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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3:1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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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민영진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요?
(출애굽기 3:13-15)
2011년 3월 6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민영진 목사
오늘 우리가 새길교회 역사를 살필 때 창립 24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살피면 오늘은 3.1절 92주년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전 세계의 교회가 지키는 교회력으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심을 기념하는 주현절(主顯節) 마지막 주일로서 특별히 “주님의 산상변화”를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이 모든 것들의 공통된 점은 우리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기억(記憶)한다는 것입니다. 기억은 심리적 작용을 일으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기억하는 이를 그 기억 내용의 최초의 사건 속으로 데려가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기억을 통하여 그 사건이 현재에서 재생되기도 합니다.
“기원에 대한 배신”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막시스트인 테리 이글톤(Terry Eagleton)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기원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시작에는 <기원을 배신한 기독교운동>에 대한 반발이 한 요인이 되었다.” 참 묘한 여운을 줍니다. 기독교가 자신의 기원을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마르크스주의가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자신이 신봉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리를 전개합니다. “결국 마르크스주의 또한 세계의 넓은 지역에서 그 스스로의 기원을 배신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공산주의가 쇠퇴한 것은 그것이 자신의 기원을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배신당한 혁명”을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기억행사는 “기원에 대한 배신”을 예방하려는 의도가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해 24주년을 맞는 새길교회는 언제나 그 기원을 배신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누가 준 것인지는 기억이 안 되어도 옛날 일제강제점령기, 특히 1940년대에 누가 가지고 있던 찬송가 한 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악보가 없이 가사만 있는 찬송 책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몇 몇 찬송은 새카맣게 먹칠이 되어 있었고, 또 어떤 찬송은 어떤 절 전체에 먹칠이 되어 있었고, 또 더러는 어떤 특수한 구절이 먹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그 책을 저에게 준 이는 일제치하에서 한국교회가 불러서는 안 되는 장 전체의 찬송이 있었고, 몇 개의 절로 구성된 장 중에는 부르는 것이 금지된 어떤 절의 가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일제의 교회 탄압이 일본에서도 있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일본 학자들에게 물어보았는데 아직 알고 있는 이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모(某) 교단 출판사 10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가 흥미 있는 문건 하나를 보았습니다. 1942년 당시 그 교단 총회장이 각 교회 담임목사들에게 보내는 공한이었습니다.
各敎會指導者諸位에게
本敎會 讚美歌는 當局의 指示에 依하야 左記와 如히 全章削除, 部分削除, 句節訂正을 하였사오니 貴敎會에서 使用하는 讚美歌는 必히 削除部分을 切取하거나 白紙로 바르거나 하시고 歌詞訂正은 訂定表와 如히 訂正하시어 使用하시기를 切望하나이다. 各 敎會 指導者 諸位는 責任지시고 各 信徒들에게 반드시 實行케 하시기를 거듭 要望하나이다.
第七日安息日耶蘇再臨敎會 朝鮮合會長 平山正雄(최태현)
全章削除 - 제32장(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 제56장(군가 부르라), 제165장(세상과 마귀 합하니), 제166장(후사된 자여 왜 졸고 있느냐), 제182장(피란처 있으니), 제187장(예수의 이름 권세여), 제238장(내 집에서 얼마 먼가), 部分削除 - 제40장 4절(귀한 예수 이름 듣고), 제66장 3절(너와 날 위해 예비한 집이로다), 제113장 1절(전능하신 예수 우리 왕이시니), 제133장 1절(추수하기 다 마치고), 제164장 3절(찬미하라 복주신 구세주 예수). 歌詞訂正 - 제 16장 제목 우리는 주의 군병(선과 악이 싸음)등 21곳 (1942 年 3月 29日)
우리교회는 이런 억압을 받는 교회였었는데, 그래도 그 때는 민족을 섬기는 교회였고,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교회였는데, 최근 어느 교계 원로는 “한국교회는 너무 커졌다. 그러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세상에 대해 교만해졌다. 개인적으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국교회 발전에 도움이 안 되서 없어졌으면 좋겠다. 세상을 가르치려고만 하고, 혼내려고만 하고 있으니, 세상과 담을 쌓게 되고,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와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기독교신문> 2011년 2월 27일 5면). 오늘이 우리 주님의 산상변화를 기념하는 주일인 만큼 그가 한 말을 한 곳 더 인용하고자 합니다. “교회만큼 재미있는 곳이 없다. 복음이 없어도 어느 정도의 프로그램과 관계만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니 교인들이 세상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 변화산에서의 베드로처럼 교회에서 초막을 짓고 살려고 한다.”(같은 자료).
변화산 사건과 같은 우리의 종교 체험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이정표(里程標)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서 더 깊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거기 길에 꽂힌 <산 아래로>라는 이정표를 못 읽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시면서 당신의 백성을 거기에서 인도해내라 하십니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널 보냈다고 그 히브리인들에게 말하고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그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우리가 이해 못 할 걱정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를 보내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분께 “이름”을 여쭙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는지를 듣기 전에 우리끼리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이름이 있었던가? 야곱의 자손이 조상 때부터 섬겨 온 하나님을 이름도 모르고 섬겼다는 말인가? 모세도 모르는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고 있는 야곱의 자손들은 그러면 안다는 말인가? 모세만 모르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모세로서는 가서 물어 보면 될 일이다. 그들도 모르고 있는 이름이라면 모센들 구태여 알아야 할 필요는 무엇인가?
모세가 하나님께 이집트에 있는 히브리인들 핑계를 대면서 “그들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요?” 하고 넌지시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의 대답은 시큰둥합니다. 히브리말로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 이것을 직역하면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대로 되어갈 그러한 나일 것이다”입니다. 영어로 직역을 하면 “I will be what I will be”입니다. 하나님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입니다. <공동번역>이나 <새번역>이 “나는 나다”라고 한 번역은 듣기에 따라서는 “내가 나지 누구이겠느냐”라는 말로 더 이상 대화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15절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밝히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YHWH,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YHWH)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우리가 편의상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 네 글자 Y H W H에는 이것을 소리 내어 읽어낼 모음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 발음을 모릅니다. 유대교에서는 이 발음을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글자가 나오면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아도나이’ 곧 “주님”이라고 읽었습니다. 사도들도 “주님”이라고 읽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부를 수 없는 이름"(ineffable name)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에서는 이 이름은 “빚어서는 안 되는” 이름입니다. “설명해서는 안 되는 이름”입니다. 설명하면 그것은 이미 그의 이름이 아닙니다. 제가 이쯤 말하면 아마 여러분 중에서는 노자의 도덕경 첫 장의 첫 구절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을 떠올리실 분도 계실 줄 압니다. 하나님의 경우에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최근 3-4년 동안 우리나라 독서계에는 현대의 과학적 사고를 하는 지성인들의 무신론 저서가 번역 소개되었고, 나올 때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어, 때 아닌 신론 논쟁을 유발시켰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크리스토퍼 힛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데이비드 밀스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 등의 저서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제목이 충분히 내용을 전달합니다. 저는 이들의 무신론을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리학에 근거한 무신론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저서들은 실재로 스티븐 호킹의 <위대한 설계> 까지 여기 가세하여 우주 물리학자까지 참여한 현대의 무신론 저서들입니다. 15년 전에 이런 주장들이 나올 것을 예견하면서 기독교가 “기원에 대한 배신”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당시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이었던 도널드 맥컬러 교수였습니다. 그의 저서 The Trivialization of God: The Dangerous Illusion of a Manageable Deity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당시 미국개신교를 “만신전(萬神殿 Pantheon)”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기독교유신론이 미국의 자본주의와 결탁해서 양산한 수많은 신들로 교회가 가득 찼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미국 교회를 “우상의 신전”이라고도 혹평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낸, 인간이 마음대로 만들어 낸 신들인만큼 그 신들은 조금도 위대할 것이 없다고도 했습니다. 어쩌면 도킨스의 <만들어진 하나님>이나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나 밀스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는 저서들은 맥컬러 목사의 글에 주석을 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의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름을 부르면 이미 그것은 여러 신들 명단에 한 이름으로 오르는 만들어진 신들 가운에 하나일 뿐입니다. 출애굽기의 하나님은 당신을 빚거나 묘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출 20:4). 조각으로 빚거나 묘사하면 그것은 이미 그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었을 때에 인간 예수에게서 당신을 남김없이, 깡그리 들어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은 그 아들 안에 충만하게 머물러 계신다”(골 1:19)고 하였습니다. 새길교회의 신앙고백이나 창립취지문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고백된 것은 한국기독교사에서 큰 공헌을 남긴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새길교회의 기원에 대한 배신”이 없기를 바랍니다. 현대의 무신론자들이 없다고 한 신들은 기독교 유신론이 만들어 낸 만신전의 신들입니다. 나는 그들이 이룩한 우상파괴의 공을 인정하고 싶습니다. 현대의 무신론을 기독교가 수용해야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아드님에게서 당신 자신을 다 나타내셨습니다.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십니다”(골 1:15).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으시면 팔레스타인 땅에 오셔서 30여년을 우리들과 함께 사셨던 그를 가리키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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