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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5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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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하나님의 사랑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활동을 시작하여 므낫세 왕 때 순교하기까지 60여 년 동안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이사야는 범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포로로 끌려갈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사야서에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했던 것입니다.
본문은 구약의 메시아 예언 중 가장 유명하고 놀라운 예언입니다. 마치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기록한 것처럼 생생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정확하고 깊이 있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예언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약 700년 전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실 것을 오래 전부터 이미 계획해놓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700년 전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훨씬 전부터 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때가 언제였을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3-4)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이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시기 위해 처음부터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시기로 작정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나를 무한한 사랑으로 사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메시아의 고난에 관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당신을 이렇게 무한하신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인간의 불신앙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 무한하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고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마침내 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는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아들을 영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0-11) 예수님께서 오셔서 큰 이적을 행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지만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전도할 때도 늘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그렇게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텐데 왜 사람들은 그렇게 믿기를 거부할까요? 이런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도 이것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1절)
이것은 인간의 미련함과 완악함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스스로는 절대로 하나님께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셔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은 이 구원의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여겨 비웃으면서 믿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그분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낮은 곳에 오신 메시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의 고난의 역사는 그들로 하여금 메시아를 더욱 간절히 대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메시아가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분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증오하며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유대인들은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매우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대한 왕이나 강력한 군사적 영웅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메시아가 그렇게 영광스럽고 장엄한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매우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2절)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갈릴리 목수의 아들로 자라셨습니다. 갈릴리는 가난하고 천대받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갈릴리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가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하자, 나다나엘은 다음과 같이 빌립의 말을 일축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요1:45-46)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신데 이렇게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처럼 낮고 비천하게 오신 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비천함을 체휼하시고 친히 담당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난당하신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다면 온 인류로부터 영광과 열렬한 환영을 받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오셨을 때 찾아온 사람들은 이방인들인 동방박사 세 사람과 몇 사람의 목자들에 불과했습니다. 헤롯은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밖에는 아무도 이 땅에 아기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가난과 서민들의 애환을 함께 겪으시면서 자라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는 즉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반대와 핍박에 직면하셨습니다. 아무도 그분을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3절)
예수님께서 간고를 당하셨다는 것은 슬픔을 당하셨다는 뜻입니다. 질고를 아신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고통을 체휼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가 당하는 슬픔과 고통을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가 당하는 슬픔과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슬픔과 질병과 고통을 당할 때 주님 앞에 나가서 얼마든지 도우시는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슬픔과 고통을 잘 이해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나의 슬픔과 질고를 대신 당하신 메시아
인간의 모든 슬픔과 질병과 고통은 다 죄의 결과로 온 것들입니다. 만일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런 것들을 하나도 당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슬픔과 고통과 질병은 죄 때문에 온 것들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이런 것들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의 모든 슬픔과 질병과 고통까지도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이 마침내 자기 죄 값을 받아서 그렇게 고통을 당하며 죽게 되었다고 떠들어댔습니다. 놀랍게도 이사야 선지자는 이 일을 미리 본 것처럼 생생하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4절)
마태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7) 예수님께서는 내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내 죄를 없애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내 죄를 없애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그 죄의 결과로 당하게 된 이 슬픔과 고통도 해결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온전히 영접하면 모든 슬픔과 고통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이기고도 남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는 죄와 죽음과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메시아의 대속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는데, 단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에게는 죄가 전혀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이 세상에서 죄인들이 죄 값으로 당하는 모든 고통과 슬픔과 연약함을 다 당하셨습니다. 아니, 우리 죄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고난과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셨을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힘없이 모든 고난을 당하셨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정확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4상)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슬픔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범죄한 우리가 그 죄 값으로 마땅히 당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아무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가 당해야 할 슬픔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채찍질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그분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관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통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모진 고통을 당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5상)
이사야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신 결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5하)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죄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서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던 죄가 사라지고,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은혜입니까?
내 맘대로 고집하던 나를 위해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6상)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죄악된 본성을 따라 제 맘대로 범죄하며 산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모습과 본성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인이 자기 고집대로 범죄하며 사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죄인들은 반드시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죄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하)
그런데 심지어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이렇게 제 맘대로 고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어떻게 우리가 또 다시 내 맘대로 고집하며 죄 가운데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내 뜻과 고집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700여 년 전에 기록한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낮고 비천하게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존귀하고 거룩하신 분이신데 멸시와 천대를 당하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데 모든 슬픔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아무도 왜 하나님이시며 죄 없으신 그분이 그런 멸시와 천대와 슬픔과 고통을 당하셔야 했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오늘 나 자신이 당해야 마땅한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대신해서, 내 죄를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죄 때문에 당해야 할 멸시와 천대와 슬픔과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랑과 은혜를 입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나를 위해 당하신 주님의 멸시와 천대와 슬픔과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 잊지 맙시다. 나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구원에 대한 뜨거운 감사와 감격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충성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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