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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의 목표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시작한 저는 중학생 때 국가 대표로 선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부터 테니스엘보우라는 팔꿈치의 심한 통증으로 선수생명을 위협받았습니다. 진통 주사를 맞지 않으면 경기에 나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기를 6년, 진통주사의 효과는 계속 떨어져 갔습니다. 그런데 18살의 어린 나이로 이제는 마지막 출전이라 생각했던 도쿄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뜻밖에도 중국 선수들을 모두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노력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병은 낫지 않고 약화되어 갔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 간구해 보라는 권유를 듣고 이것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별 생각 없이 기도원에 가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저에게 임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을 때, 6년 동안 저를 고질적으로 괴롭히던 테니스엘보우가 극적으로 치료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건으로 제 삶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이젠 저의 명예가 아니라 제가 만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라켓을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시련은 닥쳐왔습니다. 또다시 저는 간염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간염환자를 대표단에 소속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저는 대표 선수단에서 제외되는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망도 포기도 하지 않았고, 열심히 라켓을 잡고 연습하였습니다. 결국 다시 국가대표에 복귀할 수
있었고 '86아시아게임에서 현정화 선수와 더불어 중국팀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염은 계속 심해졌고 모두들 이제는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마다 저를 일으키셔서 저로 '88서울올림픽 때도 국가대표로
출전하게 하셨습니다.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제 몸도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가눌 수조차 없었습니다. 현정화 선수와 함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한 경기 한 경기를 치루었습니다. 결국 중국과 또 다시 만난 복식 결승전... 결승전 당일 우리는 두 손을 마주잡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아무도 넘을 수 없을 것이라던 중국 탁구의 벽을 우리는 기도로 넘어섰던 것입니다. 기도로 우리는 올림픽 금메달을 조국의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M국에서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며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리석게 산다'고 걱정하지만 그들에게 저는 고백합니다. 예수님만이 저의 소망이시고 기쁨이요 힘이요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진정 한 가치는 금메달이 아니라 천국의 면류관이라고 말입니다.
(양영자, 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
80년대 탁구여왕 양영자 씨, 몽골 유망주 5명과 방한
22일 오전 인천 서구 원당동 대한항공 탁구단 체육관. 검은색 니트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양영자(44) 씨는 마치 20년 전 흑백사진 속에서 걸어 나온 듯했다. 짧은 헤어스타일이나 몸매가 예전과 다름없었다.
양 씨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현정화(39) KRA 감독과 짝을 이룬 여자복식 결승에서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따내며 국내에 탁구 신드롬을 일으켰던 ‘탁구 여왕’. 1980년대 국내 여자탁구를 주름잡았고 1986년 부산 아시아경기, 1987년 뉴델리 세계선수권에 이어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현 감독과 짝을 이뤄 3년 연속 여자복식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양 씨는 25세 때인 1989년 초 은퇴해 제일모직(현 삼성생명) 코치 생활을 잠깐 하다 탁구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양 씨가 선교사의 길을 택한 기자 출신 남편 이영철(47) 씨를 따라 1997년 몽골로 떠난 것.
2004년 몽골에서 중국의 몽골 자치주인 내몽골로 옮겨 선교활동을 하는 그가 일주일에 두세 번 탁구 지도를 해주는 몽골 대표팀의 유망주 5명을 데리고 21일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대한항공에서 합동 훈련을 할 수 있게 초청해 줬어요. 몽골 아이들로선 이렇게 좋은 기회가 없어요.”
양 씨는 몽골에서도 탁구 클럽을 열어 어린이들을 지도하는 등 여전히 탁구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내몽골에서 ‘본업’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비정부기구(NGO) 활동이다.
반재(16), 윤재(15) 두 딸은 2005년 기숙사가 딸린 대전의 학교에 보냈지만 양 씨 부부는 언제 한국에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다.
양영자(오른쪽)가 1988 서울 올림픽 여자 복식에서 중국 선수들을 꺾고 우승한 뒤 시상식에서 현정화(현 KRA 감독)와 함께 관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국내 탁구계를 오래 떠나 있었지만 탁구계에서 양 씨의 존재감은 여전히 크다. 대한항공 김무교(33) 코치는 “어릴 때부터 우상이었다”며 “3년 전 대한항공 선수 2명을 데리고 내몽골을 방문해 언니하고 탁구를 쳐봤는데 정말 실력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양 씨는 오전 훈련이 끝난 뒤 대우증권 탁구단이 훈련하는 한국체대로 자리를 옮겼다. 김택수(39) 대우증권 총감독은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양 씨의 단골 훈련 파트너였다.
김 감독이 점심 식사 자리에서 양 씨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요즘 여자탁구 어렵잖아요. 누나 같은 사람이 후배들을 이끌어 줘야지요. 그럴 책임이 있는 거 아니에요?” 양 씨는 “조금 기다려 봐. 혹시 알아? 돌아올지”라고 웃으며 얼버무렸다.
서울 올림픽에서 유남규(40) 대한탁구협회 이사가 남자단식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당시 언론은 “남자탁구가 마침내 여자탁구의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표현할 만큼 한국 여자탁구는 강했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한국 탁구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선결 과제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양 씨는 “공격형 선수들을 대표팀 주축으로 키워야 희망이 있다”고 짧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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