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창14:1-24 |
---|---|
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가나안 남북전쟁과 아브람의 롯 구출
창세기 14장 1- 24
1.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4.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5. 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8.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9.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10.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21.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22.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지난 3000년 동안 지구상에는 3300여 차례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미국과 옛 소련의 군비경쟁이 한창이었을 때 양국이 가진 핵탄두는 지구를 41번이나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날마다 3만5000여명이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증오심과 세력 확장을 위해 전 세계가 쓰는 돈은 연간 5500억달러에 이릅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은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전쟁을 통하여 그 얼마나 많은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되고 있습니까? 부모를 잃은 고아들, 자녀를 잃은 부모의 한 맺힘, 신체 일부분을 잃은 장애인들의 고통, 심각한 전쟁의 후유증을 누가 책임질 수 있습니까?
일전에 방송에서 이순신 장군에 관한 특집 프로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 수군에게 연전연승한 이순신 장군의 승리의 비밀을 파헤친 프로였습니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불과 열두 척의 군선으로 333척의 왜선단을 물리친 장면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악의 상황에서 거둔 극적인 승리였을 뿐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항상 우세한 전력을 유지하며 흩어져 있는 적을 기습하는 전략을 통해 승리했습니다.
해군사관학교 임원빈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은 우연이 아니라 과학이다.” 승리할 만한 위치에서 승리할 조건을 두루 갖추었을 때 이기는 것이 전쟁입니다. 약할 때 전쟁하면 백전백패하고 맙니다. 강한 전력과 유리한 조건을 유지해야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전쟁입니다. 신앙생활은 마귀와의 끊임없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약한 모습으로 나아가 천신만고 끝에 승리한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히 무장하고, 강한 모습으로 마귀와 대적하여 확실한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성경은 열세의 전력으로 마귀와 싸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항상 우세한 전력으로 마귀를 제압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생동안 3가지 전쟁을 치룹니다. 첫째는 영적전쟁입니다. 즉 사단과의 전쟁입니다. 마귀의 유혹과의 싸움입니다. 둘째는 생존권을 위한 생존경쟁의 싸움입니다. 셋째는 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 속에 자아(ego)와 초자아(super-ego)라는 두 가지 자아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자기 속에 선을 행하려는 자아와 악을 행하려는 자아가 있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의 내면 속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싸운다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 두 가지 자아가 있습니다. 이것이 항상 싸웁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육체의 소욕이 지배하느냐? 성령의 소욕이 지배하느냐? 선을 행하려는 자아가 지배하느냐? 악을 행하려는 자아가 지배하느냐? 이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어서 대장되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 예수만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고 싸움터로 나가야 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힘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고, 능히 대적하여 저 마귀를 물리친 옛 성도들 같이 그 어떤 고난당해도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3)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4)
아브람이 거하는 땅은 네 개의 큰 나라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전쟁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믿음의 여정을 걷고 있는 아브람의 삶의 환경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삶의 환경이 소란한 가운데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아브람이 자기 조카 롯을 구출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전 2000년 전에 엘람 왕 그돌라오 멜이 사해 부근의 다섯 나라를 치기 위해 동맹국들을 이끌고 쳐들어 왔습니다. 그돌아오멜이 쳐들어 온 것은 12년 동안 사해 부근의 나라들이 그돌라오멜을 섬겼는데, 이들이 13년째 되던 해에 그돌라오멜을 배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돌라오멜이 동맹국들을 이끌고 14년째 되던 해에 사해 부근의 다섯 나라들을 치기 위해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돌아오멜은 사해에 오기까지 수많은 가나안 족속들을 쳐부수고 내려왔습니다(5-7절). 이 싸움은 마치 어른과 아이의 싸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돌라오멜은 사해 부근의 다섯 나라들을 모두 쳐부수고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과 재물들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끼여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가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브람에게 찾아와서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아브람의 조카 롯도 함께 끌려갔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집에서 훈련된 가신(家臣) 318명과 자신과 동맹 관계에 있던 에스골과 마므레를 함께 데리고 그돌라오멜을 추격하였습니다.
아브람은 단까지 쫓아갔습니다. 단까지의 거리는 무려 100Km나 됩니다. 단까지 쫓아간 아브람은 밤이 되자 그돌아오멜을 기습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수십 Km를 쫓아가면서 기습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브람은 포로로 잡혀간 모든 사람들과 약탈당한 재물을 모두 찾아왔습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자 소돔 왕과 살렘 왕이 아브람을 마중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태도는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먼저 살렘 왕은 19- 20절에서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합니다. 즉 살렘 왕은 이 전쟁의 승리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아브람을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소돔 왕은 21절에서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라고 말합니다. 소돔 왕이 이렇게 말한 것은 아주 잘못된 말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전쟁에서 이긴 자가 당연히 전리품을 취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의 전쟁에서 빼앗은 소돔 왕의 재물들은 당연히 아브람의 것입니다. 그런데도 소돔 왕은 마치 자기가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돔 왕이 이렇게 말하자 아브람은 소돔 왕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소돔 왕의 제의를 거절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아브람은 자신의 수하들이 먹은 양식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만을 제하여 줄 것을 말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기록자가 이 사건을 통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2 에서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록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그돌라오멜을 이기게 하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셨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본문 13-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우리는 어떤 곤란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합니까? 낙담하거나, 도망가거나, 맞서거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 문제를 피하지 않고 맞서 해결합니다. 그 난처한 문제가 형제의 고통을 포함하고 있다면 더욱 더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난처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평상시에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러진 이 세대 속에서 우리는 침착하고 치밀한 그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얼마나 잘 준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평소에 준비하는 삶을 삽시다. 또한 침착하게 계획하는 삶을 삽시다. 그래서 갑자기 문제가 생겼을 때 용기 있게 대처합시다.
본문 18, 19절을 보겠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람에게 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제자들과 보내면서 떡은 나의 살이라 하시고, 포도주를 영생을 위한 언약의 피라 하신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아브람은 전쟁 중에 멜게세덱이란 사람과 만납니다. 멜기세덱이란 ‘정의의 임금’ 혹은 ‘나의 임금’이란 뜻입니다. 바로 이 멜기세덱과의 만남을 통해 본격적인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됩니다. 전쟁과 환난 중에 만나는 하나님, 그분이야말로 우리 삶의 은혜의 출발점이 되십니다.
역사적인 실존 인물로서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었습니다. 살렘은 ‘평화’를 뜻합니다. 그는 ‘전쟁의 왕들’ 사이에 살고 있는 ‘평화의 왕’이었습니다. 그가 의의 왕이며, 평화의 왕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며, 우리의 모범이 돕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훌륭합니다. 그 당대의 왕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멜기세덱이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언약을 맺으면서도, 그를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하였고, 그의 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의와 평화’를 무가치 하게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 앞에 값진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경쟁하게 돕니다. 마치 삼국지를 보는 것 같이, 서로를 제거하여 자신의 명예와 세력을 넓히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그들은 서로 경쟁하기보다, 서로 격려하고 도우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왕입니다. 그가 엘람 왕을 물리쳤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열국의 왕들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와서 축복해 줍니다. 우리 같으면 시샘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명성이 아브라함 때문에 깎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승리에 대하여 기뻐하며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의 승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며 간증입니까. 아브라함도 이 만남을 참으로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기습전을 펼쳐 승리를 거두고 돌아옵니다. 그도 뽐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군사들을 모아서 가나안의 여러 땅과 도시들을 차지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멜기세덱 앞에 자랑하지도 않았고, 깔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멜기세덱의 위대함을 인정하며, 그에게 십일조를 바칩니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둘 다 위대한 사람들이지만, 서로의 만남과 교제를 통하여 더욱 위대해집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서로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더욱 자라갑니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외로움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처럼 “나만 남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왕상19:10). 그러나 그들은 남은 자로서 서로를 격려하며 축복하고 함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그들은 높고 위대한 사람들이었지만, 만남을 통하여 가장 높은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본문 20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세계적인 부호 록펠러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는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해 원금을 모두 날렸습니다. 광부들은 폭도로 변해 밀린 임금을 요구했습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록펠러'는 너무 괴로워 자살을 떠올렸습니다. 기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해온 록펠러는 황량한 폐광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음을 믿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 주십시오."
록펠러는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때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위로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더 깊이 파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믿고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록펠러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황금 대신 '검은 물'이 분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석유였습니다. 자살 직전의 록펠러는 유전을 발견해 일약 거부가 되었습니다. 록펠러가 대 부호가 된 것은 철저한 십일조 생활에서 비롯됐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6:20)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히7: 1- 4)
살렘 왕 멜기세덱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함께 하셔서 아브람이 전쟁에서 이겼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본 절에서 이 전쟁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반면에 소돔 왕은 멜기세덱과는 달리 아브람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음을 통해, 그가 아브람과 무관한 사람임을 드러냈습니다. 소돔 왕이 이렇게 아브람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축복 하는 자를 복 주실 것이며 아브람을 저주하는 자를 저주 하실 것이라는' 창세기 12장 3절의 약속대로,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대상이 됨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중에 소돔 왕과 그 백성은 자신들의 심각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완전히 멸망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21- 23을 보겠습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학교 총장이 학교 건물을 한창 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건물을 완성하는데 1백만 달러가 모자랐습니다. 어려운 사정으로 고민하던 그는 어느 날 정부 고위관리로부터 제의를 받았습니다.그의 말은 2장의 서류에 사인을 해주면 1백만 달러를 희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가 사인을 하게 되면 고위관리에게는 3백만 달러가 생기고 총장에게는 건축에 필요한 1백만 달러가 생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총장이 그 서류를 자세히 검토해보니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만든 위조서류였습니다. 총장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눈을 감고 사인을 두 번만 하면 경제적으로 유익하고 아무에게도 손해를 주지 않고도 학교 건물을 완성할 수 있는데…’ 그러자 그 고위관리는 사인을 해도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그냥 해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했습니다.하지만 총장은 결국 거절했습니다. 이 사실은 그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도 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몇 초만에 1백만 달러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양심에 의해 어리석은 자가 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경건은 우리가 혼자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사는 모습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불의한 것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삶에 방해가 되는 것, 명예욕, 물질 욕심, 탐욕, 성적유혹 등을 거절하지 못하는 순간 넘어지게 됩니다.
아브람은 소돔 왕이 제공하는 전리품을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사실 이웃 나라 통치자로부터 물품을 제공받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는 명예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당연히 취할 수 있는 전리품마저도 거절하였습니다. 이는 아마 아브람이 타락하고 부도덕한 이방 족속의 물품을 꺼려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히11:24)
이렇게 과거에 아브람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복을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아브람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복을 허락하십니다. 아브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아브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또한 그의 삶 전체를 인도 하셨듯이, 오늘날도 자기 백성들에게 역시 그러한 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거나 또는 그 복이 너무 적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그 관계 속에 온전히 거해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통해 천하 만민을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창 12:3).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온전히 누리려면, 아브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그의 뜻을 행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섬기는 관계 속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바로 모시고 그분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뜻에 전적으로 우리의 모든 결정을 내 맡기는 헌신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그분의 이끄심을 즐거이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복을 주셨던 것과 같은 원리로 오늘날도 풍성한 자신의 은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십자가 군사입니다. 악한 마귀 군사들과 힘껏 싸워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 물리치고, 많은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선한 싸움 다 싸우고,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께 칭찬 받고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기를 소망합니다. 주여,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시고.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하나님을 지금 보다 더욱 더 사랑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성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영육 간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