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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3:3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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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순님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더 큰 가족
(마가복음 3:31-35)
2011년 3월 27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최순님 자매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는 부모로 염낭거미를 따를 자가 없다합니다. 염낭거미 암컷은 번식기가 되면 나뭇잎을 말아서 주머니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주머니 속에 들어앉아 알을 낳습니다. 새끼들을 온갖 위험에서 보호해내려고 그렇게 안전한 주머니 속에 들어앉았지만 이제 자기 새끼들을 먹여 살릴 수가 없게 되지요. 다급해진 어미는 자신의 몸을 자식들에게 줍니다. 어미의 사랑을 알 리가 없는 새끼들은 제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자라납니다. 이 염낭거미 이야기는 흔히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극단적인 희생을 은유할 때 사용되곤 하지요.
염낭거미 모성애에 비할만한 가시고기 아빠의 부성애 역시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는 이야깁니다. 가시고기 수컷들은 암컷을 어렵게 유혹해서 알을 낳게 만들고 암컷이 알을 낳기 무섭게 자기 둥지에서 쫓아내버리곤 또 다른 암컷을 유혹해서 알을 낳게 만드는 그런 일을 몇 차례나 반복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알들이 충분히 쌓이면 어미 없이 혼자 힘으로 지극정성을 다해 새끼를 기른답니다. 홀어머니의 희생에만 익숙해 있는 우리에겐 이 가시고기 아빠의 그 자식사랑이 참 유별나 보이긴 합니다.
염낭거미의 모성애와 가시고기의 부성애가 아무리 지극하달지라도 어떻게 우리 인간의 그것과 비교되겠습니까. 자식 앞에서라면 어떤 시련에도 놀라지도 흔들리지도 않으며 희생으로만 점철된 인생을 살아가는 어머니들의 이야기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만큼 무수합니다.
소설가 최인호 씨는 매일 매일 일기를 쓰듯이 가족들의 이야기를 오래 연재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분의 가족이야기에 제일 많이 등장했던 주인공도 역시 어머니였습니다. 최인호 씨의 ‘천국에서 온 편지’라는 책은 어머니에 관한 글만 모아서 펴낸 책인데 이 책과 신경숙 씨의 <엄마를 부탁해>는 근래 몇 년 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꾸준히 지켜오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인생을 이해하는데 최인호 씨는 3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하고, 신경숙 씨는 소설 속의 주인공의 입을 빌려 어머니를 거리에서 잃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어머니의 희생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지요. 그간에 읽었던 다른 어떤 책들보다 이 두 책이 제게 오래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두 작가의 추억과 회한이 저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몹시 고생을 하고, 고생을 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할 것이며,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 수 있으며, 이마에서 피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최인호 씨는 회환에 잠겨 어머니의 일생으로 요약합니다. 그런데 제가 최인호 씨의 글을 읽다가 감명을 받은 부분은 자신의 어머니가 하늘에서 대본을 받아 인생이라는 연극무대에서 자기 어머니 역할을 맡아 하나님의 대본대로 연기하시고 하늘로 돌아가셨다던 바로 그 대목에서였습니다. 연극의 막이 내리자 어머니라는 배역의 분장을 지우고 육신의 무대 의상을 벗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셨다는 그 표현에서 저는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어떤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주부로 살아오면서 제 스스로 가족에 대한 집착만을 불필요하리만큼 강하게 키웠다는 새삼스런 자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선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 문밖에 서서 예수님을 부르십니다. 아주 낯선 표정으로 예수님께선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내 어머니라고 못박고계십니다.
늘 이 말씀은 우리를 참 불편하게 하지요. 우리가 너무도 당연시해온 부모노릇과 가족관계에 대하여 강하게 부정하는 것으로 들리기에 그렇습니다. 자식에 대한 책임감을 비롯해서 갖가지 사랑의 수고와 헌신, 어찌보면 우리 삶 전체를 부정하는 말씀으로도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어떤 때는 이보다 더 냉혹한 말씀도 서슴치 않으십니다. “나보다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더욱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씀까지 하시지요. 가정을 파괴하라는 말씀은 분명히 아닐진데 왜 그토록 불편한지요. 저는 하나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사랑이 염낭거미나 가시고기의 사랑처럼 가족이라는 좁은 틀과 안일함만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말하자면 쉽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택해서야 되겠느냐는 따가운 일침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글쎄요, 세상을 힘들게 살고 쉽게 사는 것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쉽게 사는 사람들은 가치의 차이를 아주 편리하게 정한다지요?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 사이에서 언제나 내 것만을 우선순위에 놓는 공식의 반복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모든 경계를 넘어서시고 모든 장벽을 허무신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다르십니다. 부랑자들과 밥상을 나누심으로써 계급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사마리아인을 지목하셨습니다. 그 렇게 민족 간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은 언선언하심으로써 마침내 종교적 울타리마저 허물어버리셨던 예수님은 자신만의 가족과 민족과 또한 종교에 대한 유별의 사랑과 충성심을 보다 더 넓 언큰 가족을 위한 사랑과 충성심으로 바꾸라고 하십니다. 쉽게 사는 삶을 택하심으말라는 말씀이시겠지요.
사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더 큰 가족인 세상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저희는수없이 갈등을 겪습니다. 어쩌면 아직 가족을 넘어서는 사랑의 방법조차 모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리버사이드 교회의 목사님이셨던 윌리엄 슬로언 코핀 목사님은 예수님이야말로 그 갈등을 가장 치열하게 겪은 분이시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 그 갈등은 너무 치열했던 게 분명하여 그의 생애 가장 마지막 순간이었던 십자가 위에서나 풀렸다. ‘여인이여, 당신의 아들을 보라, 아들이여 당신의 어머니를 보라.’ 그런 고통의 순간에 예수님의 지극한 효성이 실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요셉은 죽었고 마리아는 과부가 되었다. 이제 예수님은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풍요한 삶을 어머니에게 제공한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어머니께 영적인 풍요로움을 제공하는 방식을 보면 아주 흥미롭다. 즉 이제 마리아도 가족을 떠나 사랑받는 제자 요한에게 간다. 예수님은 어머니더러 제자들과 합류하라고 권유하시면서 어머니를 자신의 구원사역에 동참시킨다. 비로소 어머니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겪었던 예수님의 갈등이 해소되는 순간이다.”
지난 11일, 일본 열도를 삼킨 대재앙의 위세 앞에서 우리는 모두 숨죽인 어린이와 같았습니다. 연일 언론으로 접하던 부음과 절망을 바라보며 모두 심장 깊은 데를 강타하는 공포심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정신과 의사는 자기 자신도 마치 지진지역에 있었던 것 마냥 몸이 한쪽으로 내내 쏠려 있던 것 같았고, 온몸에 여러 대의 주삿바늘이 찌르는 것 같았다고 자신의 슬픔을 애도하더군요. 저는 (망언을 했다고 지탄 받았던 그 목회자와 별로 다를 것 없는) 대다수 침묵하는 기독교인들과 도대체 제 자신의 생각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보다 그제서야 제 심장에도 주삿바늘이 꽂힌 듯 따끔거리며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살던 마을이 아예 지도에서 사라져버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비탄에 잠긴 사람들의 절망과 슬픔 앞에서 어떻게 이런 비극을 교훈 삼아야 할 것인지, 우리에게도 다가올지 모르는 비극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어떻게 더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지부터 생각했던 저였기에 더 그랬습니다.
방사선 피폭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마을에 남아서 사람들을 끝까지 구조해내던 자위대들과 후쿠시마 원전 안에서 다른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았던 최후의 결사대들의 헌신을 보시며 여러분은 어떠셨는지요. 자기에게 맡겨진 생명을 위해 끝까지 헌신하고 무조건 희생하는 어머니들의 확대된 모성 같이 느끼진 않으셨는지요.
우리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비극을 볼 때마다 본능적으로 누구 탓인지 따지는데 참 익숙한 것 같습니다. 부모 탓인지 아니면 자신의 탓인지, 한국사람이라서? 믿음이 없어서? 학력이 낮아서? 가난해서? 부자여서? 끊임없이 탓할 비극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느라 허비하진 않았는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선 우리가 그렇게 탓하는 자세로 슬픔이나 절망을 받아들이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분별해내길 바라시겠지요. 예수님이시라면 가장 비참한 사건까지도 아마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통로라 여기실 것 같습니다. 만약 고통이나 어둠이 오늘 그들의 것이었다면 내일은 우리 것이 되기도 한다는 걸 우리는 삶을 통해 허다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난해는 우리가 참 힘들었지요. 이성에 호소해도 감성에 호소해도 꿈쩍하지 않는 권력층들은 우리들 삶을 점점 더 헤집어서 점점 더 황폐한 삶 속으로 몰아갔습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본의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지난해 우리에게 일어났던 여러 가지 참담했던 사건들은 사실 기억 속에서 어느샌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천안함 사건으로 새파란 장병들을 한꺼번에 잃은 유족들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연평도에선 포격 사건이 또 일어났습니다. 구제역으로 살붙이처럼 키우던 가축들이 몸부림치면서 생매장 당하는 모습을 날마다 티브이와 신문으로 보면서 슬퍼하기보다는 우리는 날마다 무기력해져갔습니다. 그런데 슬픔보다 무기력이 훨씬 나빴습니다. 진정한 목적도 설렘도 없는 우울한 삶이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지배할 것만 같아 전 지난 겨울 내내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힘든 싸움을 하고 계시는 청소 노동자 어머니들의 이야기 역시 우리를 그 무기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시급 4320원으로 하루 10시간을 쉴틈 없이 일하는 그분들은 아침, 점심 식사를 곰팡이와 쥐들이 사는 계단 밑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해결하며 살아가십니다. 한 시간에 860원만 단지 860원만 더 올려달라는 요구로 파업까지 벌이고 계십니다. 벌써 몇 달 동안이나.... 그분들에게 남들만큼의 임금과 그저 밥을 먹고 잠시 쉴 수 있는 작은 휴식공간조차 마련해주지 않는 지금의 이 사회에 크리스쳔은 많은데 그들의 형제자매와 어머니가 되어 줄 분들은 어디에 계신지요?
열악한 작업장에서 일하다 화재로 숨진 여성들을 기리는 미국 노동자들의 궐기가 세계 여성의 날의 계기가 되었다 합니다. 세계여성의 날이 시작된 지는 어느새 10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 청소노동자 어머니들의 삶은 어디서 어떻게 윤택해졌는지 누구에게 물어봐야 되나요. 우리가 계단 밑 저 남루한 일상에 애써 눈감는다면, 손톱만큼이라도 나아질 인간다운 세상이 그분들에게도 찾아오게끔 함께 손잡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건 세상의 더 큰 가족의 집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눈감아버린다는 뜻은 아닐까요.
식물세상과 사람세상을 빗대기 좋아했던 파브르가 남긴 말을 소개하면서 마치고자 합니다. 나무들의 가장 바깥 쪽에 있는 눈비늘을 보면서 파브르는 노동자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입을 옷감을 열심히 짜는 노동자들은 막상 그 멋지고 훌륭한 옷감을 걸쳐보지 못합니다. 아니, 자신들의 손재주로 우아하게 짠 리본 한 조각도 모자에 마음대로 달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잎을 돌보려고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눈비늘 같은 사람들, 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꽃받침이 되어 주는 사람들, 남들이 꺼리는 일,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이들의 겉모습은 대부분 초라합니다. 하지만 맡은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묵묵히 최선을 다하지요. 그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기에 이 세상은 잎처럼 푸르고 꽃처럼 밝을 수 있습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주님! 자식 사랑에 가족 사랑에 몰두해 있는 저희에게 마지막 순간 십자가 위에서 ‘여인이여, 당신의 아들을 보라, 아들이여, 당신의 어머니를 보라’시며 어머니께 가족을 떠나 제자들과 합류하길 원하셨던 당신의 그 크신 뜻을 깨닫게 도와주십시오. 그 길을 따를 수 있는 용기도 저희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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