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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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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0:3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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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7.5.13
연속설교 "가정을 생각하다" (1)
"태초에 가정이 있었다"
(In the Beginning was Family)
-- --마태복음 10:34-39
1.
안녕하셨습니까? 지난 열흘 동안 여러분의 기도에 힘입어 한국 방문을 잘 마치고 건강하게 돌아왔습니다. 기도해 주신 성도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주일 설교해 주신 조영진 감리사님께 감사드리며, 교회를 잘 지켜 준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떠나 있어 보면, 역시 교회의 주인은 담임 목사가 아니라 성도들이며 또한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한국 방문을 계획하면서 주저됨이 많았습니다. 갑작스럽게 쇠약해진 어머님을 5년 만에 뵈러 가는 길이었지만, 신분 문제로 혹은 생활상의 문제로 인해 5년 혹은 10년이 넘게 가족과 헤어져 사는 분들이 우리 교우들 가운데 적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에 부담은 있었지만, 당신의 살을 깎아 먹이시듯 저희 자식들을 길러주신 어머님을, 그래도 정신이 온전할 때 찾아뵙고 싶어서, 홀로 바람같이 다녀왔습니다. 아무 일도 만들지 않고, 가족 외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최소로 만들고, 며칠 동안 어린 아이처럼 되신 어머님 곁에 머물다 왔습니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대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가 늙은이 식사나 챙기고 있으니 어떡한다니?"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속에 배인 아버님의 마음을 느끼고는 참 감사했습니다. 불과 며칠의 만남이었지만, 충분히 값있고 의미 있었다 싶어, 감사했습니다.
사실, 5년 만에 귀국하면서 가족만을 만나고 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수소문을 하여 만나자는 분도 계셨고, 기왕에 왔으니 설교를 해 달라는 분도 계셨고, 하루라도 집회를 해 달라고 청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저는 그 부탁을 ‘복음을 전할 기회’라고 이름 짓고 응하여 분주하게 돌아다니다가, 하루 이틀 정도 어머님을 뵙고 올 수도 있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가정이 제게 너무도 소중했습니다. 복음 전파도 중요하고 선교도 중요하지만, 이 시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가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저를 가족처럼 여기고 찾아와 준 친구와 제자 몇 명을 만나는 것으로 시간을 다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가정은 제게 이토록 중요합니다. 아니, 저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이토록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몇 해 전, 성경에 나오는 가정 이야기들을 엮어 책으로 내면서, 저는 <태초에 가정이 있었다>는 제목을 단 적이 있었습니다. 가정은 인류 사회에서 제일 처음으로 탄생한 공동체입니다. 또한 가정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사람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생겨난 것은 국가도 아니요, 학교도 아니며, 교회도 아니고, 바로 가정이었습니다. 가정은 인간 사회를 위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2.
기독교에 대한 오해들이 많습니다만, 기독교가 가정을 소홀히 하는 종교라는 오해처럼 근거 없고, 사실과 다르며, 억울한 것이 또 있을까요? 한국에 있을 때, 한 번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기사 양반과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때 제가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고 운을 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나이가 지긋하신, 권태와 피로감으로 인해 찌들대로 찌든 모습의 그 기사께서 버럭 화를 내시면서, "아니, 가족도 몰라보고, 조상도 몰라보는 그런 후레자식들의 종교를 뭐 하러 믿어요? 자식들이 혹시 교회에 미치지 않을까 무서워요. 내 친척 중에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도대체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니까요."
저는 그 기세에 눌려, "아, 그러시군요!"라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더 화를 돋구었다가는 교통사고를 낼 지 모를 만큼, 그분은 흥분하셨습니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처음부터 자초지종을 말씀 드려가며, 기독교가 그런 종교가 아님을 설명해 드리고 싶었습니다만,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저 속으로, "그게 아닌데, 왜 이렇게 지독한 오해가 발생했을까?"하고 생각만 하다가 목적지에서 내렸습니다.
그 기사 분에게는 설명드릴 기회가 없었지만, 여러분에게는 그럴 기회를 가지기 원합니다. 이번에 5회 연속 설교 "가정을 생각하다"를 마련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가정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번의 연속 설교를 통해 가정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고, 기독교 신앙과 가정생활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생각해 보기를 기대합니다. 그럼으로써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부름을 새롭게 느끼고, 그 부름을 따라 가정을 회복시키는 일에 마음을 다해 보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가정’ 이야기를 하면 소외감을 느끼실 분들이 계십니다. 가족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별로 없는 분들이 그렇고, 또한 이런 저런 일로 인해 가정에 상처를 입은 분들이 그렇습니다. 부부에 대해 말할 때, 홀로 사시는 분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녀에 대해 혹은 부모에 대해 말할 때, 자녀가 없거나 부모가 없는 분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 연속 설교에서는 그런 분들도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힘써 볼 것입니다. 아니,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육신적인 가족을 돌보도록 할뿐 아니라, 육신적인 가족 너머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에게 여쭙겠습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 너무 쉬워서 뭔가 함정이 있는 것 같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가정이 우선입니다. 태초에 가정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태초에 교회가 있었습니까? 창세기를 뒤져 보십시오. 창세기에는 교회가 나오지 않습니다. 가정만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가정 단위로 했습니다. 제사장도 없었습니다. 각 가정에서 가장이 제사장의 역할을 했습니다. 혹은 족장이 한 부족의 제사장 역할을 했습니다. 가정이 우선입니다. 가정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왜 가정이 아니라 교회가 우선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가정의 일과 교회의 일이 서로 대립할 때, 교회 일을 우선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가정의 불화를 감수하고라도 교회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실제로, 기독교가 가족을 등한히 하게 하는 ‘후레자식의 종교’라고 비판받을만한 일들이 교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교회를 우선하도록 잘 못 가르친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필요한 일들에 몰두하다 보니, 가정의 일을 등한히 하도록 오도하는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목회가 교인들의 영적 성장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데,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목회자나 혹은 평신도 지도자들의 야심으로 인해 그릇된 길로 가는 경우가 왕왕 일어납니다. 이럴 때, 가정은 교회로 인해 심한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의 장인이신 도건일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 예배당 건축을 위해 작정 헌금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늘 그렇게 하듯, 집회를 통해 예배당 건축의 중요성을 각성시키고는 건축 헌금을 작정하게 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헌금 작정서를 살펴보는데, 아주 가난하게 사는 가정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액수의 헌금을 작정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목사님이 보실 때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건축이 진행되는 동안, 그 가정은 힘껏 헌금을 했으나, 작정한 액수에 턱도 없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 가정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분과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다가 목사님께서 어느 날 그분의 건축 헌금 약정서를 들고 그분을 심방했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기도한 후, "지금까지 헌금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작정한 헌금을 다 드린 것으로 믿으십시오. 이 헌금 약정서는 제가 두 분이 보는 앞에서 찢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마음의 부담을 치워 주셨습니다. 두 분은 목사님의 행동에 감격하여 흐느껴 울었고, 그 이후로 더욱 진실한 마음으로 기쁘게 섬기시며 살아가셨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진실로 성도들의 영혼을 살피는 목회자의 심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당면한 건축 빚과 씨름하면서도, 한 성도의 영혼의 짐을 두고 고민하며 이런 결단을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먼저 생각하고, 교회보다 가정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실제로, 가정이야 깨지든 말든, 그 사람의 영혼이야 질식하든 말든, 약속한 헌금을 완납하라고 강요하는 목회자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형편입니다.
4.
가정보다 교회 일을 우선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는 책임을 모두 목회자나 평신도 지도자들이 뒤집어 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잘 못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가정 일을 내버려두고 교회 일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이유 때문에 가정 일에 소홀히 하고, 그 빈자리를 교회 일로 메우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욕심에 따라 행동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정당화시킵니다.
아내를 대면하기 싫어서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남편을 대면하기 싫어서 교회 일에 몰두하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서로 책임을 떠밀다 보니, 험한 말로 ‘집구석’에 들어가기 싫어,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모의 잦은 싸움으로 인해 집 밖으로 떠도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집안에서 해야 하는 허드렛일이 싫어서 교회에서 하는 ‘사역’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 때문에 가정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집안 꼴이 말이 아닌데, 아이들 형편이 말이 아닌데, 부부 관계가 말이 아닌데,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밖으로 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폴 스티븐스(Paul Stevens)가 쓴 <영혼의 친구, 부부>(Marriage Spirituality)라는 책은 이 연속 설교를 하는 동안에 꼭 읽어 보도록 천거하고 싶은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부부가 영혼의 친구로 성숙해 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제안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가정과 사역의 문제도 다룹니다. 교회를 통한 사역에 있어서 부부 혹은 가정의 합의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강조합니다. 진정한 사역은 부부의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사역을 통해 부부가 서로를 더 깊이 알고 사랑하는 결과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도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역도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서 나온 사역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흘러 넘쳐 나와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빈 곳을 채우기 위한 사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야망을 이루기 위해, 혹은 내 취미 생활을 위해, 혹은 내 공명심을 채우기 위해 행하는 사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내 안을 채움으로써 흘러 넘쳐야 비로소 올바른 사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역할 때, 그 사역은 가정이나 가족에게 짐이 되거나 상처를 입히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부부의 사역 그리고 가족 전체의 사역으로 인해 가정이 더 화목해지고 행복해지며 온전해집니다. 그러한 변화가 없다면, 혹은 교회에서의 사역으로 인해 가정생활이 더욱 더 악화되어 간다면, 잠시 멈추어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사역보다 가정이 먼저입니다. 교회의 필요를 위해 "사역이 가정보다 더 먼저입니다"라고 말할 법한 목사가 하는 말이니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우선적으로 기대하시는 것은 가정을 올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 어떤 사역도 부부 관계를 해치거나 자녀를 방치하거나 가정을 사막처럼 만든다면 그 사역은 중단 되어야 마땅합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여쭙겠습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이라구요? 그러면 제가 왜 또 여쭙겠습니까? 바로 위에서 드린 말씀을 생각해 보시면, "교회가 우선입니다"라고 답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가정이,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그 모습대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아니, 교회에서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가정의 참된 회복이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우선이라고 답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예수님의 말씀은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렵습니다. ‘평화의 왕’이라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34절). 참, 무시무시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칼을 들고 서로 맞설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맞설 것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36절)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만 떼어 놓고 보면, 기독교는 가정을 해체하고 파괴시키는 종교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을 곡해하여 가족을 원수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볼 때, 두 가지의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왜 가족이 갈라지게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37절 이하에 그 답이 나오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원인입니다. 둘째 질문은 "자기 가족을 원수시 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문맥을 보면, 가족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 믿지 않는 가족들이 믿는 가족을 원수로 여기고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믿는 가족이 믿지 않는 가족을 원수처럼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가족을 미워하거나 원수시 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은 인간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릅니다만, 그 감정을 그대로 두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감정을 품고 있어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을 원수처럼 대하는 가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지 않던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갈 때, 처음에 일어날 수 있는 혼란과 갈등과 아픔을 예고해 줍니다.
그런 혼란과 갈등과 아픔을 견디지 못해 믿음을 포기하면 그 사람은 영생을 잃어버립니다. 37절에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아버지께서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면, 아버님의 뜻을 존중한다는 핑계로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문제를 참되게 해결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고통이 두려워 수술을 하지 않으려는 환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해결책은 가족 모두가 믿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일이 일어날 때까지 기도하며, 박해를 견디고, 선한 행실로써 진리를 드러내는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8절에서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태초에 가정이 있었습니다만, 가정 이전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가정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정보다 먼저입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하와보다 하나님이 먼저였습니다. 하와에게도, 아담보다 하나님이 먼저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간의 삶의 기초이며, 가정생활의 기초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온전히 회복되기 위해서는 온 가정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복음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세워질 때, 가정은 제대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6.
이 대목에서 저의 가정 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읽은 예수님의 말씀이 저의 가정에 그대로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제 가정의 신앙의 이력은 4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국의 초대 교인들이 다 그랬듯이, 처음에는 증조할머니 혼자서 믿으셨습니다. 남편과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0리도 넘는 길을 걸어 새벽기도회와 예배에 참여하셨습니다. 그 믿음은 첫째 며느리인 저의 할머님께 이어졌습니다. 시집오신 할머니께서는 시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박해는 더욱 거칠었습니다만, 할머니께서는 굳굳하게 믿음을 지키셨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가정 안에 있는 남자들은 하나도 믿지 않았습니다. 두 여인은 주부로서 해야 할 일을 정성으로 받들면서 묵묵히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신앙이 3대에 이르러 제 모친에게 이어졌습니다. 제 어머님은 시집오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시집에 오시어 시어머니와 시할머니와 함께 세 여인이 믿음 생활을 하면서, 점점 가정 안에서 믿음의 영향이 강해졌습니다. 믿음의 영향이 가정 안에 점점 두드러지게 나타나자, 세 여인의 신앙에 대한 남성들의 박해도 컸습니다. 부모님은 당시로서는 예외적으로 연애결혼을 하셨는데, 아버님은 결혼하면 함께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어머님께 약속하고는, 결혼하고 나서 입을 씻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한 때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어머님의 신앙생활을 반대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제 가정의 별로 많지 않은 불화의 원인들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믿지 않던 가족들이 예수를 믿는 가족들을 박해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저도 때로, "이럴 바에야 차라리 믿지 않으면 얼마나 속 편할까? 왜 엄마는 저렇게 고통을 받으시면 서도 교회를 다니려 하시는 걸까?"라고 의문을 가졌을 만큼, 불안 가운데서 지내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박해로부터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저의 형제들은 자주 작전을 짜야 했습니다. 분노한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교회에서 오시는 어머님을 중도에 다른 곳으로 인도하기를 여러 번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은 아버님을 미워하기는커녕,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셨고, 그분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드렸고, 마침내 그 견고하던 아버님의 불신의 성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날이 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4대째 이르러 온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고백하고 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박해자였던 아버님은 신실한 신앙인이 되시고 존경받는 장로님으로 은퇴를 하셨고, 4대째에 이르러 목사도 한 사람 나오게 되었고, 5대에 이르기까지 믿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이 온전해지려면 아직도 한 참 멀었고, 형제들의 가정 가정이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되기에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과거에 증조할머님으로부터 어머님께 이르기까지 겪으셔야 했던 박해는 충분히 보상되고도 남았습니다. 지금의 우리 가족의 행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7.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한 번 더 여쭙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까? 그게 정답입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라는 질문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만큼이나 잘못된 질문입니다. 질문이 잘못되면, 답도 잘못됩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잘 해야 합니다. 똑똑한 아이들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으면, "둘 다 좋아"라고 답합니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러면 알아듣고 질문을 멈춰야 하는데, 어리석은 부모는 굳이 또 묻습니다. "에이, 그래도,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거 아냐? 누구야, 응? 누가 더 좋아?"라고 따져 묻습니다. 명석치 못한 아이는 이 순간에, "부모 중 어느 한 편을 택해야 하는 거구나!"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둘 다 우선입니다"가 맞습니다. 교회와 가정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교회의 삶을 통해 가정이 회복되어야 하고, 가정의 회복은 다시 교회를 통한 사역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더 큰 가정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고리는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태초에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은 참된 사랑과 이해와 용서와 용납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참된 쉼이 있고, 참된 위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이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졌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곳, 서로 상처 주는 곳, 서로 미워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쉼이 없고, 더 이상 위로가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가장 먼저 우리 개인에게 일어나야 하고, 그 다음 우리 가정에 일어나야 합니다. 깨어진 가정들이 태초의 가정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일을 위해 오셨습니다. 가정은 복음의 능력이 가장 먼저 나타나야 하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일이 우리 각자의 가정에 일어나도록 하십시다. 그 일을 위해 먼저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도록 힘쓰십시다. 더욱 영적 생활에 힘쓰십시다. 우리가 영적으로 회복되지 않고는 그 어떤 노력도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내 가정이 회복되려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나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그분의 은총의 빛으로 내가 새로 지어져야 합니다. 한 번 그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 지어져 가야 합니다. 잘 믿는 것 같은 우리는 얼마나 자주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 어느 순간에도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 없는 완성품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매일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변화가 내 배우자에게, 내 자녀들에게, 형제들에게 그리고 부모에게 파급되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성 생활의 신비입니다. 한 사람이 진실하고 일관되게 영적 생활을 해 나갈 때, 그 사람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그 영향력이 미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의 영적 감화력에 이끌려 변화되어 갑니다. 때로 시간이 걸리지만, 이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가정이 하나의 작은 교회가 되는 것, 하나의 영적 공동체가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바라고 기도해야 할 목표입니다. 나에게 그 마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일을 이루려는 열심이 내게 있다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은총을 허락해 주실 것이며, 그로 인해 태초의 가정으로 회복되어 나갈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 모두에게 이 거룩한 마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일을 향한 열심이 불 일 듯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그 마음과 열심을 가진 모든 심령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가정이 영적 공동체로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한 영적 가정으로 성숙해 가기를 기도합니다.
태초에 가정을 세우신 주님,
오늘의 가정들을 보시면서 아파하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가
주님 안에서 새로 지어지게 하소서.
저의 변화로 가정이 변화되게 하소서.
저의 가정을 영적 공동체로 만들어 주소서.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십자가를 능히 지고 가게 하소서.
우리 교회를,
아니 이 땅의 모든 교회를
영적 가정이 되게 하셔서
혈육을 넘어서 사랑스러운 가족을 만나게 하시고,
또한 혈육의 가정을 회복시키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연속설교 "가정을 생각하다" (1)
"태초에 가정이 있었다"
(In the Beginning was Family)
-- --마태복음 10:34-39
1.
안녕하셨습니까? 지난 열흘 동안 여러분의 기도에 힘입어 한국 방문을 잘 마치고 건강하게 돌아왔습니다. 기도해 주신 성도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주일 설교해 주신 조영진 감리사님께 감사드리며, 교회를 잘 지켜 준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떠나 있어 보면, 역시 교회의 주인은 담임 목사가 아니라 성도들이며 또한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한국 방문을 계획하면서 주저됨이 많았습니다. 갑작스럽게 쇠약해진 어머님을 5년 만에 뵈러 가는 길이었지만, 신분 문제로 혹은 생활상의 문제로 인해 5년 혹은 10년이 넘게 가족과 헤어져 사는 분들이 우리 교우들 가운데 적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에 부담은 있었지만, 당신의 살을 깎아 먹이시듯 저희 자식들을 길러주신 어머님을, 그래도 정신이 온전할 때 찾아뵙고 싶어서, 홀로 바람같이 다녀왔습니다. 아무 일도 만들지 않고, 가족 외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최소로 만들고, 며칠 동안 어린 아이처럼 되신 어머님 곁에 머물다 왔습니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대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가 늙은이 식사나 챙기고 있으니 어떡한다니?"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속에 배인 아버님의 마음을 느끼고는 참 감사했습니다. 불과 며칠의 만남이었지만, 충분히 값있고 의미 있었다 싶어, 감사했습니다.
사실, 5년 만에 귀국하면서 가족만을 만나고 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수소문을 하여 만나자는 분도 계셨고, 기왕에 왔으니 설교를 해 달라는 분도 계셨고, 하루라도 집회를 해 달라고 청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저는 그 부탁을 ‘복음을 전할 기회’라고 이름 짓고 응하여 분주하게 돌아다니다가, 하루 이틀 정도 어머님을 뵙고 올 수도 있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가정이 제게 너무도 소중했습니다. 복음 전파도 중요하고 선교도 중요하지만, 이 시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가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저를 가족처럼 여기고 찾아와 준 친구와 제자 몇 명을 만나는 것으로 시간을 다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가정은 제게 이토록 중요합니다. 아니, 저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이토록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몇 해 전, 성경에 나오는 가정 이야기들을 엮어 책으로 내면서, 저는 <태초에 가정이 있었다>는 제목을 단 적이 있었습니다. 가정은 인류 사회에서 제일 처음으로 탄생한 공동체입니다. 또한 가정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사람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생겨난 것은 국가도 아니요, 학교도 아니며, 교회도 아니고, 바로 가정이었습니다. 가정은 인간 사회를 위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2.
기독교에 대한 오해들이 많습니다만, 기독교가 가정을 소홀히 하는 종교라는 오해처럼 근거 없고, 사실과 다르며, 억울한 것이 또 있을까요? 한국에 있을 때, 한 번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기사 양반과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때 제가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고 운을 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나이가 지긋하신, 권태와 피로감으로 인해 찌들대로 찌든 모습의 그 기사께서 버럭 화를 내시면서, "아니, 가족도 몰라보고, 조상도 몰라보는 그런 후레자식들의 종교를 뭐 하러 믿어요? 자식들이 혹시 교회에 미치지 않을까 무서워요. 내 친척 중에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도대체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니까요."
저는 그 기세에 눌려, "아, 그러시군요!"라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더 화를 돋구었다가는 교통사고를 낼 지 모를 만큼, 그분은 흥분하셨습니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처음부터 자초지종을 말씀 드려가며, 기독교가 그런 종교가 아님을 설명해 드리고 싶었습니다만,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저 속으로, "그게 아닌데, 왜 이렇게 지독한 오해가 발생했을까?"하고 생각만 하다가 목적지에서 내렸습니다.
그 기사 분에게는 설명드릴 기회가 없었지만, 여러분에게는 그럴 기회를 가지기 원합니다. 이번에 5회 연속 설교 "가정을 생각하다"를 마련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가정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번의 연속 설교를 통해 가정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고, 기독교 신앙과 가정생활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생각해 보기를 기대합니다. 그럼으로써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부름을 새롭게 느끼고, 그 부름을 따라 가정을 회복시키는 일에 마음을 다해 보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가정’ 이야기를 하면 소외감을 느끼실 분들이 계십니다. 가족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별로 없는 분들이 그렇고, 또한 이런 저런 일로 인해 가정에 상처를 입은 분들이 그렇습니다. 부부에 대해 말할 때, 홀로 사시는 분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녀에 대해 혹은 부모에 대해 말할 때, 자녀가 없거나 부모가 없는 분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 연속 설교에서는 그런 분들도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힘써 볼 것입니다. 아니,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육신적인 가족을 돌보도록 할뿐 아니라, 육신적인 가족 너머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에게 여쭙겠습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 너무 쉬워서 뭔가 함정이 있는 것 같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가정이 우선입니다. 태초에 가정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태초에 교회가 있었습니까? 창세기를 뒤져 보십시오. 창세기에는 교회가 나오지 않습니다. 가정만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가정 단위로 했습니다. 제사장도 없었습니다. 각 가정에서 가장이 제사장의 역할을 했습니다. 혹은 족장이 한 부족의 제사장 역할을 했습니다. 가정이 우선입니다. 가정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왜 가정이 아니라 교회가 우선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가정의 일과 교회의 일이 서로 대립할 때, 교회 일을 우선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가정의 불화를 감수하고라도 교회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실제로, 기독교가 가족을 등한히 하게 하는 ‘후레자식의 종교’라고 비판받을만한 일들이 교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교회를 우선하도록 잘 못 가르친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필요한 일들에 몰두하다 보니, 가정의 일을 등한히 하도록 오도하는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목회가 교인들의 영적 성장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데,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목회자나 혹은 평신도 지도자들의 야심으로 인해 그릇된 길로 가는 경우가 왕왕 일어납니다. 이럴 때, 가정은 교회로 인해 심한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의 장인이신 도건일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 예배당 건축을 위해 작정 헌금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늘 그렇게 하듯, 집회를 통해 예배당 건축의 중요성을 각성시키고는 건축 헌금을 작정하게 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헌금 작정서를 살펴보는데, 아주 가난하게 사는 가정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액수의 헌금을 작정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목사님이 보실 때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건축이 진행되는 동안, 그 가정은 힘껏 헌금을 했으나, 작정한 액수에 턱도 없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 가정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분과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다가 목사님께서 어느 날 그분의 건축 헌금 약정서를 들고 그분을 심방했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기도한 후, "지금까지 헌금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작정한 헌금을 다 드린 것으로 믿으십시오. 이 헌금 약정서는 제가 두 분이 보는 앞에서 찢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마음의 부담을 치워 주셨습니다. 두 분은 목사님의 행동에 감격하여 흐느껴 울었고, 그 이후로 더욱 진실한 마음으로 기쁘게 섬기시며 살아가셨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진실로 성도들의 영혼을 살피는 목회자의 심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당면한 건축 빚과 씨름하면서도, 한 성도의 영혼의 짐을 두고 고민하며 이런 결단을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먼저 생각하고, 교회보다 가정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실제로, 가정이야 깨지든 말든, 그 사람의 영혼이야 질식하든 말든, 약속한 헌금을 완납하라고 강요하는 목회자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형편입니다.
4.
가정보다 교회 일을 우선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는 책임을 모두 목회자나 평신도 지도자들이 뒤집어 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잘 못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가정 일을 내버려두고 교회 일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이유 때문에 가정 일에 소홀히 하고, 그 빈자리를 교회 일로 메우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욕심에 따라 행동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정당화시킵니다.
아내를 대면하기 싫어서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남편을 대면하기 싫어서 교회 일에 몰두하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서로 책임을 떠밀다 보니, 험한 말로 ‘집구석’에 들어가기 싫어,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모의 잦은 싸움으로 인해 집 밖으로 떠도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집안에서 해야 하는 허드렛일이 싫어서 교회에서 하는 ‘사역’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 때문에 가정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집안 꼴이 말이 아닌데, 아이들 형편이 말이 아닌데, 부부 관계가 말이 아닌데,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밖으로 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폴 스티븐스(Paul Stevens)가 쓴 <영혼의 친구, 부부>(Marriage Spirituality)라는 책은 이 연속 설교를 하는 동안에 꼭 읽어 보도록 천거하고 싶은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부부가 영혼의 친구로 성숙해 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제안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가정과 사역의 문제도 다룹니다. 교회를 통한 사역에 있어서 부부 혹은 가정의 합의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강조합니다. 진정한 사역은 부부의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사역을 통해 부부가 서로를 더 깊이 알고 사랑하는 결과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도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역도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서 나온 사역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흘러 넘쳐 나와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빈 곳을 채우기 위한 사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야망을 이루기 위해, 혹은 내 취미 생활을 위해, 혹은 내 공명심을 채우기 위해 행하는 사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내 안을 채움으로써 흘러 넘쳐야 비로소 올바른 사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역할 때, 그 사역은 가정이나 가족에게 짐이 되거나 상처를 입히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부부의 사역 그리고 가족 전체의 사역으로 인해 가정이 더 화목해지고 행복해지며 온전해집니다. 그러한 변화가 없다면, 혹은 교회에서의 사역으로 인해 가정생활이 더욱 더 악화되어 간다면, 잠시 멈추어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사역보다 가정이 먼저입니다. 교회의 필요를 위해 "사역이 가정보다 더 먼저입니다"라고 말할 법한 목사가 하는 말이니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우선적으로 기대하시는 것은 가정을 올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 어떤 사역도 부부 관계를 해치거나 자녀를 방치하거나 가정을 사막처럼 만든다면 그 사역은 중단 되어야 마땅합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여쭙겠습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이라구요? 그러면 제가 왜 또 여쭙겠습니까? 바로 위에서 드린 말씀을 생각해 보시면, "교회가 우선입니다"라고 답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가정이,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그 모습대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아니, 교회에서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가정의 참된 회복이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우선이라고 답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예수님의 말씀은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렵습니다. ‘평화의 왕’이라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34절). 참, 무시무시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칼을 들고 서로 맞설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맞설 것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36절)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만 떼어 놓고 보면, 기독교는 가정을 해체하고 파괴시키는 종교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을 곡해하여 가족을 원수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볼 때, 두 가지의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왜 가족이 갈라지게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37절 이하에 그 답이 나오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원인입니다. 둘째 질문은 "자기 가족을 원수시 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문맥을 보면, 가족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 믿지 않는 가족들이 믿는 가족을 원수로 여기고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믿는 가족이 믿지 않는 가족을 원수처럼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가족을 미워하거나 원수시 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은 인간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릅니다만, 그 감정을 그대로 두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감정을 품고 있어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을 원수처럼 대하는 가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지 않던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갈 때, 처음에 일어날 수 있는 혼란과 갈등과 아픔을 예고해 줍니다.
그런 혼란과 갈등과 아픔을 견디지 못해 믿음을 포기하면 그 사람은 영생을 잃어버립니다. 37절에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아버지께서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면, 아버님의 뜻을 존중한다는 핑계로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문제를 참되게 해결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고통이 두려워 수술을 하지 않으려는 환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해결책은 가족 모두가 믿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일이 일어날 때까지 기도하며, 박해를 견디고, 선한 행실로써 진리를 드러내는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8절에서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태초에 가정이 있었습니다만, 가정 이전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가정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정보다 먼저입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하와보다 하나님이 먼저였습니다. 하와에게도, 아담보다 하나님이 먼저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간의 삶의 기초이며, 가정생활의 기초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온전히 회복되기 위해서는 온 가정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복음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세워질 때, 가정은 제대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6.
이 대목에서 저의 가정 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읽은 예수님의 말씀이 저의 가정에 그대로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제 가정의 신앙의 이력은 4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국의 초대 교인들이 다 그랬듯이, 처음에는 증조할머니 혼자서 믿으셨습니다. 남편과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0리도 넘는 길을 걸어 새벽기도회와 예배에 참여하셨습니다. 그 믿음은 첫째 며느리인 저의 할머님께 이어졌습니다. 시집오신 할머니께서는 시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박해는 더욱 거칠었습니다만, 할머니께서는 굳굳하게 믿음을 지키셨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가정 안에 있는 남자들은 하나도 믿지 않았습니다. 두 여인은 주부로서 해야 할 일을 정성으로 받들면서 묵묵히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신앙이 3대에 이르러 제 모친에게 이어졌습니다. 제 어머님은 시집오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시집에 오시어 시어머니와 시할머니와 함께 세 여인이 믿음 생활을 하면서, 점점 가정 안에서 믿음의 영향이 강해졌습니다. 믿음의 영향이 가정 안에 점점 두드러지게 나타나자, 세 여인의 신앙에 대한 남성들의 박해도 컸습니다. 부모님은 당시로서는 예외적으로 연애결혼을 하셨는데, 아버님은 결혼하면 함께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어머님께 약속하고는, 결혼하고 나서 입을 씻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한 때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어머님의 신앙생활을 반대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제 가정의 별로 많지 않은 불화의 원인들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믿지 않던 가족들이 예수를 믿는 가족들을 박해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저도 때로, "이럴 바에야 차라리 믿지 않으면 얼마나 속 편할까? 왜 엄마는 저렇게 고통을 받으시면 서도 교회를 다니려 하시는 걸까?"라고 의문을 가졌을 만큼, 불안 가운데서 지내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박해로부터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저의 형제들은 자주 작전을 짜야 했습니다. 분노한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교회에서 오시는 어머님을 중도에 다른 곳으로 인도하기를 여러 번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은 아버님을 미워하기는커녕,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셨고, 그분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드렸고, 마침내 그 견고하던 아버님의 불신의 성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날이 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4대째 이르러 온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고백하고 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박해자였던 아버님은 신실한 신앙인이 되시고 존경받는 장로님으로 은퇴를 하셨고, 4대째에 이르러 목사도 한 사람 나오게 되었고, 5대에 이르기까지 믿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이 온전해지려면 아직도 한 참 멀었고, 형제들의 가정 가정이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되기에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과거에 증조할머님으로부터 어머님께 이르기까지 겪으셔야 했던 박해는 충분히 보상되고도 남았습니다. 지금의 우리 가족의 행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7.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한 번 더 여쭙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까? 그게 정답입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라는 질문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만큼이나 잘못된 질문입니다. 질문이 잘못되면, 답도 잘못됩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잘 해야 합니다. 똑똑한 아이들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으면, "둘 다 좋아"라고 답합니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러면 알아듣고 질문을 멈춰야 하는데, 어리석은 부모는 굳이 또 묻습니다. "에이, 그래도,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거 아냐? 누구야, 응? 누가 더 좋아?"라고 따져 묻습니다. 명석치 못한 아이는 이 순간에, "부모 중 어느 한 편을 택해야 하는 거구나!"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둘 다 우선입니다"가 맞습니다. 교회와 가정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교회의 삶을 통해 가정이 회복되어야 하고, 가정의 회복은 다시 교회를 통한 사역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더 큰 가정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고리는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태초에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은 참된 사랑과 이해와 용서와 용납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참된 쉼이 있고, 참된 위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이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졌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곳, 서로 상처 주는 곳, 서로 미워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쉼이 없고, 더 이상 위로가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가장 먼저 우리 개인에게 일어나야 하고, 그 다음 우리 가정에 일어나야 합니다. 깨어진 가정들이 태초의 가정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일을 위해 오셨습니다. 가정은 복음의 능력이 가장 먼저 나타나야 하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일이 우리 각자의 가정에 일어나도록 하십시다. 그 일을 위해 먼저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도록 힘쓰십시다. 더욱 영적 생활에 힘쓰십시다. 우리가 영적으로 회복되지 않고는 그 어떤 노력도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내 가정이 회복되려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나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그분의 은총의 빛으로 내가 새로 지어져야 합니다. 한 번 그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 지어져 가야 합니다. 잘 믿는 것 같은 우리는 얼마나 자주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 어느 순간에도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 없는 완성품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매일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변화가 내 배우자에게, 내 자녀들에게, 형제들에게 그리고 부모에게 파급되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성 생활의 신비입니다. 한 사람이 진실하고 일관되게 영적 생활을 해 나갈 때, 그 사람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그 영향력이 미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의 영적 감화력에 이끌려 변화되어 갑니다. 때로 시간이 걸리지만, 이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가정이 하나의 작은 교회가 되는 것, 하나의 영적 공동체가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바라고 기도해야 할 목표입니다. 나에게 그 마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일을 이루려는 열심이 내게 있다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은총을 허락해 주실 것이며, 그로 인해 태초의 가정으로 회복되어 나갈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 모두에게 이 거룩한 마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일을 향한 열심이 불 일 듯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그 마음과 열심을 가진 모든 심령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가정이 영적 공동체로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한 영적 가정으로 성숙해 가기를 기도합니다.
태초에 가정을 세우신 주님,
오늘의 가정들을 보시면서 아파하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가
주님 안에서 새로 지어지게 하소서.
저의 변화로 가정이 변화되게 하소서.
저의 가정을 영적 공동체로 만들어 주소서.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십자가를 능히 지고 가게 하소서.
우리 교회를,
아니 이 땅의 모든 교회를
영적 가정이 되게 하셔서
혈육을 넘어서 사랑스러운 가족을 만나게 하시고,
또한 혈육의 가정을 회복시키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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