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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우의 시는 우선 쉽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생활의 편린들을 간결한 언어로 기록한 일기이다. -조덕근(시인) 최용우 시집 모두 10권 구입하기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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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우님의 시를 읽으며 -1996.3.10 첫 시집의 시평
조덕근 (시인, 목사)
1
컴퓨터통신 이라는 의사소통의 도구가 생기면서 우리의 만남도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선것 같다. 내가 최용우 전도사님(앞으로는 그냥 '님'만 붙이기로 하자)과 만난 것은 바로 그 새로운 공간 안에서이다. 통신 완전 초보시절 01410으로 하이텔에 접속을 하는데 자꾸만 끊기는 바람에 CNET(크리스챤네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거기에 들어가 여기저기 돌아다녀보다가 '시편151편'이라는 작은 문학모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작은 모임을 이끌고 있던 분이 바로 최용우님이다. 그리고 이 작은 모임은 '기독교문학동호회'로 발전하여 최용우님은 역시 그 모임을 변함없이 이끌고 있다.
그는 한때 3년간 유조선을 타고 온 세계 바다를 몸으로 체험한 적이 있는 외항선원 출신이고, 제과제빵 기술을 배워 빵을 만들기도 했으며 '기뻐하는사람들'이라는 선교회를 조직하여 선교쪽지도 발행하는 등 문서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신학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수업도 받았고, 이어 첫딸 '최좋은'이가 태어나고 첫돌이 될 무렵 또다른 체험을 위해 항공기부품을 정밀주조하는 회사에 입사하여 지금은 하루에 10시간이상 땀흘려 일하면서도 맑은 서정과 시심(詩心)을 잃지 않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2
서문(序文)격인 <첫글>에서
알고보니 詩란 더이상 암호놀이가 아니었습니다.
일부 詩를 논하는 이들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시란 우리들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냥 삶을 기록하니 그것이 詩가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그가 생각하는 시는 '그냥 삶을 기록'한 그것이다. 가장 소박하고도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아닐수 없다. '시'란 삶의 기록이라는 것이 진술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의 시들은 삶의 기록으로 가득차 있다. 그의 삶의 기록이 그대로 시가 되어 나온 것이다. 최용우님의 시는 우선 쉽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생활의 편린들을 간결한 언어로 기록한 일기이다.
그의 시에는 어떤 삶이 있을까? 그의 시에서 삶을 역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
최용우님이 보내준 복사본 시집을 읽다가 눈에 번쩍 띄는 시가 있었다.
티 하나 보이지 않는
단조로운 한 일획
날카로운 칼날
그 위로 태양만이 솟을 수 있음
선홍빛 피흘림을 무릎쓰고
바로 저렇게!
골고다 골짜기에 우뚝 선
모난 그대로의 열십자
둔탁한 망치소리
그 위에는 주님만이 달릴 수 있음
주홍빛 보혈 뚝뚝 흘리며
바로 저렇게! -<일출> 전문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쓴 시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붉은 해가 빛을 발하면서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골고다 십자가'를 떠올리고 있다.
태양을 보면서 십자가를 떠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태양의 붉은 빛'에서 골고다의 십자가를 본 것이 아니라 붉은 덩어리 태양에서 쏟아져나와 떨어지는 태양 주위의 붉은 기운들을 보면서 피를 연상하게 되고 그 피에서 골고다 십자가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수평선을 '날카로운 칼날'로 인식하는 것이 특이하다. 수평선은 푸른색이므로 칼날의 푸른 빛과 어울려 수긍이 간다. 또한 이 푸른색은 피(보혈)의 붉은 색과 어울리며 섬뜩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 푸름과 붉음이 어우러지는 곳에 '골고다 골짜기에 우뚝 선/모난 그대로의 열십자'의 십자가가 나오고 있다. 푸름은 칼이요 죽이는 것이라면 붉음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칼은 드러난 것이고 핀ㄴ 살 속에 있는 것이다. 칼이 살을 베어 피가 나오게 하듯이 푸른 수평선이 바닷속의 태양을 나오게 한다. 이 죽음과 죽임당함이 한데 어우러지는 곳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열십자'는 종횡이 교차하는 곳이다. 만남이다. 그 만남의 극치가 에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십자가를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가득 차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사고작용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시인은 '둔탁한 망치소리'를 듣고 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망치소리 뚝딱뚝딱뚝딱뚝딱 혹은 쿵쿵쿵쿵쿵쿵쿵쿵 혹은 쾅쾅쾅쾅쾅쾅쾅쾅.
이것은 절대자 앞에서 자기를 찾고 자기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지름길이다.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절대자를 생각하고 그 앞에서 참회하기를 마지 않는 시인은 아름다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마음이 어떤가를 볼 수 있는 시가 있다.
어느 때는
하나님을 찬송하면서도
찬송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때는
부르짖어
기도하면서도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때는>
항상 부족한 마음을 가진다. 항상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으면서도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또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다 되었다고 하는 자기 기만, 혹은 자기 만족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 부단히 자기 정진을 시도하는 신앙인의 모습을볼 수 있다.
4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되 혼자서만 하지 않는다.
아버지, 저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아버지, 저의
기도도 들어 주십시오
네!
-<어떤 절규> 전문
제목이 '어떤 절규'다. 절규라는 것은 간절하게 부르짖는 것, 자기에게 어떤 소원이 있어 절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저'도' 불쌍히 여겨달라 하고, 저의 기도'도'들어달라고 한다. 근본적으로 생각이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독은 독이다/ +독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맹독이다'(<고독>2연)라고 잘라 말한다.
5
시인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성실함으로 나타난다. 성실함이란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받은 사람인데 그 점을 충실히 인식하고 그대로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다.
주님, 짐을 주십시오
좀더 무거운 짐을 주십시오
그리고 그 짐을 질 수 있도록
좀 더 튼튼한 어깨를 주십시요.
---
주님! 나는 주님의 일꾼입니다.
가장 천하고 가장 힘든 일을 시키셔도
주님의 막노동꾼으로도 나는
눈물나도록 족합니다. 행복합니다. -<사역자의 다짐>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으로서 지금 막노동꾼과 다름없는 일을하면서도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이 세상에 살면서 나름대로 일에 열중하면서 가정을 책임지고 살아가냥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살면서, 힘들지만 즐겁고 행복하게 일을 해나가고 있는 최용우님은 참된의미의 노동시인이 아닐까? 최용우님을 받쳐주고 있는 것은 신앙의 힘이다. 이 신앙의 태도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시
나를
주님의 땔감으로
삼으로서
오!
불꽃의
하나님이여. -<땔감>
자기가 기꺼이 땔감이 되겠다고 하는 정말 무서운 소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또 다른 시에서 자기를 '걸레'로 사용해 달라고 하기도 한다. '저를 들고 더러운 이곳 저곳을/ 어서 깨끗이 문질러 주십시오'라고 소원한다. 자기를 땔감으로 삼아 불꽃의 하나님이 활활 타오를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 또, 자기가 걸레가 되어 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이 본래의 빛을 가지게 해 달라는 소원. 소금이 형체도 없이 녹아서 그 음식의 부패를 막아주고 맛을 더하게 하듯이. 그런 삶을 살겠다는 이 시인의 순수한 열정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6
최용우님의 사진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사실 하나. 이런 얼굴(?)에서도 이런 시(?)가 나올 수 있나(?)
한 밤 전봇대에서
매미 한마리가 울어요
무슨 사연 있길레
저리 슬피 우나...
나도 주님 품 안에서
울고 싶습니다.
아무 일 없어도
그냥 저렇게 -<울고싶은 날>-
시간은 한 밤이고 전봇대가 높이 솟아 있어 을시년스럽다. 거기에 매미 한마리가 붙어 때를 분간 못하고 울어대는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그냥 너머가지 않고 한 편의 신앙이 담긴 시를 빚어내었다. 전봇대에 붙은 매미를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과 그 속에 자기가 의지하고 믿는 신앙의 대상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시인이 텔레비젼을 보고 있다. 개미가 어깨를 문다. 개미를 잡으려다가 '개미에게로 가서/ 배우라'는 성경말씀을 떠올리고 텔레비젼을 끄고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리고 개미는 그냥 살려보낸다. 이상은 <개미>라는 시를 풀어 써 본 것이다. 시인을 스치고 가는 일상의 가장 작은 사건들까지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것이 곧 신앙과 거의 자동으로 연결됨을 볼 수 있다.
최용우님은 신앙시인이다.
이 말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니다.
7
최요우님은 지금도 시를 쓰고 있다. 직장에서 고단한노동 뒤에 담배한대 피우며 숨을 돌리는 대신에 의자에 앉아 한 편의 시를 쓴다고 한다. 그 시 역시 삶의 기록일텐데, 기대가 된다. 또 다른 삶의 기록. 이제까지 최용우님의 시가 신앙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면 이제 삶이라는 것도 새로운 비중으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점 때문이다. 신앙이 강조되면 일반인들이 읽을 때 거부감과 더불어 너무 빨리 신앙이라는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버린 느낌에 가볍다는 인상을 지워버릴 수 없는데,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서 좀 더 삶과 씨름하는모습을 보여준다면 읽는 이들에게 더욱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을것이다. 펄펄 끓는 용광로 앞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노동에 열중하다 그거친 손으로 쓰는 시. 보고 싶다.
그는 묵묵히 걷고 있으며 그렇게 앞만 보고 묵묵히 걷기를 원하지만 그 가슴에 비상을 꿈꾸는 사람이다.
올해도
묵묵히 걸을 수 있기를
앞만보고 걷기를
주님과 동행하기를
목적을 수단 삼지 않기를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힘차게 박차고
날아오를 수 있기를
훨훨 새가 되기를
-<새해아침>전문
비상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만은, 이런 꿈을 가지고 오히려 현실에 충실한 최용우님은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다.
'저는 詩人이 아닙니다. 詩人 흉내만 내는 사이비입니다'라고 자백하고 있듯이 그는 詩人이 아닌 '사람'이다. 참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 곧 詩이고 '詩人'인 것을...
조덕근 (시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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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통신 이라는 의사소통의 도구가 생기면서 우리의 만남도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선것 같다. 내가 최용우 전도사님(앞으로는 그냥 '님'만 붙이기로 하자)과 만난 것은 바로 그 새로운 공간 안에서이다. 통신 완전 초보시절 01410으로 하이텔에 접속을 하는데 자꾸만 끊기는 바람에 CNET(크리스챤네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거기에 들어가 여기저기 돌아다녀보다가 '시편151편'이라는 작은 문학모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작은 모임을 이끌고 있던 분이 바로 최용우님이다. 그리고 이 작은 모임은 '기독교문학동호회'로 발전하여 최용우님은 역시 그 모임을 변함없이 이끌고 있다.
그는 한때 3년간 유조선을 타고 온 세계 바다를 몸으로 체험한 적이 있는 외항선원 출신이고, 제과제빵 기술을 배워 빵을 만들기도 했으며 '기뻐하는사람들'이라는 선교회를 조직하여 선교쪽지도 발행하는 등 문서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신학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수업도 받았고, 이어 첫딸 '최좋은'이가 태어나고 첫돌이 될 무렵 또다른 체험을 위해 항공기부품을 정밀주조하는 회사에 입사하여 지금은 하루에 10시간이상 땀흘려 일하면서도 맑은 서정과 시심(詩心)을 잃지 않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2
서문(序文)격인 <첫글>에서
알고보니 詩란 더이상 암호놀이가 아니었습니다.
일부 詩를 논하는 이들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시란 우리들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냥 삶을 기록하니 그것이 詩가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그가 생각하는 시는 '그냥 삶을 기록'한 그것이다. 가장 소박하고도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아닐수 없다. '시'란 삶의 기록이라는 것이 진술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의 시들은 삶의 기록으로 가득차 있다. 그의 삶의 기록이 그대로 시가 되어 나온 것이다. 최용우님의 시는 우선 쉽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생활의 편린들을 간결한 언어로 기록한 일기이다.
그의 시에는 어떤 삶이 있을까? 그의 시에서 삶을 역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
최용우님이 보내준 복사본 시집을 읽다가 눈에 번쩍 띄는 시가 있었다.
티 하나 보이지 않는
단조로운 한 일획
날카로운 칼날
그 위로 태양만이 솟을 수 있음
선홍빛 피흘림을 무릎쓰고
바로 저렇게!
골고다 골짜기에 우뚝 선
모난 그대로의 열십자
둔탁한 망치소리
그 위에는 주님만이 달릴 수 있음
주홍빛 보혈 뚝뚝 흘리며
바로 저렇게! -<일출> 전문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쓴 시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붉은 해가 빛을 발하면서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골고다 십자가'를 떠올리고 있다.
태양을 보면서 십자가를 떠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태양의 붉은 빛'에서 골고다의 십자가를 본 것이 아니라 붉은 덩어리 태양에서 쏟아져나와 떨어지는 태양 주위의 붉은 기운들을 보면서 피를 연상하게 되고 그 피에서 골고다 십자가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수평선을 '날카로운 칼날'로 인식하는 것이 특이하다. 수평선은 푸른색이므로 칼날의 푸른 빛과 어울려 수긍이 간다. 또한 이 푸른색은 피(보혈)의 붉은 색과 어울리며 섬뜩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 푸름과 붉음이 어우러지는 곳에 '골고다 골짜기에 우뚝 선/모난 그대로의 열십자'의 십자가가 나오고 있다. 푸름은 칼이요 죽이는 것이라면 붉음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칼은 드러난 것이고 핀ㄴ 살 속에 있는 것이다. 칼이 살을 베어 피가 나오게 하듯이 푸른 수평선이 바닷속의 태양을 나오게 한다. 이 죽음과 죽임당함이 한데 어우러지는 곳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열십자'는 종횡이 교차하는 곳이다. 만남이다. 그 만남의 극치가 에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십자가를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가득 차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사고작용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시인은 '둔탁한 망치소리'를 듣고 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망치소리 뚝딱뚝딱뚝딱뚝딱 혹은 쿵쿵쿵쿵쿵쿵쿵쿵 혹은 쾅쾅쾅쾅쾅쾅쾅쾅.
이것은 절대자 앞에서 자기를 찾고 자기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지름길이다.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절대자를 생각하고 그 앞에서 참회하기를 마지 않는 시인은 아름다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마음이 어떤가를 볼 수 있는 시가 있다.
어느 때는
하나님을 찬송하면서도
찬송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때는
부르짖어
기도하면서도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때는>
항상 부족한 마음을 가진다. 항상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으면서도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또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다 되었다고 하는 자기 기만, 혹은 자기 만족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 부단히 자기 정진을 시도하는 신앙인의 모습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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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되 혼자서만 하지 않는다.
아버지, 저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아버지, 저의
기도도 들어 주십시오
네!
-<어떤 절규> 전문
제목이 '어떤 절규'다. 절규라는 것은 간절하게 부르짖는 것, 자기에게 어떤 소원이 있어 절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저'도' 불쌍히 여겨달라 하고, 저의 기도'도'들어달라고 한다. 근본적으로 생각이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독은 독이다/ +독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맹독이다'(<고독>2연)라고 잘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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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성실함으로 나타난다. 성실함이란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받은 사람인데 그 점을 충실히 인식하고 그대로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다.
주님, 짐을 주십시오
좀더 무거운 짐을 주십시오
그리고 그 짐을 질 수 있도록
좀 더 튼튼한 어깨를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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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나는 주님의 일꾼입니다.
가장 천하고 가장 힘든 일을 시키셔도
주님의 막노동꾼으로도 나는
눈물나도록 족합니다. 행복합니다. -<사역자의 다짐>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으로서 지금 막노동꾼과 다름없는 일을하면서도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이 세상에 살면서 나름대로 일에 열중하면서 가정을 책임지고 살아가냥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살면서, 힘들지만 즐겁고 행복하게 일을 해나가고 있는 최용우님은 참된의미의 노동시인이 아닐까? 최용우님을 받쳐주고 있는 것은 신앙의 힘이다. 이 신앙의 태도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시
나를
주님의 땔감으로
삼으로서
오!
불꽃의
하나님이여. -<땔감>
자기가 기꺼이 땔감이 되겠다고 하는 정말 무서운 소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또 다른 시에서 자기를 '걸레'로 사용해 달라고 하기도 한다. '저를 들고 더러운 이곳 저곳을/ 어서 깨끗이 문질러 주십시오'라고 소원한다. 자기를 땔감으로 삼아 불꽃의 하나님이 활활 타오를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 또, 자기가 걸레가 되어 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이 본래의 빛을 가지게 해 달라는 소원. 소금이 형체도 없이 녹아서 그 음식의 부패를 막아주고 맛을 더하게 하듯이. 그런 삶을 살겠다는 이 시인의 순수한 열정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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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우님의 사진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사실 하나. 이런 얼굴(?)에서도 이런 시(?)가 나올 수 있나(?)
한 밤 전봇대에서
매미 한마리가 울어요
무슨 사연 있길레
저리 슬피 우나...
나도 주님 품 안에서
울고 싶습니다.
아무 일 없어도
그냥 저렇게 -<울고싶은 날>-
시간은 한 밤이고 전봇대가 높이 솟아 있어 을시년스럽다. 거기에 매미 한마리가 붙어 때를 분간 못하고 울어대는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그냥 너머가지 않고 한 편의 신앙이 담긴 시를 빚어내었다. 전봇대에 붙은 매미를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과 그 속에 자기가 의지하고 믿는 신앙의 대상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시인이 텔레비젼을 보고 있다. 개미가 어깨를 문다. 개미를 잡으려다가 '개미에게로 가서/ 배우라'는 성경말씀을 떠올리고 텔레비젼을 끄고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리고 개미는 그냥 살려보낸다. 이상은 <개미>라는 시를 풀어 써 본 것이다. 시인을 스치고 가는 일상의 가장 작은 사건들까지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것이 곧 신앙과 거의 자동으로 연결됨을 볼 수 있다.
최용우님은 신앙시인이다.
이 말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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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요우님은 지금도 시를 쓰고 있다. 직장에서 고단한노동 뒤에 담배한대 피우며 숨을 돌리는 대신에 의자에 앉아 한 편의 시를 쓴다고 한다. 그 시 역시 삶의 기록일텐데, 기대가 된다. 또 다른 삶의 기록. 이제까지 최용우님의 시가 신앙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면 이제 삶이라는 것도 새로운 비중으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점 때문이다. 신앙이 강조되면 일반인들이 읽을 때 거부감과 더불어 너무 빨리 신앙이라는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버린 느낌에 가볍다는 인상을 지워버릴 수 없는데,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서 좀 더 삶과 씨름하는모습을 보여준다면 읽는 이들에게 더욱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을것이다. 펄펄 끓는 용광로 앞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노동에 열중하다 그거친 손으로 쓰는 시. 보고 싶다.
그는 묵묵히 걷고 있으며 그렇게 앞만 보고 묵묵히 걷기를 원하지만 그 가슴에 비상을 꿈꾸는 사람이다.
올해도
묵묵히 걸을 수 있기를
앞만보고 걷기를
주님과 동행하기를
목적을 수단 삼지 않기를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힘차게 박차고
날아오를 수 있기를
훨훨 새가 되기를
-<새해아침>전문
비상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만은, 이런 꿈을 가지고 오히려 현실에 충실한 최용우님은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다.
'저는 詩人이 아닙니다. 詩人 흉내만 내는 사이비입니다'라고 자백하고 있듯이 그는 詩人이 아닌 '사람'이다. 참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 곧 詩이고 '詩人'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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