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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딤전3: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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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교회 http://www.wordspring.net/ |
예의범절의 힘(The Power of Manners)
본문/ 딤전3:1-13
1. 들어가는 이야기
우리는 지난 몇 주일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생명의 원초적 에너지는 原石(원석)-原木(원목)-鎔巖(용암)-거대한 저수지의 물과 같아서 잘 가다듬고 다스려야 현실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이 생명 에너지는 우선 비전의 힘, 삼겹줄의 힘, 프로의 힘, 억척의 힘, 일상의 힘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예의범절의 힘(The Power of Manner)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2. 왜, 예절의 힘이 필요한가?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41, 유대인)은 “우선 살고 볼 일이다. 철학은 그 다음이다(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 라는 유명한 소리를 하였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선 살고 볼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난 6주 동안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각 사람이 가져야 할 내적-주관적-실존적 마음의 태도에 관하여 묵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뭔가 좀 부족합니다. 비전-삼겹줄-억척-프로-일상의 힘으로 살아남기는 하겠으나, 생육하고 번성하고 넉넉하고 품위 있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에는 뭔가 2%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그 2%의 부족을 채워 圓滿具足(원만구족)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예의범절의 힘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교회의 직분자는 물론 모든 성도들이 교회 내의 사람들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 선한 증거를 얻는 방법은 평소에 항상 단정하게 사는 것(worthy of respect)이라고 하였습니다(본문 4절, 8절, 11절). 나는 이 단정하게 사는 것이 곧 예의범절의 힘이라고 이해합니다.
단정하게 산다는 것-예의범절을 지키고 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배려하고 易地思之(역지사지-다른 사람과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한다)하며 사는 것입니다. 단정한 말씨-옷차림-음식 차림-인사-칭찬-인정-일 솜씨 등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 예의범절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탄생-입학-승진-결혼-성공 등)을 무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슬픔(실패-구조조정의 퇴출-불합격-이별-죽음 등)을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닙니다. 예의범절을 잘 지키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탈무드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앉았거든 일어서지 말라, 다른 사람이 모두 일어섰거든 앉아 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3. 예의범절의 힘(The Power of Manners)이란 무엇인가?
첫째. 예의범절은 그 사람의 인품-인격을 드러내는 후광-그림자-Infrastructure-존재 분위기-배경 음악과 같습니다. 예의범절의 본질은 다른 사람에 대한 겸손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만난 사람이 높은 티를 내지 않을 때-부자 티를 내지 않을 때-배운 티를 내지 않을 때-전문가 티를 내지 않을 때-힘든 티를 내지 않을 때 감동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치가 그렇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걸핏하면 높은 티를 내고-부자 티를 내고-배운 티를 내고-전문가 티를 내고-오만 상을 찌푸리며 힘든 티를 냅니다. 현실에서 예의범절을 지킨다는 것이 그 만큼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만큼 그 반대급부도 대단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예의범절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아무개는 사람이 참 신사야(숙녀야)” 혹은 “아무개는 참 싸가지 없는 놈이야”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 말을 할 때 신사-숙녀와 싸가지 없는 놈의 기준은 대부분 예의범절(말투-티내는 것-척하는 것-빈대 붙는 것-선후배를 몰라보는 것 등)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평소에 신사-숙녀라는 평판을 들어야 합니다.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평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왜? 신사-숙녀라는 평판은 그 사람 일생 동안 수호천사 노릇을 합니다만, 싸가지 없는 놈이란 평판은 그 사람이 하는 일마다 발목을 잡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라도 싸가지 없는 놈과 일하기 좋아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의 인간관계에서 예의범절은 지금 이 시간에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특히 한국교회 사회에서는 더 하다).
셋째. 예의범절은 싸움터에서도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고대의 싸움터에서는 용감한 적장은 패장이라도 각별한 예의범절로 대하였습니다(세바와 살문나를 예의범절로 대한 기드온의 경우 삿8:20-21).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일상생활이 곧 싸움터이고 논쟁터(부부싸움-부모와 자식 사이의 싸움-직장에서의 싸움-친구 사이의 싸움-교회 안의 싸움-기타 일상에서 이해관계의 싸움 등)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단 싸움-논쟁이 일어나면 예의범절을 무시합니다. 할 말-못할 말, 되는 소리-안 되는 소리,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악-악- 거리고 싸웁니다. 그런데 성경은 비록 싸울 때라 할지라도 예의범절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수욕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잠25:9-10)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신사-숙녀는 금지된 무기를 쓰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정이 증오의 감정으로 변했다 하더라도 일찍이 친구로서 자신을 신뢰하고 털어놓은 상대방의 약점을 악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지된 무기를 써서 비열한 승리를 얻은 사람은 “그 놈은 싸가지 없는 놈!”이란 평판이 영원히 뒤따를 것이며, 금지된 무기를 쓰지 않음으로 패한 사람은 “그는 신사-숙녀였다!” 라는 명예로운 평판이 영원히 뒤따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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