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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우 말씀묵상

깊은데로가서

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회개하지 않는 마음

주일말씀 금요철야............... 조회 수 4757 추천 수 0 2002.05.22 00: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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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2:5-8 
구분 : 믿음교회 철야 
로마서 2:5-8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판단한다고 하셨습니까?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이 판단을 받습니다. 고집이 사람을 망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고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고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프라이드를 말합니다. 누구든 자신만의 독특한 프라이드가 없으면 그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일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양보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완고함도 고집이지만, 그러나 보다 차원높은 고집은 그런 성품적인 고집이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고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본질을 포기할 줄 모르는 그것이 진짜 왕고집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고집은 절대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종교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고집을 버렸다고는 결코 볼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통해서 조차 자신의 고집을 관철시키고 자신의 이기를 도모하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가만히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면 자신의 뜻과 고집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성취해 보려는 인간의 완강함과 완악함이 드러나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고집은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정해 놓은 기준을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합니다. 그러한 기준을 통해서 자아성취, 혹은 자기실현을 도모하기 마련인데 어찌 그러한 인간의 고귀함을 포기한단 말입니까.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휴머니즘이라든지 이상향들은 대부분 자신의 기준설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들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개인적인 이상 혹은 공동체적인 이상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것들은 모두 인간의 포기할 수 없는 자신들의 고집입니다. 이같은 이상들에 대해서 뭐라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모독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이러한 인간의 이상을 충실히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고등종교는 이러한 이상을 충실히 실현하기 위해서 봉사하는 신만이, 그리고 그러한 종교만이 고등종교라 인정을 받을 뿐입니다. 그러한 이상과 꿈들을 어떻게 인간이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한 인간의 고집은 무엇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본다면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충실히 적용하고 그것에 맞추어서 살며 동시에 그러한 거울을 타인에게 적용하며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들은 서로의 관계설정도 자신의 그러한 기준을 서로에게 적용하며 어울리려 합니다. 거기에서 좋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을 어느덧 구별하면서 서로가 티격태격 살아갑니다. 이러한 속에서 더 낳은 기준자를 제정하고 내세우고 또한 적용하면서 이상적인 자아상을 형성하려고 하며, 이러한데서 율법은 태어나고 제정됩니다.

이것이 최초에는 자신에게 타당한 법으로 시작되지만 점차 세분화되고 다양한 서로의 관계성을 통해서 공동체적인 유익을 도모하는 관습법이나 혹은 도덕과 윤리 더 나아가서 사회법으로 발전하고 구체화 됩니다. 때로는 성문화된 법이 탄생되어 나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면서 삽니다. 그리고 그러한 법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기준과 적용이 다릅니다.

심지어 양심이라는 도덕조차 문화와 시대에 따라서 달리 적용됩니다. 인간의 의식속에는 양심이라는 기능이 작용하고 있어서 이러한 법과 제도 혹은 규율이 생기는 것인데 그것이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보편적인 심성과 보편적인 양심의 요청이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데 이러한 양심이라는 것도 하나로 정해져서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때문에 특정 지역에서 죄인인 것이 다른 문화권이나 사회에서는 결코 죄가 되지 않는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국가보안법과 같은 특수한 경우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라, 도덕과 윤리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것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결코 지탄을 받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즉 A라는 문화권에서는 양심의 거리낌을 받고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B라는 문화권에서는 도무지 양심의 걸림이 되지 않기 때문에 죄의식에 사로잡힐 필요가없는 경우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기능이 작용하고 있어서 비록 천차만별이지만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맛보고 삽니다. 이것이 법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바로 이와같은 인간의 삶의 양태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인간은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 율법을 양식으로 삼고 율법을 먹으며 율법 아래에서 살며 율법을 고집합니다. 그리고 그같은 율법을 통해서 자아실현을 희망하며 그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이같은 고집을 누가 버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을 버리는 것은 자신의 삶의 터전을 버리는 것이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지탱시켜주었던 도덕적 지반을 포기하는 것이니 누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란 말입니까? 자신의 삶을 유지시켜 주던 터전과 기반을 포기한다는 것은 곧 세상을 포기한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고집을 포기할 수있는 인간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고집이요 회개치 아니한 마음입니다. 때문에 회개란 이러한 율법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서 사용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여전히 율법 아래에서 파묻혀 율법을 파먹고 살면서 그 아래에서 잘잘못을 따져가며 울며불며 회개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그러나 인간들은 바로 그같은 회개밖에는 할 능력이 없는것이 현실이요, 사실이니 답답한 일 아닙니까!

우리가 분명히 주시해야 할 사항은 바로 이같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상황인식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인식 아래에서 율법의 구조와 틀을 이해하고 그 아래에서 운명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인간의 수양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율법이요, 자신의 욕심일 뿐입니다. 그래서 수양은 그 수양으로 무엇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수양을 통해서는 결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으니 아하, 그 수양이나 고행은 성공했다고 할 수도도 있겠습니다.
  
  성경은 탈출구를 제시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란 바로 이같은 인간의 실존으로부터 해방을 제시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위대성과 장엄함이 있는것입니다.  진리에 이르는 명쾌하고 투명한 길!!. 인간의 지혜와는 전혀 상반되는 방법!! 십자가의 죽음은 곧 율법으로부터의 결별을 선언케 합니다. 자신의 율법적 가치관을 죽여버립니다. 자신이 죽는 사건입니다.그러나  세상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이 발생합니다. 세상이 내게서 죽는 것이요 그것은 이제까지의 나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의 맹점은 이러한 십자가의 도가 다만 관념과 교리로만 작용하고자신의 삶의 실제를 형성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십자가가 난무하고 있고 널려있지만 정작 십자가는 없는 기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부흥하고 있는데 진리는 찾아볼 수가 없다습니다. 십자가의 높고 높은 숲속에서 십자가를 찾아볼 수 없으니 대명천지에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단말입니까?

무엇이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입니까?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다는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열심히 자신의 기준과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며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살아가면서 사는 인생들은 율법적 면류관을 자신의 머리에 쓰고 사는 셈입니다. 그것은 모두 세상의 영광이며 칭호들입니다. 진리와는 전혀 별개의 것들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으니 자신에게는 잠시의 영광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무거운 짐이라는 사실은 그날에야 비로소 알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날이라 함은 진리가 진리로 드러나고 불의가 불의로 드러나는 어느 한 날이 모든 인생들에게는 반드시 주어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를 헌신짝과 같이 거절하고 버렸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 이상이 없습니다. 모세가 살고 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호 이상의 가치는 생각해볼 수 없는 지상에서의 최고 가치였습니다. 애굽의 왕실의 상황으로 보아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는 다는 것은 지상에서 가장 영예롭게 생각하는 자리의 1순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내던지고 당당히 그리스도를 인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 더큰 재물로 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만일 모세가 애굽의 모든 보화를 참된 보화로 여겼다면 그가 쓰고 있는 애굽의 모든 영광은 자신의 머리에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모양밖에는 아무것도 아닌셈이 됩니다.애굽의 가치관을 거절할 수 있는가? 그리고 율법적 가치관을 버리고 자유자의 자녀가 될 수 있는가? 예루살렘을 던져버리고 새 예루살렘을 누릴 수 있는가.?
예루살렘을 무너트릴 수 있을 때가 곧 「회개」라는 것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
최용우 2000.9.1(금) 믿음교회 금요철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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