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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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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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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태어나서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예수님의 생애는 아빠의 품에 안겨 먼먼 이국땅으로 도망을 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갓 태어나서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 여린 새싹같은 아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헤롯은 '아기를 찾아 죽이려(2:13)' 하였을까요.
다른 평범한 가정의 아기로 태어났다면 커다란 축복 가운데 일생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이 "예수"였기에 파란만장한 생애의 시작부터 '피바람'을 부르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최초의 순교자들(2:16)이 생긴 것입니다. 그 어린아이들 또한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 했습니다.
아기예수님의 고난은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고 헤롯이후에 뒤를 이어 왕이 된 아켈라오에께까지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표기하고 변방 갈릴리의 어느 작은 동네인 나사렛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의 배후 조종자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폭풍치듯 격정의 한 순간을 보내고 조용한 마을 '나사렛'에 안착하기까지 순간순간 하나님은 '말씀을 이루시며 (5, 18, 23절)' 예수님을 이끄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 세 종류가 있는데, 육체적인 시각장애인, 몰라서 못보는 사람,(예를 들면 영어를 모르면 읽지 못하니 영어에 대하여 소경이고 , 악보를 보지 못하면 음악에 대하여 소경이고, 컴퓨터를 모르면 컴퓨터에 대하여 소경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이 어두운 사람도 소경입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런 사람인데, 예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그 말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어떻게 이 나이에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너는 유대인의 선생씩이나 되면서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다르게 표현하면 "너는 영적인 소경이다"라는 뜻입니다.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이유는 메시야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을 구원할 분을 오히려 핍박한 유대인들을 역시 영적인 소경이라는 사실을 통렬히 비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태는 그들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의 참뜻과 영적인 세계를 모른다고 지적했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슬픈 일도 기쁨으로 변화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환경이 아니라, 나의 시각이 변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 중에 계속 반복되는 말씀은 '말씀을 이루시며 (5, 18, 23절)' 헤롯의 분노와 어린아이들이 생명을 잃게 되는 비극의 살인극, 또 갓 태어난 핏덩이를 안고 야밤도주 하는 요셉과 마리아, 이런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그 침묵이 바로 하나님의 개입이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거듭, 선지자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탄생을 둘러싼 이 어두운 사건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 사건들은 슬픈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시각을 갖지 않고 보면 비극적인 사건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그 속에 내포된 하나님의 뜻과 역사의 흐름을 꿰뚫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현실 앞에서 쉽게 낙담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갖고 그 세계에 접근해 보면 기쁜 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영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오늘 현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과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환경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이 처한 환경은 어떤 의미에서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평범한 가정의 아기로 태어났다면 커다란 축복 가운데 일생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이 "예수"였기에 파란만장한 생애의 시작부터 '피바람'을 부르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최초의 순교자들(2:16)이 생긴 것입니다. 그 어린아이들 또한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 했습니다.
아기예수님의 고난은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고 헤롯이후에 뒤를 이어 왕이 된 아켈라오에께까지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표기하고 변방 갈릴리의 어느 작은 동네인 나사렛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의 배후 조종자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폭풍치듯 격정의 한 순간을 보내고 조용한 마을 '나사렛'에 안착하기까지 순간순간 하나님은 '말씀을 이루시며 (5, 18, 23절)' 예수님을 이끄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 세 종류가 있는데, 육체적인 시각장애인, 몰라서 못보는 사람,(예를 들면 영어를 모르면 읽지 못하니 영어에 대하여 소경이고 , 악보를 보지 못하면 음악에 대하여 소경이고, 컴퓨터를 모르면 컴퓨터에 대하여 소경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이 어두운 사람도 소경입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런 사람인데, 예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그 말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어떻게 이 나이에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너는 유대인의 선생씩이나 되면서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다르게 표현하면 "너는 영적인 소경이다"라는 뜻입니다.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이유는 메시야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을 구원할 분을 오히려 핍박한 유대인들을 역시 영적인 소경이라는 사실을 통렬히 비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태는 그들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의 참뜻과 영적인 세계를 모른다고 지적했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슬픈 일도 기쁨으로 변화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환경이 아니라, 나의 시각이 변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 중에 계속 반복되는 말씀은 '말씀을 이루시며 (5, 18, 23절)' 헤롯의 분노와 어린아이들이 생명을 잃게 되는 비극의 살인극, 또 갓 태어난 핏덩이를 안고 야밤도주 하는 요셉과 마리아, 이런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그 침묵이 바로 하나님의 개입이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거듭, 선지자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탄생을 둘러싼 이 어두운 사건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 사건들은 슬픈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시각을 갖지 않고 보면 비극적인 사건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그 속에 내포된 하나님의 뜻과 역사의 흐름을 꿰뚫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현실 앞에서 쉽게 낙담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갖고 그 세계에 접근해 보면 기쁜 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영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오늘 현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과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환경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이 처한 환경은 어떤 의미에서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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