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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한 세가지 금은 황금, 소금, 지금 이라고 한다. 나도 좋아하는 세가지 금이 있다. 현금, 지금, 입금 이다 ㅋㅋㅋ(햇볕같은이야기 사역 후원 클릭!) |
세기의 유명인과 가정
1999년 12월 31일자 타임지는 20세기의 많은 사건을 세가지로 집약하였습니다.
첫째는 민주주의 승리를 들었습니다(The Century of Democracy).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투쟁한 세기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권의 신장이 이루워진 세기라고 하였습니다(The Century of Civil Right).
세 번째는 과학과 기술의 세기였다는 것입니다(The Century of Science and Technology).
그래서 이 분야에 공헌한 사람들을 뽑았는데 인권문제에 있어서는 인도의 간디가 선정되었고, 정치 분야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뽑혔고, 과학 기술 분야에는 아인슈타인이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 20세기에 가장 영향을 준 사람 한 명을 뽑았는데 많은 사람들의 여론과 연구를 집약하여 타임지는 아인슈타인을 20세기를 대표하는 인물을 뽑았습니다. 1905년의 특수상대성이론과 1916년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인류 과학사 뿐만 아니라 그 때까지 지배해 왔던 절대성 원리를 상대성 원리로 바꿈으로 인류의 삶 모든 분야에 큰 영향력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평화 운동에 헌신한 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939년, 루스벧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원자폭탄 제조 건의문에 서명한 그는 죽을 때까지 그 행위를 후회하며 평화 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갖가지 정치적 대립이 존재하지만, 인류라는 생물의 씨앗을 근절시켜 버릴사태를 불러일으킬 핵무기를 만드는 행위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단돼야 한다"고 호소한 1955년의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은 그 대표적 예입니다. 또한 그는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의식한 진정한 지식인이었다고 사람들은 평가합니다.
그는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특별한 도덕적 책임감을 강조하였고 "선함과 아름다움과 참됨이 바로 우주의 법칙"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스라엘 대통령직을 고사할 정도로 지극히 권위를 싫어하며 자유인으로 그가 죽을 때까지 살았던 프리스톤에서 흰머리를 어깨위에 휘날리고 책 한권을 들고는 허름한 옷차림으로 산책을 즐겼으며, 아이들을 무척 좋아해서 늘 말동무가 되어주는 인자한 할아버지였다고 합니다. 머리에 기름 바르는 법도 없고, 바지를 다려입는 법도 없으며, 비할 수 없이 소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가정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1879년 독일 남부 울름에서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그의 첫 부인이었던 파울리네 코흐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독일, 스위스, 미국 국적을 차례로 얻었고, 아버지를 따라 어렵게
생활하다가 김나지움을 마치지 못해 이탈리아나 독일의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고 연방 공과 대학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독일어와 역사 시험에 낙제해 입학이 거절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스위스의 아라우라는 마을에서 6개월 더 김나지움을 다닌 뒤 17세때 취리히에 있는 공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같은 물리학 강의를 듣는 밀레바 마리크라는 여학생과 사랑을 속삭이게 됐었습니다. 이미 아이가 뱃속에 있었지만 그들은 3년 넘어나 결혼을 미뤄야 했습니다. 그것은 밀레바가 네살이나 위인 데다가 가정 주부감이 아니라 학자라며 어머니가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밀레바가 가난하고 천한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레바가 딸을 낳자 아인슈타인은 더 이상 결혼을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는 여전했습니다.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그 사내아이는 정신장애자였습니다. 첫째 딸은 다른 집에 양녀로 보내었습니다. 작가 미셸 잭하임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의 딸 리젤은 다운증후군으로 추정되는 정신 지체아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이력에 금이 가지 않도록 딸을 입양시켰고 그 딸은 부모로부터 버림 받고 21개월 만에 숨졌다고 합니다. 아내 밀레바는 이런 저런 고통과 충격, 특히 시어머니의 구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상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이혼을 회피하려는 `냉혹한 꾀'라고만 여겼고 심지어는 자기 아내를 "흔히 볼 수 없을만큼 추악한 여인"이라고 평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1919년에 이혼했고 그해 상대성이론으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후에 단 한번도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는 아들을 찾아가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을 세계적인 인물로 뽑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의 가정 생활은 결코 세계적일 수도 없고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만한 사람도 아닙니다. 어쩌면 작가 미셸 잭하임이 지적한 것처럼 그는 비정한 아버지, 더 나아가 인간적인 매력없은 비정한 남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유야 있겠지만 그 같은 것은 유명인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유명인들 중에도 그렇게 가정이 원만하지 못한 것을 발견합니다. 최초의 가정 아담과 하와는 범죄로 인해 에덴에서 추방되었고 큰아들 가인은 동생 가인을 죽인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당대 의인이라고 불렸던 노아는 홍수 후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몸으로 추태를 부렸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은 아내를 두차례나 외간 남자에게 내어주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경하는 다윗 역시 남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를 삼았고 아들은 아버지를 반역하였습니다. 유명도 좋지만 가정은 소중히 지켜져야 합니다. 유명하지 않더라도 인간답게 사는 화목한 가정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세기의 유명인과 가정/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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