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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성경본문 : | 눅1:3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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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눅4 |
누가복음4
마리아의 찬송
눅1:39-56
2000.10.22 믿음교회 주일오전설교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비하여 특별히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1.안나 이야기(2장),
2.나인성 과부(7장),
3.억울한 과부(18장),
4.가난한 과부(21장),
5.죄 많은 여인(7장),
6.수산나 요안나(8장),
7.혈루증 걸린 여인(8장),
8.꼬부라진 여인(13장),
9.은을 찾던 여인(15장),
10.십자가 아래서 울고 있었던 여자들(23장),
11.부활의 새벽 현장에 나왔던 여인들(24장)
유대인들이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야를 자신의 몸으로 잉태하게 된 처녀 마리아는 도무지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일어나 채비를 하고 천사가 일러 준 대로 엘리사벳이 사는 고을로 달려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꽃이 만개한 화창한 어느 봄날 유대 산중 고요한 산골마을에서 믿음이 크고 주님의 은총을 입은, 서로 친척이 되는 두 여인이 함께 만나 각각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보기 좋은 장면입니다.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과 곧 예수의 어머니가 될 나사렛의 아리따운 처녀 마리아는 지금 아기를 배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6개월이 지났고 마리아는 이제 임신 초기입니다.
마리아는 할머니 엘리사벳에게 문안인사를 합니다. 그러자 6개월 된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던 아이(나중에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가 먼저 알아보고 뛰놀았습니다.(41절) 그러자, 성령충만 한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총을 단번에 알아보고 큰소리로 기쁨의 찬가를 부릅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눅1:41-45)
상상해 보세요. 제사장의 아내이며, 머리가 하얗게 쇤 늙은 할머니가 아리따운 처녀 앞에서 황홀경에 빠져 거룩한 희열을 느끼며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에게 나아오다니... 정말 황공하고 영광스럽고 가슴 떨립니다.”하고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으로부터 확실히 확인을 받은 마리아는 이제 의심의 여지없이 메시아를 잉태한 성모가 된 것입니다. 즉시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1:46-48)
마리아의 찬송은 엘리사벳의 영접송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부른 노래입니다. Magnificat는 ‘높이 찬양한다’는 뜻인데 오늘날 가장 유명한 아리아(Aria)입니다.
(마리아의 찬송에 대한 좋은 설교가 있어서 옮깁니다.
여기서부터는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님의 설교 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사람들이 자기의 행복이나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추구해온 대표적인 세 가지가 있었다면 지혜를 통한 이성을 통한 행복의 추구, 권력을 통한 추구, 또 하나는 물질을 추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찬가에서는 이 세 가지가 철저하게 부인되고 부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 권력, 물질이 행복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복음일 수가 있습니까? 그 대답은 차라리 단순한데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지혜 있는 사람들만 행복하고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지혜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만약 권력 있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쟁취한 사람들만이 행복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힘없이 살아가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물질을 획득하거나 소유한 사람들만이 참으로 행복할 수가 있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면 가진 것이 없이 살아야 하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아기 예수로 오신 바로 그 분, 또 33년의 짧은 시간을 살다가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어가신 그 분은 그렇기에 이 땅에 힘없이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복음일 수 있다는 역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있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기예수의 사건이 정말 여러분의 복음이 되고 나의 복음이 되고 우리의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동의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마리아의 찬가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1.지혜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첫째로 그것은 지혜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지혜라는 낱말 대신에 이성이라는 낱말을 삽입시켜도 무방합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추구, 지혜를 통한 추구,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므로 행복하거나 구원을 얻으려는 이 모든 노력은 하나님 앞에서 가능하지 않다’ 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찬가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51절) 사람들이 마음의 생각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쟁취하고 소유하려는 그 끈질긴 행복의 노력 구원의 노력을 하나님은 무의로 돌리셨다라고 마리아는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나 기독교는 결코 반지식주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지식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성경은 하나님이 지식의 근원이고 지혜의 근원 이라고 선포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잠언 같은 책은 그 책 한권 전체가 지혜의 중요성, 혹은 지식의 중요성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 곳에는 언제나 인간의 이성이 눈을 뜨고 지식이 개발되는 역사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인간적 지식의 추구만으로 사람은 행복하거나 결코 구원될 수는 없다’라고 가르칩니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서 우리는 소위 지식경영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지식, 지식만으로 결코 이 지식이 이 현대의 사회 속에 그리고 앞으로 미래의 사회 속에 결코 그것만으로 복음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의 지식의 상징은 아무래도 인터넷일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현대의 지식의 전파, 그것은 벌써부터 만만치 않는 피해를 우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오욕 내지는 지식의 악용의 현장들을 이미 우리는 눈을 떠서 보고 있습니다.
사탄이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을 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보여주었더니 성경은 아담이 “지혜스럽게 할 만큼 탐스러움이었다”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떠난 지식은 이미 악이었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1:21) 사람의 이성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들의 지식의 추구가 아무리 놀랍게 현저히 발달해도 사람은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을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오히려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 하셨다고요.
오늘 마리아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이렇게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사람들을 오히려 흩어놓으신다’고 말했습니다. 지식이 행복의 길이라면, 지식이 구원의 길이라면 저 나사렛 땅이나 베들레헴 땅이 아닌 예루살렘에 가면 공부를 많이 한 허다한 랍비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종교회의 안에는 수많은 학자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저 희랍의 아테네나 고린도에서 공부하고 있었든 아니 로마에서 키케로(Cicero)를 위시한 수많은 지성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구세주를 보내고자 하실 때 이런 모든 지식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은 하나님의 신비, 나사렛 땅에 살고 있는 무명의 한 여인, 소녀 마리아를 선택한 하나님의 신비를 바라보십시오. 이것은 지혜의 추구가 지식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2.권력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둘째, 권력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인간의 생존의 의지, 나로 하여금 여기에 살게 하는 그리고 몸부림치면서 살게 하는, 인간의 생존을 붙들고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의 의지가 있다면 그것이 권력에 대한 의지” 라고 말했습니다. Will to power, 이 권력에 대한 의지는 정치가들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 안에서 부부의 갈등, 그리고 고부사이의 갈등, 시어머니와 며누리의 갈등, 곳간 열쇠를 누가 쥐느냐? 그것도 권력의 갈등이에요. 이 권력의 갈등은 가정에도 있고 직장에도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존재합니다. 아직도 소란스러운 이 세상의 모든 삶의 현장 도처에서 우리는 바로 이 권력의 갈등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권력에 집착하고 있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생각, 권력으로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것만 가지면 어떤 일이고 할 수가 있다는 그런 착각 때문 이죠.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권력으로 우리는 행복을 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권력으로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 앞에 비천한 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신비를 찬양하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이 비천한 자라고 했을 때 마리아는 자기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48절에 보시면 마리아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이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으며’ 하나님 어째서 나를 선택하셨나요?
만약 권력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권력자가 이 세상에 소망이라면 하나님은 마리아를 통해서 올 것이 아니라 가이사의 황실을 통해서 오셨을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가이사는, 강력한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로마의 황실을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오히려 그 위에서 내려치시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를 쓰시는 하나님, 나같이 비천한 소녀를 쓰셔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하고 있는 놀라우신 주님을 지금 마리아는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선택해서 놀라우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돌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한 역사를 해 내실 수가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이고 복음의 신비에요. 우리가 선교역사를 읽어보면, 복음이 전파되어 한 사회에 들어갈 때 대부분 사회의 서민 계층에서 복음이 시작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서 한 사회를 바꾸고 문화를 바꿔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바울은 고린도 전서 1장27절의 이하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그리고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물질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 할 수 없다.
세번째, 물질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동의해야 합니다. 현대의 영웅은 부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보다도 강력하고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돈을 추구하느냐, 돈을 추구하고 돈을 따라 다니다가 돈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돈이 결코 할 수 없는 것, 돈으로 행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돈으로 우리가 좋은 침대는 살수가 있지만 돈으로 달콤한 잠을 살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으로 우리는 비싼 헬스(Equipment)를, 건강기구를 살수가 있지만 돈이 우리의 건강을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돈으로 근사한 책들을 사서 아름다운 데코레이션을 할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돈이 우리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돈으로 사람은 살 수가 있지만 사랑은 살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출세는 살수가 있지만 돈으로 행복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고가의 금 십자가를 살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돈으로 구원을 살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때때로 물질에 대한 탐심은 구원받는 길에 커다란 장애요소로 우리를 방해할 수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어떤 청년 부자 관원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죠? 우리 주님은 이 부자 청년에게 ‘네 가진 것을 팔 수가 있느냐? 팔고 나를 쫓으라!’ 성경은 이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슬픈 모습으로 떠나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탐심은 주인이었습니다. 탐심이 그에게 있어서는 우상이었던 것입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53절) 주리는 자가 오히려 좋은 것으로 체험을 받을 수가 있지만 가진 자가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는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갖지 못했습니다. 행복을 갖지 못했고 구원을 가질 수가 없었든 것입니다. 그는 빈손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물질 그 자체를 악으로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돈이 악이라고 말한 적은 없어요. 오히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악이라고 말할 뿐이지 돈 그 자체가 악이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언제 돈이 악이 될 수 있습니까? 내가 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돈은 우상입니다. 돈이 나의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물리치라고,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탐심이 있는 곳에 예수님은 그 마음속에 계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이동원 목사님 설교 끝>
참고자료
1.The Renovare Spiritual Formation Bible(두란노)
2.이동원<마라아의 찬가 2000.12.24.주일 설교>
3.햇볕교회 2020.8.12.수요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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