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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절여진 배추처럼" (Like Cabbage Completely Salted)"
디모데전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375 추천 수 0 2011.04.30 23:51:29성경본문 : | 딤전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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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7. 1. 28
새해에 받은 말씀 3;
"푹 절여진 배추처럼" (Like Cabbage Completely Salted)"
디모데전서 3:1-7;마태복음 5:13
1.
저희가 경험하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감독'이라는 말은 듣기 어색한 면이 있습니다. 절대 권력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독이라는 말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조직을 한 번 살펴 보십시오. 영화 감독, 스포츠 팀의 감독 혹은 음악 감독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분야에서 감독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집니다. 그 사람의 말이 곧 법이 됩니다. 그 사람이 '아웃'(Out!)하면, 그 즉시로 빠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감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의 뜻으로 그 본문의 뜻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에 나오는 '감독'이라는 말을, 절대 권력을 가진 지위를 가리키는 말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이 말은 그런 절대 권력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오늘날 연합감리교회의 감독과 같은, 수 백개의 교회를 치리하는, 대단히 높은 지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천주교나 정교회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미사를 집전하는 고위 성직자를 가리키는 말도 아닙니다.
신약성경이 쓰여질 당시의 교회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달랐습니다. 별도의 예배당을 가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대개의 교회는 집에서 모였습니다. 당시 로마 도시의 집들의 규모를 고려해 볼 때, 많아야 오십 명 정도 모였을 것입니다. 에베소같은 큰 도시에는 그렇게 모이는 가정 교회가 여럿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 도시에 흩어져 있는 여러 교회들을 돌아보도록 위임받은 사람이 감독입니다.
이 사람은 직업 성직자가 아닙니다. 자기의 생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평신도였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과 은사 때문에, 한 지역의 여러 교회들을 돌보도록 세움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생업과 가정을 돌보면서도, 주님께 대한 사랑과 교회에 대한 사랑에 이끌려, 먼 거리를 다니면서 교회를 돌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감독이 됨으로써 얻을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희생할 것이 더 많았습니다.
2.
이렇게 본다면,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감독의 자격'은 고위 성직자의 자격도 아니고, 목회자만을 위한 자격 지침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 람이라면 누구나 꿈 꾸어야 할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맡고 싶어하면, 그는 훌륭한 일을 바란다고 하겠습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잘못하면, 이민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로직에 대한 욕망'이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로직을 꿈꾸며 그 직분을 얻기 위해 이런 저런 술수를 쓰는 것까지 합리화시키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맡고 싶어하면, 그는 훌륭한 일을 바란다고 하겠습니다"라는 말씀의 뜻은, 감독으로 세움을 받을 정도로 믿음과 인격과 삶이 성숙하게 되기를 힘쓰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바라고 힘쓰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한 지역의 여러 교회들을 돌볼 수 있을 만큼 모든 면에서 성숙하기를 힘쓰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감독이 되기 위해 정치를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감독이 되기 위해 사도들을 찾아가 환심을 사기 위해 힘쓰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감독 후보로 고려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성숙해지기를 힘쓰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말한 다음,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모두 꿈꿀만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이 본문의 제목을 '감독의 자격'이라고 했지만, 적당한 제목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바울이 여기에서 제시한 조건들을 바탕으로 한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려 한다면, 여러 가지 난관을 겪게 될 것입니다.
2절만 생각해 봅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일곱 가지 조건이 나오는데, 사실 '조건'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적당한 것은 '한 아내의 남편이며'와 '나그네를 대접하며'와 '가르치기를 잘하며' 밖에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누구든지 판단하여 합격, 불합격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네 가지는 조건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여쭙겠습니다. 제게 절제력이 있어 보입니까, 절제력이 없어 보입니까? 어떤 분은 제가 고도의 절제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이고, 어떤 분은 절제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집니다.
또 여쭙니다. 제가 단정합니까, 단정치 못합니까? 제 어릴 적, 제 어머님께서 제게 붙여주신 별명이 '겜말 할아베'였습니다. 이 말의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는데, 제 바지춤이 늘 엉덩이 중간쯤까지 내려와 있었기 때문에 붙여주신 것입니다. 제가 이 별명을 얻은 이유는 제가 단정치 못한 데도 있었지만, 당시 고무줄의 질이 형편 없었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한 번 삶아 빨고 나면 고무줄이 탄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주 바지춤을 올려도 어느새 흘러 내렸습니다. 아버지께서 쓰다 버린 넥타이로 동여매도 또 흘러내렸습니다. 넥타이가 미끄러워서 아무리 힘껏 동여매도 얼마 후면 다시 느슨해졌습니다. 그 때는 참 단정치 못했습니다. 이제는 고무줄의 질도 좋아졌고, 혁대의 질도 좋아졌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겜말 할아베가 아닙니다. 꽤 단정해지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단정함'의 기준이 높으신 분에게는 제가 여전히 단정치 못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나열된 덕목들은, 어떤 사람을 감독으로 세울 때 이 항목들을 보고 합격, 불합격을 판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항목들을 통해 믿는 사람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고, 그 모습에 이를 수 있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감독으로 이미 세움을 받은 사람들은 이 항목들을 보고, 자신에게 부족한 면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그 부분에서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도록 힘쓰라는 말입니다. 감독의 직분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명예와 감투를 생각하고 감독직을 꿈꾸지 말고, 믿는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그리하여 사람들로부터 감독의 후보자로 거론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저보고 이 본문에 제목을 붙이라고 한다면, '감독으로 부름받기에 합당한 성숙한 믿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3.
바울은 여기서 열 다섯 가지의 덕목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더 나열하자면 더 할 수 있었지만, 중요한 것들만을 나열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열 다섯 가지 덕목을 읽고 보면, 하나씩 곰곰히 생각하며 읽고,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해 본다면,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자신만을 말하자면, 저는 이 목록을 읽을 때마다 스스로 자격 미달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열 다섯 가지 중에서 잘 하고 있는 면도 있습니다. 가령, '한 아내의 남편이며'라는 조건은 잘 지키고 있습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라는 조건도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 세 가지 조건에 대해서는 두렵고 떨릴 따름입니다. 정말 좋은 목사가 되고 싶은데, 정말 인정받는 영적 지도자로 서고 싶은데, 정말 모든 점에서 흠 없이 행하고 싶은데, 돌아서고 보면 제 발걸음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이 본문 앞에서, 저는, 저 자신에게는 해결책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저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비정한 현실과 거룩한 영성 사이에서 춤을 추다가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제가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은 제게, "너는 자격 미달이다. 그 부족함을 채울 길은 무릎 꿇는 길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들려 줍니다.
이것은 다른 직분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집사로 세움을 받았든, 권사로 세움을 받았든, 혹은 장로로 세움을 받았든, 아니면 아무 직분이 없는 분이든, 여러분 각자도 이 본문을 읽으면서, "당신은 자 격 미달입니다. 그러니 더욱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십시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반대로, "당신은 충분한 자격자입니다. 그러니 한 번 멋지게 해 보십시오"라는 음성을 듣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들려주는 음성이 아니라 미혹하는 영의 음성입니다.
4.
이 본문을 읽으면서 깨닫는 또 다른,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열 다섯 가지 덕목들을 살펴 보십시다. 그 덕목들이 얼마나 다양하며 포괄적인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 개인적인 성품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둘째, 가정 생활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하며, 언제나 위엄을 가지고 자녀들을 순종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셋째,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나그네를 잘 대접하고, 난폭하지 않고 너그러우며, 다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넷째,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그 사람의 취미 생활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술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그 사람의 윤리적인 차원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고,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교회 생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교회의 일원이 되어 신앙 생활을 시작한 후 충분한 시간이 지났어야 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엇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로 따지면, 직장 생활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직장이 없었기 때문에 언급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 사도는 모든 덕목을 여기에 나열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덕목들만을 나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들어가야 할 것이 빠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덕목을 자세히 살피고 나서 놀라게 되는 점은, 성숙한 신앙은 우리 삶의 모든 면에 신앙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신앙의 전부가 아니라는 진리입니다. 기도할 때, 예배 드릴 때, 말씀을 읽을 때 어떻게 하느냐로 신앙의 성숙도가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입니다.
진실로 성숙된 신앙은 그 사람의 성품에, 가정 생활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직장 생활에, 돈을 취급하는 태도에, 그리고 심지어 그 사람의 취미 생활에까지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배추를 절일 때, 소금을 골고루 뿌려야 하는 것처럼, 혹은 누룩이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서 반죽 전체에 퍼져 나가야 하는 것처럼, 혹은 음식의 양념이 모든 재료에 골고루 퍼져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나누는 우리의 사귐의 깊이가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 성숙한 영성입니다.
5.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우리 삶의 일부분에만 침투하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일부분에서는 정말 신앙이 좋은 것 같은데, 나머지 부분에서는 신앙의 맛이 전혀 배이지 않아서, 그로 인해서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점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문제를 거론한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 모 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의 심각성을 감안해, 한 가지 예를 들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알고 지내던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몇 년 전, 그 가족의 어르신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참석했었습니다. 그 어르신은 일찍 상처한 다음, 오랫 동안 홀로 살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성경에 대해 해박하셨습니다. 늘 기도하는 분이었고, 시간만 있으면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그분이 다니던 교회 분들은 모두 그분을 성자에 가까운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분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자녀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고인의 돈독한 신앙에 비해, 그 자녀들께서는 신앙 생활에 그다지 열심을 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돈독한 신앙이 자연히 대물림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자녀쯤은 돈독한 믿음의 사람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있다가, 자녀분들 가운데 제가 가장 가까이 지내던 분에게 여쭈었습니다. "왜, 아버님의 신앙이 자녀분들에게 이어지지 못했을까요?"
저는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했는데, 그분은 아주 유쾌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아버님이, 교회에서 하시는 행동과 집에서 하시는 행동이 너무 달랐어요. 하나, 예를 들까요? 아버님이 우리 집에서 자녀들과 함께 식사를 하실 때면, 아이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식사 기도를 하세요. 그러고는 눈을 뜨고 젖가락을 들자 마자 반찬 투정을 시작하세요. 도대체, 그 긴 기도는 뭐고, 반찬 투정은 뭐냐고요?"
지난 주, 저는 그분에게 전화를 드려 이 이야기를 설교에서 나누어도 되겠느냐고 묻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고인을 불명예스럽게 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래도 그 분만한 신앙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굳이 흠을 잡으려니, 그런 흠이 잡힌 것이겠지요. 혹은 아버님의 신앙을 본받지 못했다는 허물을 어떻게든 피해보고 싶어서 둘러댄 핑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녀분이 든 이 예가 주는 교훈은 분명히 있습니다. 신앙의 영향이 반찬 투정에까지 스며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반찬이 입에 맞지 않아도 의견을 말하지 말라는 뜻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웬만하면 그렇게 하는 게 좋습니다. 물론, 반찬이 정 입에 맞지 않으면 의견을 내는 것은 정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걸 먹으라고 한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미안하지만, 내 입에는 좀 짠 거 같네."라고 말하는 것은 큰 차 이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어떻게 표현해야 덕이 되는지를 고민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 가정에서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다른 가족들을 종처럼 부린다는 것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 언제나 자기 편의대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해 보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 직장에서 상사를 속이거나 부하를 괴롭힌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침에는 동료 직원에게 전도하고는 퇴근할 무렵에는 물 좋은 술집이 어디냐고 묻는다는 것은, 크게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6.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 5: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맙시다. 이 말씀을 듣고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짠 맛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짠 맛이 우리 삶 속에 속속들이 배어 들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마 5:13). 주님의 말씀은 이런 겁니다. 네 안에 짠 맛이 어떤지를 삼가 점검하라!
짠 맛을 잃어 밖에 내버려진 소금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아무 데도 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믿는 사람이 '버려진 소금'처럼 되는 것은, 짠 맛이 하나도 없어서가 아니라, 한 두 군데, 짠 맛이 배어들지 못한 곳 때문에 그럴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작년, 백악관의 가장 높은 참모 중 한 사람이 백화점 타겟(Target)에서 5천 달러 상당의 절도를 범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일이 있습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혹은 행정가로서 앞날이 촉망되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스스로 'born-again Christian'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던 보수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정상적으로 받는 연봉만 해도 16만 달러가 넘는 그 사람은, 짠 맛이 배어들지 않은 불과 1% 정도의 영역 때문에 이렇게 수치스러운 추락을 했습니다.
또한, 복음주의 기독교 진영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던 한 목회자가 작년에 수치스러운 추락을 했습니다. 시사 주간지 Times에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 목회자 중 한 사람으로 꼽았던 그분은 짠 맛이 배어들지 않은 불과 1%도 안 되는 영역 때문에 이렇게 추락했습니다. 그분의 인격과 신앙과 학식과 지도력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아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분의 신앙은 그분의 삶의 전 영역에 잘 스며들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의 마음에 숨겨진 부정한 욕망 하나에만 그것이 스며들지 못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맛 잃은 소금'으로 취급당하여 밖에 버려졌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취급했습니까? "바깥에 내버려져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해야 했습니다. 끌로드 앨런(Claude Allen) 보좌관이나 탐 해거드(Tom Haggard) 목사는 그렇게 내버려질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말 아까워도 너무 아깝습니다. 그들을 100% 부정하고 짓밟는 여론이 참 안타깝습니다. 그것이 사회 현실입니다. 그러니, 99% 짠 맛이 배었다고 해서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마지막 1%까지도 채워야 합니다.
누구에게든, 이같은 '영적인 아킬레스건'이 있게 마련입니다. 나의 영적인 아킬레스건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성적인 욕망을 다루는 일에 소금이 쳐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한 욕망에 소금이 쳐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화를 다루는 일에 짠 맛이 배어들지 않아서,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짜릿한 스릴을 탐하는 마음에 소금이 쳐지지 않아서, 도박 혹은 도벽에 빠져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비정한 수법을 사용하는 것에 신앙의 짠맛이 전혀 스며들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정을 제가 다 나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러분들 중, 저까지 포함하여, 한 분도 예외 없이, 영적인 아킬레스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해결받지 않으면, 내 존재의 99%가 소금에 푹 절여져 있다 해도, 나머지 1% 때문에 바깥에 버려져 짓밟힐 수 있습니다.
7.
어떤 사람에게는 영적인 아킬레스건이 하나뿐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러 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존재 속에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 짠 맛이 골고루 스며들게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가장 취약한 부분, 가장 절여지지 않은 부분을 주님 앞에 내어 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짠 맛이 스며들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로써 인정하십시오. "오, 하나님! 내 돈 씀씀이에 짠 맛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내놓습니다. 성령의 소금으로 절여 주소서." "오, 하나님! 내 욕망에 짠 맛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 제어할 수 없는 내 욕망을 내어 놓습니다. 성령의 소금으로 절여 주소서." "오, 하나님! 내 입술에 짠 맛이 없습니다. 성령의 소금으로 절여 주소서." 이렇게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그것이 성령의 소금에 푹 절여질 때까지 맡기고 기다리십시오.
저는 저의 체험을 바탕으로 여러분에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 가장 취약한 부분, 가장 다루기 힘든 부분, 가장 자주 넘어지는 부분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부분을 다스려주시기를 끊임 없이 구하다 보면, 어느 새 그 부분이 소금으로 푹 절여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지치지 말고 강청해야 하는 기도는 이런 기도입니다. 내 속에 있는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우리는 끊임 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소위 '견고한 진'은 하나씩 하나씩 점령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맛보게 되는 해방감이 얼마나 큰지요! 그것은 그 죄를 즐기면서 얻는 쾌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영성은 성숙되어 갑니다.
아,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영적으로 성숙해져 간다면, 말입니다. 아,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모두가 우리 교회의 영성 목회를 통해 이토록 아름다운 영적 성숙에 이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지금, 속회를 재조정하면서 많은 속회 지도자들이 필요한데, 작은 목회를 섬기기에 충분해 보이는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 가득 차고 넘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하여 더 많은 성도들이 성숙한 영성에 이르러,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짠 맛이 스며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 교회가 필요하고,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기 위해 목회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더욱 더 푹 절여지도록 힘쓰십시다. 우리가 할 일은 소금이신 주님의 영에게 우리 전체를 드리고 그분께 맡기는 일입니다. 그러면 소금이 알아서 우리 존재 속에 그리고 우리 삶 속에 스며들 것입니다. 그 소금은, 우리 안에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빠져 나가게 하여, 우리를 선한 일에 쓰임받기에 합당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어느 것도 감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우리 전체를 열어 그분께 맡기면 됩니다. 한 번 그렇게 하 는 것이 아니라, 자주, 지속적으로, 끊임 없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온통, 푹 절여진 배추가 되어, 주님의 손에 들려, 맛있는 김치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을 꿈 꾸는 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훌륭한 일을 바란다고 하겠습니다." 이 휼륭한 일을 꿈꾸며 항상 기도에 힘써, '짠 맛이 진한 성도들', '푹 절여진 성도들'이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님,
저희가 자격 미달임을 압니다.
주님의 소금이 군데 군데 몰려 있어서
소금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
썩은 냄새가 풍겨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제 저희 전부를 주님께 엽니다.
속속들이 그리고 깊이 스며들어 주소서.
주님의 영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도록
저희의 빗장을 풀어 주시고
깊이 깊이 침투하여 주소서.
주님께 쓰임받기 좋도록
저희를 만들어 주소서.
아멘.
새해에 받은 말씀 3;
"푹 절여진 배추처럼" (Like Cabbage Completely Salted)"
디모데전서 3:1-7;마태복음 5:13
1.
저희가 경험하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감독'이라는 말은 듣기 어색한 면이 있습니다. 절대 권력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독이라는 말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조직을 한 번 살펴 보십시오. 영화 감독, 스포츠 팀의 감독 혹은 음악 감독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분야에서 감독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집니다. 그 사람의 말이 곧 법이 됩니다. 그 사람이 '아웃'(Out!)하면, 그 즉시로 빠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감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의 뜻으로 그 본문의 뜻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에 나오는 '감독'이라는 말을, 절대 권력을 가진 지위를 가리키는 말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이 말은 그런 절대 권력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오늘날 연합감리교회의 감독과 같은, 수 백개의 교회를 치리하는, 대단히 높은 지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천주교나 정교회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미사를 집전하는 고위 성직자를 가리키는 말도 아닙니다.
신약성경이 쓰여질 당시의 교회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달랐습니다. 별도의 예배당을 가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대개의 교회는 집에서 모였습니다. 당시 로마 도시의 집들의 규모를 고려해 볼 때, 많아야 오십 명 정도 모였을 것입니다. 에베소같은 큰 도시에는 그렇게 모이는 가정 교회가 여럿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 도시에 흩어져 있는 여러 교회들을 돌아보도록 위임받은 사람이 감독입니다.
이 사람은 직업 성직자가 아닙니다. 자기의 생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평신도였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과 은사 때문에, 한 지역의 여러 교회들을 돌보도록 세움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생업과 가정을 돌보면서도, 주님께 대한 사랑과 교회에 대한 사랑에 이끌려, 먼 거리를 다니면서 교회를 돌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감독이 됨으로써 얻을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희생할 것이 더 많았습니다.
2.
이렇게 본다면,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감독의 자격'은 고위 성직자의 자격도 아니고, 목회자만을 위한 자격 지침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 람이라면 누구나 꿈 꾸어야 할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맡고 싶어하면, 그는 훌륭한 일을 바란다고 하겠습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잘못하면, 이민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로직에 대한 욕망'이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로직을 꿈꾸며 그 직분을 얻기 위해 이런 저런 술수를 쓰는 것까지 합리화시키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맡고 싶어하면, 그는 훌륭한 일을 바란다고 하겠습니다"라는 말씀의 뜻은, 감독으로 세움을 받을 정도로 믿음과 인격과 삶이 성숙하게 되기를 힘쓰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바라고 힘쓰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한 지역의 여러 교회들을 돌볼 수 있을 만큼 모든 면에서 성숙하기를 힘쓰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감독이 되기 위해 정치를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감독이 되기 위해 사도들을 찾아가 환심을 사기 위해 힘쓰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감독 후보로 고려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성숙해지기를 힘쓰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말한 다음,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모두 꿈꿀만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이 본문의 제목을 '감독의 자격'이라고 했지만, 적당한 제목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바울이 여기에서 제시한 조건들을 바탕으로 한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려 한다면, 여러 가지 난관을 겪게 될 것입니다.
2절만 생각해 봅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일곱 가지 조건이 나오는데, 사실 '조건'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적당한 것은 '한 아내의 남편이며'와 '나그네를 대접하며'와 '가르치기를 잘하며' 밖에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누구든지 판단하여 합격, 불합격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네 가지는 조건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여쭙겠습니다. 제게 절제력이 있어 보입니까, 절제력이 없어 보입니까? 어떤 분은 제가 고도의 절제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이고, 어떤 분은 절제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집니다.
또 여쭙니다. 제가 단정합니까, 단정치 못합니까? 제 어릴 적, 제 어머님께서 제게 붙여주신 별명이 '겜말 할아베'였습니다. 이 말의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는데, 제 바지춤이 늘 엉덩이 중간쯤까지 내려와 있었기 때문에 붙여주신 것입니다. 제가 이 별명을 얻은 이유는 제가 단정치 못한 데도 있었지만, 당시 고무줄의 질이 형편 없었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한 번 삶아 빨고 나면 고무줄이 탄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주 바지춤을 올려도 어느새 흘러 내렸습니다. 아버지께서 쓰다 버린 넥타이로 동여매도 또 흘러내렸습니다. 넥타이가 미끄러워서 아무리 힘껏 동여매도 얼마 후면 다시 느슨해졌습니다. 그 때는 참 단정치 못했습니다. 이제는 고무줄의 질도 좋아졌고, 혁대의 질도 좋아졌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겜말 할아베가 아닙니다. 꽤 단정해지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단정함'의 기준이 높으신 분에게는 제가 여전히 단정치 못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나열된 덕목들은, 어떤 사람을 감독으로 세울 때 이 항목들을 보고 합격, 불합격을 판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항목들을 통해 믿는 사람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고, 그 모습에 이를 수 있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감독으로 이미 세움을 받은 사람들은 이 항목들을 보고, 자신에게 부족한 면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그 부분에서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도록 힘쓰라는 말입니다. 감독의 직분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명예와 감투를 생각하고 감독직을 꿈꾸지 말고, 믿는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그리하여 사람들로부터 감독의 후보자로 거론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저보고 이 본문에 제목을 붙이라고 한다면, '감독으로 부름받기에 합당한 성숙한 믿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3.
바울은 여기서 열 다섯 가지의 덕목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더 나열하자면 더 할 수 있었지만, 중요한 것들만을 나열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열 다섯 가지 덕목을 읽고 보면, 하나씩 곰곰히 생각하며 읽고,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해 본다면,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자신만을 말하자면, 저는 이 목록을 읽을 때마다 스스로 자격 미달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열 다섯 가지 중에서 잘 하고 있는 면도 있습니다. 가령, '한 아내의 남편이며'라는 조건은 잘 지키고 있습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라는 조건도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 세 가지 조건에 대해서는 두렵고 떨릴 따름입니다. 정말 좋은 목사가 되고 싶은데, 정말 인정받는 영적 지도자로 서고 싶은데, 정말 모든 점에서 흠 없이 행하고 싶은데, 돌아서고 보면 제 발걸음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이 본문 앞에서, 저는, 저 자신에게는 해결책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저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비정한 현실과 거룩한 영성 사이에서 춤을 추다가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제가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은 제게, "너는 자격 미달이다. 그 부족함을 채울 길은 무릎 꿇는 길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들려 줍니다.
이것은 다른 직분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집사로 세움을 받았든, 권사로 세움을 받았든, 혹은 장로로 세움을 받았든, 아니면 아무 직분이 없는 분이든, 여러분 각자도 이 본문을 읽으면서, "당신은 자 격 미달입니다. 그러니 더욱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십시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반대로, "당신은 충분한 자격자입니다. 그러니 한 번 멋지게 해 보십시오"라는 음성을 듣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들려주는 음성이 아니라 미혹하는 영의 음성입니다.
4.
이 본문을 읽으면서 깨닫는 또 다른,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열 다섯 가지 덕목들을 살펴 보십시다. 그 덕목들이 얼마나 다양하며 포괄적인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 개인적인 성품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둘째, 가정 생활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하며, 언제나 위엄을 가지고 자녀들을 순종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셋째,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나그네를 잘 대접하고, 난폭하지 않고 너그러우며, 다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넷째,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그 사람의 취미 생활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술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그 사람의 윤리적인 차원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고,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교회 생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교회의 일원이 되어 신앙 생활을 시작한 후 충분한 시간이 지났어야 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엇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로 따지면, 직장 생활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직장이 없었기 때문에 언급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 사도는 모든 덕목을 여기에 나열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덕목들만을 나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들어가야 할 것이 빠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덕목을 자세히 살피고 나서 놀라게 되는 점은, 성숙한 신앙은 우리 삶의 모든 면에 신앙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신앙의 전부가 아니라는 진리입니다. 기도할 때, 예배 드릴 때, 말씀을 읽을 때 어떻게 하느냐로 신앙의 성숙도가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입니다.
진실로 성숙된 신앙은 그 사람의 성품에, 가정 생활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직장 생활에, 돈을 취급하는 태도에, 그리고 심지어 그 사람의 취미 생활에까지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배추를 절일 때, 소금을 골고루 뿌려야 하는 것처럼, 혹은 누룩이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서 반죽 전체에 퍼져 나가야 하는 것처럼, 혹은 음식의 양념이 모든 재료에 골고루 퍼져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나누는 우리의 사귐의 깊이가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 성숙한 영성입니다.
5.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우리 삶의 일부분에만 침투하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일부분에서는 정말 신앙이 좋은 것 같은데, 나머지 부분에서는 신앙의 맛이 전혀 배이지 않아서, 그로 인해서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점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문제를 거론한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 모 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의 심각성을 감안해, 한 가지 예를 들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알고 지내던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몇 년 전, 그 가족의 어르신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참석했었습니다. 그 어르신은 일찍 상처한 다음, 오랫 동안 홀로 살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성경에 대해 해박하셨습니다. 늘 기도하는 분이었고, 시간만 있으면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그분이 다니던 교회 분들은 모두 그분을 성자에 가까운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분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자녀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고인의 돈독한 신앙에 비해, 그 자녀들께서는 신앙 생활에 그다지 열심을 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돈독한 신앙이 자연히 대물림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자녀쯤은 돈독한 믿음의 사람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있다가, 자녀분들 가운데 제가 가장 가까이 지내던 분에게 여쭈었습니다. "왜, 아버님의 신앙이 자녀분들에게 이어지지 못했을까요?"
저는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했는데, 그분은 아주 유쾌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아버님이, 교회에서 하시는 행동과 집에서 하시는 행동이 너무 달랐어요. 하나, 예를 들까요? 아버님이 우리 집에서 자녀들과 함께 식사를 하실 때면, 아이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식사 기도를 하세요. 그러고는 눈을 뜨고 젖가락을 들자 마자 반찬 투정을 시작하세요. 도대체, 그 긴 기도는 뭐고, 반찬 투정은 뭐냐고요?"
지난 주, 저는 그분에게 전화를 드려 이 이야기를 설교에서 나누어도 되겠느냐고 묻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고인을 불명예스럽게 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래도 그 분만한 신앙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굳이 흠을 잡으려니, 그런 흠이 잡힌 것이겠지요. 혹은 아버님의 신앙을 본받지 못했다는 허물을 어떻게든 피해보고 싶어서 둘러댄 핑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녀분이 든 이 예가 주는 교훈은 분명히 있습니다. 신앙의 영향이 반찬 투정에까지 스며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반찬이 입에 맞지 않아도 의견을 말하지 말라는 뜻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웬만하면 그렇게 하는 게 좋습니다. 물론, 반찬이 정 입에 맞지 않으면 의견을 내는 것은 정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걸 먹으라고 한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미안하지만, 내 입에는 좀 짠 거 같네."라고 말하는 것은 큰 차 이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어떻게 표현해야 덕이 되는지를 고민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 가정에서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다른 가족들을 종처럼 부린다는 것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 언제나 자기 편의대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해 보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이 직장에서 상사를 속이거나 부하를 괴롭힌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침에는 동료 직원에게 전도하고는 퇴근할 무렵에는 물 좋은 술집이 어디냐고 묻는다는 것은, 크게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6.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 5: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맙시다. 이 말씀을 듣고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짠 맛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짠 맛이 우리 삶 속에 속속들이 배어 들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마 5:13). 주님의 말씀은 이런 겁니다. 네 안에 짠 맛이 어떤지를 삼가 점검하라!
짠 맛을 잃어 밖에 내버려진 소금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아무 데도 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믿는 사람이 '버려진 소금'처럼 되는 것은, 짠 맛이 하나도 없어서가 아니라, 한 두 군데, 짠 맛이 배어들지 못한 곳 때문에 그럴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작년, 백악관의 가장 높은 참모 중 한 사람이 백화점 타겟(Target)에서 5천 달러 상당의 절도를 범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일이 있습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혹은 행정가로서 앞날이 촉망되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스스로 'born-again Christian'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던 보수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정상적으로 받는 연봉만 해도 16만 달러가 넘는 그 사람은, 짠 맛이 배어들지 않은 불과 1% 정도의 영역 때문에 이렇게 수치스러운 추락을 했습니다.
또한, 복음주의 기독교 진영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던 한 목회자가 작년에 수치스러운 추락을 했습니다. 시사 주간지 Times에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 목회자 중 한 사람으로 꼽았던 그분은 짠 맛이 배어들지 않은 불과 1%도 안 되는 영역 때문에 이렇게 추락했습니다. 그분의 인격과 신앙과 학식과 지도력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아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분의 신앙은 그분의 삶의 전 영역에 잘 스며들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의 마음에 숨겨진 부정한 욕망 하나에만 그것이 스며들지 못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맛 잃은 소금'으로 취급당하여 밖에 버려졌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취급했습니까? "바깥에 내버려져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해야 했습니다. 끌로드 앨런(Claude Allen) 보좌관이나 탐 해거드(Tom Haggard) 목사는 그렇게 내버려질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말 아까워도 너무 아깝습니다. 그들을 100% 부정하고 짓밟는 여론이 참 안타깝습니다. 그것이 사회 현실입니다. 그러니, 99% 짠 맛이 배었다고 해서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마지막 1%까지도 채워야 합니다.
누구에게든, 이같은 '영적인 아킬레스건'이 있게 마련입니다. 나의 영적인 아킬레스건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성적인 욕망을 다루는 일에 소금이 쳐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한 욕망에 소금이 쳐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화를 다루는 일에 짠 맛이 배어들지 않아서,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짜릿한 스릴을 탐하는 마음에 소금이 쳐지지 않아서, 도박 혹은 도벽에 빠져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비정한 수법을 사용하는 것에 신앙의 짠맛이 전혀 스며들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정을 제가 다 나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러분들 중, 저까지 포함하여, 한 분도 예외 없이, 영적인 아킬레스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해결받지 않으면, 내 존재의 99%가 소금에 푹 절여져 있다 해도, 나머지 1% 때문에 바깥에 버려져 짓밟힐 수 있습니다.
7.
어떤 사람에게는 영적인 아킬레스건이 하나뿐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러 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존재 속에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 짠 맛이 골고루 스며들게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가장 취약한 부분, 가장 절여지지 않은 부분을 주님 앞에 내어 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짠 맛이 스며들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로써 인정하십시오. "오, 하나님! 내 돈 씀씀이에 짠 맛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내놓습니다. 성령의 소금으로 절여 주소서." "오, 하나님! 내 욕망에 짠 맛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 제어할 수 없는 내 욕망을 내어 놓습니다. 성령의 소금으로 절여 주소서." "오, 하나님! 내 입술에 짠 맛이 없습니다. 성령의 소금으로 절여 주소서." 이렇게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그것이 성령의 소금에 푹 절여질 때까지 맡기고 기다리십시오.
저는 저의 체험을 바탕으로 여러분에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 가장 취약한 부분, 가장 다루기 힘든 부분, 가장 자주 넘어지는 부분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부분을 다스려주시기를 끊임 없이 구하다 보면, 어느 새 그 부분이 소금으로 푹 절여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지치지 말고 강청해야 하는 기도는 이런 기도입니다. 내 속에 있는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우리는 끊임 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소위 '견고한 진'은 하나씩 하나씩 점령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맛보게 되는 해방감이 얼마나 큰지요! 그것은 그 죄를 즐기면서 얻는 쾌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영성은 성숙되어 갑니다.
아,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영적으로 성숙해져 간다면, 말입니다. 아,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모두가 우리 교회의 영성 목회를 통해 이토록 아름다운 영적 성숙에 이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지금, 속회를 재조정하면서 많은 속회 지도자들이 필요한데, 작은 목회를 섬기기에 충분해 보이는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 가득 차고 넘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하여 더 많은 성도들이 성숙한 영성에 이르러,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짠 맛이 스며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 교회가 필요하고,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기 위해 목회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더욱 더 푹 절여지도록 힘쓰십시다. 우리가 할 일은 소금이신 주님의 영에게 우리 전체를 드리고 그분께 맡기는 일입니다. 그러면 소금이 알아서 우리 존재 속에 그리고 우리 삶 속에 스며들 것입니다. 그 소금은, 우리 안에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빠져 나가게 하여, 우리를 선한 일에 쓰임받기에 합당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어느 것도 감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우리 전체를 열어 그분께 맡기면 됩니다. 한 번 그렇게 하 는 것이 아니라, 자주, 지속적으로, 끊임 없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온통, 푹 절여진 배추가 되어, 주님의 손에 들려, 맛있는 김치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을 꿈 꾸는 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훌륭한 일을 바란다고 하겠습니다." 이 휼륭한 일을 꿈꾸며 항상 기도에 힘써, '짠 맛이 진한 성도들', '푹 절여진 성도들'이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님,
저희가 자격 미달임을 압니다.
주님의 소금이 군데 군데 몰려 있어서
소금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
썩은 냄새가 풍겨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제 저희 전부를 주님께 엽니다.
속속들이 그리고 깊이 스며들어 주소서.
주님의 영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도록
저희의 빗장을 풀어 주시고
깊이 깊이 침투하여 주소서.
주님께 쓰임받기 좋도록
저희를 만들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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