼과 신앙의 유익을 고려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을 기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고 목적하던 것은 실망으로 끝나며 자신의 마음을 찌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롯의 선택의 기준이 어디 있었습니까?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인간 생활에서 바른 선택을 하려면 바로 볼 줄을 알아야 합니다. 롯이 눈을 들어 동편에 있는 요단 들을 바라보매 물이 많고 푸른 풀이 무성하니 그곳을 택하겠다 했습니다. 푸른 풀과 물이 많은 것만 보고 거기에 소돔과 고모라성이 있고 거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바로보고 보지 못하는가 하는 것은 인간 일생의 흥망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가 무엇을 바로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고 권면했습니다. 얼른 듣기에는 모순된 말 같지만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물질 가운데는 보이는 것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물 한 컵을 떠 왔다고 하면 얼른 보기는 아주 맑고 정결한 물같이 보이지만 그 물 한 방울을 떠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물 가운데 여러 가지 세균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보이지 아니하는 물질을 보기 시작하기 전에는 위생을 지킬 줄 몰랐습니다. 물질 가운데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을 볼 줄 알면서부터 차츰 의학이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통 물질은 다 보입니다. 그러나 이 물 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자와 양자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보이지 않는 물질을 볼 줄 알기 전에는 이 물질 속에서 내재한 힘을 사람들이 사용할 줄을 몰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물질을 볼 줄 알 때부터 원자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힘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보이지만 먼 데 있는 것은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 데 있는 것을 볼 줄 알아야 바로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발 뿌리에 있는 것만 보지 말고 먼 장래에 있는 것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만 보면 안되고, 아시아도 보고, 유럽도 보고, 전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지구 위에 산다고 땅 위만 보면 안됩니다. 눈을 들어 요단들만 볼 것이 아니라 하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만 보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도 보아야 합니다. 국내만 보면 안됩니다. 외국도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든 겉은 잘 보이지만 그 속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겉만 보지 말고 그 속까지 보아야 합니다. 속담에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있지요. 밖의 빛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속까지 보아야 합니다. 또 현재는 보이지만 장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래까지도 미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현 재만 보면 안됩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 장래가 어떻게 될 줄도 미리 알아야 합니다. 일제 말기에 일본 사람들이 홍콩, 싱가폴, 말레이지아와 필리핀을 점령하게 되니까 이제는 온 세계가 일본의 천지가 되나 보다 하고 크게 감동을 받은 한국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옷 을 입고, 일본 음식을 먹고, 심지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동방 요배도 하고 현재만 보았습니다.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승만 정권 때 3 15 선거가 있은 다음 그때 승리한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현재만 보았습니다. 장차 올 4. 19는 보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정권 때 유신헌법을 만들어 놓고 영구적인 집권을 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10. 26이 있으리라고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전두환 정권의 소위 5공 비리가 무엇입니까? 세상이 이렇게까지 뒤집힐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아무리 미련한 사람이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승리했다고 즐거워할 것만이 아니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을 미리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정치하시는 분들은 장래의 역사를 미리 보고 자신의 행동을 조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물질적 세계는 육안으로 보이지만 영적 세계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도 겉사람은 육안으로 보이지만 속사람은 보이지 아니합니다. 속 사람, 그 영혼의 가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보이지만 온 우주를 창조하신 천지의 대주재 하나님 아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로 볼 줄 알아야 우리가 삽니다. 이 세상의 나라는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육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볼 수 없는 나라를 볼 줄 알아야 우리가 삽니다. 전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도단성에 있을 때 아람군대가 포위를 했습니다. 엘리사의 종이 두려워서 어쩔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있는 군대가 아람군대보다 많다. 하면서 하나님, 이 사람의 눈을 밝혀 주옵소서. 했습니다. 엘리사의 종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늘의 불말과 불수가 아람군대에 맞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의 영광, 하늘나라 권세, 하늘의 신비를 우리가 볼 줄 알아야 이 세상 나라 일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현세는 보이지만 내 세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내세를 미리 보고 살아야 바로 살 수가 있습니다. 천당과 지옥이 우리 육안으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미리 보아야 이 다음에 우리가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대심판의 자리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미리 보아야 이 다음에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요셉은 보이는 보디발의 아내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갈 것을 내다보면서 깨끗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성공한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끝으로, 어떻게 하면 바로 볼 수가 있습니까?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너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절 이하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까? 마음이 깨끗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거듭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높은 산에 올라야 바르게 봅니다. 고상한 영적 수준에 올라야 그리스도의 도덕적 수준에서 모든 것을 바로 볼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사도 바울이 회개하기 전에는 자기 육체의 모든 것이 굉장히 커 보였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베냐민의 지파인데 내가 누구만 못한가?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난 후에는 전에 높고 크고 굉장하게 보이던 모든 것 이 분토같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수준이 얼마나 높습니까? 우리 하나하나가 이처럼 높 은 수준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확실한 증거처럼 아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같이 모든 고난을 참았다고 했습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알고 경외하면서 육신의 명령을 거절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보고 바로 택합시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30: 15- 20)

 

  본문 14- 17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롯이 떠나고 아브라함은 이제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롯이 아름다운 땅을 선택한 반면 아브라함은 거친 땅에 남았습니다. 롯이 성읍에 정착한 반면 아브라함은 성밖에서 방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롯보다 훨씬 불리한 처지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좋은 땅을 포기하고 가나안을 선택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롯의 선택이 세상 욕심에 의한 선택이었던 반면에 아브라함의 선택은 믿음에 의한 선택이었습니다. 당장은 아브라함의 선택이 손해인 것 같았으나 앞으로 전개되는 역사는 아브라함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줍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서운함과 외로움, 그리고 허전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떠나 계셨다가 다시 찾아오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항상 아브라함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양보하고 포기한 후에,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브라함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롯을 떠난 후 외로움에 잠겨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해주심으로 더욱 강건해졌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그로 인하여 손해와 외로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성도의 모습을 기뻐하시고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눈앞의 세상적인 욕심에 이끌려 선택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롯도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같은 단어지만 롯의 경우와 아브라함의 경우에 이 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롯은 탐욕과 불신앙과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볼 수 없었고 오직 세상적인 풍요와 쾌락만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선택했으며, 그 선택으로 인하여 불행한 결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눈에는 메마른 광야밖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믿음의 눈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과 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약속을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5-17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을 밟으며 걸어다녔습니다. 그 땅은 이제 아브라함의 것이었으며, 그의 후손들이 번성할 땅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양보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축복의 약속을 받습니다. 아브람의 삶의 관심이 소유에서 떠나게 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약속으로 축복하십니다. 아브람은 이러한 약속의 증거로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서 “여호와를 위한 단”을 쌓게 됩니다. 내가 예배를 드리는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미래를 막연하고 불확실하게 바라보지 마십시오. 내가 서 있는 위치를 한탄하지 마십시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항상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비전의 눈으로 미래와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마지못해 직장생활을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꿈을 가지고 직장생활을 하도록 하십시오. 사업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곳에서 땀흘려 일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내가 번 돈은 장차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사용될 돈이다. 내가 좀 더 수고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일하도록 하십시오. 눈을 들어 중국과 인도와 아프리카를 보십시오. 믿음으로 그 땅을 밟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비전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교회가 장차 땅끝까지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이 세계 방방곡곡에 나가서 복음 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눈이 그곳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세계비전을 바라보며, 세계를 가슴에 품고 뜨겁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며 이 비전을 이루어나가는 교회가 됩시다.

 

  본문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위로와 힘을 얻었으며, 비전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드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줄 것입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의 비전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위로와 힘을 얻고 비전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해서 현실이 갑자기 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척박한 가나안 땅에 있었습니다. 비전을 보았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망하기 쉽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비전을 새롭게 본 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18절) 아브라함이 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비전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며, 감사와 헌신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현실의 차이를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셔서 우리를 사로잡아주십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이 땅에서 실망하고 현실에 부딪혀 힘들고 외로울 때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비전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충만하게 힘입으며, 큰 기쁨과 용기를 얻는 예배가 되기 바랍니다.

그 선택이 있은 후 롯은 점점 이동하여 마침내 소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기근을 만나고 갈등을 겪고 손해를 당하면서 아브라함은 더욱 믿음의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당장에 그것이 손해보는 것 같고 외로운 길인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십시오. 여러분의 미래는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혹시라도 롯처럼 선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좋게 보여도 멸망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전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믿음의 길로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기원합니다.

 

  * 기도: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양자택일할 일이 많습니다.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무엇을 선택할 때 먼저 주님의 나라와 공의를 생각하고 결정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과 복된 길을 선택하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옵소서. 제가 처한 곳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금이 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축복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모든 언행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발하게 하소서. 하나님께 사랑받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도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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