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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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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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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아 하시니라.
마가복음 14:1-11절 말씀을 잘 살펴보십시오. 두 종류의 사람들이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원수들이었고 나사로, 마르다, 시몬, 마리아는 예수님의 친구들이었습니다. 잘 보세요.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의 원수들은 당시에 신앙인들이었고, 예수님의 친구들은 그 신앙인들이 사람취급도 안하는 천한 신분이었습니다.
원수들은 예수를 잡아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예수님의 친구들은 옥합을 깨뜨리는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가? 나는 어느 편인가요?
예수님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름 앞에 '문둥이'라고 쓴 것을 보면 그는 원래 나병환자였는데 예수님께 치료를 받아 병 나음을 입고 그 고마운 마음으로 예수님과 예수님을 다르는 사람들을 초청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둥이였던 시몬의 식탁은 아름다운 향기가 진동하는 식탁이 되었습니다. 식탁에 꽃 한송이만 꽂아도 그 식탁이 돋보이는데 값비싼 향유가 부어졌으니 얼마나 멋진 식탁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 향한 마리아의 헌신은 시몬의 식탁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습니다.
내가 들고가는 헌신의 옥합은 내가 방문하는 성도의 가정에 축복이 됩니다. 마리아의 헌신이 없었다면 시몬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옥합은 소문내지 않고 갑자기 은밀하게 준비되었습니다. 오직 주님만 알아주면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조용한 실천이 만마디의 신앙고백보다 낫습니다. 마라아는 시몬의 식탁으로 조용히 왔습니다. 그녀는 고요한 순간에 자신이 가졌던 최대의 보물을 포기하였습니다. 사람의 칭찬이나 자기 위로나 세상의 명예를 의식하지 않아야 맑은 희생입니다. 마리아의 시선은 오직 예수님에게로만 향하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마리아의 옥합을 삼백데나리온에 팔아 구제헌금으로 썼어야 마땅했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마리아의 행동이 어리석은 낭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성도들이 인정하지 않고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헌신을 흔들림없이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주님도 인정하고 사람들도 인정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더욱 순수한 헌신이 미움이나 시기의 대상이 되고 말썽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실천을 주저합니다. 대체로 우리는 남이 인정해 주지 않는 봉사는 하기 싫어합니다. 제자들은 마리의 옥합이 깨지는 순간 할렐루야!를 외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입으로 무안을 당하고 책망을 당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인정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칭찬을 하여도 주께서 나를 변호해 주시지 않는일이라면 전혀 무익할 따름입니다. 나는 누구의 시선을 더 의식하는가? "옳다 인정함을 받는자는 자기를 칭찬하는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린도루서10:18)
마리아의 옥합만큼이나 교회 안에서 깨드려져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성경의 옥합'입니다. 성경이 깨져야 합니다. 항아리에 담아두면 그 가치는 간직할지언정 그 향기는 맡을수 없습니다. 성경의 향기는 성경이 열리고 성경의 순수한 원리들이 흘러 나와야 맡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양심을 찌르기도 하고 커다란 돈벌이가 되는 불의한 일을 포기하게도 하고, 눈속임을 중단하도록 자극하며, 어두운데서 짓던 죄를 중단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이 깨지지 않고 그냥 지금처럼 옥합 안에 갖혀있는 상징성을 지닌 성경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을 깨뜨릴 것입니다. 마구마구 부술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마리아를 직접 꾸짖었던 사람은 가룟유다였습니다.(요12:4-5)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구제 운운했지만, 요한은 그가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착복을 일삼았다고 폭로하였습니다(요12:6).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실삼아 돈을 벌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그것이 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가난한 자입니까? 주님은 마굿간에 오셔서 이 세상에 빈 몸으로 오신 가장 가난한자이셨던 것을 유다는 왜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마라아는 삼백데나리온이나 되는 향휴를 허비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은 30세겔에 주님을 팔아 소득이 생겼습니다. 마리아는 돈을 썼고 유다는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은 삼십세겔을 도로 내놓고 목을 매달았습니다. 마리아는 허비했지만 생명을 얻었고, 유다는 돈을 벌었지만 생명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서 유다를 가리켜 "멸망의 자식"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다가 마리아에게 한 "허비"한다는 말이 요한복은17:12절의 '멸망'이라는 단어와 원문상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멸망의자식' '허비의 자식'입니다.
마리아는 귀한 옥합향을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시몬의 집은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찼습니다. 아, 그 향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 되었을까요? 그 향기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코가 예민한 사람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맡고 있습니다. 이세상 일은 시간속에 가라앉고 맙니다. 좋은 삶을 살았든 악한 삶을 살았든 다 잊혀집니다. 어떤 문헌에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그냥 기록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헌신은 예수님이 기억해 주셨기에 오래도록 그 사건이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한순간 영웅으로 주목을 받았던 사람도 한시대가 흘러가면 쓸쓸하게 잊혀지고 말지만, 하나님께 바쳐진 헌신은 영원토록 그 빛을 잃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의인이고 어떤 사람이 악인입니까? 선한일을 많이 하면 의인입니까? 악한일을 많이 하면 악인입니까?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양들은 주님께 행한 선한 일들을 너무나 당연시 하엿습니다. 그래서 그런 당연한 일을 구태여 기억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염소는 달랐습니다. 선행을 내세우며 권리를 주장하고 자기들이 하지 않은 일까지 불리고 늘려서 자랑하였습니다. 바로 이 차이입니다. 선생을 드러내는 사람은 악인이고, 선행을 당연히 여기며 기억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마리아의 옥합은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옥합이 깨지는소리는 널리 광고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어제의 옥합을 추억하지 말고 늘 새로운 옥합을 깨드려야 합니다.
성경에 언급되는 '마리아'는 '주님 발 아래 있는자!'입니다. 여러명의 '마리가'가 등장하지만 한결같이 '주님의 발 아래'있었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눅10:39)
'마리아가 예수계신 곳에 와서 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요11:32)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요12:3)
발 아래 있다는 표현은 봉사와 존경과 의존을 말합니다. 또 다른 성경적 의미는 '문하생' 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문하생이었고 이 마리아도 예수님의 발 아래서 말씀을 듣고 배우던 문하생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시작은 언제나 말씀을 잘 듣고 배우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말씀이 우선되지 않은 봉사나, 기도나, 헌신은 겉으로 보면 잘 되는 것 같아도 안으로 심각한 문제를 키워가는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 아래서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는 부단한 관심과 마음의 집중이(누가복음10:42)있어야만 진정한 능력과 거룩한 열심을 일으키는 감동이 생길수 있습니다. * 최용우 2000.9.27.수 믿음교회 수요예배설교
마가복음 14:1-11절 말씀을 잘 살펴보십시오. 두 종류의 사람들이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원수들이었고 나사로, 마르다, 시몬, 마리아는 예수님의 친구들이었습니다. 잘 보세요.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의 원수들은 당시에 신앙인들이었고, 예수님의 친구들은 그 신앙인들이 사람취급도 안하는 천한 신분이었습니다.
원수들은 예수를 잡아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예수님의 친구들은 옥합을 깨뜨리는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가? 나는 어느 편인가요?
예수님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름 앞에 '문둥이'라고 쓴 것을 보면 그는 원래 나병환자였는데 예수님께 치료를 받아 병 나음을 입고 그 고마운 마음으로 예수님과 예수님을 다르는 사람들을 초청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둥이였던 시몬의 식탁은 아름다운 향기가 진동하는 식탁이 되었습니다. 식탁에 꽃 한송이만 꽂아도 그 식탁이 돋보이는데 값비싼 향유가 부어졌으니 얼마나 멋진 식탁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 향한 마리아의 헌신은 시몬의 식탁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습니다.
내가 들고가는 헌신의 옥합은 내가 방문하는 성도의 가정에 축복이 됩니다. 마리아의 헌신이 없었다면 시몬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옥합은 소문내지 않고 갑자기 은밀하게 준비되었습니다. 오직 주님만 알아주면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조용한 실천이 만마디의 신앙고백보다 낫습니다. 마라아는 시몬의 식탁으로 조용히 왔습니다. 그녀는 고요한 순간에 자신이 가졌던 최대의 보물을 포기하였습니다. 사람의 칭찬이나 자기 위로나 세상의 명예를 의식하지 않아야 맑은 희생입니다. 마리아의 시선은 오직 예수님에게로만 향하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마리아의 옥합을 삼백데나리온에 팔아 구제헌금으로 썼어야 마땅했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마리아의 행동이 어리석은 낭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성도들이 인정하지 않고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헌신을 흔들림없이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주님도 인정하고 사람들도 인정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더욱 순수한 헌신이 미움이나 시기의 대상이 되고 말썽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실천을 주저합니다. 대체로 우리는 남이 인정해 주지 않는 봉사는 하기 싫어합니다. 제자들은 마리의 옥합이 깨지는 순간 할렐루야!를 외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입으로 무안을 당하고 책망을 당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인정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칭찬을 하여도 주께서 나를 변호해 주시지 않는일이라면 전혀 무익할 따름입니다. 나는 누구의 시선을 더 의식하는가? "옳다 인정함을 받는자는 자기를 칭찬하는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린도루서10:18)
마리아의 옥합만큼이나 교회 안에서 깨드려져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성경의 옥합'입니다. 성경이 깨져야 합니다. 항아리에 담아두면 그 가치는 간직할지언정 그 향기는 맡을수 없습니다. 성경의 향기는 성경이 열리고 성경의 순수한 원리들이 흘러 나와야 맡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양심을 찌르기도 하고 커다란 돈벌이가 되는 불의한 일을 포기하게도 하고, 눈속임을 중단하도록 자극하며, 어두운데서 짓던 죄를 중단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이 깨지지 않고 그냥 지금처럼 옥합 안에 갖혀있는 상징성을 지닌 성경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을 깨뜨릴 것입니다. 마구마구 부술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마리아를 직접 꾸짖었던 사람은 가룟유다였습니다.(요12:4-5)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구제 운운했지만, 요한은 그가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착복을 일삼았다고 폭로하였습니다(요12:6).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실삼아 돈을 벌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그것이 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가난한 자입니까? 주님은 마굿간에 오셔서 이 세상에 빈 몸으로 오신 가장 가난한자이셨던 것을 유다는 왜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마라아는 삼백데나리온이나 되는 향휴를 허비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은 30세겔에 주님을 팔아 소득이 생겼습니다. 마리아는 돈을 썼고 유다는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은 삼십세겔을 도로 내놓고 목을 매달았습니다. 마리아는 허비했지만 생명을 얻었고, 유다는 돈을 벌었지만 생명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서 유다를 가리켜 "멸망의 자식"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다가 마리아에게 한 "허비"한다는 말이 요한복은17:12절의 '멸망'이라는 단어와 원문상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멸망의자식' '허비의 자식'입니다.
마리아는 귀한 옥합향을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시몬의 집은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찼습니다. 아, 그 향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 되었을까요? 그 향기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코가 예민한 사람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맡고 있습니다. 이세상 일은 시간속에 가라앉고 맙니다. 좋은 삶을 살았든 악한 삶을 살았든 다 잊혀집니다. 어떤 문헌에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그냥 기록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헌신은 예수님이 기억해 주셨기에 오래도록 그 사건이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한순간 영웅으로 주목을 받았던 사람도 한시대가 흘러가면 쓸쓸하게 잊혀지고 말지만, 하나님께 바쳐진 헌신은 영원토록 그 빛을 잃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의인이고 어떤 사람이 악인입니까? 선한일을 많이 하면 의인입니까? 악한일을 많이 하면 악인입니까?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양들은 주님께 행한 선한 일들을 너무나 당연시 하엿습니다. 그래서 그런 당연한 일을 구태여 기억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염소는 달랐습니다. 선행을 내세우며 권리를 주장하고 자기들이 하지 않은 일까지 불리고 늘려서 자랑하였습니다. 바로 이 차이입니다. 선생을 드러내는 사람은 악인이고, 선행을 당연히 여기며 기억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마리아의 옥합은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옥합이 깨지는소리는 널리 광고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어제의 옥합을 추억하지 말고 늘 새로운 옥합을 깨드려야 합니다.
성경에 언급되는 '마리아'는 '주님 발 아래 있는자!'입니다. 여러명의 '마리가'가 등장하지만 한결같이 '주님의 발 아래'있었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눅10:39)
'마리아가 예수계신 곳에 와서 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요11:32)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요12:3)
발 아래 있다는 표현은 봉사와 존경과 의존을 말합니다. 또 다른 성경적 의미는 '문하생' 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문하생이었고 이 마리아도 예수님의 발 아래서 말씀을 듣고 배우던 문하생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시작은 언제나 말씀을 잘 듣고 배우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말씀이 우선되지 않은 봉사나, 기도나, 헌신은 겉으로 보면 잘 되는 것 같아도 안으로 심각한 문제를 키워가는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 아래서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는 부단한 관심과 마음의 집중이(누가복음10:42)있어야만 진정한 능력과 거룩한 열심을 일으키는 감동이 생길수 있습니다. * 최용우 2000.9.27.수 믿음교회 수요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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