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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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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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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여기서 '전파하라'는 것은 메시지를 전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말이 딤후4:2에도 나오는데 '너희는 말씀을 전파하라' 고대에는 중요한 전갈을 포고자(herald)가 전달했습니다. 왕의 직속 전령(메신저)은 왕의 메시지를 동네마다 다니며 소리 높이 외쳤고 마을의 백성들은 함께 모여 최근 소식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선포자는 자신의 말이나 견해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이 받은 그 말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전갈의 내용을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전갈의 내용이 자기 마음에 들든 들진 않던 선포자는 메시지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전달해야 했습니다. 그는 무슨 토론이나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전갈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그런데 <막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성경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도 가장 잘 못 해석되어지고 있는 구절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잘 못 해석된 성경기준에 따라 다른 일에만 열성적 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신에 우리 자신의 프로그램이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우리의 복음이 앞서고 있다는 말입니다. 잘 못 이해되고있는 성경해석의 방법들을 살펴볼라고 합니다.
잘 못해석하는 성경 1 <막1: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주린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가난한 자들을 위해 집을 지으며 병든 자를 돌보아 주어라????>
물론 우리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같은 사회를 돌아보라는 것이 주님이 주신 명령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테레사 수녀같이 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배는 부르게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육체의 질병을 고친다해도 불치의 영혼의 병은 어떡합니까?(렘17:9) 잠시동안 가난을 면한다 해도(현 세상) 영원한 가난뱅이(영혼)는 어떻게 손쓸 수 있습니까? 우리가 헐벗은 자들을 가장 좋은 옷으로 입힌다 해도 죽을 때 그리스도의 의를 입지 못한 채 죽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좋은 집에 살아도 하늘에 영원한 집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도움이 이생에만 한정되어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도움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 주린자를 먹여주고 헐벗은 자를 입혀주며 가난한자를 위해주면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라구요? 순진한 소리. 그들은 절대로 그런 선행 때문에 믿어주지(?) 않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복음을 전하>기 보다는 그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사회사업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누더기를 벗겨내고 근사한 옷을 입히십시오. 악취가 코를 찌르는 도시의 빈민촌에 사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시골의 깨끗하고 작은 집을 제공하십시오. 스스로 자신과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그 뒤에 그가 구원받지 못한 채 죄 가운데 죽도록 내버려둔다면 그는 결국에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저는 결코 누구를 위해서도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해리 아이언 사이드의 "너희가 회개치 아니하면(Except ye repent)"이라는 글에서 인용: p. 181-182)
<모든 사회악이 척결되고 정의가 구현된다고 할지라도 사람에게 여전히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곧 그리스도이다!> (J. W. Hyde)
잘못 해석 하는 성경 2 <막1: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사회에 심기 위해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라???>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주로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의 교회 활동은 주로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에 이교도들이 신전에서 매춘행위를 하곤 했으므로 그들이 성전에서의 매춘 금지운동을 벌이고 있었습니까? 보수주의 성향의 사람들이 로마 원로원으로 선출되도록 노력하고 있었습니까? 로마의 비인간적인 검투 시합에 반대하여 가두시위를 벌였습니까? 과연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이혼이나 노예학대, 낙태, 부정부패, 윤리운동 등의 사회악에 대한 반대 운동에 나섰을까요? 물론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초기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런 것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을 행하기에도 바빴던 것입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 8:4).
그들이 과연 이런 토론을 했을까요? "현재 부도덕한 이 사회는 기독교적 가치관만이 변화시킬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윤리실천운동'도 하고 '환경운동'도 하고 '낙태반대운동'도 하고 대규모 집회도 열어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으로 이 사회를 변화시킵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타락한 사회로 하여금 억지로 성경의 가치관을 따르도록 한 예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사회에 "그리스도의 원리"를 뿌리내리게 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억지로 성도처럼 살도록 강요하기보다는, 그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온전히 살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일이니다.
우리는 죄를 배격하고 회개를 앞세우며 권능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먼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동성애와 아동 학대, 포르노그라피, 낙태를 일삼는 변화되지 않은 교회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먼저 돌이켜 회개하라고 외쳐야합니다. 교회는 이 사회가 성경적인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한 비난보다 교회 안에서 이단을 허용하고 진리를 선포하지 않는데 대한 비난에 더욱 열을 올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 거짓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눈감아 주면서 어짜피 타락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진 사회를 반대하고 배격한다는 것은 위선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항거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회개로 초대하는 말씀의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겐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심판을 경고했던 에녹이나(유14-15), 의를 선포하며 다가올 심판에 대해 경고했던 노아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벧후2:5) 우리에게는 복음을 전파는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운동으로 한 시대의 가치관을 뒤바꾼 것이 아니라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불과 몇 세대 동안 그들은 성경의 교리로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성전에는 이방인들의 신들이 사라졌으며 우상숭배는 시들해져 마치 좌초된 배처럼 되었다. 그들은 세상에 사람과 사람사이의 보다 높은 도덕률을 가지고 왔다. 여자의 인격과 신분이 바로 섰다. 순결, 예의 범절에 대한 기준도 바뀌었다. 많은 격투 시합 같은 많은 잔인한 관행들이 폐지되었다. 이것이 모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향이었다' (J. C. 라일)
잘못 해석 하는 성경 3 <막1: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세상을 변화시켜라.>
하나님은 우리보고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체제는 병들어 치유불능 상태에 있고 멸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각 개인(모든 만민에게)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고, 사람이 복음의 메시지에 반응할 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됩니다. 세상은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은 지옥과 멸망으로 들어가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이 멸망할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생명줄을 던지는 것'이며 복음을 전함으로 '멸망하는 자를 구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사회 변화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회심시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말이 많이 있는데 사실 그런 슬로건을 뒷받침 해줄 만한 성경의 가르침이나 예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새 세상을 가져오는 건 결코 교회가 아닙니다.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잘못 해석 하는 성경 4 <막1: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라.>
다시한번 본문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 봅시다. <막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공동번역), 온 세상에 나가서 (표준새번역), 온 세상에 가서(한글킹제임스),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이 말은 결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이끌어 복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가서... 모든 피조물을 교회로 초청하라' 반대로 우리가 <온 세상으로 나가야>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궁전 뜰로 초청하여 왕의 메시지를 들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곧장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달려가 거기서 왕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와는 다르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복음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만 오려고 합니다. 버스로 데리고 오건 꾀어서 데리고 오건 어쨌든 우리교회로만 오게 합니다. 그래서 그 모인 숫자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 숫자의 크기가 그 교회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각 교회의 첫째 목적이 과연 사람들을 불러와서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곳인가요? 복음은 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가르침을 최우선해야 합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고 와서는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바른 교리로 가르침으로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가르침을 받은 성도가 세상에 가서 또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 시간에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의 길로 초청하는 것이나 그들을 성도의 회중이 되도록 이끄는 일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것 이상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사역의 우선 순위를 둘 때 늘 발생합니다. 양떼들을 먹이고 성도들을 바르게 양육하는 대신 간단한 구원의 메시지나 요한복음 3:16 말씀만을 제시합니다. 물론 요한복음 3:16은 복음의 메시지를 놀랍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요한복음 3:16 이상입니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건 그런 간단한 구원의 초청이 아니라 성경 전체입니다.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연약한 성도들은 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을 교회에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고 교육해야되는 교회가 때아닌 문화센터가 되어서 볼링반, 등산반, 에어로빅반, 이 구성되고 비 본질적인것에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강하게 자라가야 합니다. 구원받는 순간은 하나님의 학교에 갓 입학하는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강력하게 훈련시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여기 흥미로운 사실이 있는데 대부분의 이단들은 자신들의 교회당을 멋지게 짓지 않습니다. 교회가 교회당을 장식하고 있는 사이에 이단들은 대신 양육센터나 교육센터를 세워 오히려 성경의 원리에 충실(??)하게 자신들에게 포섭된 자들을 진리가 아닌 자신들의 거짓된 교리로 강력하게 훈련시킵니다. 마귀는 어떤 체계가 효과적인가를 압니다.
<막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가장 많이 듣고 묵상하는 이 예수님의 유언이 가장 잘 못 해석되어 교회 깊숙히 뿌리박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가복음 끝=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여기서 '전파하라'는 것은 메시지를 전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말이 딤후4:2에도 나오는데 '너희는 말씀을 전파하라' 고대에는 중요한 전갈을 포고자(herald)가 전달했습니다. 왕의 직속 전령(메신저)은 왕의 메시지를 동네마다 다니며 소리 높이 외쳤고 마을의 백성들은 함께 모여 최근 소식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선포자는 자신의 말이나 견해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이 받은 그 말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전갈의 내용을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전갈의 내용이 자기 마음에 들든 들진 않던 선포자는 메시지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전달해야 했습니다. 그는 무슨 토론이나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전갈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그런데 <막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성경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도 가장 잘 못 해석되어지고 있는 구절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잘 못 해석된 성경기준에 따라 다른 일에만 열성적 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신에 우리 자신의 프로그램이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우리의 복음이 앞서고 있다는 말입니다. 잘 못 이해되고있는 성경해석의 방법들을 살펴볼라고 합니다.
잘 못해석하는 성경 1 <막1: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주린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가난한 자들을 위해 집을 지으며 병든 자를 돌보아 주어라????>
물론 우리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같은 사회를 돌아보라는 것이 주님이 주신 명령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테레사 수녀같이 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배는 부르게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육체의 질병을 고친다해도 불치의 영혼의 병은 어떡합니까?(렘17:9) 잠시동안 가난을 면한다 해도(현 세상) 영원한 가난뱅이(영혼)는 어떻게 손쓸 수 있습니까? 우리가 헐벗은 자들을 가장 좋은 옷으로 입힌다 해도 죽을 때 그리스도의 의를 입지 못한 채 죽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좋은 집에 살아도 하늘에 영원한 집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도움이 이생에만 한정되어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도움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 주린자를 먹여주고 헐벗은 자를 입혀주며 가난한자를 위해주면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라구요? 순진한 소리. 그들은 절대로 그런 선행 때문에 믿어주지(?) 않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복음을 전하>기 보다는 그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사회사업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누더기를 벗겨내고 근사한 옷을 입히십시오. 악취가 코를 찌르는 도시의 빈민촌에 사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시골의 깨끗하고 작은 집을 제공하십시오. 스스로 자신과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그 뒤에 그가 구원받지 못한 채 죄 가운데 죽도록 내버려둔다면 그는 결국에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저는 결코 누구를 위해서도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해리 아이언 사이드의 "너희가 회개치 아니하면(Except ye repent)"이라는 글에서 인용: p. 181-182)
<모든 사회악이 척결되고 정의가 구현된다고 할지라도 사람에게 여전히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곧 그리스도이다!> (J. W. Hyde)
잘못 해석 하는 성경 2 <막1: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사회에 심기 위해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라???>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주로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의 교회 활동은 주로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에 이교도들이 신전에서 매춘행위를 하곤 했으므로 그들이 성전에서의 매춘 금지운동을 벌이고 있었습니까? 보수주의 성향의 사람들이 로마 원로원으로 선출되도록 노력하고 있었습니까? 로마의 비인간적인 검투 시합에 반대하여 가두시위를 벌였습니까? 과연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이혼이나 노예학대, 낙태, 부정부패, 윤리운동 등의 사회악에 대한 반대 운동에 나섰을까요? 물론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초기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런 것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을 행하기에도 바빴던 것입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 8:4).
그들이 과연 이런 토론을 했을까요? "현재 부도덕한 이 사회는 기독교적 가치관만이 변화시킬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윤리실천운동'도 하고 '환경운동'도 하고 '낙태반대운동'도 하고 대규모 집회도 열어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으로 이 사회를 변화시킵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타락한 사회로 하여금 억지로 성경의 가치관을 따르도록 한 예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사회에 "그리스도의 원리"를 뿌리내리게 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억지로 성도처럼 살도록 강요하기보다는, 그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온전히 살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일이니다.
우리는 죄를 배격하고 회개를 앞세우며 권능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먼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동성애와 아동 학대, 포르노그라피, 낙태를 일삼는 변화되지 않은 교회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먼저 돌이켜 회개하라고 외쳐야합니다. 교회는 이 사회가 성경적인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한 비난보다 교회 안에서 이단을 허용하고 진리를 선포하지 않는데 대한 비난에 더욱 열을 올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 거짓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눈감아 주면서 어짜피 타락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진 사회를 반대하고 배격한다는 것은 위선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항거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회개로 초대하는 말씀의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겐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심판을 경고했던 에녹이나(유14-15), 의를 선포하며 다가올 심판에 대해 경고했던 노아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벧후2:5) 우리에게는 복음을 전파는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운동으로 한 시대의 가치관을 뒤바꾼 것이 아니라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불과 몇 세대 동안 그들은 성경의 교리로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성전에는 이방인들의 신들이 사라졌으며 우상숭배는 시들해져 마치 좌초된 배처럼 되었다. 그들은 세상에 사람과 사람사이의 보다 높은 도덕률을 가지고 왔다. 여자의 인격과 신분이 바로 섰다. 순결, 예의 범절에 대한 기준도 바뀌었다. 많은 격투 시합 같은 많은 잔인한 관행들이 폐지되었다. 이것이 모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향이었다' (J. C. 라일)
잘못 해석 하는 성경 3 <막1: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세상을 변화시켜라.>
하나님은 우리보고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체제는 병들어 치유불능 상태에 있고 멸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각 개인(모든 만민에게)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고, 사람이 복음의 메시지에 반응할 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됩니다. 세상은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은 지옥과 멸망으로 들어가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이 멸망할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생명줄을 던지는 것'이며 복음을 전함으로 '멸망하는 자를 구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사회 변화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회심시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말이 많이 있는데 사실 그런 슬로건을 뒷받침 해줄 만한 성경의 가르침이나 예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새 세상을 가져오는 건 결코 교회가 아닙니다.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잘못 해석 하는 성경 4 <막1: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라.>
다시한번 본문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 봅시다. <막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공동번역), 온 세상에 나가서 (표준새번역), 온 세상에 가서(한글킹제임스),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이 말은 결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이끌어 복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가서... 모든 피조물을 교회로 초청하라' 반대로 우리가 <온 세상으로 나가야>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궁전 뜰로 초청하여 왕의 메시지를 들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곧장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달려가 거기서 왕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와는 다르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복음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만 오려고 합니다. 버스로 데리고 오건 꾀어서 데리고 오건 어쨌든 우리교회로만 오게 합니다. 그래서 그 모인 숫자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 숫자의 크기가 그 교회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각 교회의 첫째 목적이 과연 사람들을 불러와서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곳인가요? 복음은 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가르침을 최우선해야 합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고 와서는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바른 교리로 가르침으로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가르침을 받은 성도가 세상에 가서 또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 시간에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의 길로 초청하는 것이나 그들을 성도의 회중이 되도록 이끄는 일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것 이상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사역의 우선 순위를 둘 때 늘 발생합니다. 양떼들을 먹이고 성도들을 바르게 양육하는 대신 간단한 구원의 메시지나 요한복음 3:16 말씀만을 제시합니다. 물론 요한복음 3:16은 복음의 메시지를 놀랍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요한복음 3:16 이상입니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건 그런 간단한 구원의 초청이 아니라 성경 전체입니다.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연약한 성도들은 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을 교회에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고 교육해야되는 교회가 때아닌 문화센터가 되어서 볼링반, 등산반, 에어로빅반, 이 구성되고 비 본질적인것에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강하게 자라가야 합니다. 구원받는 순간은 하나님의 학교에 갓 입학하는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강력하게 훈련시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여기 흥미로운 사실이 있는데 대부분의 이단들은 자신들의 교회당을 멋지게 짓지 않습니다. 교회가 교회당을 장식하고 있는 사이에 이단들은 대신 양육센터나 교육센터를 세워 오히려 성경의 원리에 충실(??)하게 자신들에게 포섭된 자들을 진리가 아닌 자신들의 거짓된 교리로 강력하게 훈련시킵니다. 마귀는 어떤 체계가 효과적인가를 압니다.
<막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가장 많이 듣고 묵상하는 이 예수님의 유언이 가장 잘 못 해석되어 교회 깊숙히 뿌리박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가복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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