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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25-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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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7.6.3
연속설교 "가정을 생각하다" (4)
"믿는 사람만이 보낼 수 있다"
(Only Those Who Believe Let Go)
--누가복음 2:25-35
1.
"가족을 손님처럼 여겨라"는 말이 있습니다. 맞을 때 반가이 맞고, 보낼 때 기쁘게 보내라는 말입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영원히 함께 살 것 같지만, 언젠가 헤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헤어져야 할 때도 있지만, 정신적으로 떠나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잘 맞이하고, 잘 대접하고, 잘 살아야 하지만, 또한 잘 헤어질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잘 떠날 줄 알아야 하고, 잘 떠나보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며, 때로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장 정성을 들여 잘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준비가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가정과 관계하여 ‘떠나보내기’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처음 부모가 된 사람들에게 제가 자주 읽어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지 팔일이 되자, 그 부모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봉헌례를 올립니다. 그 때, 성전에 시므온이라는 아주 경건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구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여, 시므온은 초조해 있었습니다. 그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보고,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아기 예수님을 보고 시므온은 얼마나 기뻤던지,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29절)라고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다해 아기 예수님을 축복한 다음, 시므온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34-35절)
2.
시므온은, 장차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우셔서 메시아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면서 마리아에게 경고합니다.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도대체, 태어난 지 일주일이 갓 지난 아이를 안고 있는 어린 엄마에게 이게 할 소리입니까? 이 말을 들은 마리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겁니다. 시므온은 더 이상 그들을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는지 모릅니다. 혹은, 자신의 말이 듣기에 거북하기는 하지만, 장차 당할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미리 준비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 경우야 어찌되었든, 시므온의 예언은 마리아에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30세가 갓 넘은 아들을 하나님께 내어 주어야 했고, 그로부터 약 3년여 동안 칼이 마음을 찌르는 듯한 아픔과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돈 많이 버는 직업은 아니지만 먹고 살기에 별로 어렵지 않은 목수로 살면서, 착한 처자와 결혼하고, 자식들 낳아 기르면서, 부모 부양하고, 형제자매와 함께 우애 좋게 살기를 선택했다면, 그 어머니의 마음은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정처도 없이 떠돌며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나 듣고 다닙니다. 권력자들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 미움은 점점 강해져 박해가 되고, 나중에는 모진 고난을 겪고, 십자가 위에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합니다. 마리아는 그 모든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서서히 죽어가는 동안, 그 옆에서 지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는 동안 그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 모든 아픔은 마리아가 아들을 내어 주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아들이 가는 곳마다 따라가 눈물 콧물로 말리고 다녔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소명을 이루기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마리아도 처음에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들이 미쳤다는 소리가 들리자, 다른 자식들과 함께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이후로 어머니 마리아도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견하고 방해하려고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 아들의 소명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따라 다닙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고 참된 사랑을 경험하고 진리를 찾을 수 있게 된 배후에는, 한 어머니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주고 그에 따르는 아픔을 묵묵히 견딘, 위대한 모성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내어 주기로 결단하고 그 결단에 따르는 고난을 감내한 한 여인이 그 배후에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마리아에게는 실로 메시야의 어머니로 택함 받을 특별한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위대한 결단과 인내심은 오늘 우리 모든 부모들에게 하나의 모델로 서 있습니다.
3.
이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부모 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내 자식을 내어줄 수 있을까? 나는 내 자식을 내어 주는 아픔을 견딜만한가? 혹시 나는 내 자식을 영원히 품에 안고 싶어 하지 않는가?
물론, 자식을 영원히 품에 안고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정상적인 부모의 공통된 감정일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어려움을 당하고 고생하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들을 자기 품 안에 안고 있으려 합니다. 그러면 안전할 것 같고, 그러면 행복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이 진실로 안전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제 때에 부모를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제 때에 젖을 떼야 하고, 제 때에 부모를 떨어져 있는 훈련을 받아야 하고, 제 때에 제 스스로의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스스로 앞길을 개척해 가야하고, 제 때에 짝을 만나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그 때마다 자식을 내어 놓는 것이 불안하고 때로는 아프지만, 그 때마다 잘 보내고 잘 떠나지 않으면 큰 어려움이 생깁니다.
주일마다, 아래층 유아 실에서는 보내는 훈련과 떠나는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를 잠시 떼어 놓으려 하면, 처음에는 울고불고 떼를 쓰지만, 그리고 그런 아이를 두고 돌아서는 것이 마음 아프지만, 당연히 거쳐야 할 단계입니다. 때론 아이보다 부모가, 이 작은 이별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잘 해야, 나중에 더 큰 이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대학교에 보내고도, 마음으로는 보내지 못하여 근심하는 부모도 있고, 부모를 떠나 기숙사에 와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결혼을 시키는 것도 떠나보내는 일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을 보면,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결혼의 원리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기 위해 필히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떠나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떠나서 독립해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에게도 힘 든 일이고, 자녀에게도 힘 든 일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자녀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도 많고, 결혼을 했으면서도 정신적으로 떠나지 못하는 자녀들도 많습니다.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로 인해 그리고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배우자로 인해 이혼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자녀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를 ‘헬리콥터형 부모’라고 한답니다. 자식이 어디를 가나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선회해 가며 감시하고 간섭하려는 부모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비유를 처음 보고는, ‘아, 그것 참 기가 막힌 비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헬리콥터가 머리 위에서 선회할 때, 얼마나 시끄러운지 경험해 보셨습니까? 두 귀를 틀어막아도 고통스럽습니다. 마찬가지로, 헬리콥터형 부모는 잔소리도 심합니다. 그런데 그 잔소리가 대부분 헬리콥터 소음처럼 필요 없는 말입니다. 또한 헬리콥터가 머리 위에서 선회할 때는, 거친 바람 때문에 옷깃을 힘껏 부여잡고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걸어야 합니다. 이처럼, 헬레콥터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을 열지 않고 폐쇄적으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4.
그런데 ‘내어주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꿈을 위해 자식을 내어 주는 일입니다. 자식에 대한 내 소유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내어드리고, 하나님의 꿈을 위해 헌신하도록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모든 ‘사소한 내어주기’는 이 ‘큰 내어주기’를 위한 연습이랄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내어주기에 준비되어 있습니까? 헬리콥터형 부모들은 절대로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해 갖는 유일한 소원은 돈 잘 버는 직업을 택하여 큰 집 사고, 자식들 교육 잘 시키고, 안전하고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섬기는 일에, 때로 돈 되지 않고 어렵지만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자식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니, 적어도 그런 뜻을 가지고 기도하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했을 때, 그 소명을 향해 떠나보낼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왔을 때, 아프지만, 힘들지만, 가슴에 칼을 대는 것처럼 아리더라도, 내어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세상에 좋은 것을 모두 차지하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참되고 영원한 가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얼마 전 <생일>과 <축복>이라는 시 선집을 소개했었는데, 그 저자인 서강대 장영희 교수님의 글 중, 그 아버지이신 영문학자 장왕록 교수님의 묘비명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묘비에 "나 그대 믿고 떠나리"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아버님이 직접 쓴 글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의 시구를 딴 것인지 모르지만, 그 묘비명을 읽을 때마다,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보여 주셨던 든든한 믿음을 떠올리며 감사한다고 글을 썼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내어 줄 수 있으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는 사람만이 보낼 수 있고, 믿는 사람만이 떠날 수 있습니다. 떠나보내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자녀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내지 못하고, 억지로 헤어졌을 때는 다시 만날 때까지 불안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불안해서 기도해 보지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한, 기도할수록 마음은 더 불안해집니다. 기도하는 모습으로 보아서는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보면 믿지 못하는 겁니다. 또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부모를 떠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디 믿을 구석이 있어야 믿죠. 하나도 믿을 구석이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믿습니까?"라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 자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믿어봄직 하다는 사실입니다. 자녀에게서 내가 원하는 하나의 가능성만을 찾으니,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뿐입니다. 공부를 잘 해야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요인은 수없이 많습니다. 한 사람에게 어떤 가능성이 담겨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메마른 씨앗 한 톨을 보고 거대한 참나무를 볼 눈을 가진 사람이 흔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 믿어야 합니다. 씨앗 속에 거대한 참나무가 들어있다고 믿고 흙 속에 심고 물을 주듯, 우리도 우리 자녀들의 숨겨진 잠재성을 믿고 내어 주어야 합니다.
둘째, 믿음직함은 믿어주는 사람 밑에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의심하고 감시하는 분위기에서는 믿음직함이 자라지 않습니다. 불안하지만, 혹시 안 될지도 모르지만, "자, 한 번 해 봐!"라고 말하며 어깨를 두들겨 주고 믿고 맡겨 놓으면, 그 사람은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믿음직스럽게 일을 이루어 냅니다. 그러므로 믿을 수 없음을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직하여 믿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믿어지지 않아도 든든히 믿어주는 것이 부모가 할 일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마음에 불안감이 들어찹니다. 믿고 맡겼다가 낭패를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듭니다. 그래서 챙기기 시작합니다. 그럴수록 믿음은 더욱 엷어집니다.
5.
1909년, 에모리 대학교 학장 제임스 딕키(James Dickey)가 어네스트 우드러프(Ernest Woodruff)라는 유명한 사업가에게 쓴 편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에모리 대학교 1학년에 다니던 그 아들에 관해 쓴 편지입니다.
저는 당신의 아들 로버트가 이번 학기에 대학교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만족스러운 성적을 내지 못했고, 그것을 보충할 방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댁의 아드님은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며, 게다가 결석도 잦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댁의 아드님은 학생으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만일 학업을 지속할 뜻이 있다면, 그가 준비된 수준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를 권고합니다. 1909년 2월 2일.
I do not think it advisable for him to return to college this term as he has not done satisfactory work and cannot therefore make up what he would lose before returning again. He has never learned to apply himself, which together with very frequent absences makes it impossible for him to succeed as a student. Should you desire for him to continue his academic career, I would suggest that he begin all over again starting at the point where he is qualified to work and then go forward. Feb. 2, 1909.
여러분 중 혹시 이와 비슷한 편지를 받아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것처럼 엄청나지는 않더라도, 학교에서 날아온 편지로 인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경험을 한 분들이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시 조지아의 아틀란타 시에서 명성이 높았던 사업가 아버지로서 이런 수치스러운 편지를 받았을 때, 그 아버지가 얼마나 실망스러웠을지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편지를 받고도 그 아들을 믿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편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오늘의 코카콜라 회사를 있게 한 로버트 우드러프(Robert Woodruff)입니다. 미국 역사에 가장 많은 재산을 소유했던 사람 중 하나, 음료수 하나로 세계를 정복하고 세상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던 그 사람,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냉정했던 에모리 대학교에 천문학적인 재산을 기부하고 떠난 그 사람, 바로 로버트 우드러프가 이편지의 주인공입니다. 얼마 전, 에모리 대학교의 옥스포드 칼리지를 방문했을 때, 우드러프 기념관에 전시된 원본 편지를 읽고, 매우 인상 깊어, 받아 적어 두었었습니다. 그가 한 때 이렇게 불성실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인상 깊었고, 나중에 교육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신을 내친 학교에 엄청난 기부금을 헌납했다는 사실도 인상 깊었습니다.
로버트 우드러프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공로가 누구에게 돌아갈지를 신경 쓰지 않는 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미칠 수 있는 곳에는 제한이 없다"(There is no limit to what a man can do or where he can go if he doesn’t mind who gets the credit). 혹시 "아니, 믿을 만 해야 믿지요. 믿을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믿어요?"라는 질문을 마음에 품고 계셨던 분이라면, 앞에서 읽어드린 편지와 그 편지의 주인공이 체험적으로 한 이 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에게 어떤 가능성이 담겨 있는지, 얼마나 믿을만한 사람인지, 얼마나 능력 있는 아이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고 내어 주어야 합니다. 믿고 맡겨야 합니다.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믿고 물러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 안에서 순이 돋고, 가지가 자라고, 잎이 피고, 꽃이 피며, 열매가 열립니다.
6.
자식을 믿고 기다릴 수 있으려면, 그 자식을 믿고 내 품에서 내어줄 수 있으려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내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그 자녀를 길러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가 하나님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돕기만 하면 됩니다. 그 자녀의 미래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나보다 내 자녀의 행복을 더 끔찍하게 생각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자녀의 가능성이 활짝 꽃 피어나기를 소원하는 간절함에 있어서 나는 하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마침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식도 손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부모가 어찌할 수 없음을 결국은 인정하게 됩니다. 어찌 하려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너무 늦은 깨달음은 절망과 후회와 배신감과 공허감을 함께 데리고 옵니다. 미리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귀한 자녀를 얼마 동안 양육하도록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분의 뜻을 찾아 양육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임지고 있음을 믿고, 떠나보낼 때 떠나보내고, 맡길 때 맡기고, 내어줄 때 내어 주어야 합니다. 비록 부모의 마음에 안 맞는 결정을 했다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찾은 소명이라면 기꺼이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는 사람만이 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자녀를 믿고, 자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자신의 품에서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보내고 나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비록, 때론 섭섭하고, 때론 보고 싶고, 때론 쓸쓸하여 고통스럽지만, 견딜 수 있습니다.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실 줄 믿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참되고 영원한 가치를 위해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을 믿기 때문에, 내어 주고 나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떠나보내고 나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떠나보냈을 때, 때로 넘어지고 때로 흔들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자녀를 믿고 견디고 기다립니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쳐서, 바로 서서 똑바로 걸을 때까지, 즐겁게 걷고 뛰며 삶을 누릴 때까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믿음이 그 힘입니다.
7.
이것은 자식을 가진 부모에게만 해당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부모를 가진 자식에게도 해당하는 진리이며, 서로 사랑하며 사는 부부에게도 해당하는 진리이며, 좋은 친구 관계에도 해당하는 진리입니다. 떠날 때 잘 떠나고, 보내야 할 때 잘 보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떠날 때 잘 떠나고, 보내야 할 때 잘 보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떠나고 보내는 과정은 아프지만, 그 아픔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몇 주일 전에 방문했을 때, 이미 반쯤은 떠나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육신은 고스란히 그곳에 계셨지만, 정신과 영혼은 반쯤 떠나셨다고 느꼈습니다.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별 연습을 시작해야 할 때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일기에 썼습니다.
가셔요, 어머니.
반쯤만 가셔요.
지금은 다 보내드릴 수 없으니
한 번에 다 보내드릴 수 없으니
반쯤만 가셔요.
때가 되면
다 보내 드려야 한다는 걸 알아요.
어머님은 원래 제소유가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딸이잖아요.
저에게 하나님의 역할을 하도록
잠시 함께 있도록 보내주신 천사잖아요.
그래서 그 역할이 다 끝나면
하나님께 돌아가셔야 함을
저는 알아요.
그러니 때가 되면
다 보내 드릴게요.
기쁜 마음을 보내 드릴게요.
하지만 조금만 더 계셔 주셔요.
반쯤만 계셔도 충분해요.
준비가 다 될 때까지
조금만 더 머물러 주셔요.
연속설교 "가정을 생각하다" (4)
"믿는 사람만이 보낼 수 있다"
(Only Those Who Believe Let Go)
--누가복음 2:25-35
1.
"가족을 손님처럼 여겨라"는 말이 있습니다. 맞을 때 반가이 맞고, 보낼 때 기쁘게 보내라는 말입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영원히 함께 살 것 같지만, 언젠가 헤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헤어져야 할 때도 있지만, 정신적으로 떠나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잘 맞이하고, 잘 대접하고, 잘 살아야 하지만, 또한 잘 헤어질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잘 떠날 줄 알아야 하고, 잘 떠나보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며, 때로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장 정성을 들여 잘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준비가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가정과 관계하여 ‘떠나보내기’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처음 부모가 된 사람들에게 제가 자주 읽어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지 팔일이 되자, 그 부모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봉헌례를 올립니다. 그 때, 성전에 시므온이라는 아주 경건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구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여, 시므온은 초조해 있었습니다. 그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보고,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아기 예수님을 보고 시므온은 얼마나 기뻤던지,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29절)라고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다해 아기 예수님을 축복한 다음, 시므온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34-35절)
2.
시므온은, 장차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우셔서 메시아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면서 마리아에게 경고합니다.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도대체, 태어난 지 일주일이 갓 지난 아이를 안고 있는 어린 엄마에게 이게 할 소리입니까? 이 말을 들은 마리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겁니다. 시므온은 더 이상 그들을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는지 모릅니다. 혹은, 자신의 말이 듣기에 거북하기는 하지만, 장차 당할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미리 준비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 경우야 어찌되었든, 시므온의 예언은 마리아에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30세가 갓 넘은 아들을 하나님께 내어 주어야 했고, 그로부터 약 3년여 동안 칼이 마음을 찌르는 듯한 아픔과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돈 많이 버는 직업은 아니지만 먹고 살기에 별로 어렵지 않은 목수로 살면서, 착한 처자와 결혼하고, 자식들 낳아 기르면서, 부모 부양하고, 형제자매와 함께 우애 좋게 살기를 선택했다면, 그 어머니의 마음은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정처도 없이 떠돌며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나 듣고 다닙니다. 권력자들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 미움은 점점 강해져 박해가 되고, 나중에는 모진 고난을 겪고, 십자가 위에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합니다. 마리아는 그 모든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서서히 죽어가는 동안, 그 옆에서 지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는 동안 그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 모든 아픔은 마리아가 아들을 내어 주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아들이 가는 곳마다 따라가 눈물 콧물로 말리고 다녔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소명을 이루기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마리아도 처음에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들이 미쳤다는 소리가 들리자, 다른 자식들과 함께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이후로 어머니 마리아도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견하고 방해하려고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 아들의 소명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따라 다닙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고 참된 사랑을 경험하고 진리를 찾을 수 있게 된 배후에는, 한 어머니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주고 그에 따르는 아픔을 묵묵히 견딘, 위대한 모성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내어 주기로 결단하고 그 결단에 따르는 고난을 감내한 한 여인이 그 배후에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마리아에게는 실로 메시야의 어머니로 택함 받을 특별한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위대한 결단과 인내심은 오늘 우리 모든 부모들에게 하나의 모델로 서 있습니다.
3.
이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부모 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내 자식을 내어줄 수 있을까? 나는 내 자식을 내어 주는 아픔을 견딜만한가? 혹시 나는 내 자식을 영원히 품에 안고 싶어 하지 않는가?
물론, 자식을 영원히 품에 안고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정상적인 부모의 공통된 감정일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어려움을 당하고 고생하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들을 자기 품 안에 안고 있으려 합니다. 그러면 안전할 것 같고, 그러면 행복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식이 진실로 안전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제 때에 부모를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제 때에 젖을 떼야 하고, 제 때에 부모를 떨어져 있는 훈련을 받아야 하고, 제 때에 제 스스로의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스스로 앞길을 개척해 가야하고, 제 때에 짝을 만나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그 때마다 자식을 내어 놓는 것이 불안하고 때로는 아프지만, 그 때마다 잘 보내고 잘 떠나지 않으면 큰 어려움이 생깁니다.
주일마다, 아래층 유아 실에서는 보내는 훈련과 떠나는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를 잠시 떼어 놓으려 하면, 처음에는 울고불고 떼를 쓰지만, 그리고 그런 아이를 두고 돌아서는 것이 마음 아프지만, 당연히 거쳐야 할 단계입니다. 때론 아이보다 부모가, 이 작은 이별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잘 해야, 나중에 더 큰 이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대학교에 보내고도, 마음으로는 보내지 못하여 근심하는 부모도 있고, 부모를 떠나 기숙사에 와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결혼을 시키는 것도 떠나보내는 일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을 보면,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결혼의 원리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기 위해 필히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떠나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떠나서 독립해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에게도 힘 든 일이고, 자녀에게도 힘 든 일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자녀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도 많고, 결혼을 했으면서도 정신적으로 떠나지 못하는 자녀들도 많습니다.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로 인해 그리고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배우자로 인해 이혼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자녀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를 ‘헬리콥터형 부모’라고 한답니다. 자식이 어디를 가나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선회해 가며 감시하고 간섭하려는 부모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비유를 처음 보고는, ‘아, 그것 참 기가 막힌 비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헬리콥터가 머리 위에서 선회할 때, 얼마나 시끄러운지 경험해 보셨습니까? 두 귀를 틀어막아도 고통스럽습니다. 마찬가지로, 헬리콥터형 부모는 잔소리도 심합니다. 그런데 그 잔소리가 대부분 헬리콥터 소음처럼 필요 없는 말입니다. 또한 헬리콥터가 머리 위에서 선회할 때는, 거친 바람 때문에 옷깃을 힘껏 부여잡고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걸어야 합니다. 이처럼, 헬레콥터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을 열지 않고 폐쇄적으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4.
그런데 ‘내어주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꿈을 위해 자식을 내어 주는 일입니다. 자식에 대한 내 소유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내어드리고, 하나님의 꿈을 위해 헌신하도록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모든 ‘사소한 내어주기’는 이 ‘큰 내어주기’를 위한 연습이랄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내어주기에 준비되어 있습니까? 헬리콥터형 부모들은 절대로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해 갖는 유일한 소원은 돈 잘 버는 직업을 택하여 큰 집 사고, 자식들 교육 잘 시키고, 안전하고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섬기는 일에, 때로 돈 되지 않고 어렵지만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자식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니, 적어도 그런 뜻을 가지고 기도하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했을 때, 그 소명을 향해 떠나보낼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왔을 때, 아프지만, 힘들지만, 가슴에 칼을 대는 것처럼 아리더라도, 내어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세상에 좋은 것을 모두 차지하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참되고 영원한 가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얼마 전 <생일>과 <축복>이라는 시 선집을 소개했었는데, 그 저자인 서강대 장영희 교수님의 글 중, 그 아버지이신 영문학자 장왕록 교수님의 묘비명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묘비에 "나 그대 믿고 떠나리"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아버님이 직접 쓴 글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의 시구를 딴 것인지 모르지만, 그 묘비명을 읽을 때마다,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보여 주셨던 든든한 믿음을 떠올리며 감사한다고 글을 썼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내어 줄 수 있으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는 사람만이 보낼 수 있고, 믿는 사람만이 떠날 수 있습니다. 떠나보내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자녀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내지 못하고, 억지로 헤어졌을 때는 다시 만날 때까지 불안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불안해서 기도해 보지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한, 기도할수록 마음은 더 불안해집니다. 기도하는 모습으로 보아서는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보면 믿지 못하는 겁니다. 또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부모를 떠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디 믿을 구석이 있어야 믿죠. 하나도 믿을 구석이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믿습니까?"라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 자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믿어봄직 하다는 사실입니다. 자녀에게서 내가 원하는 하나의 가능성만을 찾으니,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뿐입니다. 공부를 잘 해야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요인은 수없이 많습니다. 한 사람에게 어떤 가능성이 담겨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메마른 씨앗 한 톨을 보고 거대한 참나무를 볼 눈을 가진 사람이 흔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 믿어야 합니다. 씨앗 속에 거대한 참나무가 들어있다고 믿고 흙 속에 심고 물을 주듯, 우리도 우리 자녀들의 숨겨진 잠재성을 믿고 내어 주어야 합니다.
둘째, 믿음직함은 믿어주는 사람 밑에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의심하고 감시하는 분위기에서는 믿음직함이 자라지 않습니다. 불안하지만, 혹시 안 될지도 모르지만, "자, 한 번 해 봐!"라고 말하며 어깨를 두들겨 주고 믿고 맡겨 놓으면, 그 사람은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믿음직스럽게 일을 이루어 냅니다. 그러므로 믿을 수 없음을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직하여 믿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믿어지지 않아도 든든히 믿어주는 것이 부모가 할 일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마음에 불안감이 들어찹니다. 믿고 맡겼다가 낭패를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듭니다. 그래서 챙기기 시작합니다. 그럴수록 믿음은 더욱 엷어집니다.
5.
1909년, 에모리 대학교 학장 제임스 딕키(James Dickey)가 어네스트 우드러프(Ernest Woodruff)라는 유명한 사업가에게 쓴 편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에모리 대학교 1학년에 다니던 그 아들에 관해 쓴 편지입니다.
저는 당신의 아들 로버트가 이번 학기에 대학교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만족스러운 성적을 내지 못했고, 그것을 보충할 방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댁의 아드님은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며, 게다가 결석도 잦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댁의 아드님은 학생으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만일 학업을 지속할 뜻이 있다면, 그가 준비된 수준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를 권고합니다. 1909년 2월 2일.
I do not think it advisable for him to return to college this term as he has not done satisfactory work and cannot therefore make up what he would lose before returning again. He has never learned to apply himself, which together with very frequent absences makes it impossible for him to succeed as a student. Should you desire for him to continue his academic career, I would suggest that he begin all over again starting at the point where he is qualified to work and then go forward. Feb. 2, 1909.
여러분 중 혹시 이와 비슷한 편지를 받아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것처럼 엄청나지는 않더라도, 학교에서 날아온 편지로 인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경험을 한 분들이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시 조지아의 아틀란타 시에서 명성이 높았던 사업가 아버지로서 이런 수치스러운 편지를 받았을 때, 그 아버지가 얼마나 실망스러웠을지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편지를 받고도 그 아들을 믿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편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오늘의 코카콜라 회사를 있게 한 로버트 우드러프(Robert Woodruff)입니다. 미국 역사에 가장 많은 재산을 소유했던 사람 중 하나, 음료수 하나로 세계를 정복하고 세상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던 그 사람,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냉정했던 에모리 대학교에 천문학적인 재산을 기부하고 떠난 그 사람, 바로 로버트 우드러프가 이편지의 주인공입니다. 얼마 전, 에모리 대학교의 옥스포드 칼리지를 방문했을 때, 우드러프 기념관에 전시된 원본 편지를 읽고, 매우 인상 깊어, 받아 적어 두었었습니다. 그가 한 때 이렇게 불성실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인상 깊었고, 나중에 교육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신을 내친 학교에 엄청난 기부금을 헌납했다는 사실도 인상 깊었습니다.
로버트 우드러프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공로가 누구에게 돌아갈지를 신경 쓰지 않는 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미칠 수 있는 곳에는 제한이 없다"(There is no limit to what a man can do or where he can go if he doesn’t mind who gets the credit). 혹시 "아니, 믿을 만 해야 믿지요. 믿을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믿어요?"라는 질문을 마음에 품고 계셨던 분이라면, 앞에서 읽어드린 편지와 그 편지의 주인공이 체험적으로 한 이 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에게 어떤 가능성이 담겨 있는지, 얼마나 믿을만한 사람인지, 얼마나 능력 있는 아이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고 내어 주어야 합니다. 믿고 맡겨야 합니다.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믿고 물러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 안에서 순이 돋고, 가지가 자라고, 잎이 피고, 꽃이 피며, 열매가 열립니다.
6.
자식을 믿고 기다릴 수 있으려면, 그 자식을 믿고 내 품에서 내어줄 수 있으려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내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그 자녀를 길러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가 하나님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돕기만 하면 됩니다. 그 자녀의 미래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나보다 내 자녀의 행복을 더 끔찍하게 생각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자녀의 가능성이 활짝 꽃 피어나기를 소원하는 간절함에 있어서 나는 하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마침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식도 손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부모가 어찌할 수 없음을 결국은 인정하게 됩니다. 어찌 하려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너무 늦은 깨달음은 절망과 후회와 배신감과 공허감을 함께 데리고 옵니다. 미리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귀한 자녀를 얼마 동안 양육하도록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분의 뜻을 찾아 양육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임지고 있음을 믿고, 떠나보낼 때 떠나보내고, 맡길 때 맡기고, 내어줄 때 내어 주어야 합니다. 비록 부모의 마음에 안 맞는 결정을 했다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찾은 소명이라면 기꺼이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는 사람만이 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자녀를 믿고, 자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자신의 품에서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보내고 나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비록, 때론 섭섭하고, 때론 보고 싶고, 때론 쓸쓸하여 고통스럽지만, 견딜 수 있습니다.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실 줄 믿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참되고 영원한 가치를 위해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을 믿기 때문에, 내어 주고 나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떠나보내고 나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떠나보냈을 때, 때로 넘어지고 때로 흔들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자녀를 믿고 견디고 기다립니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쳐서, 바로 서서 똑바로 걸을 때까지, 즐겁게 걷고 뛰며 삶을 누릴 때까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믿음이 그 힘입니다.
7.
이것은 자식을 가진 부모에게만 해당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부모를 가진 자식에게도 해당하는 진리이며, 서로 사랑하며 사는 부부에게도 해당하는 진리이며, 좋은 친구 관계에도 해당하는 진리입니다. 떠날 때 잘 떠나고, 보내야 할 때 잘 보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떠날 때 잘 떠나고, 보내야 할 때 잘 보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떠나고 보내는 과정은 아프지만, 그 아픔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몇 주일 전에 방문했을 때, 이미 반쯤은 떠나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육신은 고스란히 그곳에 계셨지만, 정신과 영혼은 반쯤 떠나셨다고 느꼈습니다.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별 연습을 시작해야 할 때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일기에 썼습니다.
가셔요, 어머니.
반쯤만 가셔요.
지금은 다 보내드릴 수 없으니
한 번에 다 보내드릴 수 없으니
반쯤만 가셔요.
때가 되면
다 보내 드려야 한다는 걸 알아요.
어머님은 원래 제소유가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딸이잖아요.
저에게 하나님의 역할을 하도록
잠시 함께 있도록 보내주신 천사잖아요.
그래서 그 역할이 다 끝나면
하나님께 돌아가셔야 함을
저는 알아요.
그러니 때가 되면
다 보내 드릴게요.
기쁜 마음을 보내 드릴게요.
하지만 조금만 더 계셔 주셔요.
반쯤만 계셔도 충분해요.
준비가 다 될 때까지
조금만 더 머물러 주셔요.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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