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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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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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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이었으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택한 동네가 가버나움이었고 그곳에서 많은 이적과 병자를 고치고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기회가 되는대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볐고 예수님은 쉴틈도 없이 일을 하셨습니다.
한번은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그의 친구들이 매고 왔으나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어서 지붕을 뚫고 병자를 달아 내리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병이 나아 침상을 들고 걸어나가는' 은혜까지 입게됩니다.
이 사건을 눈여겨 봐야 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나가는 장면에 초점을 맞추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믿음과 죄 사함'입니다. 믿음은 무엇이고 왜 예수님은 그 믿음 으로 인하여 '죄'를 사함받았다고 선언하십니까? 그리고 죄사함 받은 증거로 치료의 기적까지 베푸셨을까요?
다이어니시어(Dionysia)라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 지방법원에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던 땅에 대한 재판을 받았는데 패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불복하고 고등법원에 항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땅 문서를 돌로 만든 상자 안에 넣고 종을 시켜서 고등법원이 있는 알랙산드리아에 다녀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종이 가는 도중에 주막에 하룻밤 묵었는데 그만 불이나서 타죽고 말았습니다. 그후로 2000년이 지난 어느날 고고학자들은 사막의 모래속에서 종의 해골과 돌상자를 발굴해냈습니다. 돌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후포스타시스:권리증서> 였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狀)이요..."(히브리서11:1) 에서 실상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후포스타시스> 즉 '권리증서'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권리증서입니다.
믿음이 무엇이냐 하면 내 소유가 틀림없다는 공인된 권리증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친구들과 중풍병자의 무엇을 보셨습니까?
'권리증서'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을 보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는데 한가지는 자기의 경험과 지식과 아는 범위 안에서 자기의 눈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한가지 방법은 성경이 성경을 풀어가도록 성경 자체를 가지고 보는 방법입니다. 첫 번째 방법으로 보면 '바라는 것'이란 자기가 마음속에 소원하는 것입니다. 병나음, 합격, 물질, 건강, 가족구원 등등 그런 것들이지요. 그러나 성경이 성경을 보게하는 방법으로 보면 '바라는 것'이란 히브리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 즉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셨는지 이해가 됩니까? 성경을 자기의 방식대로 보면 볼수록 '성경의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와는 상관없이 엉뚱한 해석과 오해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중풍병자에게 중요한 것은 중풍병이 나음을 입는 것이 아니라 그 죄사함을 받는 것이 었습니다. 죄사함을 받는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고 병이 나음을 받는 것은 육신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병을 먼저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의 권세를 참람(僭濫)하게 여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젊은 예수를 '메시야' 즉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되이 죄사함의 권세자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침상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침상을 갖고 집으로 가라!' 명령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 툴툴 털고 지금까지 누워있던 침상을 거두어 나가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제서야 예수님과 그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한번은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그의 친구들이 매고 왔으나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어서 지붕을 뚫고 병자를 달아 내리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병이 나아 침상을 들고 걸어나가는' 은혜까지 입게됩니다.
이 사건을 눈여겨 봐야 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나가는 장면에 초점을 맞추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믿음과 죄 사함'입니다. 믿음은 무엇이고 왜 예수님은 그 믿음 으로 인하여 '죄'를 사함받았다고 선언하십니까? 그리고 죄사함 받은 증거로 치료의 기적까지 베푸셨을까요?
다이어니시어(Dionysia)라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 지방법원에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던 땅에 대한 재판을 받았는데 패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불복하고 고등법원에 항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땅 문서를 돌로 만든 상자 안에 넣고 종을 시켜서 고등법원이 있는 알랙산드리아에 다녀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종이 가는 도중에 주막에 하룻밤 묵었는데 그만 불이나서 타죽고 말았습니다. 그후로 2000년이 지난 어느날 고고학자들은 사막의 모래속에서 종의 해골과 돌상자를 발굴해냈습니다. 돌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후포스타시스:권리증서> 였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狀)이요..."(히브리서11:1) 에서 실상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후포스타시스> 즉 '권리증서'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권리증서입니다.
믿음이 무엇이냐 하면 내 소유가 틀림없다는 공인된 권리증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친구들과 중풍병자의 무엇을 보셨습니까?
'권리증서'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을 보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는데 한가지는 자기의 경험과 지식과 아는 범위 안에서 자기의 눈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한가지 방법은 성경이 성경을 풀어가도록 성경 자체를 가지고 보는 방법입니다. 첫 번째 방법으로 보면 '바라는 것'이란 자기가 마음속에 소원하는 것입니다. 병나음, 합격, 물질, 건강, 가족구원 등등 그런 것들이지요. 그러나 성경이 성경을 보게하는 방법으로 보면 '바라는 것'이란 히브리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 즉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셨는지 이해가 됩니까? 성경을 자기의 방식대로 보면 볼수록 '성경의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와는 상관없이 엉뚱한 해석과 오해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중풍병자에게 중요한 것은 중풍병이 나음을 입는 것이 아니라 그 죄사함을 받는 것이 었습니다. 죄사함을 받는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고 병이 나음을 받는 것은 육신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병을 먼저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의 권세를 참람(僭濫)하게 여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젊은 예수를 '메시야' 즉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되이 죄사함의 권세자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침상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침상을 갖고 집으로 가라!' 명령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 툴툴 털고 지금까지 누워있던 침상을 거두어 나가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제서야 예수님과 그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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