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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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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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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본문 22;29 에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 하였도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권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무너뜨리려 하였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파 사람들이 '세금'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지만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쉴틈도 없이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타납니다. '권세'의 문제가 종교의 본질에 관한 문제라면 '세금'의 문제는 정치, 사회적인 문제이고 오늘 '부활'에 관한 문제는 교리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골탕먹이기 위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성경의 내용을 교묘하게 왜곡시켜 인용합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24절) 하고 모세를 들먹였지만 사실은 성경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해보면 어떤 사람들은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하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가끔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교회에 관해 누구보다도 익숙하고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든 간에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저 사두개인들의 질문과 비슷한 허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인용했지만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용하였습니다. 성경을 백번 읽고 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해도 성경의 참 내용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사두개인과 다를것이 없습니다. '전도폭팔'을 창설했던 제임스 캐네디목사님이 그랬습니다. 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뛰어난 신학지식을 가지고 목회를 시작 하면서 누구보다도 목회를 잘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실패를 경험합니다. 자기의 신학 지식으로 자기의 인간적인 열정으로 목회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의지하여 다시 성경을 보기 시작합니다. 100번이나 봤던 성경이었는데도 성령님이 보게 하셔서 다시 보는 성경은 성경을 처음 보는 것 같았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 이후에 새롭게 깨달은 성경을 기초로 하여 '전도폭발훈련'을 개발해냅니다.
이단들을 만나면 아주 성경을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교리만을 구슬 꿰듯이 연결하여 성경을 여기저기 짜깁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달달달달 외웁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 구원파가 그렇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내용만 추려내서 믿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을 때에는 아주 합리적이고 성경에 정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 앞에 가면 성경을 크게 오해하여 성경의 핵심과 본질을 잃어버렸다고 책망을 받을 것이 뻔합니다.
성경공부를 아무리 많이 하고 큐티를 한다고 해도, 그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 성경공부나 큐티는 관념이고 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배를 화려하고 거룩하게 드려도 아무리 많은 시간 기도를 하여도 그 속에서 예수님의 피묻은 손을 잡지 못하면 다 시간낭비라는 말입니다. 오늘 읽는 이 글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면 이 글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쓰레기일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아픈 부분은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는 목회자가 드물다는 것입니다. 깊은 묵상이 없다보니 너무나도 가벼운 설교가 난무하고, 무책임한 설교는 마른 막대기처럼 생명이 없습니다. 또 한가지 커다란 딜레마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말씀을 반드시 생활과 연결시켜서 적용하도록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듯 합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말씀과 손을 잡고 출발했던 설교가 어느 틈엔가 말씀은 떼어놓고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만 실컷하고 결국에는 말씀을 찾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삶 속에 적용시키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지만 말씀을 왜곡시키고 약화시켜가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들이 전부 다 살아가는데 딱 들어맞는 실습과목만 공부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차라리 따분하고 지루하더라도 정확하고 확실한 성경의 원리를 설교하는 것이 '삶 가운데 적용시키기 위한 재미있는 설교'보다는 나은 것입니다.
성경의 의도를 깨닫기 원합니다. 이것이 저의 평생 가장 우선인 기도 제목입니다. 말씀 뒤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심중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문자라는 그림자 가지고 실체를 본 듯 말하기는 싫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이에 그려진 호랑이를 보고서 그 무서움을 실감나게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실체를 보고 싶습니다. 제가 물려 죽어도 좋사오니 살아있는 말씀의 호랑이를 손으로 잡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 평생의 기도제목입니다.
당시에 성경학자들이었던 사두개인들은 그 성경을 너무 연구(?)하다보니 '성경을 연구해보니 부활은 없는 것이더라'하는데까지 곁길로 빠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와서 짐짓 궁금한 척 하면서 거짓말로 지어낸 이야기를 하며 거만하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誤解)하였도다" *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권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무너뜨리려 하였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파 사람들이 '세금'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지만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쉴틈도 없이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타납니다. '권세'의 문제가 종교의 본질에 관한 문제라면 '세금'의 문제는 정치, 사회적인 문제이고 오늘 '부활'에 관한 문제는 교리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골탕먹이기 위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성경의 내용을 교묘하게 왜곡시켜 인용합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24절) 하고 모세를 들먹였지만 사실은 성경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해보면 어떤 사람들은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하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가끔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교회에 관해 누구보다도 익숙하고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든 간에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저 사두개인들의 질문과 비슷한 허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인용했지만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용하였습니다. 성경을 백번 읽고 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해도 성경의 참 내용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사두개인과 다를것이 없습니다. '전도폭팔'을 창설했던 제임스 캐네디목사님이 그랬습니다. 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뛰어난 신학지식을 가지고 목회를 시작 하면서 누구보다도 목회를 잘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실패를 경험합니다. 자기의 신학 지식으로 자기의 인간적인 열정으로 목회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의지하여 다시 성경을 보기 시작합니다. 100번이나 봤던 성경이었는데도 성령님이 보게 하셔서 다시 보는 성경은 성경을 처음 보는 것 같았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 이후에 새롭게 깨달은 성경을 기초로 하여 '전도폭발훈련'을 개발해냅니다.
이단들을 만나면 아주 성경을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교리만을 구슬 꿰듯이 연결하여 성경을 여기저기 짜깁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달달달달 외웁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 구원파가 그렇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내용만 추려내서 믿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을 때에는 아주 합리적이고 성경에 정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 앞에 가면 성경을 크게 오해하여 성경의 핵심과 본질을 잃어버렸다고 책망을 받을 것이 뻔합니다.
성경공부를 아무리 많이 하고 큐티를 한다고 해도, 그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 성경공부나 큐티는 관념이고 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배를 화려하고 거룩하게 드려도 아무리 많은 시간 기도를 하여도 그 속에서 예수님의 피묻은 손을 잡지 못하면 다 시간낭비라는 말입니다. 오늘 읽는 이 글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면 이 글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쓰레기일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아픈 부분은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는 목회자가 드물다는 것입니다. 깊은 묵상이 없다보니 너무나도 가벼운 설교가 난무하고, 무책임한 설교는 마른 막대기처럼 생명이 없습니다. 또 한가지 커다란 딜레마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말씀을 반드시 생활과 연결시켜서 적용하도록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듯 합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말씀과 손을 잡고 출발했던 설교가 어느 틈엔가 말씀은 떼어놓고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만 실컷하고 결국에는 말씀을 찾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삶 속에 적용시키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지만 말씀을 왜곡시키고 약화시켜가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들이 전부 다 살아가는데 딱 들어맞는 실습과목만 공부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차라리 따분하고 지루하더라도 정확하고 확실한 성경의 원리를 설교하는 것이 '삶 가운데 적용시키기 위한 재미있는 설교'보다는 나은 것입니다.
성경의 의도를 깨닫기 원합니다. 이것이 저의 평생 가장 우선인 기도 제목입니다. 말씀 뒤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심중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문자라는 그림자 가지고 실체를 본 듯 말하기는 싫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이에 그려진 호랑이를 보고서 그 무서움을 실감나게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실체를 보고 싶습니다. 제가 물려 죽어도 좋사오니 살아있는 말씀의 호랑이를 손으로 잡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 평생의 기도제목입니다.
당시에 성경학자들이었던 사두개인들은 그 성경을 너무 연구(?)하다보니 '성경을 연구해보니 부활은 없는 것이더라'하는데까지 곁길로 빠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와서 짐짓 궁금한 척 하면서 거짓말로 지어낸 이야기를 하며 거만하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誤解)하였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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