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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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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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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5:1-7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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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산은 전체의 12분의 1만 물위로 보이고 나머지 부분은 바다 아래 잠겨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빙산과 같습니다. 보이는 부분은 '의식'이고 보이지 않고 잠겨있는 부분은 '잠재의식'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고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내 안에 있기는 있는데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잠재의식'이 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나는 생각하는 아주 작은 '의식' 부분만이 나의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나는 '잠재의식'안에 있습니다.
가장 위에 '의식(생각)'이 있고, 생각 아래 그 열배도 넘는 '잠재의식'이 있으며, 잠재의식의 아래에 '무의식'이 있습니다.
'무의식'의 세계는 천국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여러분! 천국으로 통하는 문앞까지 가 보셨습니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의식'의 아래, '잠재의식'의 아래, '무의식'에까지 깊게 그물을 내리면 천국문앞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업 어부였던 베드로에게 고기잡는 법을 갈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고기잡는 법은 베드로가 전문이지, 예수님은 목수출신이어서 책상 의자만드는 전문입니다. 합당하지 않는 말이라도 예수님의 말이라면, 메주로 콩를 쑨다해도 무조건 믿으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 그런식으로 설교를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한 말씀속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비밀을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평생토록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본 칼럼의 타이틀이 '깊은데로 가서'입니다.
겉 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속이 유대 사람인 사람이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표준롬2:28-29)
'독사의 자식들'이라 책망을 받았던 유대종교, 기성종교,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형식주의, 외식하는 종교가 무엇입니까? 바로 '의식'에 속한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무의식'에 속하신 분이니 '의식'으로 예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멋떨어진 성전과, 기가막힌 성가대의 찬양도, 화려한 강대상 장식도, 다 와~~~ 보니 참 좋다고 느끼는 '의식'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것을 부인하는것이 아니고, 그 안에 하나님이 안계시면 아무 소용이 없는 '형식주의'라는 뜻입니다.
지난세기 동안 한국 기독교는 놀랄만큼 부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부흥이란 외적인 형식의 성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크게 불어진 고무풍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내면은 텅 텅 텅 텅 빈, 공허가 가득한! 그래서 작은 바늘 하나에도 펑 터져버릴 허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교회가 '형식'으로 예수님을 묶어두는 것은 반대합니다. 예수님이 묶는다고 해도 묶이실 분은 아니지만요. 예를 들어 예수님은 어느나라 사람입니까?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으로 유대인의 예수, 미국인의 예수, 흑인의 예수, 한국인의 예수, 중국인의 예수...그 누구의 예수도 된다 이말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예수가 한국인의 옷인 한복을 입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프리카 흑인의 예수가 너무 더워 옷을 벗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스키모인 예수가 너무 추워 옷을 껴입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꼭 예수님은 헐렁한 통옷에 맨발 비스므름해야 되고 턱에는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러야 됩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런 의식적인 외형은 중요한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식'에 너무 치중하다보면, 정말 중요한 '잠재의식'을 잃게 됩니다. 그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책망받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의식'에서 '잠재의식'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기독교신앙이 참 대단하고 엄청나고 신비스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신비스러운 체험을 실제로 경험하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기껏 예수믿고 담배끊었네, 술 끊었네... 그런 도덕적 수준의 변화를 간증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생각한다면 기독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외면적, 형식적인 신앙에서 영맥(영맥)을 파고 들어가는 내면적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진리를 무시하고 어떻게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밖으로 끄집어 내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는 경건의 시간이라고 하는 '큐티'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왜 끝에 가서 '적용'이라는 것에 목숨을 거는지, 그게 참 이해가 안됩니다. 말씀은 꼭 '적용'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용'이라는 도구로 하나님을 밖으로 찝어내지 말고 그냥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도록 그냥 두어야 합니다. (물론 끄집어 낼 때도 있어야겠지만) 오히려 내면의 세계로 자꾸 들어가 잠재의식을 지나 '무의식'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파라! 파라 ! 깊이 파라 앝게 하면 망한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달으라-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이제 복을 비는 반 샤머니즘 신앙에서 벗어나고 외부적 형식적인 예배교인에서도 벗어나 내면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잠재의식'속에 들어있는 것을 끄집어 내지 않으면 앞으로 기독교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혹여 '잠재의식'에 대한 오해가 있을까봐서 한마디 하면, 언제나 그렇듯 기독교인들은 단어선점에서 이단들이나 비기독교인들에게 한발 늦습니다. 그래서 손해를 볼 때가 참 많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우리는 모두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의 증인 입니다.'하고 말하면 이단 단체인 '여호와의 증인'이 머리속애 연상이 그 좋은 말을 쓸수가 없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안식교인 입니다.' - 누구나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토요일 안식을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주일'이라는 괴상한 단어를 만들어서 사용합니다. 사실은 '주일'이 아니고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이란 어떤 특정한 요일을 말하는게 아니거든요.
'잠재의식' '기' -모두 기독교적인 용어인데, 엉뚱한 사람들이 가져다가 그 의미을 잘 못 전하는 바람에 사용하기가 꺼져지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잠재의식' 은 '성공학'에서 말하는 '할수있다'식의 잠재의식이 아닙니다.
ⓒ최용우 2002.9.22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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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산은 전체의 12분의 1만 물위로 보이고 나머지 부분은 바다 아래 잠겨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빙산과 같습니다. 보이는 부분은 '의식'이고 보이지 않고 잠겨있는 부분은 '잠재의식'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고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내 안에 있기는 있는데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잠재의식'이 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나는 생각하는 아주 작은 '의식' 부분만이 나의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나는 '잠재의식'안에 있습니다.
가장 위에 '의식(생각)'이 있고, 생각 아래 그 열배도 넘는 '잠재의식'이 있으며, 잠재의식의 아래에 '무의식'이 있습니다.
'무의식'의 세계는 천국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여러분! 천국으로 통하는 문앞까지 가 보셨습니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의식'의 아래, '잠재의식'의 아래, '무의식'에까지 깊게 그물을 내리면 천국문앞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업 어부였던 베드로에게 고기잡는 법을 갈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고기잡는 법은 베드로가 전문이지, 예수님은 목수출신이어서 책상 의자만드는 전문입니다. 합당하지 않는 말이라도 예수님의 말이라면, 메주로 콩를 쑨다해도 무조건 믿으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 그런식으로 설교를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한 말씀속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비밀을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평생토록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본 칼럼의 타이틀이 '깊은데로 가서'입니다.
겉 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속이 유대 사람인 사람이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표준롬2:28-29)
'독사의 자식들'이라 책망을 받았던 유대종교, 기성종교,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형식주의, 외식하는 종교가 무엇입니까? 바로 '의식'에 속한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무의식'에 속하신 분이니 '의식'으로 예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멋떨어진 성전과, 기가막힌 성가대의 찬양도, 화려한 강대상 장식도, 다 와~~~ 보니 참 좋다고 느끼는 '의식'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것을 부인하는것이 아니고, 그 안에 하나님이 안계시면 아무 소용이 없는 '형식주의'라는 뜻입니다.
지난세기 동안 한국 기독교는 놀랄만큼 부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부흥이란 외적인 형식의 성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크게 불어진 고무풍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내면은 텅 텅 텅 텅 빈, 공허가 가득한! 그래서 작은 바늘 하나에도 펑 터져버릴 허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교회가 '형식'으로 예수님을 묶어두는 것은 반대합니다. 예수님이 묶는다고 해도 묶이실 분은 아니지만요. 예를 들어 예수님은 어느나라 사람입니까?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으로 유대인의 예수, 미국인의 예수, 흑인의 예수, 한국인의 예수, 중국인의 예수...그 누구의 예수도 된다 이말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예수가 한국인의 옷인 한복을 입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프리카 흑인의 예수가 너무 더워 옷을 벗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스키모인 예수가 너무 추워 옷을 껴입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꼭 예수님은 헐렁한 통옷에 맨발 비스므름해야 되고 턱에는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러야 됩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런 의식적인 외형은 중요한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식'에 너무 치중하다보면, 정말 중요한 '잠재의식'을 잃게 됩니다. 그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책망받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의식'에서 '잠재의식'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기독교신앙이 참 대단하고 엄청나고 신비스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신비스러운 체험을 실제로 경험하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기껏 예수믿고 담배끊었네, 술 끊었네... 그런 도덕적 수준의 변화를 간증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생각한다면 기독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외면적, 형식적인 신앙에서 영맥(영맥)을 파고 들어가는 내면적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진리를 무시하고 어떻게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밖으로 끄집어 내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는 경건의 시간이라고 하는 '큐티'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왜 끝에 가서 '적용'이라는 것에 목숨을 거는지, 그게 참 이해가 안됩니다. 말씀은 꼭 '적용'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용'이라는 도구로 하나님을 밖으로 찝어내지 말고 그냥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도록 그냥 두어야 합니다. (물론 끄집어 낼 때도 있어야겠지만) 오히려 내면의 세계로 자꾸 들어가 잠재의식을 지나 '무의식'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파라! 파라 ! 깊이 파라 앝게 하면 망한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달으라-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이제 복을 비는 반 샤머니즘 신앙에서 벗어나고 외부적 형식적인 예배교인에서도 벗어나 내면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잠재의식'속에 들어있는 것을 끄집어 내지 않으면 앞으로 기독교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혹여 '잠재의식'에 대한 오해가 있을까봐서 한마디 하면, 언제나 그렇듯 기독교인들은 단어선점에서 이단들이나 비기독교인들에게 한발 늦습니다. 그래서 손해를 볼 때가 참 많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우리는 모두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의 증인 입니다.'하고 말하면 이단 단체인 '여호와의 증인'이 머리속애 연상이 그 좋은 말을 쓸수가 없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안식교인 입니다.' - 누구나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토요일 안식을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주일'이라는 괴상한 단어를 만들어서 사용합니다. 사실은 '주일'이 아니고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이란 어떤 특정한 요일을 말하는게 아니거든요.
'잠재의식' '기' -모두 기독교적인 용어인데, 엉뚱한 사람들이 가져다가 그 의미을 잘 못 전하는 바람에 사용하기가 꺼져지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잠재의식' 은 '성공학'에서 말하는 '할수있다'식의 잠재의식이 아닙니다.
ⓒ최용우 2002.9.22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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