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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우 말씀묵상

깊은데로가서

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누가복음 누가복음06............... 조회 수 4371 추천 수 0 2002.06.06 10:4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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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2:1-14 
구분 : 눅6 

2:1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 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누가복음6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누가복음2:1-14


 1.그리스도인의 삶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2.베들레헴 원정출산
 3.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4.화해의 중재자로 오신 예수님
 5.큰 기쁨의 좋은 소식
 6.우리도 이웃과 화평해야 합니다.



1.그리스도인의 삶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면서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이신데, 나를 그저 되는 대로 내버려 두실리가 없습니다.
 요즘 저의 큰 딸내미는 ‘미운 일곱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말을 안 듣는지 엄마 아빠의 인내력 테스트를 하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 뚜껑이 달그락 거리며 열렸다 닫혔다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희 부부는 딸을 “그래, 니 멋대로 해봐라” 하고 포기할까요?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식은 자식입니다. 미운 짓을 해도 한번 자식은 영원한 자식이듯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우리의 삶이 비록 구겨진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나의 삶에 간섭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우연은 없습니다. 나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일 중 의미 없는 일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뭐, 안 풀리는 일이 있습니까?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메시지를 주실 것입니다. 내 힘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하다가는 더욱 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보세요. 분명히 하나님의 어떤 의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안 풀리는 일을 불평하기 전에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있는가? 아니면 나에게 어떤 맺힌 것이 있는지 세밀히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2.베들레헴 원정출산


 요즘엔 미국에서 아기를 낳으면 ‘미국국적’을 쉽게 취득할 수 있다 하여 돈만 있으면 쉽게 ‘원정출산’을 한다고 하는데, 지금부터 2천년 전, 만삭이 된 마리아와 요셉의 ‘원정출산’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사렛에서부터 몇날 며칠 배를 움켜잡고 걷다가, 지치면 쉬고 또 기운을 차려서 걷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베들레햄 까지 큰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더욱 베들레헴에 도착하였지만, 산모를 기다리는 것은 따뜻한 방이 아니라. 짐승의 체취가 가득한 마굿간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마굿간에 기대어 앉아 어쩌면 불만이 가득하여 투덜거렸을지도 모릅니다. 하필이면 이때에 호적령이 내려 죽을 고생을 해야 하다니, 이게 무슨 꼴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 우연은 없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생고생은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미5:2)이란 예언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아구스도의 호적령을 이용하셨습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탁월한 저술가가 현대 의학의 지식을 빌려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설명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작아지시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져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다.’ 다시 설명하면 육안으로서는 식별이 불가능한 수정란이 불안에 떨고있는 10대 소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태아가 형성되기까지 세포분열을 계속해서 커져 가야 될 난세포가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좀 심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탄생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전혀 과장된 말도 아니고, 지나친 상상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어떻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작아지실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오실 수가 있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탄생할 때에 유대 나라에 있는 왕과 모든 귀족들 이 정장을 하고 서서 무슨 환영 축제를 했습니까? 팡파레를 불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많은 시민들이 와서 축하를 드리기를 했습니까? 아 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마구간에 있는 짐승 몇 마리와 천사들의 말을 듣고 달려온 가난하고 천한 몇명의 목자들 외에는 하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셔서, 그토록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놀라는 사람도 없었고, 영접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비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오셨습니다. 샬롬, 에이레, 화평, 화목, 평화를 주시기 위해 주님이 오셨습니다.
 1장 79절 사가랴의 축복송 가운데 “예수님이 오시면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시고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꼭 오셔야 될 이유, 그것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수 천년 전에 이사야는 장차 이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면서 ‘평강의 왕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4.화해의 중재자로 오신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 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우리는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골1:21) 이것이 원래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 어린 아들이 아버지와 원수가 되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신하가 임금과 원수가 되어서 어떻게 하룻밤인들 베개를 높이 하고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웃과의 불편한 관계 가지고도 마음이 편하지 않는데, 하물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인간이 어떻게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잠을 자는 것이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웃고 떠드는 것이지, 만일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어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습이 얼마나 가증스러운가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한 사람도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는 그 자체가 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이와 같은 저주스러운 처지를 보다 못한 하나님은 오래 전부 터 인간과 화해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평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또 한 세대를 완전히 불로 심판하시면서 다시는 인간이 하나님을 함부로 거역하고 범죄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기도 하셨습니다. 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악하고 음란하고 더러운 성을 본보기로 심판하시면서 남아있는 이 지구상의 사람들에게 경고하시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화해의 몸짓에 눈을 돌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생각다 못한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내가 직접 내려가 보아야 하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도 다수에 해당하는 평민의 모습으로, 다수에 해당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친히 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 된 인간과 화목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4) 무엇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까? 원수 된 우리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평화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만 나가면 모든 허물과 죄를 순식간에 용서받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5.큰 기쁨의 좋은 소식


 어느 해 성탄절 예배를 드리면서 너무나 감격에 겨워 수건을 적시며 운적이 있습니다. 예배드리기 위해서 예배당에 나온 나와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예배하고 있는데 이런 축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만 예배를 드리며 평화를 누릴 수 있는데 그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눈물나게 감격스러웠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을 하나님과 다시 손잡고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면 온 인류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과 평화하는 은혜의 길이 열릴 것도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만이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습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아무 이유가 없는데, 그만한 구실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잘 보셨습니다. 우리만 보시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무조건 자기와 화목하시고 자기 품에 안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와 이 세상 끝날 까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둘 사이가 가까워졌는지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마.’라고 약속하시게 되었습니다. 한순간도 나를 혼자 떼어놓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31절에 바울이 너무나 흥분되고 너무나 황홀해서 소리친 그 말씀이 정말로 우리 마음에 그대로 와 닿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하리요?” 다시 말하면, 말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을 어찌해서 하나님이 만세전에 미리 아시고, 나 같은 것을 예정하시고, 나 같은 것을 때가 되자 부르시고, 부르신 다음에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다음에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화롭게 하셨는가? 이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는데, 이 일에 대해서 무슨 말이 필요한가”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셨고, 우리와 평화 하셨는데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의롭다 하시는 이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받으시고 우리와 평화하신 하나님인데 누가 우리를 보고 이러니 저러니 말하겠는가?’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깰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흔들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를 주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만큼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6.우리도 이웃과 평화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웃과 평화 할 수 있게 하시게 위해서 오셨습니다. 티끌보다 많은 죄, 먹보다 검은 죄를 예수의 이름으로 씻음 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사람은 자기 안에 놀라운 능력이 생기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해서 다른 형제와 평화 하고자 하는 능력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내 안에서 다스리시는 그 은혜 때문에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라. 원수를 사랑하라.”(롬12:1) 왜 이렇게 명령합니까?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 계시고 그분이 나에게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형제까지도 나는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순한 종교적인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이 명령하는 것입니다. 바로 나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핸리 나우웬이 말했습니다. “용서는 공동체인 교회 생활의 접착제입니다. 용서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리를 함께 있도록 붙들어 주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자라게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나는 용서받아야 될 사람이요, 용서해야 될 사람이요, 당신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요, 항상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마음에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있고 마음에 증오가 있으면 누가 손해를 봅니까?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손해 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손해는 내가 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영적으로 점점 더 병이 들어갑니다. 자기도 모르게 병이 들어갑니다. 병이 들어가면 은혜와는 거리가 멀어 집니다.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것이 심해지면 육신까지 병이 납니다. 누가 손해를 봅니까? 평화의 왕을 모시고 있다면서 모순된 삶을 살면 손해를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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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The Renovare Spiritual Formation Bible(두란노)
2.교부들의 성경주해<루카 복음서>분도 p.55-96
2000.10.25 믿음교회 수요 설교
2020.8.26. 햇볕교회 수요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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