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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6: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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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인간적인 방법과 이스마엘의 출생
본문: 창세기: 16장 1- 16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사울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사무엘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제사를 드리므로 결국 버림받았습니다.(삼상13: 1- 15)
출애급기 16장 19- 21절에 보면 모세는 만나를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이것은 내일의 모든 염려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일부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일 식량의 부족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불신이나 다른 사람보다 더 소유하겠다는 탐욕으로 인해 인간적인 준비를 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불신과 탐욕으로 축적한 만나에는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사는 자의 결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바라는 교회 부흥과 변화도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교회가 변화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후 10년이 되도록 후사가 없었습니다.(3절)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조금씩 불신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방법대로 이루려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권고에 따라 인간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그의 모습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나와서 울며 기도하고 나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어떤 해결책이 곧 생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 돌아가 보면 문제가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이 때 우리는 지금까지 고수해오던 믿음의 방법에 회의를 느끼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할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인간적인 방법이 쉽고 잘 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우리는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방법대로 일을 이루실 때까지 좀 더 기다릴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았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포기하거나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은혜 받은 후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조금 더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자기 종 중에서 한 사람을 후계자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치고 믿음이 약해졌던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다시 확인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확인해주셨던 것입니다.
자,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사라가 잉태를 하고 입덧이 심해진다든지 그런 일이 일어날 차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여전히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1절)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해주셨는데, 언약까지 맺으시면서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이것이 아브라함이 직면한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사라에게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가장 힘든 사람은 사라였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 마치 자기의 책임인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 사라는 자신이 늙어서 더 이상 자식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남편 아브라함도 자꾸만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하고 조바심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라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아브라함과 자기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게 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라는 자신이 나이가 많아 생리가 끊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지 않은 것은 아마도 다른 여자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왜 진즉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사라는 자신의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서 아들을 낳게 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방법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자기의 몸종을 남편에게 첩으로 주어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아들은 부인의 아들로 입양되었습니다. 사라는 이 방법을 사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사라는 자기 맘대로 하나님의 뜻을 단정했습니다. 이것은 사라가 기도해보고 얻은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얻은 결론도 아니었습니다. 마음의 갈등을 느끼면서 고민하고 실망하는 가운데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려진 결론이 하나님의 뜻에 맞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은 항상 우리의 이성과 정서에 잘 맞아 떨어집니다. 누가 봐도 그럴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인간적인 생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라의 생각이 어떻습니까? 자신의 몸종은 아직 젊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내면 틀림없이 아들을 낳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당시에는 이런 방법이 보편적으로 용인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자신의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갈은 바로 잉태를 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그렇게 헤맸단 말입니까? 사라에게는 그렇게도 안 되던 일이 왜 하갈에게는 그렇게도 쉽게 된단 말입니까? 사라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방법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길을 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한 결과 일은 매우 복잡하고 어렵게 꼬여가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은 처음에는 그럴듯하고 쉽게 풀리는 것 같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처음에는 어렵지만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의 풍성하신 축복과 은혜를 체험하게 합니다. 하갈은 자신이 잉태한 것을 알자 여주인 사라를 멸시했습니다(4절). 여주인 사라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던 마음이 사라져버렸던 것입니다. 사라가 얼마나 원통했겠습니까? 사라가 이렇게 고통을 받게 된 것은 그녀가 믿음의 길을 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한 결과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욱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전개되었습니다. 자신의 몸종 하갈이 잉태한 것을 알고 자신을 멸시하자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일찍이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이런 식으로 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신약성경은 남편에게 복종한 가장 모범적인 예로 사라를 들고 있습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벧전3:5-6) 그러한 사라가 지금은 분노에 차서 평소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말을 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토록 고귀하고 기품이 있던 사라가 앞뒤 안 가리고 남편에게 막말을 퍼부었습니다. 아마도 사라는 평생을 두고 이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후회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길을 버리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 반드시 실패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브람은 인간적인 방법을 생각합니다.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고자 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의 탄생은 사래와 하갈의 불화로 이어집니다. 나의 성급한 행동이 화를 불러 온 경우가 없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사라가 이렇게 거칠게 공격하자 아브라함은 사라로 하여금 하갈을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6절) 아브라함은 자신이 나서서 이 문제를 수습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포기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라는 하갈을 학대했고,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못 이겨 아브라함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도망쳐 집을 나가고 말았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요 택한 백성이며 선지자였던 아브라함의 가정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한 결과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여 사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천국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바로 하나님의 통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다스리십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면 우리의 삶에는 질서가 파괴되고 불행한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일어난 일이 바로 이러한 일이었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가정의 질서 파괴되었습니다. 몸종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주라고 부르며 복종하던 사라는 남편에게 막 대들며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장과 남편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이 문제를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이를 임신한 채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자 질서가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존귀한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거룩한 선지자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야 할 아브라함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존귀하고 아름다웠던 사라도 여느 이방 아낙네들과 다를 것이 없는 추한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거룩하고 하나님의 은총이 늘 함께 했던 아브라함의 집안은 썰렁하고 어색하고 불편한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은총이 떠난 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을 거역하고 범죄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 믿는 사람이 오히려 안 믿는 사람만도 못하게 되고 맙니다. 교회는 나가는데 진정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우습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부끄러운 모습이지요. 주님께서는 이런 미지근한 사람들을 토하여 내치겠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6) 교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있지 못한 교회는 능력도 없고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욕을 먹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이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왜 우리에게는 인간적인 방법이 안 통합니까?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사라가 사용했던 방법이 당시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것이었는데 왜 사라의 경우에만 문제가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방법으로 아들을 얻고, 그 아들이 얼마든지 후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의 집에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왜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으려고 한 것 때문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렇게 곤욕을 치러야 했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잘 되기만 하는데 왜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불화가 일어나고 종이 주인에게 대드는 일이 일어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범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백성에게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친구들은 그렇게 해도 잘만 되는데 나는 안될 때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원망하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아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주시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1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15년이 지나서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들을 주실 것이면 좀 빨리 주실 것이지 왜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임신이 불가능한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러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주심으로써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음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이 아들을 낳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아들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아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어나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아기를 낳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누구에게나 어려운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문제를 믿음으로 이겨내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때 문제는 훨씬 복잡하게 꼬여갔고, 그들은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믿음으로 이기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실패하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감사한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일을 그르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위로와 축복이 됩니다. 나는 연약하고 실패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선하신 뜻을 반드시 이루고야 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잘 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리다가 쉽게 지칩니다. 믿음이 약해지고 인간적인 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결코 실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끝까지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통하여 이 진리를 또 한 번 더 확실한 언어로 외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본 부인은 "사라"라고 이름하는 히브리인 여인이었고 둘째 부인은 애굽에서 사라의 몸종으로 데려 왔다가 여주인 사라의 권유를 받아 아브라함의 아내가 된 "하갈"이라 이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비록 하갈은 그의 여주인이 아기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씨받이"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의 여주인의 남편인 아브라함의 첩이 되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아 준 여인이었지만, 또 끊어질 아브라함 가문의 대를 이어 주는 이 엄청난 일을 단행한 희생적 여인이었지만, 그러나, 한 남자와 두 여인 사이의 갈등은 그러한 당시의 "가문의 대(代) 잇기 관습법"의 질서와 윤리라는 그런 수준 높은 사회이념으로서도 전혀 해결의 도움을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라와 하갈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고 마침내 정실부인 사라는 첩 하갈을 축출하는 데까지 발전해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공존관계(共存關係)"가 무너진 것입니다.
사라와 하갈의 갈라섬, 그것은 사라의 아들 "이삭"과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갈라짐의 원인이 되었고 그리고 이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라짐은 또한 오늘 날의 이스라엘과 이슬람 교도들 사이의 해결불가능의 인종분쟁, 종교분쟁, 영토분쟁, 그리고 이념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은 지정학적으로 볼 때, 약속의 땅 가나안과 이방 나라 애굽 사이를 구분짓는 국경지역으로서 아랍인들의 조상인 이스마엘이 태어난 지역이요 오늘 날의 수많은 아랍인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하는 멕카(Mecca)라는 도시 근방에 위치한 "술"이라 이름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지역은 예루살렘과 맥카가 갈라지는 지역이며 이스라엘과 이슬람의 분기점(分岐點)이기도 합니다.
특이한 것은 사라에게서 쫓겨난 하갈이 임신한 몸을 이끌고 억울함과 분노의 눈물을 삼키며 도망치는 길, 이젠,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약속의 땅 가나안과는 영원히 결별하는, 그리고 이스라엘인들과 아랍의 이슬람 신도들이 영원히 이를 갈며 증오와 갈등의 대립관계가 되어 원수관계로 헤어지는 그 중요한 순간의 길, 바로 이 "술"(수르) 지역의 노상에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이요 이외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이방나라 아랍인들의 국경까지 오시다니요! 그것도 버림 받은 이방인 여인, 아브라함의 씨받이 첩인 "하갈"이라는 이 이방여인의 뒤를 따라 여기까지 오시다니요! 이야말로 민족주의 신앙의 세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랍인들의 국경지역인 "술" 지역까지 그것도 "한 쫓겨난 이방 여인", 즉 애굽에서 데려 온 씨받이 여종인 하갈의 뒤를 따라 오신 것일까요? 무슨 말씀을 하시기 위함일까요?
놀랍게도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너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갈의 대답은 “저는 제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8절)
본문 9- 11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하갈아, 너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 그리고 그의 수하에 복종하라!"
하나님의 사자의 이 명령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특히, 히브리 원문이 말하는 바를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사라의 수하에서 그녀로부터 받을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라"라는 의미를 분명하게 갖고 있다면,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이는 실로, 대단한 축복사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라와 하갈, 그리고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뇌하는 인류를 향하여 "고통스럽지만 공존(共存)이 곧 인간평화(人間平和)의 근본이다"라는 가장 원형적인 "평화선언문"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결론 지울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더불어 사는 것,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이가 나쁜 고부가 함께 한 지붕 밑에서 한 솥 밥을 먹으며 함께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은 피하지 말아야 할 필수적인 "평화의 관문"이라는 것입니다. "아골 골짜기가 희망으로 가는 문이다" 라고 외친 예언자 호세아 처럼(호 2: 15), 이 "고통스러운 공존의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길을 통하여서도 진정한 평화가 이룩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의 본문은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라와 하갈 사이의 "벽"을 허물라고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 여인 하갈의 고통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고 사라에게 내리신 축복을 하갈에게도 내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라만이 하나님의 딸이 아니라 하갈도 하나님의 딸이라는 것입니다. 이삭만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들이 아니라 이스마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주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못지 않게 "이스마엘"에게 주신 이름도 "엘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 "엘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매우 축복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아랍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히브리 종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진리를 증언해 왔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히브리 종교는 결코 후대의 유대 종교와 같은 배타적 민족주의 신앙에 깊이 물든 율법주의 종교와는 달랐습니다. "돌아가라! 이웃과 고통을 나누며 함께 살아라!"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이 계명이 모든 율법을 집대성한 하나님의 근본 뜻이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술" 길 샘물 곁에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 "돌아가라. 그리고 네 이웃과 고통을 나누어 가지면서 함께 살아가는 그런 공존의 삶을 살아라!"라는 이 말씀만이 진정한 의미의 평화실천에 관한 가르침일 뿐입니다. 오늘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 사이에 이러한 방식으로 오십니다. 38선 남북 분단지역에도 오시고 백인과 흑인 사이의 갈등지역에도 오시고 사이 나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도 오시고 경상도와 전라도가 접경하는 지리산 능선 위에도 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자녀들아, 돌아가서 함께 더불어 살아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며 함께 더불어 살아라. 이것이 너희 하늘 아버지인 나, 하나님이 원하는 진정한 평화다."
본문 13절을 보겠습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신학생 3명이 영화를 보고 밤늦게 기숙사 담을 넘다가 학장에게 붙잡혔습니다. 학장은 엄격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학장은 신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켰습니다. 신학생들은 어두운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벌벌 떨었습니다. 학장이 아주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신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예, 우리 신학교 학장님입니다.” 다시 학장은 꾸중을 했습니다.
“너희들은 무단이탈, 월담, 늦은 귀교 등 세 가지 잘못을 했다. 그에 상응한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그때 신학생 중 하나가 묻습니다.
"그런데 학장님은 우리가 누구인지 아세요?” 학장은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학생들은 “그럼 됐어요”라며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분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 1- 4)
본문 15, 16절을 보겠습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하갈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지하여 다시 아브람의 집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아브람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비록 아브람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따라 난’(갈4:23) 육의 자손이었습니다. 이는 비록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자들 가운데도 언약의 백성이 아닌 육의 자손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마3:9) 결국 구원은 혈통적 유산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내려진 은혜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됩니다.(엡2:8)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지금 처해있는 상황만을 바라본다면 옆 사람의 권고를 따르게 되고 육신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적안 방법은 반드시 인간적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방법대로 추구하는 영역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발견되었다면 이 시간에 그것을 떨쳐 버리십시오. 아무리 선한 일을 도모하고자 하였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지 않은 내 생각, 내 방법은 결국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갑시다.
* 기도: 연약한 나를 붙드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어둠과 고난 속에 있던 나를 구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살려는 내 삶의 부수적인 걸림돌을 제하여주시고 주님이 그러셨듯이 세상의 헛된 욕망을 포기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기다리게 하시고 맡겨진 일에 인내함으로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싫을지라도 그것을 완수하거나 완전케 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시고, 내 자신의 삶에 대해 인내하게 하심으로 목표가 이루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지라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나를 실망시키고 목표의 실현에 방해가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어떠한 원망이나 불평이 없이 그것을 수용하게 하옵소서.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현실이 어렵고 곤란하더라도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을 주소서.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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