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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우 말씀묵상

깊은데로가서

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22:15-22 하나님의 것, 가이사의 것

마태복음 마태복음73............... 조회 수 2166 추천 수 0 2002.02.26 16: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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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구분 :  
내용이 너무 길어 본문 생략합니다.

  오늘 말씀은 참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한절한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유대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율법 지키기에 정신 없었던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는 창녀와 더불어 먹고 마시고, 세리와 더불어 드시며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무참히 부수어 버리셨습니다.

   율법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변론하는 것은 그들의 전매특허였는데 어찌된 셈인지 별 방법을 다 써봐도 예수님에게는 먹혀들지 않고 있으니, 바리새인들로서는 이마에 식은땀이 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지 않고는 자기들의 종교적인 지위나 정치적인 파워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그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며 예수를 꼼짝못하게 할 묘수를 찾아냅니다.
  
   그러던 중 어느 머리 좋은 바리새인에게서 예수님을 꼼짝 못하게 할 기가막힌 계락이 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냐?' 하는 질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계략을 생각해내고는 아마도 너무 좋아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번에야말로 예수는 우리 손아귀에 잡혔다! 이 질문은 무슨 대답을 하여도 다 시비를 걸 수 있으며, 대답을 회피한다면 백성들에게 비겁함을 드러내는 셈이니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 하면, 로마의 실정법을 어기는 것이니 당장에 감옥에 갖히게 될 것이고, 세를 바치라 하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되는 셈이니 유대 민중의 보편적인 애국심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 되겠는가! 무리들은 더 이상 예수에게서 어떤 지도자의 모습같은 것을 느낄 수 없을 것이고 민심은 그를 떠날 것이다. 우하하하... 이왕이면 세를 바치지 말라는 대답을 했으면 좋겠다! 당장에 로마의 실정법을 어긴 죄목으로 잡혀가버리게 말이다!"

   예수님을 말의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일단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과 단 둘이 만나 이런 질문을 해봤자 나중에 법정에서 증인이 없으면 아무소용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롯 당원들을 동반했습니다 (16절) 그런데 하필이면 왜 헤롯 당원들인가? 자기들과 같은 바리새인이나 무리들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아니다. 당시에 헤롯 당원들은 정치적 실세였고,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실세였으며 두 부류는 서로 공생공존의 관계였으니 헤롯 당원보다 확실한 증인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도 언제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들 두 누룩은 당시 사회를 주도한 두 가치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잡기 위한 바리새인들의 치밀함이며 세상의 권모술수에 능한 모습에 기가막힐 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여!' 하고 부르면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늘어놓는 말은 어떻게든 예수님이 자기들의 계략에 말려들도록 하기 위해서 아첨하는 말부터 해야 했을 것입니다. 16절을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선생님은 정말 참되십니다.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면서도 그야말로 진리만 가르치십니다. 우리같은 것들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무엇보다도 그 어떤 인간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그대로 선포하시는 모습이 너무 감명 깊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께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선생님께서는 사람을 그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생님께서는 그가 제사장의 옷을 입었다거나, 돈이 많고 권력을 가진자라고 해서, 그것 때문에 할 말을 못하시는 분도 아니고 진리 아닌 거짓을 말하시는 분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육신이 약하여 '외모'를 의식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상하고, 또한 그만큼 선생님이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어께가 으쓱해지고 기분이 좋아서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주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 여세를 몰아 그들은 넌즈시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는 투로 말합니다. 17절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우리가 전부터 잘 모르는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 이스라엘은 예로부터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다윗의 나라를 회복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그 성취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가이사의 명령을 어기고 독립할 힘도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게 우리의 고민입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가이사의 명령을 어기자니 당장에 부닥치는 현실이 어렵고, 그렇다고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명을 어기자니 내세와 영생의 문제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일이 옳은일입니까? 아닙니까?  
   더욱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는 세금 문제뿐 아니라, 사람이 태어나 호적등록을 하기만 하면 누구나 주민세를 물어야 하는데, 우리가 주민세를 낸다는 것은 우리 이스라엘이 가이사 왕국의 백성이라는 뜻 아닙니까? 하나님께 선택된 특별한 민족인 이스라엘 왕국이 가이사 아래에 들어가다니요. 주민세는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우리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가이사 같은 세상의 임금을 의식해서 바른말을 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기에 감히 묻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르니이까?"

   인간의 악함은 그 하는 말이 거치른가 부드러운가에 있지 않습니다. 이렇듯 그 안에 비수를 품고도 겉으로는 얼마든지 나긋나긋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외면의 겸손과 부드러움, 상대방을 높이는 칭찬과 존경같은 것들은 얼마든지 상대방을 죽이는 독약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말에는 단 한마디도 그릇됨이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그 누가 들어도 흠잡을데 없는 완벽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어찌 예수님을 속일 수 있으리요! 예수님은 그 질문들이 지니는 함정 -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다고 할 경우에는 역대로 전해 내려오는 하나님의 선민 사상을 포기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불가하다고 할 경우에는  당장 로마의 군사를 불러들여 자신을 묶으리라는 것-을 간파하고 계셨기 때문에 "외식(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8절)

    함정은 건너뛰거나 돌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함정은 그 속으로 뛰어들면 안됩니다. 즉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 옳다, 그르다는 양단간의 대답은 모두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무응답' 또한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이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꼼짝없이 알면서도 눈뜨고 당하게 될 순간입니다.  

   "셋돈을 내게 보이라"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제대로 읽은 예수님께서 그 동전을 보여달라 하니 바리새인들은 "옳지! 이제 게임은 끝났다!" 하며 데나리온 하나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왔습니다.
"자, 여기 이 데나리온에 있는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 것인가?"
"물론 가이사의 것이지요."

   사람들은 돈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고 십일조, 감사헌금, 건축헌금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드린 그 돈을 하나님이 과연받으셨을까? 에 대한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헌금을 하지 못해서 안타깝고 하나님께 죄송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바치라고 말씀하셨는가?'에 대한 의심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많은 헌금을 하면 가슴이 뿌듯하고 그 반대이면 부끄러운 생각을 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는 사람의 가치관이 '돈'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가 돈을 좋아하니까 하나님도 돈을 좋아하실 것으로 생각하여 돈을 많이 바친 사람을 하나님은 더 사랑하고 적게 바친 사람은 그만큼 적게 사랑하실 것이란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세금에 대한 질문을 하느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관심사가 그만큼 '돈'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엔 '성직자'가 소득세를 내야 하는가 아니면 내지 말아야 하는가를 가지고 논란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만큼 그들의 관심사가 '돈'에 있다는 반증입니다. 문제는 성직자가 세금을 내야 하는가 내지 말아야 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따위 논쟁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한심하게 생각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영적 지도자라 하는 사람들이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문제에 매여 오도가도 못하면서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행태. 하나님 나라의 삶과 세상 나라의 삶을 뒤섞어 놓는 가르침.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세금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그들의 삶이 '세상'에 속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야 할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세상이 집을 짓고 터를 잡았다는 뜻이며 그러므로 당연히 바리새인의 주인은 세상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돈이라는 것은 사람이 그것을 가치있게 보아주지 않으면, 그것에 가치를 부여해 주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동전은 가치가 떨어지면 병두껑 보다도 소용없는 것이고 지폐도 가치가 떨어지면 코푸는 휴지만도 못한 종가 되는 것입니다.  돈에 적힌 글과 돈의 형상이 힘을 쓰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들에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고, 이 말은 곧 그들 속에 돈이 형상화되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하면 돈에 적혀있는 형상과 글이라는 것은 그 사람 마음 속에 들어있는 형상이나 글과 일치한다는 말입니다.

   데나리온에 가이사의 형상과 가이사의 글이 적혀있다는 것은  가이사가 그 세상의 지배자였다는 뜻이며, 가이사만 있으면 그 세상에서 할 수 있는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냐'고 질문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사이사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뜻이 되고 , 반대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의식' 즉 잠들어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깨어있는 사람은 그러므로 가이사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거기 무슨 옳고 그름의 문제가 있겠습니까! 세를 바쳐도 그만이고 안 바쳐도 그만입니다. 역시 오늘날 성직자들도 세금을 내든 안내든 하나님은 거기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시며 내든 말든 그것은 전적으로 성직자들 맘대로라는 말입니다.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도 동일한 문제입니다. 십일조를 하든 말든, 건축헌금을 하든 말든, 하나님은 거기에 아무런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 복을 많이 받고 어쩌고 하는 것은 종교 사기꾼들의 농간입니다. 복 받기 위해서 헌금을 하시려거든 차라리 그 돈을 은행에 예금해서 이자나 받아 드십시오! 하나님으 그 돈 받고 이자 안 붙여 주십니다. 잘 이해하십시오! 자기가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가이사의 것'이라면 헌금을 아무리 많이 해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이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가이사의 것 을 탐내지도 않으실 뿐더러 가이사 역시 하나님의 것을 손대지도 못합니다. 동전에 새겨져 있는 형상과 글이 누구의 형상이며 누구의 글입니까? 거기 가이사의 형상이 그려져 있고 가이사의 글이 씌여져 있으면 그것이 곧 가이사의 소유이며 가이사가 다스리는 세상에 힘을 지닌 표라는 뜻입니다. 그런 가이사의 표를 가지고 그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느니 마느니 하는 문제를 논하고 있는 자체가 그들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고, 그래서 그들 속에 아직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지 아니하였으며,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형상화되지 않았기에 가이사의 형상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새겨지고,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과 형상과 말씀이(글이) 아로새겨졌다면 우리는 더 이상 가이사 나라의 부정이나 부도덕 불의나 부패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그것들을 벗어나 하나님의 온전하시며, 하나님의 거룩에 더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의 액수가 많다고 해서 입이 찟어지게 기분이 좋지도 않을 것이며 헌금의 액수가 적다고 해서 위축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30배, 60배,100배 뻥튀기를 해주시란 기대도 하지 않을 것이며 헌금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슬프게 할 것이란 생각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는 불이(不二)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소유인가 아니면 가이사의 소유인가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큰일났습니다. 바라새인들의 잔꾀가 무참하게 무너지는 현장을 봅시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모습을 봅시다. 이제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면 그들은 가이사의 지배아래 있어 가이사의 것이라는 선언을 하는 셈이고, 또 관념만의 신앙이긴 하지만 자기들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므로 가이사에게 세를 낼수 없다고 하게 되면 이제 예수를 걸고 넘어질 그 법망에 스스로 말려들게 되는 꼴이니, 이런걸 가리켜 혹 떼러갔다가 혹 붙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가이사의 것이면 내가 가진 만물도 가이사의 것이고, 반대로 내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면 만물도 자연히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나 가이사는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속에 그의 형상과 글이 새겨져 우리의 삶이 그의 뜻대로 움직여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사이며 가이사 역시 동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그러나 가이사가 다스리는 세상으로부터의 공급은 중단될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더 좋아하십니까?
  무엇을 더 가치있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입니까, 가이사 입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까, 보이는 세계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세상의 재물입니까?
  오늘 내 가슴에 새겨진 형상과 글은 과연 누구의 것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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