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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날을 위한 든든한 기초

디모데전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483 추천 수 0 2011.04.30 23:51:29
.........
성경본문 : 딤전6:17-19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07. 2. 11
새해에 받은 말씀 5:
"앞 날을 위한 든든한 기초"(Unshakable Foundation for the Future)"

--디모데전서 6:17-19; 마태복음 6:19-24 바울은 부자들에게 세 가지의 권고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1. 내용 연구

1)디모데전서 본문에서 부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을 정리해 보십시오.

2)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정의합니까?

3) 19절에 의하면, 부를 잘 사용하는 일은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2. 토의 문제

1) "부자되세요"라는 인사말에 대한 당신의 느낌은 어떤 것입니까? 부자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2) 물질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의 믿음은 물질주의에 대해 어떤 관계를 가집니까?

3) 십일조 헌금과 주일의 안식은 물질주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전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이 도전을 감당해 내고 있습니까?

4) 오늘 말씀을 통해 한 가지만 결심하고 실천하십시오.

1.

"부자 되세요!" 이것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사말이라고 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부자가 되어 편안하게 먹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마련인데, 과거에는 왠지 그 속내를 내보이는 것을 부끄러이 여겼더랬습니다. 부자 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놓고 말한다는 것이 왠지 속물처럼 느껴졌습니다. 부자되는 것이 인생의 참된 목적은 아니라는 믿음이 우리 의식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애써 부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며 참되게, 정직하게, 진실하게 살려고 힘써 왔습니다. 그랬었는데, 이제는 그 부끄러운 욕망을 드러내놓고 표현하고, 덕담으로 만들어 사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만큼 우리 나라가 가난하기 때문일까요? 국제 관계를 담당하시는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제 우리나라가 여러가지 면에서 세계 10위 정도의 선진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경제력에 있어서 세계 10위권에 있는 나라의 국민들이 "부자 되세요!" 혹은 "더 부자 되세요?"라는 말로 인사하고 있다면, 과연 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얼마 전,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내민 후보들이 내세운 출마의 변을 읽고, 한 참 생각했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후보들 모두가 내세운 목표는 '잘 사는 나라,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저는, "아니, 지금보다 더 잘 살아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경제 구조가 잘 못 되어서 빈곤층이 더욱 커지고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사정을 몰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그늘 속에 몰아놓고, 가는 곳마다 돈 잔치, 돈 놀이, 돈 싸움으로 흥청거리는 나라의 지도자로 나선다는 사람들이 '더 잘 살게 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뭔가 잘 못 된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쯤 살게 되었으면, 건강한 나라, 깨끗한 나라, 상식이 통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나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더 딱한 것은, 종교마져도 부자 되기 위한 질주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제가 말할 입장이 아니니, 제가 몸 담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서만 말하겠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지난 반세기 동안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축복을 선전해 온 것은 다 아는 일입니다. 그 축복의 복음은 한 참 어려울 때, 모두가 다 어렵게 살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지금도 여전히 그 복음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이 '충만히' '넘치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긍정의 힘'을 선전하고, '형통의 원리'를 가르칩니다. 성경 안에 부자되는 길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물질주의의 망령으로부터 백성들을 깨어나게 해야 할 책임을 가진 교회가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2.

디모데가 사역하고 있던 에베소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동서양을 잇는 관문이었던 에베소는 무역과 상업으로 인해 엄청난 부를 누렸습니다. 동서양의 온갖 진귀한 물품들이 에베소로 몰려 들었습니다. 아데미 신전과 다른 신전들을 찾는 여행객들로 인해 그곳에는 항상 돈이 넘쳤습니다. 그들이 신전에 찾아와 비는 것은 '더 큰 부자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여신 아데미는 번영과 다산과 부를 가져다 주는 신으로 숭배를 받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살던 에베소 시민들 가운데 일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에베소 시에서 계속 살아가는 일은 참으로 많은 도전을 수반했습니다. 이교 제사와 미신과 다른 종교에 대한 유혹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에베소 안에 팽배해 있던 물질주의의 위협은 더 더욱 컸습니다. 오직 부자될 목적으로만 종교 행위에 참여하던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서 그 가치관을 뒤집어야 했습니다. 그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질주의의 가치관을 벗어나는 일은, 물질적인 존재로서 항상 물질을 다루어야 하는 인간에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에서 이 문제를 아주 투박한 필치로 다룹니다. 5장 9절을 보십시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경고하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형편이 나아지기를 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넉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탓할 일이 아닙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입니다. 또한 바울 사도께서는 '사업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 혹은 '자신의 업무에서 뛰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바울이 경고하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을 말합니다. 할 수 있는 한 많이 모으기를 원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돈을 모으고 불리는 일에만 골몰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에베소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3.

오늘 읽은 6장의 본문에서 바울은 또 한 번 이 문제를 지적합니다. 여기서는 이미 부자가 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교만해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부는 아주 쉽게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내 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둘째, '덧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돈이 넉넉해지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그 돈이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점점 약해집니다. 하나님은 내게 돈을 공급해 주는 분으로만 필요하고, 내 문제를 실제로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은 바로 돈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곧, 그 돈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그리고 때로는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특히,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인 '사람의 마음을 사는 일'에 있어서, 돈은 참으로 무력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참된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권고합니다. 돈에 대한 마음의 태도도 중요하지만, 그 돈을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느냐도 중요합니다. 엄청난 부를 쌓아놓고, '나는 이 부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해서, 허물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부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집착하지 않는 행동의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물질주의로부터 참되게 해방될 수 있습니다.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 '돈 제일주의', '부자되자주의'는 참으로 위험합니다. 얼마나 위험하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5절에서, 물질과 하나님 사이에서 어느 한 편을 선택하라고 요청하셨겠습니까? 속성 상,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물질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질주의에 빠져 있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은 마음의 초점이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필경 비틀거리고 휘청거리고 헤매이게 됩니다.

물질주의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잊기 쉽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생령' 즉 '살아있는 영' 혹은 '육체를 가진 영'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영에 있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우리는 육체적인 존재로서 영적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서 육적인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물질에 탐닉하다 보면, 영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본성을 잃어버립니다. 지구에 온 어린 왕자가 자기가 떠나 온 별을 잊으면 어쩌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별에 잠시 방문한 어린 왕자들입니다. 우리의 정체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를 잊을 정도로 이 세상의 재미에 마음이 팔려서는 안 됩니다.

물질주의에 빠지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시에, 위로 하나님, 그 아래로 인간, 그리고 그 아래로 물질을 두셨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고 물질을 관리하고 다스리고 사용하도록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그 질서 안에서 살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고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이 그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물질을 우리 위로 올려놓고 섬기고, 하나님을 우리 아래로 내려놓고 부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대치하고, 우상을 이용해 물질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불행의 원초적인 원인입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를 물질주의로 규정하신 예수님의 판단은 실로 옳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이 여전히 진리임을 인정하고 확인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이 진리는 끊임없이 도전을 받았고, 또한 변함 없는 진리로 입증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에베소에서도, 서울에서도, 와싱톤에서도, 그것은 여전히 진리이며, 이 세상 끝날까지 진리로 서 있을 것입니다.

4.

성경에 보면, 물질주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몇 가지 장치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장치가 십일조 규정과 안식일 규정입니다. 먼저, 십일조 규정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초등학교 때의 일로 기억합니다만, 어느 날, 문맹이셨던 할머니께서 제게 봉투를 주시면서, "얘야, 여기다가 '십일조 헌금'이라고 쓰고 내 이름좀 써 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써 드렸는데, 다음 날 교회에 다녀 오신 할머니께서, "에이 녀석! 너 때문에 교회에서 내가 망신 당했다"라고 혼을 내십니다. "왜요? 해 달라시는대로 해 드렸잖아요?"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께서, "목사님이 그러시는데, 십일조라는 글을 잘 못 썼다는데?"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예요! 분명히 열 하나, 11이라고 썼어요!"라고 당당히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께서, "아이고, 이놈아! 십일조를 11이라고 쓰면 어떡해! 그게 십분의 일, 열의 하나라는 뜻이지, 열 하나라는 뜻이냐?" 그 때, 저는 십일조가 무엇인지 처음 알았고, 처음부터 십일조 헌금에 대해 아주 부 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십일조 헌금은 많은 분들에게 있어 이렇게 부정적인 느낌을 안겨 줍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십일조 헌금은 영적 생활의 도약판 같은 역할을 합니다. 자신의 수입의 10분의 1을 바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헌금을 드리고 있다는 사실은 믿음에 있어서 상당한 진보를 이루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피터 마샬(Peter Marshall) 목사님은 미국 의회의 원목(chaplain)으로 유명합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저서를 낸, 그분의 부인 캐서린 마샬(Catherine Marshall)이 더 유명합니다만, 피터 마샬 목사님은 미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아주 존경받는 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마샬 목사님에게 어떤 남자가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의 고민은 이러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한 동안 십일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과거 제 연봉이 2만 달러일때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2천 달러를 헌금으로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제 제 연봉은 50만 달러입니다. 그러니 이제 5만 달러를 드려야 하는데,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마샬 목사님은 아무 조언 없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예,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확실히 문제가 있군요. 그 문제에 대해 함께 기도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데,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반가운 표정으로 "그래 주십시오"라고 답했습니다.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인 마샬 목사님은 그 남자의 손을 잡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랑의 주님, 이분이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간구하오니, 이분을 도와 주옵소서. 이분이 십일조를 드리기에 부담이 없는 정도로 이분의 연봉을 줄여 주옵소서." (Dear Lord, this man has a problem, and pray that you will help him. Lord, reduce his salary back to the price where he can afford to tithe.)

추측하기는, 그 기도가 끝나고 그 사람은 상기된 얼굴로 문을 박차고 나갔을 겁니다. 그리고는 "저 사람이 그 많은 사람들이 존경한다는 그 목사인가? 되지 못한 목사 같은이라고!"라고 투덜거렸을 것 같습니다. 피터 마샬 목사님은 기도하는 분이었으므로, 그 사람이 결국은 마샬 목사님의 진심을 깨닫고 진실한 믿음으로 돌아왔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저는 피터 마샬 목사님의 기도서를 가지고 있는데, 능히 이러고도 남을만한 분입니다. 부드러울 때는 양털처럼 부드럽지만, 정의를 향해 말할 때는 불을 내품었던 분입니다. 하여튼, 이 일화는 십일조 헌금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도전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5.

성경에 의하면, 십일조는 여러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들의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고,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를 위해 사용되기도 했고, 성전 건축을 위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십일조 헌금의 사용처는 이렇게 다양하지만, 십일조 규정의 동기 즉 '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떼어 바치게 했느냐?'는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저는 그 이유를, '물질주의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도전'이라고 해석합니다.

도전이 도전으로서의 역할을 하려면 어려워야 합니다. 남산에 올라가는 것을 '도전'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적어도 지리산이나 설악산 정도는 되어야 '도전한다'라는 말이 어울립니다. 운전면허시험을 보러 가면서 '도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적어도 변호사 시험이나 의사 시험 정도는 되어야 도전한다는 말이 어울립니다. 아이에게 주는 용돈 정도를 바치는 것은 전혀 도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수입의 십분의 일 정도는 되어야 도전이 됩니다.

그런데 '도전'에는 항상 그 어려움에 대한 보상이 있게 마련입니다. 지리산 등반에 도전하여 성취한 사람은, 보통 사람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합니다. 변호사 시험에 도전하여 합격한 사람에게는 법률가로서의 권한이 주어집니다. 도전은 이런 것입니다. 십일조를 통한 하나님의 도전에는 '물질주의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이 도전을 이겨낸 사람들은 그 들이 지구라는 별에 떨어진 어린 왕자임을 잊지 않습니다. 이 도전을 이겨낸 사 람들은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참되게 그분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이 도전을 이겨낸 사람들은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주인으로 회복됩니다. 이 도전을 이겨낸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얻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이렇게 물질을 제대로 관리함으로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게"(딤전 6:19)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십일조를 정직하고 정확하게 드리는 사람들 중에, 물질주의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물질주의에 갇혀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이상으로 갚아 주신다고 믿고, 마치 주식에 투자하는 심정으로, 천 달러를 바치면서 만 달러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분의 일보다 더 많은 헌금을 드리면서, 하나님이 다음 달 수입을 그 십일조에 맞춰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우상 숭배입니다.

어떤 교회는 전 교인의 80% 이상이 십일조를 한다고 자랑합니다. 만일, 십일조 생활을 통해 그분들이 물질주의로부터 해방되어 살고 있다면, 정말 부러운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물질주의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이 맡겨 주신 물질을 잘 관리하고 사용하는 수준에 이르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물질주의에 갇혀서, 혹은 더 많은 물질을 바라고, 혹은 더 부자되려는 욕심으로, 교인들의 대다수가 십일조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하나도 자랑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도전에 한 번 응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성숙한 영성의 사람은 가장 먼저 물질주의로부터 해방된 사람입니다. 물질주의로부터 해방되는 길에 있어서 첫 관문은 십일조 헌금입니다. 십일조 헌금을 두 손에 잡고, "하나님, 제 희망은 하나님입니다. 물질로부터 제 마음을 뗍니다. 제 마음을 받아 주시고, 저로 하여금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물질의 주인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듭 거듭 그렇게 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몸을 입은 영적 존재로서 한 없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6.

물질주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또 다른 방책이 바로 안식일 계명입니다. 일 주일에 하루를 구별하여, 먹고 살기 위한 모든 일을 중지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받은 복을 이웃과 나누며, 우리의 삶을 축하하고 감사하라는 것이 안식일 계명의 참 의미입니다. 일 주일에 하루를 쉬라는 말은 단순히 휴식을 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루 동안 일을 중단하고, 내가 먹고 살기 위해 부심하지 않아도 내 삶이 어찌되는 것이 아니며, 내가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장악하지 않아도 세상은 여전히 돌아간다는 것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먹고 사는 것은 내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 계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심을 확인하는 방법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힘쓰는 것을 잠시 중지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손을 놓으면 모든 것이 잘못될 것처럼 아둥바둥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그 노력을 멈추고 가만히 있어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인생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 금새 드러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바울이 말한 하나님 상을 부정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분이라고요? 도대체 그 '우리'는 누구입니까? 저는 아무래도 그 안에 든 것 같지 않습니다. 제게는 '모든 것'은 고사하고, 필요한 최소한의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풍성히' 주신다고요? 투 잡(two jobs)을 뛰어도 먹고 살기 힘듭니다. '즐기게 하시는 분'이라고요? 삶의 즐거움을 맛 본 지, 까마득한 옛날입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런 하나님,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느끼시는 분이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렇게 회복시키기 위해 여러분 자신보다 더 간절히 애태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그분의 원래 의도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도록 마련하셨습니다. 그 질서를 깨뜨린 것은 바로 우리 타락한 인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곡된 이 질서를 바로잡아 모든 사람들이 넉넉히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힘쓸 책임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분은 실로 모든 인간의 행복을 바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바로 이 사실을 주기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신 장치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진리,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신다는 진리를 거듭 확인하고, 감사하고, 축하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밤이나 낮이나, 일년 365일 부지런히 자신을 들볶아 긁어 모으려고만 하는 우리 타락한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힘 없고 약한 사람들은 쉴 틈 없이 일해도 먹고 살기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7.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사회에 정말 잘못 가고 있는 점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무한경쟁의 상업주의입니다. 제가 유학하러 왔던 80년대만 해도, 저 남부 달라스에는 주말에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습니다. 저녁에도 7시, 늦어도 9시면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돈에 욕심을 내면서 점점 영업 시간이 늘어나더니, 이제는 연중무휴 가게가 많아지고, Holiday season에는 자정까지 영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 다른 분야도 덩달아 바빠집니다. 월마트(Walmart) 하나가 영업 시간을 한 시간만 늘리면, 그 파급 효과는 수백만명에게 미칩니다. 그렇게 하여 수입은 올라갈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의 삶과 가정은 파괴됩니다.

이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 주일에 하루를 온전히 쉬면서, 예배하고, 감사하고, 나누고, 베푸는 날로 지키는 것은 아주 큰 도전입니다. 도전이기 때문에 어렵지만, 어려운 도전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도 큽니다. 저는, 주일에 가게 문을 닫았더니 매상이 더 많이 오르더라는 식의 약속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십일조를 드렸더니 수입이 더 많아지더라는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만, 그것 때문에 주 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전을 받아내면서 우리 마음에 기대해야 할 참된 보상은 물질주의로부터 해방되어 성숙한 영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도전에 응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응할 수 있는 도전입니다. 만성 적자에 허덕이는 분들에게는 저의 이 말씀이 죄책감만 심어주고 역심 떨어지게 하는 말이 될 수 있음을 압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도 생존 자체가 위태로운 분들도 계신 줄 압니다. 그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정에 계신 분들도 어렵지만 지금서부터 기억하고 준비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시절에 몸에 배인 물질주의는 나중에 고대광실에 살며 산해진미를 먹는 상황에 이르더라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일이 끝나면 그만 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일은 끝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어 멈춰 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큰 도전입니다. 그러나 응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값진 도전입니다.

8.

이제, '새 해에 주신 말씀 시리즈'를 마칩니다. 새 해에 새벽기도회에서 읽은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다섯 가지의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 다섯 가지를 주보 앞 면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첫째, 성찰하는 믿음, 둘째, 균형과 조화를 이룬 믿음, 셋째, 삶의 영역에 골고루 미치는 믿음, 넷째, 경건 생활에 초점을 둔 믿음, 그리고 다섯째, 물질주의로부터 해방된 믿음입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이 다섯 가지는 성숙한 영성의 핵심을 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시하는 방향이 아주 분명해 보입니다. 이 다섯 항목을 늘 주보 앞 면에 기록해 둘 것입니다. 이 항목을 볼 때마다, 내게 부족한 면이 무엇인지를 살펴, 영적인 성장에 더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빕니다.

오늘, 저는 마지막으로, 이민교회 교인들이 특히 예민하게 생각하는 두 가지의 주제를 다뤘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이것이 아주 큰 도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하면서 용기를 내지 못하는 상태에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십시다. 단지 더 큰 축복을 받을 욕심으로 결심할 일이 아닙니다. 물질주의로부터 해방되어 참다운 신앙으로 성숙하게 되기를 바라는 신령한 열심으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열심을 주셔서, 걱정 없이, 염려 없이, 홀가분하게, 기쁘게, 그 도전에 응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주 위험해 보이는 일이지만, 세속적으로는 손해 보는 일이요 희생하는 일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앞 날을 위한 든든한 기초'입니다.

오늘 마무리 기도는 앞에서 언급한 피터 마샬 목사님의 기도문으로 대신합니다.

주님, 제 뿌리가 이 땅에 너무 깊이 자리잡음으로 물질을 사랑하게 되지 않도록 도우소서. 이생에서의 순례가 장차 올 것에 대한 서론이요 서문이며 훈련 학교임을 알게 하소서. 그래야 인생의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유한한 물질을 사랑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삶을 행복하게 하기는커녕 근심의 뿌리만 되는 무시무시한 재물의 힘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저희 삶을 단순화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하면 저희는 아이 같지만 유치하지 않은,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이해심 많지만 결코 기만당하지 않는 성숙한 믿음에 이를 것입니다. 오 하나님, 저희를 도우셔서 단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참되게 살게 하시어, 저희 일 가운데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하나님만이 절제와 균형과 열정을 주실 수 있습니다. 아멘. ('기도선집',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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