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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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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7.7.15
"하나님께서 주실 안식"
(The Rest God Gives Us)
창세기 2:1-3; 히브리서 4:10
1.
지금은 휴가철입니다. ‘휴가’를 생각하면,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떠오릅니까? 아마도 별로 예외가 없이, 호텔, 비행기, 장시간 운전, 이곳저곳 둘러보기, 푸짐한 음식 같은 것이 떠오를 것입니다. 땅도 넓고 볼 것도 많은 미국에서는 ‘휴가’는 곧 ‘여행’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마치 휴가철의 여행을 기다리며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추수감사절 휴가 기간, 성탄절 휴가 기간, Spring Break 기간, Memorial Weekend와 Labor Day Weekend 그리고 여름철 휴가 기간이 되면, 어김없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경제적인 형편이 전혀 그럴 형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빚을 지고라도 여행을 다녀와야 ‘휴가를 잘 보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점은 이민자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미국인들의 여행 병에 우리도 오염되어 있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이민 생활 수십 년 동안 여행 한 번 가지 못하고 직장에 매어 사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만들어지면, 우리 이민자들도 휴가철마다 혹은 long weekend마다 여행 대열에 참여하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외감을 겪게 됩니다. 개학을 하고 나면 교사들이 아무 생각 없이 학생들에게, "어디들 다녀왔니?"하고 묻는다고 합니다. 사정 상 아무 곳도 가지 못한 아이들은 다음 휴가 때가 되면 부모를 조르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아무 곳도 가지 않으면 휴가를 보낸 것이 아니라는 사고방식이 점점 깊이 스며들어갑니다.
여행을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저도 여행을 좋아합니다. 다만, 여행이 곧 휴가는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 드리려는 것입니다. 휴가를 즐기는 한 방법이 여행이기는 하지만, 여행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휴가를 잘 지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여행이, 쉬어야 할 몸과 마음을 더욱 지치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휴가를 즐긴다고 하면서 엄청난 돈을 퍼붓지만, 몸과 마음과 영혼은 더욱 황량하게 파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휴가의 핵심은 쉼에 있습니다. 그동안 하던 노동을 멈추고 쉬는 것이 휴가의 목적입니다. 오늘 우리 문명은 우리를 쉬지 못하게 몰아세웁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과제는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에 있다기 보다는 ‘얼마나 잘 쉬느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들이 이 말을 아전인수 격으로 오역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안일하고 게으른 삶의 태도를 부추기려는 것이 제 의도가 아닙니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입니다. 일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게으름은 죄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일에 빠지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도 죄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일에 몰두하는 죄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2.
사람들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말씀을 토대로 하여, 마치 노동이 하나님의 저주인 것처럼 오해합니다만, 그것은 진실로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창조하시는 하나님’, ‘일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도 일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한 번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 받았고, 그 창조성을 발휘하여 오늘도 일합니다. 그리고 그 일속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일구어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건강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벌은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아니라, 땀 흘려 일해도 그 결실이 신통치 않은 것,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때로는 헛수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벌은 오늘 우리도 그대로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의미 있는 일을 위해 땀 흘려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는 일 할 수 있는 건강에 감사해야 하고, 일 할 수 있는 직장이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그 일을 통해 좋은 열매를 얻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때로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정에 있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기도합니다.) 때로는 일할 건강이 있는데도 일할 곳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사정에 있는 분들이 속히 일터를 찾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고, 일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때로는 기쁘게 땀 흘려 일하는데, 그 결실이 신통치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정에 있는 분들에게 주님의 보살핌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벌레로 짓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일도 필요하지만, 놀이도 필요하고, 춤도 필요하고, 잠도 필요하고, 쉼도 필요합니다. 그 모든 것이 있을 때, 일도 제대로 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몸소 그렇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한 번 차분히 이 본문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이 나와 있습니다.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섯 날 동안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하루하루의 창조 이야기를 읽어 보면, 창조하신 다음, 그것을 보며 감상하고 즐기십니다. 하루 종일 창조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루의 어느 정도는 창조하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는 그것을 보고 감상하고 즐기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제 칠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쉬셨습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2장 3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날을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일을 마치고 쉬는 날을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에서 자랐습니다. 쉬는 것, 노는 것, 즐기는 것은 일하는 것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청교도 전통에서는 쉬는 것과 노는 것과 즐기는 것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처럼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는 것, 쉬는 것, 즐기는 것도 그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멈추고 쉬는 날을 가장 거룩하고 복되게 하셨습니다. 일보다 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의 양으로 따지면, 쉬는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더 많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쉬는 시간이 더 크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제대로 살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한 번 정직하게 대답해 봅시다.
나는 땀 흘려 일하고 있습니까?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소득’을 얻는 것을 이상으로 가르치고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혹시 나의 노동은 병들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일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성을 활용하고 있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 그냥 무심코 일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듯, 내 일터에서 그렇게 일하고 있습니까?
나는 일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삶에 대해 관조하고, 감상하며, 즐기고 있습니까? ‘즐긴다’는 말이 이제는 너무도 타락하여 사치스럽게 즐기는 것이나 쾌락적으로 즐기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제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건강하게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들어 놓고, 그 작품을 감상하면서 감미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진짜 즐기는 것입니다. 과연 내 삶에는 그런 여유와 기쁨이 있습니까? 휴가철에 한꺼번에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즐기는 그런 기쁨이 있습니까?
나는 적정하게 쉬고 있습니까? 하루 동안에도 필요한 만큼의 휴식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일을 멈추고 쉬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사람도 쉬게 하고, 자연도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쉬면서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가지고 이웃과 나누며, 축하하며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치 무엇엔가 쫓기듯, 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3.
이런 말씀을 드리면, 다음과 같이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참 한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누가 쉴 줄 몰라서, 누가 놀 줄 몰라서, 누가 즐기기 싫어서 그렇게 합니까?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도대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상황에 계신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실제로 그런 상황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반문에 동감이 되시는 분들에게 두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혹시나 ‘피치 못할 상황’이라는 것이 제어되지 못한 욕심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가령, 능력에 부치는 비싼 집을 사고,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고급 차를 사고, 장학금을 못 받더라도 아이들을 비싼 사립학교에 보낸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런 분이라면, 혹시 집을 조금 줄여서 이사를 가고, 조금 값싼 차로 바꾸고, 일하는 시간을 조금 줄여보면 어떨까요? 그러면서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더 갖고, 속회로 모여 영적 사귐을 나누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면 어떨까요? 산책할 시간도 만들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시간을 마련하면 어떨까요?
둘째로, 혹시 일에 대한 몰두가 자신을 잊으려는 방편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가한 시간에 문득 문득 나타나는 자신의 형편없는 모습을 피하기 위해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면서 "나는 일이 좋다"고 변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소명을 찾고 일하는 것이 믿는 사람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망각할 정도까지 일에 빠지는 것은 죄입니다. 일중독과 알코올 중독과 마약 중독은 본질 상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내일을 통해 나 자신을 더 확인하며 더 나 자신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잊기 위해 일에 몰두하고 있는가?"
이도 저도 아닌데,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하고, 밤잠을 줄여서까지, second job, third job까지 뛰어야 하는 상황에 계십니까? 진실로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시기를 빕니다. 그렇게 헤어날 수 없는 어려움에 있다면, 속회 담당 목회자를 만나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서 속히 나오기를 원하시며, 우리 교회가 그 일을 돕기를 원하십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지만, 여러분에게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있다면, 교회가 도울 길이 있을 줄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며, 함께 가난의 올무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돕겠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워도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부유한 사람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삶을 누릴 가능성에 있어서 더 유리하다는 사실입니다.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더 너그럽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상황을 너무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수록 더욱 더 자주 멈추고, 삶을 관조하며, 감상하며, 즐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더 이웃을 살피고 함께 나누는 기쁨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런 삶을 추구하십시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처럼, 그렇게 건강하게, 근면하게, 그러나 여유 있게, 순간을 즐기며, 감사하며, 누리며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창조성을 발휘하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섬기십시다. 일을 통해 얻을 수입에 목적을 두지 마십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일 자체를 통해 보람을 느끼고, 일을 통해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에 의미를 두십시다. 일을 하는 동안 자주 멈추어, 우리의 삶에 대해 감사하고, 우리에게 주신 것을 누리며 즐기십시다. 숨차도록 우리 자신과 이웃을 몰아 부치지 말고, 함께 손잡고 같이 일하고, 같이 놀고, 같이 즐기십시다.
그리고 쉬는 일에 게으르지 마십시다. <안식일>(The Sabbath)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쓴 유대인 사상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Abraham Yoshua Heschel)은 6일 동안의 창조가 제 7일의 안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 7일에 안식을 하신 하나님께서 그 다음 날 즉 제 8일에 또 다시 일을 시작하셨나요? 아닙니다. 제 7일의 안식은 또 다른 한 주일을 위해 재충전하는 휴식이 아니었습니다. 6일 동안의 창조 사역이 완성되는 날이었습니다. 제 7일에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쉬시고, 모든 것을 살피시며 감상하고 즐기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영원토록 안식의 상태에 머물러 계십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진정한 안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일 하기 위해서 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안식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하기 위해 쉬는 것이 아니라, 쉬기 위해 일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얼른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에 중독된 우리가 그동안 재충전을 위한 휴식에만 익숙해 왔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몸이 견디지 못할 지경까지 일하다가 어쩔 수 없이 잠시 휴식하고는, 그 잠시의 휴식까지도 서둘러 마무리하고 다시 분주히 일하는 것이 우리 보통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일이 목적이고, 휴식은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원리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린 안식을 보면, 진정으로 쉬는 것은 단순히 일을 멈추고 에너지를 회복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살아온 것을 돌아보며, 그 삶에 대해 감사하고, 그것을 감상하며 즐기며 축복하고 축하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쉬는 시간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더 멀리 뛰기 위해 힘을 모으는 시간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며, 그 동안의 삶에 대해 감사하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며, 내 삶을 통해 이루어 오신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는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쉬는 시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시간임을 알겠습니다. 이렇게 쉴 때, 우리에게는 생명의 에너지가 충만해지고, 새로운 창조를 위해 온전하게 준비될 것입니다.
휴가는 이런 일에 사용되어야 마땅합니다. 여행은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는 데 있어 더 없이 좋은 도구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사치스럽고 소비적인 여행은 자신을 돌아보게 해 주기보다는, 자신을 망각하고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도록 만들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쉼을 위해 여행을 계획한다면,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감사하며 축복하며 이웃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쉼을 위해서라면 굳이 여행을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방법이 있습니다. 아니, 분주하고 소비적이고 정신없는 여행보다는 조용히 물러나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5.
이렇게 생각하니, 생각이 자연스럽게 은퇴에 미칩니다. 코스타에 참가하고 돌아온 주간에, 장로님 한 분이, "저, 지난주에 은퇴했습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아, 그렇습니까? 그 중요한 변화를 제가 모르고 있었네요. 죄송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축하 드려야 하나요, 애도를 표해야 하나요?" 그랬더니, 장로님께서는 서슴없이, "아, 축하해 주시면 됩니다."라고 답하셨습니다. 그 후로 이 말씀을 준비하기까지 며칠이 지났습니다만,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장로님의 말씀이 정말 맞다 싶었습니다. 6일 동안의 창조가 제 7일의 안식으로 완성된 것이라면, 일생 동안의 노동이 은퇴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은퇴의 의미가 새롭게 보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보통 은퇴는 회색빛으로 그려집니다. 위대한 음악가 파블로 가잘스(Pablo Casals)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퇴하는 것은 죽기 시작하는 것이다"(To retire is to begin to die).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는 "은퇴는 가장 추한 단어다"(Retirement is the ugliest word in the language)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끝장나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은퇴했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축하합니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의 맥락에서 보면, 은퇴의 시기는 마치 하나님의 제 7일처럼 복되고 거룩한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빨리 은퇴하여 아무 구속 없이 해 보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 수 있는 기간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마치고, 지나간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과 함께 해 오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그 일생의 열매들을 누리고 즐기며, 그 열매를 이웃과 나누며, 감사하며 축복하는 삶이 바로 은퇴의 삶이라면, 은퇴가 인생의 완성이요 목적이요 영광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은퇴 준비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지요? 최근에 누군가가, 편안한 노후를 즐기려면 최소한 10억(백만 달러)은 준비해 놓아야 한다고 말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만, 돈을 준비해 놓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믿습니다. 마음의 준비, 영적인 준비입니다. 모든 창조 사역을 마치고 안식에 들어가 감사하며 누리며 나누며 축복하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처럼, 일생 동안 한 일을 접어 두고, 그 열매를 감사하며 누리며 축복하며 함께 나누는 삶에 대해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더 이상 업적을 쌓을 수 없다는,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다는, 더 이상 사람들로부터 요청받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업적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돈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자신과 가족만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이웃을 위해 살아가기로 마음을 잡는다면, 울렁이는 마음으로 은퇴를 기다릴 수 있을 것이며, 경제적인 조건에 상관없이 ‘황금의 노년’을 즐길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6.
여기까지 생각하니, 제 생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 이후의 생에 미칩니다. 노동과 쉼, 6일 동안의 창조와 제 7일의 안식, 평생의 노동과 은퇴의 안식의 관계를 묵상하다 보니, 육신을 입고 사는 일평생과 육신을 벗은 후의 생명도 같은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가 얻는 구원을 ‘안식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얻는 안식, 6일 동안의 노동 후에 이르는 안식, 그리고 평생의 노동을 마치고 이르는 은퇴의 안식?이 모든 것은 지상에서의 일생을 마치고 얻게 될 영원한 안식에 대한 상징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저녁에 가족과 나누는 안식을 그리며 낮에 일하듯, 제 7일의 안식을 소망하며 6일 동안 일하듯, 그리고 은퇴 이후의 안식의 삶을 소망하며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하듯, 하나님 안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마땅한 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의심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이 우주에게 그리고 우리 인생에게 부여하신 원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품 안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믿고 소망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다만,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여 모두 다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저에게도 마땅히 영원한 안식을 설명할 방법이 없지만, 6일 동안의 창조 후에 안식이 오듯, 일생 동안의 노동 끝에 은퇴가 오듯, 이 지상에서의 삶 후에 하나님 품에서의 영원한 안식이 온다고 믿는 것이 더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6일 동안의 노동보다 제 7일의 안식이 더 복되다는 말씀과 일생 동안의 노동보다 은퇴의 삶이 더 복되다는 생각이 옳다면, 이생에서의 생애보다 하나님 품에서의 영원한 안식이 더 복되다는 결론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마치고 쉬신 것과 같이, 그 사람도 자기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히 4: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에 들어가셔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창조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일을 하면서 즐기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 세계와 함께 즐기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던 일을 그치겠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다른 종류의 일을 하면서 즐기고, 감사하고, 축하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이것까지 생각한다면, 이 휴가철에 우리는 영원을 생각해 보고, 그 삶에 대해 나를 준비시키는 일에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지나친 놀이와 폭식과 사치스러운 쇼핑으로 육체적인 욕구만을 자극시키지 말고, 하나님 품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물러나 기도하고 묵상하고 침묵하는 시간도 가져야 할 줄로 압니다. 그러면 휴가 후에 우리는 그 안식 안에서 진정한 평화를 누리고, 그 평화의 능력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야망으로가 아니라, 탐욕으로가 아니라, 경쟁심과 시기심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열정으로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섬기고, 멈추어 서서 감사하고, 감상하고, 누리고, 즐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아름다운 삶이요, 이것이 영성적인 삶의 참 모습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 같은 삶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오, 주님,
이 안식의 삶으로
매일,
매 주일,
인도하소서.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그 평안 가운데서
주님처럼
일하며
놀며
쉬며
함께 춤추며
하루하루를 즐기게 하소서.
아멘.
"하나님께서 주실 안식"
(The Rest God Gives Us)
창세기 2:1-3; 히브리서 4:10
1.
지금은 휴가철입니다. ‘휴가’를 생각하면,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떠오릅니까? 아마도 별로 예외가 없이, 호텔, 비행기, 장시간 운전, 이곳저곳 둘러보기, 푸짐한 음식 같은 것이 떠오를 것입니다. 땅도 넓고 볼 것도 많은 미국에서는 ‘휴가’는 곧 ‘여행’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마치 휴가철의 여행을 기다리며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추수감사절 휴가 기간, 성탄절 휴가 기간, Spring Break 기간, Memorial Weekend와 Labor Day Weekend 그리고 여름철 휴가 기간이 되면, 어김없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경제적인 형편이 전혀 그럴 형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빚을 지고라도 여행을 다녀와야 ‘휴가를 잘 보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점은 이민자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미국인들의 여행 병에 우리도 오염되어 있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이민 생활 수십 년 동안 여행 한 번 가지 못하고 직장에 매어 사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만들어지면, 우리 이민자들도 휴가철마다 혹은 long weekend마다 여행 대열에 참여하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외감을 겪게 됩니다. 개학을 하고 나면 교사들이 아무 생각 없이 학생들에게, "어디들 다녀왔니?"하고 묻는다고 합니다. 사정 상 아무 곳도 가지 못한 아이들은 다음 휴가 때가 되면 부모를 조르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아무 곳도 가지 않으면 휴가를 보낸 것이 아니라는 사고방식이 점점 깊이 스며들어갑니다.
여행을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저도 여행을 좋아합니다. 다만, 여행이 곧 휴가는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 드리려는 것입니다. 휴가를 즐기는 한 방법이 여행이기는 하지만, 여행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휴가를 잘 지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여행이, 쉬어야 할 몸과 마음을 더욱 지치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휴가를 즐긴다고 하면서 엄청난 돈을 퍼붓지만, 몸과 마음과 영혼은 더욱 황량하게 파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휴가의 핵심은 쉼에 있습니다. 그동안 하던 노동을 멈추고 쉬는 것이 휴가의 목적입니다. 오늘 우리 문명은 우리를 쉬지 못하게 몰아세웁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과제는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에 있다기 보다는 ‘얼마나 잘 쉬느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들이 이 말을 아전인수 격으로 오역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안일하고 게으른 삶의 태도를 부추기려는 것이 제 의도가 아닙니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입니다. 일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게으름은 죄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일에 빠지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도 죄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일에 몰두하는 죄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2.
사람들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말씀을 토대로 하여, 마치 노동이 하나님의 저주인 것처럼 오해합니다만, 그것은 진실로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창조하시는 하나님’, ‘일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도 일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한 번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 받았고, 그 창조성을 발휘하여 오늘도 일합니다. 그리고 그 일속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아름다운 세상을 일구어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건강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벌은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아니라, 땀 흘려 일해도 그 결실이 신통치 않은 것,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때로는 헛수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벌은 오늘 우리도 그대로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의미 있는 일을 위해 땀 흘려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는 일 할 수 있는 건강에 감사해야 하고, 일 할 수 있는 직장이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그 일을 통해 좋은 열매를 얻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때로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정에 있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기도합니다.) 때로는 일할 건강이 있는데도 일할 곳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사정에 있는 분들이 속히 일터를 찾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고, 일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때로는 기쁘게 땀 흘려 일하는데, 그 결실이 신통치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정에 있는 분들에게 주님의 보살핌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벌레로 짓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일도 필요하지만, 놀이도 필요하고, 춤도 필요하고, 잠도 필요하고, 쉼도 필요합니다. 그 모든 것이 있을 때, 일도 제대로 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몸소 그렇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한 번 차분히 이 본문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이 나와 있습니다.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섯 날 동안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하루하루의 창조 이야기를 읽어 보면, 창조하신 다음, 그것을 보며 감상하고 즐기십니다. 하루 종일 창조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루의 어느 정도는 창조하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는 그것을 보고 감상하고 즐기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제 칠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쉬셨습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2장 3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날을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일을 마치고 쉬는 날을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에서 자랐습니다. 쉬는 것, 노는 것, 즐기는 것은 일하는 것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청교도 전통에서는 쉬는 것과 노는 것과 즐기는 것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처럼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는 것, 쉬는 것, 즐기는 것도 그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멈추고 쉬는 날을 가장 거룩하고 복되게 하셨습니다. 일보다 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의 양으로 따지면, 쉬는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더 많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쉬는 시간이 더 크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제대로 살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한 번 정직하게 대답해 봅시다.
나는 땀 흘려 일하고 있습니까?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소득’을 얻는 것을 이상으로 가르치고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혹시 나의 노동은 병들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일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성을 활용하고 있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 그냥 무심코 일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듯, 내 일터에서 그렇게 일하고 있습니까?
나는 일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삶에 대해 관조하고, 감상하며, 즐기고 있습니까? ‘즐긴다’는 말이 이제는 너무도 타락하여 사치스럽게 즐기는 것이나 쾌락적으로 즐기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제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건강하게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들어 놓고, 그 작품을 감상하면서 감미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진짜 즐기는 것입니다. 과연 내 삶에는 그런 여유와 기쁨이 있습니까? 휴가철에 한꺼번에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즐기는 그런 기쁨이 있습니까?
나는 적정하게 쉬고 있습니까? 하루 동안에도 필요한 만큼의 휴식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일을 멈추고 쉬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사람도 쉬게 하고, 자연도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쉬면서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가지고 이웃과 나누며, 축하하며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치 무엇엔가 쫓기듯, 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3.
이런 말씀을 드리면, 다음과 같이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참 한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누가 쉴 줄 몰라서, 누가 놀 줄 몰라서, 누가 즐기기 싫어서 그렇게 합니까?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도대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상황에 계신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실제로 그런 상황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반문에 동감이 되시는 분들에게 두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혹시나 ‘피치 못할 상황’이라는 것이 제어되지 못한 욕심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가령, 능력에 부치는 비싼 집을 사고,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고급 차를 사고, 장학금을 못 받더라도 아이들을 비싼 사립학교에 보낸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런 분이라면, 혹시 집을 조금 줄여서 이사를 가고, 조금 값싼 차로 바꾸고, 일하는 시간을 조금 줄여보면 어떨까요? 그러면서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더 갖고, 속회로 모여 영적 사귐을 나누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면 어떨까요? 산책할 시간도 만들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시간을 마련하면 어떨까요?
둘째로, 혹시 일에 대한 몰두가 자신을 잊으려는 방편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가한 시간에 문득 문득 나타나는 자신의 형편없는 모습을 피하기 위해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면서 "나는 일이 좋다"고 변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소명을 찾고 일하는 것이 믿는 사람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망각할 정도까지 일에 빠지는 것은 죄입니다. 일중독과 알코올 중독과 마약 중독은 본질 상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내일을 통해 나 자신을 더 확인하며 더 나 자신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잊기 위해 일에 몰두하고 있는가?"
이도 저도 아닌데,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하고, 밤잠을 줄여서까지, second job, third job까지 뛰어야 하는 상황에 계십니까? 진실로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시기를 빕니다. 그렇게 헤어날 수 없는 어려움에 있다면, 속회 담당 목회자를 만나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서 속히 나오기를 원하시며, 우리 교회가 그 일을 돕기를 원하십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할 수 없다지만, 여러분에게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있다면, 교회가 도울 길이 있을 줄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며, 함께 가난의 올무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돕겠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워도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부유한 사람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삶을 누릴 가능성에 있어서 더 유리하다는 사실입니다.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더 너그럽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상황을 너무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수록 더욱 더 자주 멈추고, 삶을 관조하며, 감상하며, 즐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더 이웃을 살피고 함께 나누는 기쁨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런 삶을 추구하십시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처럼, 그렇게 건강하게, 근면하게, 그러나 여유 있게, 순간을 즐기며, 감사하며, 누리며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창조성을 발휘하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섬기십시다. 일을 통해 얻을 수입에 목적을 두지 마십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일 자체를 통해 보람을 느끼고, 일을 통해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에 의미를 두십시다. 일을 하는 동안 자주 멈추어, 우리의 삶에 대해 감사하고, 우리에게 주신 것을 누리며 즐기십시다. 숨차도록 우리 자신과 이웃을 몰아 부치지 말고, 함께 손잡고 같이 일하고, 같이 놀고, 같이 즐기십시다.
그리고 쉬는 일에 게으르지 마십시다. <안식일>(The Sabbath)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쓴 유대인 사상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Abraham Yoshua Heschel)은 6일 동안의 창조가 제 7일의 안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 7일에 안식을 하신 하나님께서 그 다음 날 즉 제 8일에 또 다시 일을 시작하셨나요? 아닙니다. 제 7일의 안식은 또 다른 한 주일을 위해 재충전하는 휴식이 아니었습니다. 6일 동안의 창조 사역이 완성되는 날이었습니다. 제 7일에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쉬시고, 모든 것을 살피시며 감상하고 즐기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영원토록 안식의 상태에 머물러 계십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진정한 안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일 하기 위해서 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안식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하기 위해 쉬는 것이 아니라, 쉬기 위해 일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얼른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에 중독된 우리가 그동안 재충전을 위한 휴식에만 익숙해 왔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몸이 견디지 못할 지경까지 일하다가 어쩔 수 없이 잠시 휴식하고는, 그 잠시의 휴식까지도 서둘러 마무리하고 다시 분주히 일하는 것이 우리 보통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일이 목적이고, 휴식은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원리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린 안식을 보면, 진정으로 쉬는 것은 단순히 일을 멈추고 에너지를 회복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살아온 것을 돌아보며, 그 삶에 대해 감사하고, 그것을 감상하며 즐기며 축복하고 축하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쉬는 시간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더 멀리 뛰기 위해 힘을 모으는 시간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며, 그 동안의 삶에 대해 감사하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며, 내 삶을 통해 이루어 오신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는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쉬는 시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시간임을 알겠습니다. 이렇게 쉴 때, 우리에게는 생명의 에너지가 충만해지고, 새로운 창조를 위해 온전하게 준비될 것입니다.
휴가는 이런 일에 사용되어야 마땅합니다. 여행은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는 데 있어 더 없이 좋은 도구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사치스럽고 소비적인 여행은 자신을 돌아보게 해 주기보다는, 자신을 망각하고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도록 만들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쉼을 위해 여행을 계획한다면,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감사하며 축복하며 이웃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쉼을 위해서라면 굳이 여행을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방법이 있습니다. 아니, 분주하고 소비적이고 정신없는 여행보다는 조용히 물러나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5.
이렇게 생각하니, 생각이 자연스럽게 은퇴에 미칩니다. 코스타에 참가하고 돌아온 주간에, 장로님 한 분이, "저, 지난주에 은퇴했습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아, 그렇습니까? 그 중요한 변화를 제가 모르고 있었네요. 죄송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축하 드려야 하나요, 애도를 표해야 하나요?" 그랬더니, 장로님께서는 서슴없이, "아, 축하해 주시면 됩니다."라고 답하셨습니다. 그 후로 이 말씀을 준비하기까지 며칠이 지났습니다만,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장로님의 말씀이 정말 맞다 싶었습니다. 6일 동안의 창조가 제 7일의 안식으로 완성된 것이라면, 일생 동안의 노동이 은퇴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은퇴의 의미가 새롭게 보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보통 은퇴는 회색빛으로 그려집니다. 위대한 음악가 파블로 가잘스(Pablo Casals)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퇴하는 것은 죽기 시작하는 것이다"(To retire is to begin to die).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는 "은퇴는 가장 추한 단어다"(Retirement is the ugliest word in the language)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끝장나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은퇴했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축하합니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의 맥락에서 보면, 은퇴의 시기는 마치 하나님의 제 7일처럼 복되고 거룩한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빨리 은퇴하여 아무 구속 없이 해 보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 수 있는 기간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마치고, 지나간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과 함께 해 오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그 일생의 열매들을 누리고 즐기며, 그 열매를 이웃과 나누며, 감사하며 축복하는 삶이 바로 은퇴의 삶이라면, 은퇴가 인생의 완성이요 목적이요 영광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은퇴 준비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지요? 최근에 누군가가, 편안한 노후를 즐기려면 최소한 10억(백만 달러)은 준비해 놓아야 한다고 말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만, 돈을 준비해 놓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믿습니다. 마음의 준비, 영적인 준비입니다. 모든 창조 사역을 마치고 안식에 들어가 감사하며 누리며 나누며 축복하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처럼, 일생 동안 한 일을 접어 두고, 그 열매를 감사하며 누리며 축복하며 함께 나누는 삶에 대해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더 이상 업적을 쌓을 수 없다는,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다는, 더 이상 사람들로부터 요청받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업적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돈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자신과 가족만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이웃을 위해 살아가기로 마음을 잡는다면, 울렁이는 마음으로 은퇴를 기다릴 수 있을 것이며, 경제적인 조건에 상관없이 ‘황금의 노년’을 즐길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6.
여기까지 생각하니, 제 생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 이후의 생에 미칩니다. 노동과 쉼, 6일 동안의 창조와 제 7일의 안식, 평생의 노동과 은퇴의 안식의 관계를 묵상하다 보니, 육신을 입고 사는 일평생과 육신을 벗은 후의 생명도 같은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가 얻는 구원을 ‘안식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얻는 안식, 6일 동안의 노동 후에 이르는 안식, 그리고 평생의 노동을 마치고 이르는 은퇴의 안식?이 모든 것은 지상에서의 일생을 마치고 얻게 될 영원한 안식에 대한 상징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저녁에 가족과 나누는 안식을 그리며 낮에 일하듯, 제 7일의 안식을 소망하며 6일 동안 일하듯, 그리고 은퇴 이후의 안식의 삶을 소망하며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하듯, 하나님 안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마땅한 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의심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이 우주에게 그리고 우리 인생에게 부여하신 원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품 안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믿고 소망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다만,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여 모두 다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저에게도 마땅히 영원한 안식을 설명할 방법이 없지만, 6일 동안의 창조 후에 안식이 오듯, 일생 동안의 노동 끝에 은퇴가 오듯, 이 지상에서의 삶 후에 하나님 품에서의 영원한 안식이 온다고 믿는 것이 더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6일 동안의 노동보다 제 7일의 안식이 더 복되다는 말씀과 일생 동안의 노동보다 은퇴의 삶이 더 복되다는 생각이 옳다면, 이생에서의 생애보다 하나님 품에서의 영원한 안식이 더 복되다는 결론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마치고 쉬신 것과 같이, 그 사람도 자기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히 4: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에 들어가셔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창조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일을 하면서 즐기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 세계와 함께 즐기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던 일을 그치겠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다른 종류의 일을 하면서 즐기고, 감사하고, 축하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이것까지 생각한다면, 이 휴가철에 우리는 영원을 생각해 보고, 그 삶에 대해 나를 준비시키는 일에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지나친 놀이와 폭식과 사치스러운 쇼핑으로 육체적인 욕구만을 자극시키지 말고, 하나님 품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물러나 기도하고 묵상하고 침묵하는 시간도 가져야 할 줄로 압니다. 그러면 휴가 후에 우리는 그 안식 안에서 진정한 평화를 누리고, 그 평화의 능력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야망으로가 아니라, 탐욕으로가 아니라, 경쟁심과 시기심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열정으로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섬기고, 멈추어 서서 감사하고, 감상하고, 누리고, 즐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아름다운 삶이요, 이것이 영성적인 삶의 참 모습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 같은 삶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오, 주님,
이 안식의 삶으로
매일,
매 주일,
인도하소서.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그 평안 가운데서
주님처럼
일하며
놀며
쉬며
함께 춤추며
하루하루를 즐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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