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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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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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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본문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자식을 저주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자식은 축복합니다. 비록 자식이 잘 못되었을지라도 축복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축복을 차버리는 사람에게는 '화있을진저'하며 분노를 터트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가운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굴러 들어온 축복을 발로 차버린 못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 "복있는 자는" 하시면서 8복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복 받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자세히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8복'을 거절한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단호하게 '화 있을진저'하시면서 저주를 하셨습니다. 그것도 일곱 번씩이나 '7화'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8복(福)'에 속할 것인가 '7(禍)'에 속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나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는 '우맹, 소경, 독사의 새끼들, 회칠한 무덤, 지옥의 판결'등 격렬하고도 무서운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와 정의와 진리의 선포입니다. 죄를 바늘귀만큼도 용납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용납하시지만 죄는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저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59:1-2) 그래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셨고 그의 보혈을 믿는 자는 죄가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이 '복음'입니다. 구원입니다.
그런데 '화 있을진저' 라는 말씀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이 비록 격렬한 언어로 말씀하셨지만 그 마음에는 눈물과 가슴이 찢어지는 애통과 말할 수 없는 사랑이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37절)하신 말씀 속에서 그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19:14)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그토록 내가 너를 구원하고 싶었는데!" 라며 가슴 찢어지는 아픔으로 우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화 있을진저' '저주 받을 지어다'라는 말씀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가 막히게 뜨거운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공의는 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속에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하는 아픔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한번 돌이켜 봅시다. 혹 나는 남을 비판할 때 눈물이 있었는가? 만약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남을 비판했다면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그 비판을 받은 사람은 나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고 죽었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고 화를 내고 야단을 치고 비판을 하고 거룩한 분노를 세상에 터트린 것은 그분은 그럴 자격이 있었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깊은 사랑을 전제로 그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판하고 정죄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자기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도 모두 똑같은 상황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처럼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저는 예수님처럼 비판할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비판하는 무리들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다만 그 비판에 겸손한 마음으로 가슴을 치는 안타까운 회개를 하며 주님의 긍휼히 여겨주심을 기다릴 뿐입니다. *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자식을 저주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자식은 축복합니다. 비록 자식이 잘 못되었을지라도 축복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축복을 차버리는 사람에게는 '화있을진저'하며 분노를 터트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가운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굴러 들어온 축복을 발로 차버린 못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 "복있는 자는" 하시면서 8복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복 받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자세히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8복'을 거절한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단호하게 '화 있을진저'하시면서 저주를 하셨습니다. 그것도 일곱 번씩이나 '7화'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8복(福)'에 속할 것인가 '7(禍)'에 속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나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는 '우맹, 소경, 독사의 새끼들, 회칠한 무덤, 지옥의 판결'등 격렬하고도 무서운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와 정의와 진리의 선포입니다. 죄를 바늘귀만큼도 용납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용납하시지만 죄는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저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59:1-2) 그래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셨고 그의 보혈을 믿는 자는 죄가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이 '복음'입니다. 구원입니다.
그런데 '화 있을진저' 라는 말씀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이 비록 격렬한 언어로 말씀하셨지만 그 마음에는 눈물과 가슴이 찢어지는 애통과 말할 수 없는 사랑이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37절)하신 말씀 속에서 그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19:14)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그토록 내가 너를 구원하고 싶었는데!" 라며 가슴 찢어지는 아픔으로 우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화 있을진저' '저주 받을 지어다'라는 말씀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가 막히게 뜨거운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공의는 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속에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하는 아픔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한번 돌이켜 봅시다. 혹 나는 남을 비판할 때 눈물이 있었는가? 만약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남을 비판했다면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그 비판을 받은 사람은 나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고 죽었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고 화를 내고 야단을 치고 비판을 하고 거룩한 분노를 세상에 터트린 것은 그분은 그럴 자격이 있었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깊은 사랑을 전제로 그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판하고 정죄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자기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도 모두 똑같은 상황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처럼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저는 예수님처럼 비판할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비판하는 무리들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다만 그 비판에 겸손한 마음으로 가슴을 치는 안타까운 회개를 하며 주님의 긍휼히 여겨주심을 기다릴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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