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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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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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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사방 천지에서 모여든 열광하는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앞뒤에 서 있었던 제자들은 신이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아이고, 갈릴리의 무식한 고기잡이 베드로가 출세 했네~ 저 대단하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다니!" 하는 동네사람들이라도 만나면 더욱 어깨가 으쓱했을 것입니다.
날이 저물자 낮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들판의 축제를 벌였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강 저편으로 건너가자 말씀하십니다. 그 예수님의 명령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제자들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즉각적인 복종으로 예수님을 배에 모신 그대로(36절) 노를 저어 저녁노을을 보며 갈릴리 저편으로 건너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발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큰 광풍(狂風)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딧쳐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의 광풍은 갑자기 일어나며 사람들이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광풍의 시련은 제자들이 잘못한 불순종의 대가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낮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생명의 말씀과 특별히 비유를 해석(解釋)하여 듣는 놀라운 축복을 누린 제자들이 삶의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풍랑이 거세지자 제자들은 그 귀한 야외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고도 불과 몇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그 천국 멧세지를 잊어버리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져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님은 태연하게 뱃고물을 베고 누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코까지 고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무서움에 빠져버렸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곧 뒤집힐 것 같은 배 안에서 태연하게 주무시는 예수님이 너무나도 무책임하고 무능력하며 긴급사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둔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이나 비유들은 그냥 귀에 듣기 좋은이 상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은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광풍속에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그 예수님은 아시는지 모르는지 쿨쿨 주무시고 계시다니요.
제자들은 실망스럽고 화가난 모습으로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절) 자신들을 책임자라는 막가는 심정으로 밖에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어쩔수 없는 제자들의 한계가 들어나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가끔 만나는 주무시는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도 여전히 불러도 대답 없는 안계신 것 같은 주님 앞에서 제자들처럼 실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의 주무시는 모습은 이런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다 맞기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역경이나 환란에 의해 좌초될 수 없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는 참 믿음의 모습 말입니다. 그런 믿음은 주변 환경에 초연하며 폭풍 속에서도 편히 잠들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는 없냐는 말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 봤다면 예수님을 깨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마구 소리를 치며 울부짖으며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일 밖에 안됩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예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해서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관념적으로만 알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죽게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죽게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배에 가득한(37절)것은 물이 아니라 제자들의 불신이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내 인생의 배가 조금만 파도에 밀려도, 조금만 물이 들어와도 금방 마음의 평강과 균형을 잃지는 않는가 흔들리는 인생의 배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고 한없이 초라해지며 당황하는 모습이 바로 나의 자화상은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나와 상관 없는 분처럼 저 멀리에 계시고, 나의 절박한 상황에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벙어리이고 귀먹은 예수님은 아니신가? 그래서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깨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나의 모습은 아닌가?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다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타신 배가 침몰하면 예수님도 같이 죽으십니다. 예수님을 모신 내가 망하면 예수님도 같이 망합니다. 그런 손해보실 예수님이 아님을 믿는다면 인생의 광풍에 그렇게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
예수님이 잔잔케 하신 '바다라'의 모습 :아시아, 루시아도의 항구. 로도섬 대안에 있는데 지금은 수심이 앝아 배가 정박하지 못한다.
사방 천지에서 모여든 열광하는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앞뒤에 서 있었던 제자들은 신이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아이고, 갈릴리의 무식한 고기잡이 베드로가 출세 했네~ 저 대단하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다니!" 하는 동네사람들이라도 만나면 더욱 어깨가 으쓱했을 것입니다.
날이 저물자 낮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들판의 축제를 벌였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강 저편으로 건너가자 말씀하십니다. 그 예수님의 명령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제자들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즉각적인 복종으로 예수님을 배에 모신 그대로(36절) 노를 저어 저녁노을을 보며 갈릴리 저편으로 건너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발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큰 광풍(狂風)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딧쳐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의 광풍은 갑자기 일어나며 사람들이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광풍의 시련은 제자들이 잘못한 불순종의 대가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낮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생명의 말씀과 특별히 비유를 해석(解釋)하여 듣는 놀라운 축복을 누린 제자들이 삶의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풍랑이 거세지자 제자들은 그 귀한 야외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고도 불과 몇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그 천국 멧세지를 잊어버리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져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님은 태연하게 뱃고물을 베고 누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코까지 고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무서움에 빠져버렸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곧 뒤집힐 것 같은 배 안에서 태연하게 주무시는 예수님이 너무나도 무책임하고 무능력하며 긴급사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둔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이나 비유들은 그냥 귀에 듣기 좋은이 상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은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광풍속에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그 예수님은 아시는지 모르는지 쿨쿨 주무시고 계시다니요.
제자들은 실망스럽고 화가난 모습으로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절) 자신들을 책임자라는 막가는 심정으로 밖에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어쩔수 없는 제자들의 한계가 들어나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가끔 만나는 주무시는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도 여전히 불러도 대답 없는 안계신 것 같은 주님 앞에서 제자들처럼 실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의 주무시는 모습은 이런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다 맞기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역경이나 환란에 의해 좌초될 수 없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는 참 믿음의 모습 말입니다. 그런 믿음은 주변 환경에 초연하며 폭풍 속에서도 편히 잠들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는 없냐는 말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 봤다면 예수님을 깨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마구 소리를 치며 울부짖으며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일 밖에 안됩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예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해서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관념적으로만 알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죽게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죽게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배에 가득한(37절)것은 물이 아니라 제자들의 불신이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내 인생의 배가 조금만 파도에 밀려도, 조금만 물이 들어와도 금방 마음의 평강과 균형을 잃지는 않는가 흔들리는 인생의 배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고 한없이 초라해지며 당황하는 모습이 바로 나의 자화상은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나와 상관 없는 분처럼 저 멀리에 계시고, 나의 절박한 상황에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벙어리이고 귀먹은 예수님은 아니신가? 그래서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깨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나의 모습은 아닌가?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다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타신 배가 침몰하면 예수님도 같이 죽으십니다. 예수님을 모신 내가 망하면 예수님도 같이 망합니다. 그런 손해보실 예수님이 아님을 믿는다면 인생의 광풍에 그렇게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
예수님이 잔잔케 하신 '바다라'의 모습 :아시아, 루시아도의 항구. 로도섬 대안에 있는데 지금은 수심이 앝아 배가 정박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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