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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2:4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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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호 목사 |
참고 : | 2007년 1월 7일 주일설교 |
2007년 새해 첫 주일을 맞아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시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정 그리고 경영하시는 모든 일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항상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승리하시고 그 때문에 늘 감사하며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새해를 맞을 때마다 서로 가장 많이 주고받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말일 것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싫지 않은 정말 덕담중의 덕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그와 같은 하고 듣는 중에 그 말이 성경적인 사고방식과는 다른 말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적으로 새해 인사를 한다면 그 말은 이렇게 되어야 옳습니다. ‘새해 복 많이 나누세요!’
기독교의 복은 그 복을 혼자서 누리는 복이 아닙니다. 성경은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복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로 인하여 나라와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복을 받으라가 아니라 복을 나누라가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복을 나눈다는 것은 복을 받는다는 것을 포함하고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나누기만 하면 복은 언제 받나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복 받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복 받음’을 경히 여기고 무조건 그것을 기복주의라고 매도하는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기독교는 ‘복 받음’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받은 복을 혼자서만 누리지 않고 그것을 받지 못한 자들과 함께 나눔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복은 완성이 됩니다. 복은 나눈다고 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나눌수록 더 채워지는 법입니다. 나눌수록 더 커지는 법입니다. 사이즈도 커지지만 내용이 더 좋아집니다. 복을 나누면 그 복에 사랑과 평화가 더하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을 나누지 않고 혼자 독식하면 복이 변질됩니다. 그 복에 미움과 시기와 원망과 불평과 불화가 더하여지기 때문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나누지 아니하고 혼자서 누리게 되면 복이 짐이 되고 복이 부요함이 되지 못하고 가난함이 됩니다.
저는 여행을 많이 다니는 편입니다.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공항에서 보면 대번 알 수 있습니다. 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짐이 크고 많으면 초보 여행자입니다. 여행을 많이하는 사람은 짐이 작고 단출합니다. 여행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짐이라는 것을 여행을 많이 해 본 사람은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교회에서 안식년을 할 때 2달 동안을 쉬지 않고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유럽과 미주와 남미까지 비행기를 열 댓 번씩 갈아타며 여행을 하였는데 그때도 핸드캐리할 수 있는 가방 하나만을 가지고 여행을 하였습니다. 요령이 생기니 충분히 가능하였고,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니까 여행이 편해졌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인생도 여행과 마찬가지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생도 짐이 많으면 힘들어지고 피곤해지기 때문입니다. 여행에 꼭 필요한 짐마저 없다면 그 또한 힘들겠지만, 그리고 그런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지만, 세상에는 짐이 너무 많아서 그 짐이, 짐이 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희 집은 44평입니다. 그런데 살기에 넓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좁습니다. 물론 식구가 많아서입니다. 저희 집은 4대가 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식구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짐이 많아서 입니다. 마치 내가 여행을 할 때 짐을 꾸리듯 집안 살림을 한다면, 그리하여 꼭 필요한 것만 남겨두고 옷장과 서랍과 신발장을 정리한다면 집은 훨씬 넓어지고 깨끗해 질 것입니다. 저희 집 옷장과 서랍과 신발장에는 몇 년 동안 쓰지 않고 쌓아 둔 물건들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쓰지 않는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정작 쓰고 있는 물건들을 놓아 둘 자리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이 좁다고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날 날을 잡아 그 짐들을 싹 정리하여 아름다운 가게와 같은 곳에 보내야 되겠습니다. 복을 나누지 않고 복을 쌓아만 두면 복이 나중에는 짐이 됩니다.
복을 나누지 않고 쌓아만 두면 복이 부함이 되지 않고 복이 가난함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영락교회에 있을 때, 지금도 그러시는지 잘 모르겠으나 제가 있을 때는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참 선물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연말이 되면 교인들이 보내준 선물들이 집안 한 구석에 정말 가득하였었습니다.
목사도 사람인지라 그와 같은 선물들이 쌓이면 마음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더니 아내가 심각한 걱정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은 풍족함이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 좋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풍족하니 아이들이 귀한 것을 모르고 귀한 줄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너무 지나치게 풍족함이 가져다주는 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습니다.
귀한 것이 없어서 가난한 것도 문제이지만 귀한 것이 너무 많아 귀한 것이 흔하게 되어 귀한 것이 없어진 것도 가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가난은 가난한 것이 없어서 가난한 것보다 더 질이 나쁜 가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 그 가난의 이름을 ‘악성 가난’이라고 하였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큰 아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너무 많아서 가난해 진다면 그것을 흩어 나누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아주 수학적인 말이었습니다. 아이의 말대로 그것을 여러 부대로 만들어 어려운 이웃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아내에게 사과하나 깍아 달라고 부탁을 하자 아내가 사과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앞 가게에 나가서 몇 알 사서 먹었습니다. 그러자 큰 아이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야 이제 우리도 부자다. 사과가 귀하다.”
제가 참 귀하게 여기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균형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걸음으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균형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제가 또 좋아하는 개념을 ‘적절’과 ‘적당’입니다. 모자라지도 않게 지나치지도 않게 삶을 잘 유지한다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처럼 어려운 일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이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뿌리가 되는 욕심이 우리의 마음과 삶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의 문제를 극복하고 정복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 자유는 없습니다. 행복은 없습니다. 성공은 없습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욕심의 문제를 극복하고 정복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욕심의 문제를 극복하고 정복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저들에게 일어난 역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욕심이 없어졌습니다. 누구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함께 나누려고 하였습니다. ‘받은 복을 함께 나눔’이 성령 충만함을 받았던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저들은 핍박 받는 상황에서도 천국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의 삶을 누렸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 교회는 성령 충만함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병 낫고 형통하여 부자 되는 것 외에는 잘 생각을 못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령 충만함을 그것을 뛰어 넘었습니다. 병 낫고 형통하여 부하게 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그것을 뛰어 넘어 욕심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리하여 ‘복을 받음’에서 ‘복을 나눔’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들과 이 설교를 듣고 보시는 여러분들이 다 그 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욕심처럼 버리기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욕심의 구조를 깊이 연구하면 길이 있습니다. 욕심은 가치관과 연관이 있습니다. 가치에 대한 관이 생기지 않으면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 민희가 태어나서 처음 세배를 하였습니다. 세배 돈을 주었지만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직 돈에 대한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막내가 말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운 말은 물론 엄마와 아빠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희 막내가 세 번째로 빨리 배운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100원’이었습니다. 형들을 좇아 100원을 들고 가게를 들락거리면서 100원의 가치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100원만 주면 사탕과 살 수 있고 장남감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출근을 하려는데 막내가 문을 막고 손을 내 밀었습니다. ‘아빠 100원’ 통행세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100원 짜리 하나를 주려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100원 짜리가 없었습니다. 500원 짜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500원을 주었습니다. 저는 아이가 좋아서 펄쩍 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막내를 그 500원 동전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리 저리 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500원 동전은 제 아이가 그때 처음 보는 돈이었습니다. 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웃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아빠가 돈 아닌 것을 주고 장난을 친다고 생각을 한 막내가 500원 동전을 방바닥에 내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으응, 100원’ 큰 아이가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답답하여 펄쩍, 펄쩍 뛰면서 동생에게 ‘정열아 그거 500원이야 100원짜리 다섯 개야’를 외쳤지만 막내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냥 100원, 100원만 외쳤습니다.
500원의 가치를 모르면 100원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 500원의 가치를 알면 100원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저희 막내에게 500원과 100원을 놓고 둘 중에 하나를 가지라면 무엇을 가지겠습니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를 정말 본 사람은 세상 나라에 대한 욕심을 드디어 정리하고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은 후 세상에 대한 모든 자랑을 다 배설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복이 짐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함께 나누라고 주신 복을 욕심으로 잘못 받아 혼자 누리다 보니 쓰지도 못하는 것들을 욕심 사납게 그냥 깔고 앉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이 지나쳐 부자가 되지 못하고 가난뱅이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가난뱅이가 아닌 악성가난뱅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을 나누지 못하고 깔고 앉아 있게 되면 복은 짐과 가난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복이 화가 됩니다. 복이 편중되어 흐르지 않으면 복이 흐르지 않는 곳에는 불평이 생깁니다. 불만이 생깁니다. 원망이 생깁니다. 시기가 생깁니다. 미움이 생깁니다. 분노가 생깁니다. 절망이 생깁니다. 그것은 결국 불화로 발전하게 됩니다. 전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남한은 복을 넘치게 받았고, 북한은 그 복을 받지 못하여 아직도 나라의 목표가 이밥에 고깃국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남한의 복이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통하여 북과 나누어지지 않으면 결국 이 땅에는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이 땅은 전쟁의 위험이 세계에서 가장 높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은근히 전쟁을 바라는 눈치입니다. 전쟁을 유일한 살 희망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해서 저들이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기면 뺏어 먹고 지면 얻어먹으면 된다고 저들은 정말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꼭 남과 북 사이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 날마다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희년의 법을 제정하여 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우리 교회는 오늘 희년 헌금을 통하여 그와 같은 정신을 이 땅에 구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가 지난주일 설교를 통하여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희년 정신의 실현은 순교 다음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 일을 실천하려면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열심히 아주 잘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열심히 아주 잘 믿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도 보고 살므로 세상에 대한 욕심을 배설물처럼 내어 버리고 사람들이 다 깔고 앉아 누리기만 하려고 하는 복을 기꺼이 내어 놓고 세상과 자신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움이 가난한들의 채움이 됩니다. 저들의 채움이 우리들에게는 우리가 비운 것보다 더 크고 귀한 복으로 다시 우리들에게 채워 질 것입니다.이와 같은 비움과 채움의 선순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정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할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거듭나서,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봄으로, 세상의 모든 욕심을 다 내어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는, 그리하여 복이 복이 되고 화가 되지 않은 그런 복된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정말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새해를 맞을 때마다 서로 가장 많이 주고받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말일 것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싫지 않은 정말 덕담중의 덕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그와 같은 하고 듣는 중에 그 말이 성경적인 사고방식과는 다른 말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적으로 새해 인사를 한다면 그 말은 이렇게 되어야 옳습니다. ‘새해 복 많이 나누세요!’
기독교의 복은 그 복을 혼자서 누리는 복이 아닙니다. 성경은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복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로 인하여 나라와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복을 받으라가 아니라 복을 나누라가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복을 나눈다는 것은 복을 받는다는 것을 포함하고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나누기만 하면 복은 언제 받나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복 받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복 받음’을 경히 여기고 무조건 그것을 기복주의라고 매도하는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기독교는 ‘복 받음’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받은 복을 혼자서만 누리지 않고 그것을 받지 못한 자들과 함께 나눔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복은 완성이 됩니다. 복은 나눈다고 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나눌수록 더 채워지는 법입니다. 나눌수록 더 커지는 법입니다. 사이즈도 커지지만 내용이 더 좋아집니다. 복을 나누면 그 복에 사랑과 평화가 더하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을 나누지 않고 혼자 독식하면 복이 변질됩니다. 그 복에 미움과 시기와 원망과 불평과 불화가 더하여지기 때문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나누지 아니하고 혼자서 누리게 되면 복이 짐이 되고 복이 부요함이 되지 못하고 가난함이 됩니다.
저는 여행을 많이 다니는 편입니다.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공항에서 보면 대번 알 수 있습니다. 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짐이 크고 많으면 초보 여행자입니다. 여행을 많이하는 사람은 짐이 작고 단출합니다. 여행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짐이라는 것을 여행을 많이 해 본 사람은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교회에서 안식년을 할 때 2달 동안을 쉬지 않고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유럽과 미주와 남미까지 비행기를 열 댓 번씩 갈아타며 여행을 하였는데 그때도 핸드캐리할 수 있는 가방 하나만을 가지고 여행을 하였습니다. 요령이 생기니 충분히 가능하였고,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니까 여행이 편해졌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인생도 여행과 마찬가지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생도 짐이 많으면 힘들어지고 피곤해지기 때문입니다. 여행에 꼭 필요한 짐마저 없다면 그 또한 힘들겠지만, 그리고 그런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지만, 세상에는 짐이 너무 많아서 그 짐이, 짐이 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희 집은 44평입니다. 그런데 살기에 넓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좁습니다. 물론 식구가 많아서입니다. 저희 집은 4대가 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식구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짐이 많아서 입니다. 마치 내가 여행을 할 때 짐을 꾸리듯 집안 살림을 한다면, 그리하여 꼭 필요한 것만 남겨두고 옷장과 서랍과 신발장을 정리한다면 집은 훨씬 넓어지고 깨끗해 질 것입니다. 저희 집 옷장과 서랍과 신발장에는 몇 년 동안 쓰지 않고 쌓아 둔 물건들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쓰지 않는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정작 쓰고 있는 물건들을 놓아 둘 자리가 없어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이 좁다고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날 날을 잡아 그 짐들을 싹 정리하여 아름다운 가게와 같은 곳에 보내야 되겠습니다. 복을 나누지 않고 복을 쌓아만 두면 복이 나중에는 짐이 됩니다.
복을 나누지 않고 쌓아만 두면 복이 부함이 되지 않고 복이 가난함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영락교회에 있을 때, 지금도 그러시는지 잘 모르겠으나 제가 있을 때는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참 선물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연말이 되면 교인들이 보내준 선물들이 집안 한 구석에 정말 가득하였었습니다.
목사도 사람인지라 그와 같은 선물들이 쌓이면 마음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더니 아내가 심각한 걱정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은 풍족함이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 좋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풍족하니 아이들이 귀한 것을 모르고 귀한 줄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너무 지나치게 풍족함이 가져다주는 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습니다.
귀한 것이 없어서 가난한 것도 문제이지만 귀한 것이 너무 많아 귀한 것이 흔하게 되어 귀한 것이 없어진 것도 가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가난은 가난한 것이 없어서 가난한 것보다 더 질이 나쁜 가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 그 가난의 이름을 ‘악성 가난’이라고 하였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큰 아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너무 많아서 가난해 진다면 그것을 흩어 나누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아주 수학적인 말이었습니다. 아이의 말대로 그것을 여러 부대로 만들어 어려운 이웃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아내에게 사과하나 깍아 달라고 부탁을 하자 아내가 사과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앞 가게에 나가서 몇 알 사서 먹었습니다. 그러자 큰 아이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야 이제 우리도 부자다. 사과가 귀하다.”
제가 참 귀하게 여기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균형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걸음으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균형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제가 또 좋아하는 개념을 ‘적절’과 ‘적당’입니다. 모자라지도 않게 지나치지도 않게 삶을 잘 유지한다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처럼 어려운 일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이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뿌리가 되는 욕심이 우리의 마음과 삶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의 문제를 극복하고 정복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 자유는 없습니다. 행복은 없습니다. 성공은 없습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욕심의 문제를 극복하고 정복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욕심의 문제를 극복하고 정복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저들에게 일어난 역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욕심이 없어졌습니다. 누구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함께 나누려고 하였습니다. ‘받은 복을 함께 나눔’이 성령 충만함을 받았던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저들은 핍박 받는 상황에서도 천국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의 삶을 누렸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 교회는 성령 충만함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병 낫고 형통하여 부자 되는 것 외에는 잘 생각을 못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령 충만함을 그것을 뛰어 넘었습니다. 병 낫고 형통하여 부하게 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그것을 뛰어 넘어 욕심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리하여 ‘복을 받음’에서 ‘복을 나눔’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들과 이 설교를 듣고 보시는 여러분들이 다 그 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욕심처럼 버리기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욕심의 구조를 깊이 연구하면 길이 있습니다. 욕심은 가치관과 연관이 있습니다. 가치에 대한 관이 생기지 않으면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 민희가 태어나서 처음 세배를 하였습니다. 세배 돈을 주었지만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직 돈에 대한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막내가 말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운 말은 물론 엄마와 아빠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희 막내가 세 번째로 빨리 배운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100원’이었습니다. 형들을 좇아 100원을 들고 가게를 들락거리면서 100원의 가치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100원만 주면 사탕과 살 수 있고 장남감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출근을 하려는데 막내가 문을 막고 손을 내 밀었습니다. ‘아빠 100원’ 통행세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100원 짜리 하나를 주려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100원 짜리가 없었습니다. 500원 짜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500원을 주었습니다. 저는 아이가 좋아서 펄쩍 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막내를 그 500원 동전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리 저리 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500원 동전은 제 아이가 그때 처음 보는 돈이었습니다. 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웃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아빠가 돈 아닌 것을 주고 장난을 친다고 생각을 한 막내가 500원 동전을 방바닥에 내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으응, 100원’ 큰 아이가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답답하여 펄쩍, 펄쩍 뛰면서 동생에게 ‘정열아 그거 500원이야 100원짜리 다섯 개야’를 외쳤지만 막내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냥 100원, 100원만 외쳤습니다.
500원의 가치를 모르면 100원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 500원의 가치를 알면 100원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저희 막내에게 500원과 100원을 놓고 둘 중에 하나를 가지라면 무엇을 가지겠습니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를 정말 본 사람은 세상 나라에 대한 욕심을 드디어 정리하고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은 후 세상에 대한 모든 자랑을 다 배설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복이 짐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함께 나누라고 주신 복을 욕심으로 잘못 받아 혼자 누리다 보니 쓰지도 못하는 것들을 욕심 사납게 그냥 깔고 앉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이 지나쳐 부자가 되지 못하고 가난뱅이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가난뱅이가 아닌 악성가난뱅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을 나누지 못하고 깔고 앉아 있게 되면 복은 짐과 가난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복이 화가 됩니다. 복이 편중되어 흐르지 않으면 복이 흐르지 않는 곳에는 불평이 생깁니다. 불만이 생깁니다. 원망이 생깁니다. 시기가 생깁니다. 미움이 생깁니다. 분노가 생깁니다. 절망이 생깁니다. 그것은 결국 불화로 발전하게 됩니다. 전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남한은 복을 넘치게 받았고, 북한은 그 복을 받지 못하여 아직도 나라의 목표가 이밥에 고깃국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남한의 복이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통하여 북과 나누어지지 않으면 결국 이 땅에는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이 땅은 전쟁의 위험이 세계에서 가장 높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은근히 전쟁을 바라는 눈치입니다. 전쟁을 유일한 살 희망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해서 저들이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기면 뺏어 먹고 지면 얻어먹으면 된다고 저들은 정말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꼭 남과 북 사이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 날마다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희년의 법을 제정하여 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우리 교회는 오늘 희년 헌금을 통하여 그와 같은 정신을 이 땅에 구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가 지난주일 설교를 통하여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희년 정신의 실현은 순교 다음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 일을 실천하려면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열심히 아주 잘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열심히 아주 잘 믿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도 보고 살므로 세상에 대한 욕심을 배설물처럼 내어 버리고 사람들이 다 깔고 앉아 누리기만 하려고 하는 복을 기꺼이 내어 놓고 세상과 자신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움이 가난한들의 채움이 됩니다. 저들의 채움이 우리들에게는 우리가 비운 것보다 더 크고 귀한 복으로 다시 우리들에게 채워 질 것입니다.이와 같은 비움과 채움의 선순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정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할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거듭나서,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봄으로, 세상의 모든 욕심을 다 내어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는, 그리하여 복이 복이 되고 화가 되지 않은 그런 복된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정말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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