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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26:2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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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7.5.27
연속설교 "가정을 생각하다" (3)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함께"
(We with God, God with Us)
--창세기 26:26-33 사도행전 2:1-4
1.
지난 주, 우리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브라함이 그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한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와 관계하여, 얼마 전, 어떤 분으로부터 아주 황당해 보이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잖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 그러셨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요. 하지만 ‘이삭은 뭔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거든요? 아버지가 자신의 손발을 묶고 목에 칼을 들이대는 충격적인 경험이 이삭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싶어요. 아브라함에게 뭔가 뜻하신 것이 있었다면, 이삭에게도 있지 않았겠어요? 뭘까요? 이삭이 이 충격(trauma)을 어떻게 소화해 냈을까요?
이 질문은 믿음이 깊었던 철학자 죄렌 키엘케골(Soren Kierkegaard)의 명작 <공포와 전율>(Fear and Trembling)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책에서 키엘케골은, 이해할 수 없는 이 명령에 대해 아브라함이 취했을 다른 선택을 가정해 보는데, 그 중 하나가 이런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심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이삭이 알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상처를 입을까 염려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결심이라고 말하고는, 칼을 빼어 듭니다. 그 때, 하나님이 개입하여 칼을 쥔 아브라함의 손을 잡아챕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이삭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소심하고 유약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창세기 22장 이후의 이삭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이삭은 실제로 이 사건을 통해 심리적인 충격을 받아, 소심하고 유약한 사람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뭐 하나,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결혼도,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연출됩니다. 나중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삭은 에서와 야곱 그리고 아내 리브가 사이에서 아주 무력한 가장으로 처신합니다. 오늘, 그 일부만 읽었지만, 26장을 보면 이삭의 소심성과 유약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 한 예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에서 나타납니다. 그랄 지방 사람들이 너무나도 아리따운 자기 아내를 탐하여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고 지레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위험을 벗어났지만, 그는 이렇게 걱정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물이 귀한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우물이 아주 중요한데,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파는 데는 선수였습니다. 힘쓰고 애써서 우물을 파 가축들에게 물을 먹이고 있노라면, 그랄 지방 사람들이 와서 빼앗습니다. 웬만하면 대항해서 싸워 어렵게 판 우물을 지킬 법도 한데, 순순히 물러나,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또 팝니다. 그러면 그 지방 사람들이 또 와서 시비를 걸고 우물을 빼앗습니다. 그러면 이삭은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또 팝니다. 26장 22절을 보니, 이렇게 하기를,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을 때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뒤집으면 뭡니까? 그 지방 사람들에게 필요한 우물들을 다 파주고 나서야 이삭은 자기 우물을 가질 수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까? 참, 보기 드물게 나약하고 소극적이고 소심한 사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이렇듯, 이삭은 한 번도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발휘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리아 산에서의 그 충격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이삭이 소심하고 유약하고 소극적으로 살았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실패자로 살았던 것은 아니며, 불행했던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고 말해줍니다.
흉년을 피하여 그랄 땅에 내려간 이삭은 그곳에 있는 동안 거대한 부자가 됩니다. 꼭 부자가 되려고 의도하고 분투한 것은 아닙니다.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주고, 빼앗는 사람이 있으면 빼앗기고, 사취하는 사람이 있으면 속아주는데도, 이삭이 손을 대는 일마다 잘 되는 겁니다. 이삭 자신도 의도하지 않은 일들이 터집니다. 세상 적으로는 계속 손해만 보고 피해 다니지만, 가는 곳마다 그는 복의 근원이 됩니다.
불레셋 왕 아비멜렉은, 그랄 지방 사람들과 같이, 처음에는 이삭을 무시했습니다. 가뭄을 피해 몸 붙여 살고 있는 나그네가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그런데 두고 보니 그게 아닙니다. 무력하고 만만해 보이고 하찮아 보이는 이삭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그 지방 사람들이 알아차립니다. 처음에는 밀리는 대로 밀려다니고 치이는 대로 치이던 이삭이 하잘 것 없어 보였지만, 나중에는 "이 사람에게는 뭔가 믿는 것이 있구나! 뭔가 대단한 것을 믿으니, 저렇게 대책 없이 손해보고 대책 없이 양보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삭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당신 사이에 평화조약을 맺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와 당신 사이에 언약을 맺읍시다. 우리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고, 당신을 잘 대하여, 당신을 평안히 가게 한 것처럼, 당신도 우리를 해롭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분명히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28-29절)
여러분, 누군가 여러분을 잘 아는 사람이 다가와,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이게 보통 말입니까? 아, 평생에 그런 인정을 받을 정도로 한 번 살아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정을 받는 것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이 좋은 것입니다.
3.
서두에서 소개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또한 이삭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의 충격으로 인해 소심해지고 나약해졌는지는 모릅니다만,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은 더욱 든든해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이 나약해지기만 하면 대책 없지만, 그 약함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원인이 된다면, 그 나약함은 오히려 반길만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합니다"(고후 12:10)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진실로 강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의지할 때인데, 인간적인 약함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든다면, 그 약함이 오히려 강함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삭은 이 사건을 통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자신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 전까지, 이삭은 아버지의 행동을 보면서, 자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분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 같은 지나친 사랑을 보고, 이삭은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마치 왕자라도 되는 양, 자신이 진실로 그렇게 귀하신 몸인 양, 오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자신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있음을 충격적으로 확인했습니다. 자기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있다는 자각에 이르자, 이삭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이 산산이 깨어지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이후로 이삭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심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하는 행동을 보면서, 이삭은 하나님이 아버지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배웠습니다. 아버지에게 그랬듯이, 자신에게도 하나님이 제일 중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결코 귀하신 몸이 아니라는 사실도 겸손히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그는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믿음 안에서 자라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삭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은 또한 이삭과 함께 하셔서,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셨습니다.
이토록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굳게 믿었던 이삭이기에, 그는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손해 보고 밀리고 치이고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패배감이나 적개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 평화를 일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
4.
그렇다면, 가정을 생각하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행동을 보고, 그들보다 하나님이 더 우선이라고 느낄까, 아니면 자신들이 진짜 귀하신 몸이라고 착각할까? 아이들이 우리의 삶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까, 아니면 삶에 필요한 장식품 정도로 하찮게 생각할까? 자녀는 부모의 거울입니다. 부모의 가치관이 자녀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에게도 모리아 산의 경험이 있습니다. 제 기억이 닿는 한, 지금까지 저는 주일 예배에 딱 한 번 빠져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아침에 주일 학교를 위해 교회로 가는데, 중도에서 동네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이, 학교에서 다른 동네 아이들과 축구 시합을 하기로 했으니, 같이 가자는 겁니다. 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잘 하지도 못하는 축구이지만, 그 날은 왠지 주일학교보다 축구가 더 마음을 끌었습니다. 축구를 하다가 주일 학교가 끝날 때쯤 집으로 오면 될 것이라는 속계산을 하고, 친구를 따라 학교로 가서 한 참을 놀았습니다.
제 딴에는 적당한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왔는데, 벌써 어머니께서는 교회에 다녀오신 뒤였습니다. 시계가 귀하던 때라, 감각으로 시간 계산을 했는데, 그만 너무 오래 놀아버렸던 것입니다. 저를 보자마자 어머니는 굳은 표정으로 제 손목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머님은 동생 기저귀로 제 손을 묶어 놓고는, 왜 이러느냐고, 엄마 속 터져 죽는 꼴 보고 싶으냐고 혼을 내면서 때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진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질식할 듯이 떨고 있었습니다. 제가 정신을 잃기 직전, 어머니의 손을 잡아챈 천사가 있었습니다. 할머니였습니다. 그분은 제 울음소리를 듣고 들어 오셔서 저를 구출해 주셨습니다.
그 때 제가 공포스럽게 확인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어머님은, 하나님이냐 아들이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택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머님에게는 저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기초 석이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후로 저는 주일 예배 빠지는 것에 대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마치 어머님을 떠나는 것처럼 생각했기에, 어머님 곁에 있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저에게도 역시 하나님이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혹시,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그 때 왜 그렇게 모질게 하셨느냐고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좀 지나쳤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머님은, 한 끼에 30명 가까운 밥을 해 대야 했던 대가족의 며느리로서 마음에 쌓인 한을 어린 너에게 쏟아 부었던 것 같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하셨습니다. 그게 어디 사과 받을 일입니까? 지금 생각해도 어머니께서 지나치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제게는 그것이 상처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저는 그 때, 저에 대한 어머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어머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어린 저였지만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어머니께서 제게 쏟아 부으신 사랑 때문에, 저는 곧 그 기억을 의식 저 깊은 곳에 묻어두고 다시 평상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5.
저는 이런 경험 때문에, 아버지가 칼을 빼어 들고 자신의 목을 내려치려던 기억이 이삭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삭은 이미 아버지 아브라함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고 자라왔기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든든했기 때문에, 이 한 번의 사건이 그 믿음을 흔들지 못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랑이 그 아픈 기억을 의식의 깊은 바닥으로 밀어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삭에게 하나님 중심의 인생관을 심어 주었을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그 어떤 것도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있던 상처도 진실한 사랑이 있으면 치료되고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대답은 사랑입니다. 먼저 사랑부터 해야 합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에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을 귀하신 몸으로 여길 즈음이 되면, 우리는 그들보다 더 중요한 분이 있음을 선언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사랑도 집착으로 전락하지 않을 것이며, 그래야만 아이들도 자기들의 위치를 제대로 알게 되고, 그래야만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게 됩니다.
요즈음 아이들을 걱정하면서 저는 자주 그런 질문을 했었습니다. 우리 때는 얼마든지 견뎌내던 어려움을 요즘 아이들은 왜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부모님들에게 모질게 훈련을 받았는데, 그로 인해서 깨어지기는커녕 반대로 그로 인해 강인해졌는데, 왜 요즈음 아이들은 조금만 잡으려 해도 깨어지는 것일까? 뭐, ‘요즈음 아이들’이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제 아이들에게서 겪은 일입니다. 저는 아주 강하게 훈련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제 아이들도 그렇게 강하게 훈련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고 보니, 아이들이 깨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강하게 키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아직도 이 질문이 제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번에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최소한 여러 가지의 답 중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요즈음의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요즈음의 부모들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과거의 부모들은 먼저 사랑하고 그 바탕에서 훈련을 했는데, 요즈음 부모들은 사랑하는 일에는 게을리 하고 훈련만 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도 저도 하지 않는 부모도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집착하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제멋대로 놔두고, 훈련한다고 하면서 질식시킵니다. 도대체 어쩌려고 아이를 낳았는지, 딱한 부모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해 보려는 부모들도 많습니다. 문제는 자식 사랑하는 법에 무지한 경우가 많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자녀들을 양육하려는 부모는 더 더욱 드물다는 점에 있습니다.
6.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 주시기로 약속하신 그 진리의 영, 그 성령께서, 오순절에 함께 모여 있던 초대 교인들에게 임하신 것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날입니다. 성령강림절에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바로 이것,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과 ‘항상’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항상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처럼,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진실로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는 것을 우리가 똑똑히 보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성령 강림을 통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가 매일 성령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께 의지하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저를 관찰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진실로 당신과 함께 하시는 줄을 똑똑히 보았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제 인생을 성공이라고 평가할 것입니다. 저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그 정도로 분명히 드러나 보인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만큼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영성 생활의 목표입니다. 저는 제 목회를 두고,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역사하고 계심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목회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심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 제 목회에 대한 저의 기도요 바램입니다. 그것이 ‘영성 목회’의 초점입니다.
그러기 위해 저는 하나님을 제일 우선에 두고 살아가야 함을 압니다. 아직도 철저하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우선하는 삶을 살기 위해 힘씁니다. 일과 생활 중에 기도로써 성령이신 하나님과 사귀는 일을 가장 우선에 두고 삽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 내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합니다. 십일조 생활을 통해 내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선언합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제 지식과 사고의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선언합니다. 내 개인적인 이익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앞세움으로, 하나님의 뜻이 제게 더 우선임을 선언합니다. 생각에 있어, 말에 있어, 행동에 있어, 이 우선성이 명료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사실이 진실로 믿어질 때, 저는 이 세상의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그 무엇에도 붙들리지 않은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모한다스 간디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모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제가 진실로 이렇게 살아갈 때, 세상은 처음에 저를 우습게 볼지 모르지만, 성령이 제 안에 충만하게 역사하게 되면 저를 호락호락하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저는 질그릇처럼 보잘 것 없지만, 제 안에는 보화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 때문에 저는 기꺼운 마음으로 좀 더 희생하며, 좀 더 양보하며, 평화를 일구며, 복의 근원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저는 진실로 성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로 행복하고 복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제 아이들에게 전해진다면, 저는 더 이상 다른 것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제 아이들을 보고, "우리가 지켜보니, 당신은 참 똑똑하군요"라고 인정하게 될 것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언젠가 제 아이들이, "우리가 지켜보니, 하나님이 진정으로 당신과 함께 계시는군요"라는 인정을 받게 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그들 스스로 그런 믿음 안에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기꺼이 양보하며, 기꺼이 손해를 당하며,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그것이 가장 좋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저희를 도우소서.
주님께서 진실로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저희 자신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며,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최우선에 모시게 하소서.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저희 자신에게도
이웃에게도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소서.
저희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특별히 저희 자녀들에게도
이 믿음을 주소서.
성령을 통해 주님과 함께 하는 것,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연속설교 "가정을 생각하다" (3)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함께"
(We with God, God with Us)
--창세기 26:26-33 사도행전 2:1-4
1.
지난 주, 우리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브라함이 그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한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와 관계하여, 얼마 전, 어떤 분으로부터 아주 황당해 보이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잖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 그러셨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요. 하지만 ‘이삭은 뭔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거든요? 아버지가 자신의 손발을 묶고 목에 칼을 들이대는 충격적인 경험이 이삭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싶어요. 아브라함에게 뭔가 뜻하신 것이 있었다면, 이삭에게도 있지 않았겠어요? 뭘까요? 이삭이 이 충격(trauma)을 어떻게 소화해 냈을까요?
이 질문은 믿음이 깊었던 철학자 죄렌 키엘케골(Soren Kierkegaard)의 명작 <공포와 전율>(Fear and Trembling)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책에서 키엘케골은, 이해할 수 없는 이 명령에 대해 아브라함이 취했을 다른 선택을 가정해 보는데, 그 중 하나가 이런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심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이삭이 알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상처를 입을까 염려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결심이라고 말하고는, 칼을 빼어 듭니다. 그 때, 하나님이 개입하여 칼을 쥔 아브라함의 손을 잡아챕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이삭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소심하고 유약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창세기 22장 이후의 이삭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이삭은 실제로 이 사건을 통해 심리적인 충격을 받아, 소심하고 유약한 사람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뭐 하나,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결혼도,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연출됩니다. 나중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삭은 에서와 야곱 그리고 아내 리브가 사이에서 아주 무력한 가장으로 처신합니다. 오늘, 그 일부만 읽었지만, 26장을 보면 이삭의 소심성과 유약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 한 예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에서 나타납니다. 그랄 지방 사람들이 너무나도 아리따운 자기 아내를 탐하여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고 지레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위험을 벗어났지만, 그는 이렇게 걱정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물이 귀한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우물이 아주 중요한데,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파는 데는 선수였습니다. 힘쓰고 애써서 우물을 파 가축들에게 물을 먹이고 있노라면, 그랄 지방 사람들이 와서 빼앗습니다. 웬만하면 대항해서 싸워 어렵게 판 우물을 지킬 법도 한데, 순순히 물러나,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또 팝니다. 그러면 그 지방 사람들이 또 와서 시비를 걸고 우물을 빼앗습니다. 그러면 이삭은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또 팝니다. 26장 22절을 보니, 이렇게 하기를,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을 때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뒤집으면 뭡니까? 그 지방 사람들에게 필요한 우물들을 다 파주고 나서야 이삭은 자기 우물을 가질 수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까? 참, 보기 드물게 나약하고 소극적이고 소심한 사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이렇듯, 이삭은 한 번도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발휘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리아 산에서의 그 충격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이삭이 소심하고 유약하고 소극적으로 살았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실패자로 살았던 것은 아니며, 불행했던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고 말해줍니다.
흉년을 피하여 그랄 땅에 내려간 이삭은 그곳에 있는 동안 거대한 부자가 됩니다. 꼭 부자가 되려고 의도하고 분투한 것은 아닙니다.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주고, 빼앗는 사람이 있으면 빼앗기고, 사취하는 사람이 있으면 속아주는데도, 이삭이 손을 대는 일마다 잘 되는 겁니다. 이삭 자신도 의도하지 않은 일들이 터집니다. 세상 적으로는 계속 손해만 보고 피해 다니지만, 가는 곳마다 그는 복의 근원이 됩니다.
불레셋 왕 아비멜렉은, 그랄 지방 사람들과 같이, 처음에는 이삭을 무시했습니다. 가뭄을 피해 몸 붙여 살고 있는 나그네가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그런데 두고 보니 그게 아닙니다. 무력하고 만만해 보이고 하찮아 보이는 이삭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그 지방 사람들이 알아차립니다. 처음에는 밀리는 대로 밀려다니고 치이는 대로 치이던 이삭이 하잘 것 없어 보였지만, 나중에는 "이 사람에게는 뭔가 믿는 것이 있구나! 뭔가 대단한 것을 믿으니, 저렇게 대책 없이 손해보고 대책 없이 양보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삭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당신 사이에 평화조약을 맺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와 당신 사이에 언약을 맺읍시다. 우리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고, 당신을 잘 대하여, 당신을 평안히 가게 한 것처럼, 당신도 우리를 해롭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분명히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28-29절)
여러분, 누군가 여러분을 잘 아는 사람이 다가와,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이게 보통 말입니까? 아, 평생에 그런 인정을 받을 정도로 한 번 살아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정을 받는 것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이 좋은 것입니다.
3.
서두에서 소개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또한 이삭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의 충격으로 인해 소심해지고 나약해졌는지는 모릅니다만,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은 더욱 든든해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이 나약해지기만 하면 대책 없지만, 그 약함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원인이 된다면, 그 나약함은 오히려 반길만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합니다"(고후 12:10)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진실로 강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의지할 때인데, 인간적인 약함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든다면, 그 약함이 오히려 강함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삭은 이 사건을 통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자신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 전까지, 이삭은 아버지의 행동을 보면서, 자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분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 같은 지나친 사랑을 보고, 이삭은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마치 왕자라도 되는 양, 자신이 진실로 그렇게 귀하신 몸인 양, 오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자신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있음을 충격적으로 확인했습니다. 자기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있다는 자각에 이르자, 이삭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이 산산이 깨어지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이후로 이삭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심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하는 행동을 보면서, 이삭은 하나님이 아버지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 배웠습니다. 아버지에게 그랬듯이, 자신에게도 하나님이 제일 중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결코 귀하신 몸이 아니라는 사실도 겸손히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그는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믿음 안에서 자라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삭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은 또한 이삭과 함께 하셔서,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셨습니다.
이토록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굳게 믿었던 이삭이기에, 그는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손해 보고 밀리고 치이고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패배감이나 적개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 평화를 일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
4.
그렇다면, 가정을 생각하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행동을 보고, 그들보다 하나님이 더 우선이라고 느낄까, 아니면 자신들이 진짜 귀하신 몸이라고 착각할까? 아이들이 우리의 삶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까, 아니면 삶에 필요한 장식품 정도로 하찮게 생각할까? 자녀는 부모의 거울입니다. 부모의 가치관이 자녀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에게도 모리아 산의 경험이 있습니다. 제 기억이 닿는 한, 지금까지 저는 주일 예배에 딱 한 번 빠져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아침에 주일 학교를 위해 교회로 가는데, 중도에서 동네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이, 학교에서 다른 동네 아이들과 축구 시합을 하기로 했으니, 같이 가자는 겁니다. 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잘 하지도 못하는 축구이지만, 그 날은 왠지 주일학교보다 축구가 더 마음을 끌었습니다. 축구를 하다가 주일 학교가 끝날 때쯤 집으로 오면 될 것이라는 속계산을 하고, 친구를 따라 학교로 가서 한 참을 놀았습니다.
제 딴에는 적당한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왔는데, 벌써 어머니께서는 교회에 다녀오신 뒤였습니다. 시계가 귀하던 때라, 감각으로 시간 계산을 했는데, 그만 너무 오래 놀아버렸던 것입니다. 저를 보자마자 어머니는 굳은 표정으로 제 손목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머님은 동생 기저귀로 제 손을 묶어 놓고는, 왜 이러느냐고, 엄마 속 터져 죽는 꼴 보고 싶으냐고 혼을 내면서 때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진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질식할 듯이 떨고 있었습니다. 제가 정신을 잃기 직전, 어머니의 손을 잡아챈 천사가 있었습니다. 할머니였습니다. 그분은 제 울음소리를 듣고 들어 오셔서 저를 구출해 주셨습니다.
그 때 제가 공포스럽게 확인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어머님은, 하나님이냐 아들이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택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머님에게는 저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기초 석이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후로 저는 주일 예배 빠지는 것에 대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마치 어머님을 떠나는 것처럼 생각했기에, 어머님 곁에 있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저에게도 역시 하나님이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혹시,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그 때 왜 그렇게 모질게 하셨느냐고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좀 지나쳤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머님은, 한 끼에 30명 가까운 밥을 해 대야 했던 대가족의 며느리로서 마음에 쌓인 한을 어린 너에게 쏟아 부었던 것 같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하셨습니다. 그게 어디 사과 받을 일입니까? 지금 생각해도 어머니께서 지나치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제게는 그것이 상처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저는 그 때, 저에 대한 어머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어머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어린 저였지만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어머니께서 제게 쏟아 부으신 사랑 때문에, 저는 곧 그 기억을 의식 저 깊은 곳에 묻어두고 다시 평상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5.
저는 이런 경험 때문에, 아버지가 칼을 빼어 들고 자신의 목을 내려치려던 기억이 이삭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삭은 이미 아버지 아브라함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고 자라왔기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든든했기 때문에, 이 한 번의 사건이 그 믿음을 흔들지 못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랑이 그 아픈 기억을 의식의 깊은 바닥으로 밀어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삭에게 하나님 중심의 인생관을 심어 주었을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그 어떤 것도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있던 상처도 진실한 사랑이 있으면 치료되고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대답은 사랑입니다. 먼저 사랑부터 해야 합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에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을 귀하신 몸으로 여길 즈음이 되면, 우리는 그들보다 더 중요한 분이 있음을 선언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사랑도 집착으로 전락하지 않을 것이며, 그래야만 아이들도 자기들의 위치를 제대로 알게 되고, 그래야만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게 됩니다.
요즈음 아이들을 걱정하면서 저는 자주 그런 질문을 했었습니다. 우리 때는 얼마든지 견뎌내던 어려움을 요즘 아이들은 왜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부모님들에게 모질게 훈련을 받았는데, 그로 인해서 깨어지기는커녕 반대로 그로 인해 강인해졌는데, 왜 요즈음 아이들은 조금만 잡으려 해도 깨어지는 것일까? 뭐, ‘요즈음 아이들’이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제 아이들에게서 겪은 일입니다. 저는 아주 강하게 훈련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제 아이들도 그렇게 강하게 훈련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고 보니, 아이들이 깨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강하게 키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아직도 이 질문이 제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번에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최소한 여러 가지의 답 중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요즈음의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요즈음의 부모들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과거의 부모들은 먼저 사랑하고 그 바탕에서 훈련을 했는데, 요즈음 부모들은 사랑하는 일에는 게을리 하고 훈련만 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도 저도 하지 않는 부모도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집착하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제멋대로 놔두고, 훈련한다고 하면서 질식시킵니다. 도대체 어쩌려고 아이를 낳았는지, 딱한 부모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해 보려는 부모들도 많습니다. 문제는 자식 사랑하는 법에 무지한 경우가 많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자녀들을 양육하려는 부모는 더 더욱 드물다는 점에 있습니다.
6.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 주시기로 약속하신 그 진리의 영, 그 성령께서, 오순절에 함께 모여 있던 초대 교인들에게 임하신 것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날입니다. 성령강림절에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바로 이것,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과 ‘항상’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항상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처럼,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진실로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는 것을 우리가 똑똑히 보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성령 강림을 통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가 매일 성령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께 의지하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저를 관찰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진실로 당신과 함께 하시는 줄을 똑똑히 보았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제 인생을 성공이라고 평가할 것입니다. 저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그 정도로 분명히 드러나 보인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만큼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영성 생활의 목표입니다. 저는 제 목회를 두고,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역사하고 계심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목회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심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 제 목회에 대한 저의 기도요 바램입니다. 그것이 ‘영성 목회’의 초점입니다.
그러기 위해 저는 하나님을 제일 우선에 두고 살아가야 함을 압니다. 아직도 철저하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우선하는 삶을 살기 위해 힘씁니다. 일과 생활 중에 기도로써 성령이신 하나님과 사귀는 일을 가장 우선에 두고 삽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 내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합니다. 십일조 생활을 통해 내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선언합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제 지식과 사고의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선언합니다. 내 개인적인 이익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앞세움으로, 하나님의 뜻이 제게 더 우선임을 선언합니다. 생각에 있어, 말에 있어, 행동에 있어, 이 우선성이 명료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사실이 진실로 믿어질 때, 저는 이 세상의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그 무엇에도 붙들리지 않은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모한다스 간디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모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제가 진실로 이렇게 살아갈 때, 세상은 처음에 저를 우습게 볼지 모르지만, 성령이 제 안에 충만하게 역사하게 되면 저를 호락호락하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저는 질그릇처럼 보잘 것 없지만, 제 안에는 보화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 때문에 저는 기꺼운 마음으로 좀 더 희생하며, 좀 더 양보하며, 평화를 일구며, 복의 근원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저는 진실로 성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로 행복하고 복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제 아이들에게 전해진다면, 저는 더 이상 다른 것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제 아이들을 보고, "우리가 지켜보니, 당신은 참 똑똑하군요"라고 인정하게 될 것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언젠가 제 아이들이, "우리가 지켜보니, 하나님이 진정으로 당신과 함께 계시는군요"라는 인정을 받게 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그들 스스로 그런 믿음 안에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기꺼이 양보하며, 기꺼이 손해를 당하며,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그것이 가장 좋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저희를 도우소서.
주님께서 진실로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저희 자신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며,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최우선에 모시게 하소서.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저희 자신에게도
이웃에게도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소서.
저희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특별히 저희 자녀들에게도
이 믿음을 주소서.
성령을 통해 주님과 함께 하는 것,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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