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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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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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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7:6 개와 진주의 관계
7;7-11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
7:12 율법과 선지자
오늘 말씀은 이렇게 세가지 각각 다른 이야기로 구분되어 있어서 각각 설교를 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주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접하는 많은 경우에 그러하듯이 대부분 필요한 부분만 발췌되어 강조되면 흐름이 왜곡되게 되어 있습니다. 7장의 시작이 들보의 문제로 시작되었는데 이 들보의 제거와 진주, 그리고 기도, 좋은 것, 율법과 선지자의 문제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된 주제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들보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거룩한 것이 거룩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돼지가 진주를 보는 것과 동일하게 볼뿐만 아니라 돼지가 진주를 취급하는 것과 같이 취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들보라는 안경은 진주를 진주로 볼 수 없게 하는 안경입니다. 진리를 가리우게 하는 검은 안경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어떠한 자들을 개, 돼지라고 하고 있습니까?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損割禮黨)을 삼가라 (빌3:1-2)
여기에 등장하는 행악하는 자들과 손할례당은 육체를 신뢰하여 육체의 소욕에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육체의 안경 곧 들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어서 그 들보를 기준으로 하여 거룩한 것을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거룩한 것이나 진주는 오히려 진리를 거스리는 것으로 보이게 마련이입니다. 그래서 거룩을 가지고 있고 진주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도리어 율법을 범하는자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지 못하는 자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로 봅니다. 그러기에 발로 밟고 찢어서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들에 의해 진리는 항상 멸시와 천대를 받고있는 것입니다.
개들의 실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벧후2:22)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고 다시 또 토하는 인생들, 그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는 자들! 그들은 토할 때 열심히 토하면서 그것을 회개라고 하고 그 회개하였던 자리에 다시 돌아가 여전히 그렇게 삽니다. 또 다시 회개하고 돌아가고 회개 하고 돌아가고...언제까지 그러할 것인가. 그래서 개들을 삼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가 누구인 줄을 개가 어떻게 스스로 알 수 있겠는가. 자신이 이미 개의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우리는 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마태복음 7장은 '구하라'는 말씀을 하기 전에 거룩한 것과 개 그리고 진주와 돼지 이야기를 먼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목청을 돋구어 40일을 금식하면서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개에게는 진주를 주시지 않는다는 원리는 왜 생각지 않으려는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에만 관심있는 현대 기독교인들. 어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른 것은 도무지 보이지 않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만이 머리속에 있기 때문에 예수 이름은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요술을 부리는 줄 찰떡같이 믿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시대의 종교인들은 기도를 그렇게 밖에는 할 줄 모릅니다. 생선을 달라고 하는 자녀에게 뱀을 줄 부모가 없듯이 좋은 것을 천부께서 어찌 주시지 않으랴.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지만 개에게 거룩한 것과 돼지에게 진주는 도무지 주실 수 없으십니다. 어찌 돼지에게 진주를 맡길 것인가. 착각에서 빨리 깰지어다.
그러기에 아무리 열심히 기도한다 하더라도 끝내는 하나님의 좋은 것을 받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받으면서 입을 헤 벌리고 좋아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요원한 것입니다. 다만 자기식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기는 커녕 돼지우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면서 지금 자기가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구하고 있는지를 도무지 모른채, 기도한다고 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할 바가 무엇이며 두드리고 찾아야 할 바가 무엇인가? 이제는 도리어 구하는 것이 죄이며 두드리는 것이 무지이며 찾는 것이 욕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아! 그러나 너무나 이전의 사고에 찌들어 있는 이들에게 기도에 대한 사고의 대 전환은 도무지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하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신 것은 시시하게도 육신의 안일을 위한 이땅의 삶에 필요한 나부랑이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눈에서 들보가 빠지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 것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인지 그것은 오히려 지금 구하고 있는 것의 정 반대 개념입니다. 욕심을 따라 구하는 것을 청산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말씀대로의 구함의 출발이요 정욕에 심취하여 두드리고 있는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야 말로 두드리는 것의 시작입니다. 찾는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사방을 둘러 보며 먹을 양식과 목을 축일 물을 찾는 동안 그것을 찾을 수 있고 만나지는가? 그러나 그러한 것에 지쳐서 지겨운 삶이 포기되어지는 순간 생수를 만나고 영원한 참떡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조금만 성경에 귀를 기울여보면 알 수 있는데...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10:23~2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3:1~2)
기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위엣 것을 찾는 것과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 찾는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생각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 기도를 못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기도 내용을 살펴보면 전부 그러합니다. 자신이 기도한 내용을 녹음해서 한번 들어보면 아마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할것이 뻔합니다. 욕심 아닌 것이 무엇이 있는지....다만 눈이 감겨 있기에 못 볼 따름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마태복음 7장 7절의 말씀은 거꾸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면 보일 것입니다. 개와 돼지의 눈을 벗어 던져 버리고 들보를 빼어내고서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그러한 기도를 어찌 들어주시지 않겠으며 하나님께서 주고 싶어하는 바로 그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이란 그것을 받아서 살고 누리는 삶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좋은 것이란 누가복음 11장 13절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성령이 누구인가. 자신의 좋은 것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분 자신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의 궁극점은 바로 성령이요 그 분 자신에게 귀착됩니다. 그런데 그것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그 유명한 기독교의 황금률(黃金律)삶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는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나타나는 말씀이며 팔복의 성취자들에게 나타나는 거룩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의 나타난 결과이며 그것은 동시에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를 가장 잘 주석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좋은 것을 받았다면 그 진주와 거룩은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너희가 도리어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것 곧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의 빛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문을 두드린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문은 좁은문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것은 좁은 길이라는 의미와 같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좁은문을 두드리는 자는 참으로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아우성을 치면서 두드리는 문. 그 문은 가는 이들이 많지만 좁고 협착한 이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아주 적습니다.‘나는 양의 문이라’는 예수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들어가야 하는 문이기에 좁고 협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이미 인간에게는 걸어들어 갈 수 없는 좁은 길을 걷고 계시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들어가려는 문은 당연히 좁은 문입니다. 그런데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라는 말이 되기에 그와 함께 자신을 던져버리는 일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자신을 버리라는 말이요 좁은 문을 통과하라는 말이니 그러면 열리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연후에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좋은 것이며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주어집니다. 육신의 생각들이 작용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우리들이 빗장을 채우고 열지 않는 까닭은 바로 그와 같은 좁고 협착한 문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문을 두드린다고 하며 기도한답시고 목이 쉬어 있으니 어떤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말인가. 그 문은 도대체 무슨 문인가. 이러한 비밀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도무지‘문을 두드리라’는 말씀 자체가 닫혀 있는것인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7;7-11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
7:12 율법과 선지자
오늘 말씀은 이렇게 세가지 각각 다른 이야기로 구분되어 있어서 각각 설교를 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주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접하는 많은 경우에 그러하듯이 대부분 필요한 부분만 발췌되어 강조되면 흐름이 왜곡되게 되어 있습니다. 7장의 시작이 들보의 문제로 시작되었는데 이 들보의 제거와 진주, 그리고 기도, 좋은 것, 율법과 선지자의 문제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된 주제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들보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거룩한 것이 거룩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돼지가 진주를 보는 것과 동일하게 볼뿐만 아니라 돼지가 진주를 취급하는 것과 같이 취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들보라는 안경은 진주를 진주로 볼 수 없게 하는 안경입니다. 진리를 가리우게 하는 검은 안경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어떠한 자들을 개, 돼지라고 하고 있습니까?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損割禮黨)을 삼가라 (빌3:1-2)
여기에 등장하는 행악하는 자들과 손할례당은 육체를 신뢰하여 육체의 소욕에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육체의 안경 곧 들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어서 그 들보를 기준으로 하여 거룩한 것을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거룩한 것이나 진주는 오히려 진리를 거스리는 것으로 보이게 마련이입니다. 그래서 거룩을 가지고 있고 진주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도리어 율법을 범하는자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지 못하는 자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로 봅니다. 그러기에 발로 밟고 찢어서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들에 의해 진리는 항상 멸시와 천대를 받고있는 것입니다.
개들의 실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벧후2:22)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고 다시 또 토하는 인생들, 그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는 자들! 그들은 토할 때 열심히 토하면서 그것을 회개라고 하고 그 회개하였던 자리에 다시 돌아가 여전히 그렇게 삽니다. 또 다시 회개하고 돌아가고 회개 하고 돌아가고...언제까지 그러할 것인가. 그래서 개들을 삼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가 누구인 줄을 개가 어떻게 스스로 알 수 있겠는가. 자신이 이미 개의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우리는 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마태복음 7장은 '구하라'는 말씀을 하기 전에 거룩한 것과 개 그리고 진주와 돼지 이야기를 먼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목청을 돋구어 40일을 금식하면서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개에게는 진주를 주시지 않는다는 원리는 왜 생각지 않으려는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에만 관심있는 현대 기독교인들. 어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른 것은 도무지 보이지 않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만이 머리속에 있기 때문에 예수 이름은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요술을 부리는 줄 찰떡같이 믿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시대의 종교인들은 기도를 그렇게 밖에는 할 줄 모릅니다. 생선을 달라고 하는 자녀에게 뱀을 줄 부모가 없듯이 좋은 것을 천부께서 어찌 주시지 않으랴.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지만 개에게 거룩한 것과 돼지에게 진주는 도무지 주실 수 없으십니다. 어찌 돼지에게 진주를 맡길 것인가. 착각에서 빨리 깰지어다.
그러기에 아무리 열심히 기도한다 하더라도 끝내는 하나님의 좋은 것을 받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받으면서 입을 헤 벌리고 좋아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요원한 것입니다. 다만 자기식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기는 커녕 돼지우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면서 지금 자기가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구하고 있는지를 도무지 모른채, 기도한다고 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할 바가 무엇이며 두드리고 찾아야 할 바가 무엇인가? 이제는 도리어 구하는 것이 죄이며 두드리는 것이 무지이며 찾는 것이 욕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아! 그러나 너무나 이전의 사고에 찌들어 있는 이들에게 기도에 대한 사고의 대 전환은 도무지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하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신 것은 시시하게도 육신의 안일을 위한 이땅의 삶에 필요한 나부랑이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눈에서 들보가 빠지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 것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인지 그것은 오히려 지금 구하고 있는 것의 정 반대 개념입니다. 욕심을 따라 구하는 것을 청산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말씀대로의 구함의 출발이요 정욕에 심취하여 두드리고 있는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야 말로 두드리는 것의 시작입니다. 찾는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사방을 둘러 보며 먹을 양식과 목을 축일 물을 찾는 동안 그것을 찾을 수 있고 만나지는가? 그러나 그러한 것에 지쳐서 지겨운 삶이 포기되어지는 순간 생수를 만나고 영원한 참떡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조금만 성경에 귀를 기울여보면 알 수 있는데...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10:23~2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3:1~2)
기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위엣 것을 찾는 것과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 찾는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생각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 기도를 못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기도 내용을 살펴보면 전부 그러합니다. 자신이 기도한 내용을 녹음해서 한번 들어보면 아마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할것이 뻔합니다. 욕심 아닌 것이 무엇이 있는지....다만 눈이 감겨 있기에 못 볼 따름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마태복음 7장 7절의 말씀은 거꾸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면 보일 것입니다. 개와 돼지의 눈을 벗어 던져 버리고 들보를 빼어내고서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그러한 기도를 어찌 들어주시지 않겠으며 하나님께서 주고 싶어하는 바로 그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이란 그것을 받아서 살고 누리는 삶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좋은 것이란 누가복음 11장 13절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성령이 누구인가. 자신의 좋은 것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분 자신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의 궁극점은 바로 성령이요 그 분 자신에게 귀착됩니다. 그런데 그것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그 유명한 기독교의 황금률(黃金律)삶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는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나타나는 말씀이며 팔복의 성취자들에게 나타나는 거룩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의 나타난 결과이며 그것은 동시에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를 가장 잘 주석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좋은 것을 받았다면 그 진주와 거룩은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너희가 도리어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것 곧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의 빛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문을 두드린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문은 좁은문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것은 좁은 길이라는 의미와 같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좁은문을 두드리는 자는 참으로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아우성을 치면서 두드리는 문. 그 문은 가는 이들이 많지만 좁고 협착한 이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아주 적습니다.‘나는 양의 문이라’는 예수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들어가야 하는 문이기에 좁고 협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이미 인간에게는 걸어들어 갈 수 없는 좁은 길을 걷고 계시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들어가려는 문은 당연히 좁은 문입니다. 그런데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라는 말이 되기에 그와 함께 자신을 던져버리는 일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자신을 버리라는 말이요 좁은 문을 통과하라는 말이니 그러면 열리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연후에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좋은 것이며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주어집니다. 육신의 생각들이 작용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우리들이 빗장을 채우고 열지 않는 까닭은 바로 그와 같은 좁고 협착한 문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문을 두드린다고 하며 기도한답시고 목이 쉬어 있으니 어떤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말인가. 그 문은 도대체 무슨 문인가. 이러한 비밀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도무지‘문을 두드리라’는 말씀 자체가 닫혀 있는것인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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