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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딤전1: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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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7. 1. 7
새해에 받은 말씀1:
"나의 나 된 것"(He Made Me What I Am)"
--디모데전서 1:12-17; 빌립보서 3:4-6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죄 많은 과거를 생각하며 자신을 사도로 불러 쓰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고백합니다. 빌립보서의 본문에서 바울은 인간적인 자랑거리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1.본문 연구
1) 디모데전서 본문을 읽고, '자비' 혹은 '은혜'라는 말이 몇 번 나오는지 세어 보십시오.
2) 디모데전서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3) 빌립보서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자랑거리가 무엇인지 따져 보십시오.
2. 토의 문제
1)사담 후세인의 신앙에 대한 당신의 느낌을 말해 보십시오. 그와 유사한 잘못을 기독교인에게서 본 적이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2)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처형하는 일에 앞장 섰던 사람입니다. 그럴 당시에 바울은 빌립보서 본문에 표현된 것과 같은 자만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의 종교적 자부심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본문과 디모데전서 본문을 비교하면서,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4)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 자신을 비추어 보고 스스로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을 얼마나 진실하게, 얼마나 자주 하십니까?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서로의 간증을 나누어 보십시오.
1.
지난 2006년 12월 30일 아침,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Sadam Hussein)이 급작스럽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 사건은 이라크가 민주주의로 향해 가는 길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It is an important milestone on Iraq's course to becoming a democracy"라는 성명을 냈습니다. 하지만 아랍 세계에서는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더 강해지고, 테러는 더 심해졌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생각하면서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악한 행동을 했든지에 상관 없이,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기뻐하는 것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슬퍼할 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이 24년간 권력을 장악하고 저질러온 수 많은 학살과 고문과 파괴와 억압을 생각하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은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실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준 피해를 생각하면, 그것 가지고도 부족해 보입니다. 그러니 슬퍼할 일도 아닙니만, 또한 그렇다고 기쁘게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또한 저로 하여금 신앙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뉴스를 통해 전해 들으셨겠지만, 사담은 체포된 후에도, 재판 중에도, 사형이 선고된 후에도, 그리고 교수대 앞에서도, 한 번도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거나, 용서를 구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만이 진정한 이라크의 대통령이라며, "내가 없는 이라크는 아무 것도 아니다"(Iraq without me is nothing)이라고 말했습니다. 사형이 확정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죽음이 순교(martyrdom) 이며, 이라크를 위한 희생제물(sacrifice)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처형되기 전에 쓴 편지에서 그는, "만일 내 영혼이 순교의 길로 간다면, 내 영혼은 평안 가운데 알라신을 대할 것이다"(If my soul goes down this path--of martyrdom--it will face God in serenity)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교수대 앞에서도 사담은 당당하려고 애썼습니다. 사형 집행관들이 밧줄을 그의 목에 걸기 전에 두건(hood)을 씌우려 하자, 그는 거부했습니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집행인에게, "나는 전사(fighter)로 살아왔다. 나는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우리는 모두 천국에 갈 것이며, 우리 원수 들은 지옥에서 썩을 것이다"we are going to Heaven and our enemies will rot in hell)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손에 들고 교수대 앞에 섰고, 그곳에 있던 이슬람 성직자가 마지막으로 할 말을 하라고 하자, 이슬람의 기도문 첫 구절, 즉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알라의 예언자는 마호메드다" (There is no god but Allah, and his prophet is Mohammed)라는 구절을 두 번째 암송하다가, "떨컹"하는 소리와 함께 침묵했다고 합니다.
2.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사담 후세인이 얼마나 큰 욕심과 강한 집착과 높은 교만으로 뭉쳐진 사람인지를 알 것입니다. 마지막에 그가 남긴 말들은 그가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심스럽게 만듭니다. 그가 24년간 독재 정치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박해하고 착취했는지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런데 그가 알라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가 믿는 신 앞에 회개할 아무런 죄도 없다고 생각했으며, 교수대에서 숨이 끊기는 순간 천국에 가리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한 그 엄청난 죄악에 대해서는 아무 의식 없이, 자신의 죽음을 순교로 혹은 희생 제물로 여기고, 이토록 대담하게 죽음의 길을 가다니, '참 대단한 사람이 다'라는 느낌도 들지만, '그의 신앙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라는 큰 질문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가 믿는 신은 과연 무엇을 가르치는 신이며, 그가 사랑하는 경전은 과연 무엇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가 외우는 기도문은 어떤 것이기에, 죽음의 문턱 앞에서조차 이렇게 철저한 자기 기만(self-deception)에 빠져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만일 사담 후세인이 기독교인이었다면, 그래서 그가 교수대 앞에 성경을 들고 나왔다면, 그리고는 자신을 순교자로 미화하면서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암 송하면서 처형을 당했다면, 그랬다면 저는 기독교를 버리고 싶을 만큼이나, 그와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교수대 앞에 나와 자신의 악행에 대해 깊이 뉘우치며, 자신으로 인해 고통 당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고, 자신의 죽음으로 그 상처가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다면, 백 번이라고 죽겠다는 말로 참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참회로 이끄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얼마나 진실하게 볼 수 있도록 해 주느냐, 바로 여기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참된지 아니면 거짓된지가 판가름 납니다. 그 종교가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얼마나 자기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해 주느냐, 바로 여기서, 한 종교가 얼마나 믿을만한지가 판가름 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담 후세인의 처형 사건은 정치적인 사건이기도 하지만 종교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가 처형 당하기 앞서 행한 행동은 이슬람교에게는 아주 큰 상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의 딸들은 아버지가 그토록 용감하게 처형 당하는 것을 보고 자랑스러워했다(They felt very proud as they saw their father facing his executioners so bravely)고 성명을 냈지만, 생각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슬람교는 큰 불명예를 얻은 셈입니다. 참된 종교는 자기 기만을 벗겨 주고 자신의 참 모습을 찾아가도록 돕는 것인데, 오히려 종교가 자기 기만을 강화시켜 준다면, 거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한 사람에게 신앙이 제대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참되게 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오는 동안에 자신에 대해 가졌던 많은 생각들이, 하나님을 대면하고 나서 산산이 깨어져 버립니다. 자신의 진상을 대면하고는, 기가막힌 착각 속에서 살아온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첫 단계는 대개 '회개'로 시작합니다.
회개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의 차원은 잘못 살아온 과거의 소행을 깨닫고 그것에 대해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존심의 근거로 삼았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괜찮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내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이 수치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겨우 겨우 지탱해 왔던 자존심이 모두 무너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절망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다른 차원은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 참된 희망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 절망으로부터 헤어나도록 부추겨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부정함을 보고, 그분의 선하심 앞에서 자신의 악함을 보고, 그분의 정결하심 앞에서 자신의 불결함을 보고, 그분의 아름다우심 앞에서 자신의 추함을 보고, 그리고 그분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자신의 불완전한 사랑을 보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하나님을 향해 은총을 구한다면, 그분은 우리를 일으켜 주셔서 새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서서히 자신에 대해 새로운 희망을 추스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거치고 나면, 자신 자신이 얼마나 쉽게 속을 수 있는지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앙 생활의 중심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데로 모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하든, 말씀을 읽든, 찬양을 하든, 봉사를 하든, 언제나 자신을 돌아 보며, 혹시나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시나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시나 내 판단이 그릇된 것은 아닌지, 혹시나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혹시나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지, 혹시나 내 말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시나 내가 봉사하는 것이 내 자신의 줄거움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닌지, 혹시나 내가 헌신이라고 하는 것이 내 욕심은 아닌지, 혹시나 내 기도가 홀로의 독백이나 넋두리는 아닌지, 혹시나 내 예배가 우상 숭배는 아닌지, 자기 자신을 세밀하게 성찰하는 데 영적 생활의 초점이 모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삼가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우리라고 해서 사담 후세인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4.
올 해에도 지난 해처럼, 첫 몇 주일 동안 '새 해에 주신 말씀'이라는 주제 하에, 새 해 맞이 새벽기도회에서 나눈 말씀 중, 한 해 동안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삶의 지침으로 삼을만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작년에는 에스겔서를 읽었는데, 이번에는 데살로니가후서와 디모데전서를 읽었습니다. 두 주일 동안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는 동안, 누구보다도 저 자신에게 가장 많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말씀으로서,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오는 바울의 자기 고백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도 바울과 사담 후세인이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 바울 사도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아주 심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 서, 13절에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라고 고백 합니다. 15절에 가서는,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지은 죄로 따지면 자신이 가장 죄를 많이 지은 사람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에도 이와 비슷한 고백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만나주신 사람들의 명단을 열거하면서, 바울 사도는 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절과 9절입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친 자기 비하처럼 느껴질만큼, 바울은 자신의 과거 잘못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와 소명과 능력이 자신에게는 벅찬 것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바울 사도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고전 15:10)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읽은 디모데전서에서는,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13절)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14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바울 사도는 15절과 16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같은 사람을 용서해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소명을 주시며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모두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죄인입니까? 저 같은 사람도 용서 받았습니다. 당신에게는 믿음이 없습니까? 저같은 사람에게도 믿음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당신에게는 능력이 없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느끼십니까? 저같은 사람도 부름을 받고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저를 보고 희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께서 저를 사도로 쓰시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분 모두에게 희망의 증거입니다!"
5.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그 바울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실제로 대면하기 전까지는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오늘 함께 읽은 빌립보서 3장을 보면, 같은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이토록 다른 말이 나올 수 있을지 이해되지 의아스러울만큼, 바울은 자신에 대해 자랑스러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세속적으로 자 랑하고자 한다면 자신에게도 자랑할 것이 많이 있다고 운을 뗀 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말은 유대교인 남자로서 흠이 없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 중 '베냐민 지파'는, 우리로 따지면 왕족에 속합니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을 이어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라는 말은 당시로서 가장 열심이 강했던 교파에 속했다는 말입니다.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율법에 대해 열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 열심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말살시키려고 애썼다는 뜻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다'는 말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따지면 자기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혈통으로 보나, 가문으로 따지나, 교육으로 보나, 소속된 종파로 보나, 종교적 열심으로 보나, 성취한 업적으로 보나, 자랑할 것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어떻게,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을까요? 이토록 자기 자신에 대해 자랑할 거리가 많았던 바울이, 어떻게 해서 나중에는 "나는 달이 차지 못해서 난 사람같이 부족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에 대해 자부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처형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부단히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회개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바울이 우상 하나님을 믿지 않고 참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참된 모습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고 자신의 죄성에 대해 몸을 떨며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동안 붙들고 있었던 모든 것들, 모든 자랑거리를 내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듭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고백합니다. 13절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라고 말하고, 14절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라고 말합니다. 또한 16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한 없는 자비에 감격하면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7절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 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힘입어 바울 사도는 헛된 자랑과 자만심을 내려놓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랑을 얻고 새로운 자존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헛된 것에 속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참되게 살기 위해 늘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그랬기에, 사담 후쎄인처럼, 이교도들을 처형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악행을 일삼던 바울이, 마침내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바쳐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6.
사담 후세인인가, 아니면 사도 바울인가? 이것은 새 해를 신앙적으로 맞이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원하는 분들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한 번도 깨어져 본 적이 없으면, 우리는 사담처럼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혹시나 속고 있는 것이 없나를 끊임 없이 살피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대로 눈 질끈 감고 행동하다 보면, 우리는 사담처럼 되기 쉽습니다. 내가 배운 진리의 말씀으로 나 자신을 비추어 보고, 스스로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지속적으로 다시 지어지지 않으면, 그리고 자신이 배운 진리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재판하려는 유혹에 이끌리면, 우리는 필경 사담처럼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생각 있는 사람들에게 조소 거리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랑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바울이 말한 것처럼, '배설물처럼 여기고' 내려 놓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서서, 성령께서 주시는 회개의 은총(convicting grace)을 힘 입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나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을 내려 놓기를 원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절망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존재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릅꿇을 때마다 하 나님의 은총을 힘 입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날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며, 날로 더 투명해지고, 날로 더 맑아지고, 날로 더 진실해지기를 원합니다.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으면서도 자신을 순교자로 여기고, 천국에 갈 것을 꿈 꾸며, 죽음의 문턱을 향해 나간 사담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희생하여 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고 수줍게 고백한 사도 바울-바로 그분을 닮고 싶습니다. 사담의 경우처럼, 저의 죽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 사람이 믿는 신이라면 나는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저의 죽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 사람이 믿은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고 싶다'고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죽으려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일생동안 살아온 그 방식이 그 사람의 죽음을 결정합니다. 사담 후쎄인은 진실로, 69년 동안 살아온 그 모습 그대로 죽었습니다. 바울은, 비록 젊은 시절 30여년은 잘 못 살았지만, 나머지 인생은 진실되게, 참되게, 선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도 역시 네로 황제의 잔혹한 처형으로 인해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살아, 이렇게 죽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기를 즐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 자주 선다 해도,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내려 놓고 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명령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명령을 받을 분이 아니므로, 우리는 결국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맙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그분의 은총에 우리를 맡기고, 주님께서 비추어 주시는 말씀의 빛으로 우리 자신을 비추고, 그 빛의 광선으로 우리 자신을 소독하고 치료할 때, 우리는 비로소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해 갈 것입니다.
7.
이것이 새 해에 받은 첫 번째 말씀입니다. 사담이 될 것인가, 사도 바울이 될 것인가? 자기 기만의 종교인이 될 것이냐, 자기 성찰의 종교인이 될 것이냐? 오도된 종교 생활을 통해 병든 자아를 키워가는 신앙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영성 생활을 통해 병든 자아를 치유하고 참된 자아를 키워가는 신앙인이 될 것인가? 이 중요한 선택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 모두, "지금의 내가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영성 목회를 통해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하여 속 사람이 날로 성장하고 겉 사람이 날로 약해져 가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고난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이 높여지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
진실하기 원합니다.
참되기 원합니다.
거짓 자아를 내려놓기 원합니다.
속아서 살기 원치 않습니다.
저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님 안에서 참된 자아를 찾게 하시고
주님의 자비로써
늘 새로 지어지게 하소서.
새 해에는
주님의 말씀의 빛으로 저희 자신을 비추어 보는
자기 성찰의 길에
견고히 서게 하소서.
아멘.
새해에 받은 말씀1:
"나의 나 된 것"(He Made Me What I Am)"
--디모데전서 1:12-17; 빌립보서 3:4-6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죄 많은 과거를 생각하며 자신을 사도로 불러 쓰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고백합니다. 빌립보서의 본문에서 바울은 인간적인 자랑거리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1.본문 연구
1) 디모데전서 본문을 읽고, '자비' 혹은 '은혜'라는 말이 몇 번 나오는지 세어 보십시오.
2) 디모데전서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3) 빌립보서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자랑거리가 무엇인지 따져 보십시오.
2. 토의 문제
1)사담 후세인의 신앙에 대한 당신의 느낌을 말해 보십시오. 그와 유사한 잘못을 기독교인에게서 본 적이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2)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처형하는 일에 앞장 섰던 사람입니다. 그럴 당시에 바울은 빌립보서 본문에 표현된 것과 같은 자만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의 종교적 자부심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본문과 디모데전서 본문을 비교하면서,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4)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 자신을 비추어 보고 스스로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을 얼마나 진실하게, 얼마나 자주 하십니까?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서로의 간증을 나누어 보십시오.
1.
지난 2006년 12월 30일 아침,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Sadam Hussein)이 급작스럽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 사건은 이라크가 민주주의로 향해 가는 길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It is an important milestone on Iraq's course to becoming a democracy"라는 성명을 냈습니다. 하지만 아랍 세계에서는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더 강해지고, 테러는 더 심해졌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생각하면서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악한 행동을 했든지에 상관 없이,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기뻐하는 것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슬퍼할 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이 24년간 권력을 장악하고 저질러온 수 많은 학살과 고문과 파괴와 억압을 생각하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은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실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준 피해를 생각하면, 그것 가지고도 부족해 보입니다. 그러니 슬퍼할 일도 아닙니만, 또한 그렇다고 기쁘게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또한 저로 하여금 신앙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뉴스를 통해 전해 들으셨겠지만, 사담은 체포된 후에도, 재판 중에도, 사형이 선고된 후에도, 그리고 교수대 앞에서도, 한 번도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거나, 용서를 구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만이 진정한 이라크의 대통령이라며, "내가 없는 이라크는 아무 것도 아니다"(Iraq without me is nothing)이라고 말했습니다. 사형이 확정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죽음이 순교(martyrdom) 이며, 이라크를 위한 희생제물(sacrifice)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처형되기 전에 쓴 편지에서 그는, "만일 내 영혼이 순교의 길로 간다면, 내 영혼은 평안 가운데 알라신을 대할 것이다"(If my soul goes down this path--of martyrdom--it will face God in serenity)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교수대 앞에서도 사담은 당당하려고 애썼습니다. 사형 집행관들이 밧줄을 그의 목에 걸기 전에 두건(hood)을 씌우려 하자, 그는 거부했습니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집행인에게, "나는 전사(fighter)로 살아왔다. 나는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우리는 모두 천국에 갈 것이며, 우리 원수 들은 지옥에서 썩을 것이다"we are going to Heaven and our enemies will rot in hell)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손에 들고 교수대 앞에 섰고, 그곳에 있던 이슬람 성직자가 마지막으로 할 말을 하라고 하자, 이슬람의 기도문 첫 구절, 즉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알라의 예언자는 마호메드다" (There is no god but Allah, and his prophet is Mohammed)라는 구절을 두 번째 암송하다가, "떨컹"하는 소리와 함께 침묵했다고 합니다.
2.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사담 후세인이 얼마나 큰 욕심과 강한 집착과 높은 교만으로 뭉쳐진 사람인지를 알 것입니다. 마지막에 그가 남긴 말들은 그가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심스럽게 만듭니다. 그가 24년간 독재 정치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박해하고 착취했는지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런데 그가 알라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가 믿는 신 앞에 회개할 아무런 죄도 없다고 생각했으며, 교수대에서 숨이 끊기는 순간 천국에 가리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한 그 엄청난 죄악에 대해서는 아무 의식 없이, 자신의 죽음을 순교로 혹은 희생 제물로 여기고, 이토록 대담하게 죽음의 길을 가다니, '참 대단한 사람이 다'라는 느낌도 들지만, '그의 신앙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라는 큰 질문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가 믿는 신은 과연 무엇을 가르치는 신이며, 그가 사랑하는 경전은 과연 무엇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가 외우는 기도문은 어떤 것이기에, 죽음의 문턱 앞에서조차 이렇게 철저한 자기 기만(self-deception)에 빠져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만일 사담 후세인이 기독교인이었다면, 그래서 그가 교수대 앞에 성경을 들고 나왔다면, 그리고는 자신을 순교자로 미화하면서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암 송하면서 처형을 당했다면, 그랬다면 저는 기독교를 버리고 싶을 만큼이나, 그와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교수대 앞에 나와 자신의 악행에 대해 깊이 뉘우치며, 자신으로 인해 고통 당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고, 자신의 죽음으로 그 상처가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다면, 백 번이라고 죽겠다는 말로 참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참회로 이끄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얼마나 진실하게 볼 수 있도록 해 주느냐, 바로 여기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참된지 아니면 거짓된지가 판가름 납니다. 그 종교가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얼마나 자기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해 주느냐, 바로 여기서, 한 종교가 얼마나 믿을만한지가 판가름 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담 후세인의 처형 사건은 정치적인 사건이기도 하지만 종교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가 처형 당하기 앞서 행한 행동은 이슬람교에게는 아주 큰 상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의 딸들은 아버지가 그토록 용감하게 처형 당하는 것을 보고 자랑스러워했다(They felt very proud as they saw their father facing his executioners so bravely)고 성명을 냈지만, 생각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슬람교는 큰 불명예를 얻은 셈입니다. 참된 종교는 자기 기만을 벗겨 주고 자신의 참 모습을 찾아가도록 돕는 것인데, 오히려 종교가 자기 기만을 강화시켜 준다면, 거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한 사람에게 신앙이 제대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참되게 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오는 동안에 자신에 대해 가졌던 많은 생각들이, 하나님을 대면하고 나서 산산이 깨어져 버립니다. 자신의 진상을 대면하고는, 기가막힌 착각 속에서 살아온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첫 단계는 대개 '회개'로 시작합니다.
회개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의 차원은 잘못 살아온 과거의 소행을 깨닫고 그것에 대해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존심의 근거로 삼았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괜찮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내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이 수치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겨우 겨우 지탱해 왔던 자존심이 모두 무너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절망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다른 차원은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 참된 희망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 절망으로부터 헤어나도록 부추겨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부정함을 보고, 그분의 선하심 앞에서 자신의 악함을 보고, 그분의 정결하심 앞에서 자신의 불결함을 보고, 그분의 아름다우심 앞에서 자신의 추함을 보고, 그리고 그분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자신의 불완전한 사랑을 보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하나님을 향해 은총을 구한다면, 그분은 우리를 일으켜 주셔서 새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서서히 자신에 대해 새로운 희망을 추스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거치고 나면, 자신 자신이 얼마나 쉽게 속을 수 있는지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앙 생활의 중심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데로 모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하든, 말씀을 읽든, 찬양을 하든, 봉사를 하든, 언제나 자신을 돌아 보며, 혹시나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시나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시나 내 판단이 그릇된 것은 아닌지, 혹시나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혹시나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지, 혹시나 내 말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시나 내가 봉사하는 것이 내 자신의 줄거움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닌지, 혹시나 내가 헌신이라고 하는 것이 내 욕심은 아닌지, 혹시나 내 기도가 홀로의 독백이나 넋두리는 아닌지, 혹시나 내 예배가 우상 숭배는 아닌지, 자기 자신을 세밀하게 성찰하는 데 영적 생활의 초점이 모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삼가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우리라고 해서 사담 후세인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4.
올 해에도 지난 해처럼, 첫 몇 주일 동안 '새 해에 주신 말씀'이라는 주제 하에, 새 해 맞이 새벽기도회에서 나눈 말씀 중, 한 해 동안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삶의 지침으로 삼을만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작년에는 에스겔서를 읽었는데, 이번에는 데살로니가후서와 디모데전서를 읽었습니다. 두 주일 동안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는 동안, 누구보다도 저 자신에게 가장 많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말씀으로서,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오는 바울의 자기 고백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도 바울과 사담 후세인이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 바울 사도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아주 심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 서, 13절에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라고 고백 합니다. 15절에 가서는,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지은 죄로 따지면 자신이 가장 죄를 많이 지은 사람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에도 이와 비슷한 고백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만나주신 사람들의 명단을 열거하면서, 바울 사도는 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절과 9절입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친 자기 비하처럼 느껴질만큼, 바울은 자신의 과거 잘못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와 소명과 능력이 자신에게는 벅찬 것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바울 사도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고전 15:10)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읽은 디모데전서에서는,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13절)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14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바울 사도는 15절과 16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같은 사람을 용서해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소명을 주시며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모두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죄인입니까? 저 같은 사람도 용서 받았습니다. 당신에게는 믿음이 없습니까? 저같은 사람에게도 믿음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당신에게는 능력이 없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느끼십니까? 저같은 사람도 부름을 받고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저를 보고 희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께서 저를 사도로 쓰시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분 모두에게 희망의 증거입니다!"
5.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그 바울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실제로 대면하기 전까지는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오늘 함께 읽은 빌립보서 3장을 보면, 같은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이토록 다른 말이 나올 수 있을지 이해되지 의아스러울만큼, 바울은 자신에 대해 자랑스러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세속적으로 자 랑하고자 한다면 자신에게도 자랑할 것이 많이 있다고 운을 뗀 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말은 유대교인 남자로서 흠이 없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 중 '베냐민 지파'는, 우리로 따지면 왕족에 속합니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을 이어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라는 말은 당시로서 가장 열심이 강했던 교파에 속했다는 말입니다.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율법에 대해 열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 열심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말살시키려고 애썼다는 뜻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다'는 말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따지면 자기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혈통으로 보나, 가문으로 따지나, 교육으로 보나, 소속된 종파로 보나, 종교적 열심으로 보나, 성취한 업적으로 보나, 자랑할 것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어떻게,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을까요? 이토록 자기 자신에 대해 자랑할 거리가 많았던 바울이, 어떻게 해서 나중에는 "나는 달이 차지 못해서 난 사람같이 부족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에 대해 자부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처형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부단히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회개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바울이 우상 하나님을 믿지 않고 참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참된 모습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고 자신의 죄성에 대해 몸을 떨며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동안 붙들고 있었던 모든 것들, 모든 자랑거리를 내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듭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고백합니다. 13절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라고 말하고, 14절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라고 말합니다. 또한 16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한 없는 자비에 감격하면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7절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 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힘입어 바울 사도는 헛된 자랑과 자만심을 내려놓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랑을 얻고 새로운 자존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헛된 것에 속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참되게 살기 위해 늘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그랬기에, 사담 후쎄인처럼, 이교도들을 처형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악행을 일삼던 바울이, 마침내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바쳐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6.
사담 후세인인가, 아니면 사도 바울인가? 이것은 새 해를 신앙적으로 맞이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원하는 분들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한 번도 깨어져 본 적이 없으면, 우리는 사담처럼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혹시나 속고 있는 것이 없나를 끊임 없이 살피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대로 눈 질끈 감고 행동하다 보면, 우리는 사담처럼 되기 쉽습니다. 내가 배운 진리의 말씀으로 나 자신을 비추어 보고, 스스로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지속적으로 다시 지어지지 않으면, 그리고 자신이 배운 진리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재판하려는 유혹에 이끌리면, 우리는 필경 사담처럼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생각 있는 사람들에게 조소 거리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랑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바울이 말한 것처럼, '배설물처럼 여기고' 내려 놓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서서, 성령께서 주시는 회개의 은총(convicting grace)을 힘 입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나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을 내려 놓기를 원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절망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존재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릅꿇을 때마다 하 나님의 은총을 힘 입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날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며, 날로 더 투명해지고, 날로 더 맑아지고, 날로 더 진실해지기를 원합니다.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으면서도 자신을 순교자로 여기고, 천국에 갈 것을 꿈 꾸며, 죽음의 문턱을 향해 나간 사담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희생하여 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고 수줍게 고백한 사도 바울-바로 그분을 닮고 싶습니다. 사담의 경우처럼, 저의 죽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 사람이 믿는 신이라면 나는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저의 죽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 사람이 믿은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고 싶다'고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죽으려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일생동안 살아온 그 방식이 그 사람의 죽음을 결정합니다. 사담 후쎄인은 진실로, 69년 동안 살아온 그 모습 그대로 죽었습니다. 바울은, 비록 젊은 시절 30여년은 잘 못 살았지만, 나머지 인생은 진실되게, 참되게, 선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도 역시 네로 황제의 잔혹한 처형으로 인해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살아, 이렇게 죽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기를 즐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 자주 선다 해도,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내려 놓고 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명령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명령을 받을 분이 아니므로, 우리는 결국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맙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그분의 은총에 우리를 맡기고, 주님께서 비추어 주시는 말씀의 빛으로 우리 자신을 비추고, 그 빛의 광선으로 우리 자신을 소독하고 치료할 때, 우리는 비로소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해 갈 것입니다.
7.
이것이 새 해에 받은 첫 번째 말씀입니다. 사담이 될 것인가, 사도 바울이 될 것인가? 자기 기만의 종교인이 될 것이냐, 자기 성찰의 종교인이 될 것이냐? 오도된 종교 생활을 통해 병든 자아를 키워가는 신앙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영성 생활을 통해 병든 자아를 치유하고 참된 자아를 키워가는 신앙인이 될 것인가? 이 중요한 선택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 모두, "지금의 내가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영성 목회를 통해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하여 속 사람이 날로 성장하고 겉 사람이 날로 약해져 가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고난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이 높여지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
진실하기 원합니다.
참되기 원합니다.
거짓 자아를 내려놓기 원합니다.
속아서 살기 원치 않습니다.
저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님 안에서 참된 자아를 찾게 하시고
주님의 자비로써
늘 새로 지어지게 하소서.
새 해에는
주님의 말씀의 빛으로 저희 자신을 비추어 보는
자기 성찰의 길에
견고히 서게 하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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