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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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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7.12.9
강림절 두 번째 주일 및 청지기 주일
“반가운, 그러나 불편한, 그러나 복된 소식”
(Good, But Disturbing, But Blessed News)
--누가복음 1:26-38
1.
2천년 전 어느 날 밤, 그 밤은, 나사렛에 살던 한 여인 마리아에게는 잊을 수 없는 밤이 되었습니다. 그 날 밤의 일이 없었다면, 마리아는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살다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 날 밤의 일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날 밤의 일이 없었다면, 성당 입구 마다에 그의 성상이 세워지는 일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날 밤의 일이 없었다면, 천주교인들의 기도에서 그의 이름이 불려지는 일은 더 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그 날 밤, 마리아는 수 많은 유대 여인들 중에서 특별한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모르지만,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듣게 됩니다. 천사가 많은 여인들 가운데 마리아를 찾아온 것, 그것만으로도 미천한 마리아에게는 더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그를 만난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28절입니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 인간으로서 천사의 특별한 방문을 받았으니, 기뻐할 일이요,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마리아는 어리둥절해 있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말을 계속합니다. 30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아들을 낳을 것이라? 그런데 그 아들이 보통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야가 될 것이라? 32절과 33절에서 이어지는 말씀은 그 아들이 어떤 아들이 될 것인지를 예언합니다. “그는 위대하게 되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그는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 아, 이 얼마나 대단한 예언입니까? 이런 아들을 얻게 된다니, 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이란 말입니까?
옥스퍼스 대학교에서 가르치다가 지금은 영국 성공회에서 신부로 그리고 신학자로 일하고 있는 톰 라잇(Tom Wright) 박사는,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를 연구하고 나서 결론 짓기를, 당시 경건한 여인들은 임신하게 될 경우 “혹시나 내 태 중에 있는 아이가 메시야는 아닐까?”라는 기대를 할 정도로, 메시야가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렸다고 합니다. 아버지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 하에서 시달리면서,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속히 보내셔서 제 2의 출애굽을 이끌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경건한 유대인 아버지들은 자식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혹시나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다윗을 선택하여 왕으로 세우셨듯이, 자신의 자식들 가운데 하나를 메시야로 세우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아리따운 숙녀로 성장하면서, “아, 장차 내가 시집가서 애기를 낳았을 때, 그 애기가 하나님의 메시야로 선택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랬다면 가브리엘 천사의 이 소식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벅찬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유대 여인들 가운데 메시야의 어머니로 선택받는다는 일은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도 영예스럽고 모두가 다 부러워할 소식을 듣고도, 마리아는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야를 임신하고 낳아 기른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이지만, 문제는 마리아가 순결한 처녀의 몸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가브리엘이 만일, “장차 결혼하여 요셉의 아내가 되면, 그 때 메시야를 낳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순전한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요셉과 약혼을 한 후,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 순결하게 몸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런데 임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은 황당하고도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들은, “어떻게 남녀의 성적인 결합 없이 아들을 잉태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붙들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과학과 논리로 무장된 우리 현대인들만 그렇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미개해 보이는 마리아와 요셉에게도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4절을 보면, 마리아가 질문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히브리말로 ‘남자를 알다’라는 말은 성적인 결합을 한다는 뜻입니다. 마리아에게도 최소한의 상식은 있었고, 그 상식에 비추어 보아도 자신이 임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천사 가브리엘이 대답합니다. 35절입니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 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태초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마리아의 몸을 덮으면, 그 창조의 능력으로 인해 처녀가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보아라, 그대의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6-37절)고 말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넘어서서 당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브리엘의 소식이 주는 충격은 단지,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자연법칙 상 불가능하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이 사실을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닙니다.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은 처녀 생식이 과학적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 왔는데, 그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믿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마리아의 처녀 잉태설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고, 믿으려는 태도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없어도 믿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도 마리아가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자연 법칙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어려움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가 결혼을 약속하는 것인데, 이것은 주로 부모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법적 효력을 가지지는 못합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결혼할 나이에 이르면, 정혼이라는 것을 하는데, 결혼 생활을 위한 준비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혼을 한 다음 1년 동안 부부 관계는 허락되지 않지만, 법적으로는 신랑이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가집니다. 이 시기에 남편이 죽으면, 그 신부는 소위 ‘과부 처녀’(widow virgin)로 불립니다. 그렇게 1년을 잘 지내고 나면 마지막에 결혼을 하고 함께 살게 됩니다.
지금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 있습니다. 결혼식 날까지 몸을 정결하게 간수해야 할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혹은 결혼한 후에도 다른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가진 것이 드러나면, 율법은 그 여인을 사형으로 벌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 요셉이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고, “나는 아내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닙니다”라고 증언하면, 마리아는 영락없이 아이와 함께 비참하게 죽어야 합니다. 죽기 전에 당해야 할 모진 수치와 모욕과 박해를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마리아가 가브리엘의 소식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잉태하고 낳아 기르는 것은 너무도 가슴 벅찬 축복이요 은총인데, 그 은총을 받아 안고 나서 당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팔다리에 힘이 쪽 빠질 정도로 두려웠습니다. 아이를 낳기도 전에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천사의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는데, 그 물음 속에 숨겨진 그의 진짜 질문은 이런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제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낳으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합니까? 아이를 낳을 때까지 제가 살아남기나 할까요?”
3.
이 지점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해 보십시다. 성난 군중들이 마리아를 더러운 여자의 표본으로 여기고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 앞에서 욕보이고, 마구 폭행을 가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부모가 아무 죄도 없이 죄인으로 몰려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마리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을 그렇게도 사랑하고 아껴 주었던 요셉의 분노한 얼굴을 마주할 것을 두고 두려워하는 마리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주의 말과 함께 날아오는 무수한 돌에 맞아 서서히 죽어갈 운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상상을 해 보시면, 강림절의 소식이 마리아에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결국 그 모든 섭리에 대해 순명하기로 결심합니다. 38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말 그대로 생명을 맡기는 고백입니다. 그 옛날 에스더가 했던 말, “그러다 죽으면, 죽으렵니다”라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다는 고백입니다. “이제 저의 인생은 저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 놓겠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마리아의 위대성을 보여줍니다. 우리 개신교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신성시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를 중재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 호의를 입기 위해 성자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아니, 어떤 사람은 성자이고, 어떤 사람은 복자이며, 또 어떤 사람은 그냥 평범한 신자라고 믿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다 같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마리아를 숭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역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었다고 믿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하시려는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위험하고 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지를 알면서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다행히도,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과 상관하지 않고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조용히 파혼을 하기로 선택합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요셉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그로 인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the worst scenario)을 피하기는 했습니다만, 아이를 낳은 이후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할 때까지, 마리아의 삶은 고난과 아픔과 희생과 눈물로 얼룩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고, 저와 여러분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우리는 오늘 강림절 둘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강림절 혹은 대림절은 교회력의 시작으로서, 2천년 전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묵상하며,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강림을 축하하고 감사하며, 또한 장차 완전한 모습으로 임하실 재림을 기대하고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오늘 저는 마리아에게 임한 강림의 소식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 보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마리에게 임한 강림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남의 이야기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 전, 지금은 온누리교회를 담임하시는 하용조 목사께서 연예인 교회를 담임하실 때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성경 공부 시간에 하 목사님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떤 삐딱한 교인이 중간에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하신 일 중 좋은 일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그렇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다루시는 겁니까? 그런 얘기는 집어 치우고, 다른 말씀을 좀 들려 주십시오.” 그러자 하 목사님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해하기도 쉽고 고상한 가르침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분이 처녀의 몸에서 탄생했다는 교리는 받아 들여야 합니다”라고 답하시고는, 처녀 탄생설을 믿어야 할 이유들에 대해 계속하여 설명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많은 설명이 질문한 그 사람에게는 전혀 설득이 되지 않았던가 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믿지 않는 사람을 설득시킬 방도는 없어 보입니다. 그 사람이 다시금 중간에 말을 끊고, “거, 제발, 다른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없습니까? 저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순간, 긴장감이 좌중을 압도했습니다.
그 때, 그 자리에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코메디언 구봉서씨가 있었답니다. 나중에 그분은 장로가 되셨는데요. 그분이 갑자기 일어나서 질문한 그 사람을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핀잔을 주었답니다. “아니, 그 남편 요셉이 믿겠다는데, 당신이 뭔데 못 믿겠다 말이 많아? 당신은 제 3자야! 빠져!”
구봉서씨의 말씀대로, 우리는 모두 마리아와 요셉의 이야기에서 제 3자의 입장에 있습니다. 그 부부 관계의 일에 우리가 끼어들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마리아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제 3자로 남아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오늘도 성경 말씀을 읽는 이유는 당사자로서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응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늘 제 3자의 입장에서 성경을 읽으면, 늘 구경꾼의 입장에서 비판만 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마리아가 되어, 가브리엘이 전해 준 강림의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강림의 소식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고, 그 소식에 대해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하고 어떻게 응답할지 선택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5.
강림의 소식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 속에 들어오시겠다는 소식입니다. 위대하신 분, 더 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 조상 다윗의 왕위를 이을 분,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릴 분, 영원 무궁한 나라를 다스릴 분,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겠다는 소식입니다. 이 지구 위에 오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 만민에게 오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나에게, 바로 당신에게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집에, 내 마음 안에, 나의 침실 안에, 내가 운전하는 자동차 안에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내 삶 속에 뚫고 들어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여러분은 어떻게 여기십니까?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말했듯이, 이것은 알고 보면 참으로 기쁘고 복된 소식입니다. 28절에서 마리아에게 한 말씀, 즉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가 나의 삶에 개입하시겠다는 소식입니다.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내셨던 능력자가 내 삶에 관여하시겠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같은 사람을 기억하시고 나를 찾으시고 나를 보살펴 주시겠다는 소식입니다. 잠시, 이 소식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이 소식을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십니까? 무덤덤하게 느끼십니까? 아니면, 마음이 설레이십니까?
지난 주, 저는 캐나다 밴쿠버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었습니다. 마지막 날, 그 지역에서 목회하고 있는, 제가 가르쳤던 제자들을 불러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나중에 그렇게 말합니다. “저는 교수님이 저를 기억하시지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10년이 넘었는데도 기억해 주시니, 마음이 설레입니다.” 저같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보인 관심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마음 설레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나 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계시다는 사실은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거의 20년 가까이 지난 일이 생각납니다. 토론토에서 살 때의 일입니다. 그 때 제가 온타리오 호수에 가까운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때때로 밤에 호숫가에 나가 밤 하늘도 바라보고, 망망한 호수를 감상하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쏟아져 내릴 듯한 별들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내가 지금 발을 헛디뎌 호수에 빠져 죽는다면, 무엇이 달라질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저를 가까이 알고 있던 사람들은 한 동안 슬퍼할 것이고, 제 아내와 아이들은 여러 가지의 어려움을 당할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크게 보면, 저의 존재가 이 땅에 혹은 인류 역사에 아무런 차이를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조금만
크게 보면, 저의 존재는 제가 호수 안으로 던진 돌맹이 하나처럼,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저, 호숫가에 핀 풀 한 포기, 돌맹이 하나처럼 하잘 것 없는 저를, 하나님께서 불러 주셨고, 하나님께서 제 이름을 아셨고, 또한 제 삶에 관여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갑자기 눈물겨운 감사가 제 마음에서 흘러 넘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옛날, 다윗이 고백했던 기도,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시 8:4)라는 기도가 절로 제 입에서 나왔습니다.
6.
그런데 여기서 잠깐,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삶에 들어오실 때, 내가 감수해야 할 손해와 희생과 고난과 박해와 아픔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삶에 개입하기를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알라딘 램프에 나오는 지니가 아닙니다. 지니는 알라딘이 어떻게 살든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무리 비도덕적이라 해도, 그대로 순종합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내 삶에 들어와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여 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내 삶에 개입하시면,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이루어주시지만, 그와 동시에 내 삶을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틀어 놓을 수도 있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요청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으시지만, 있는 그대로 놔두지는 않으십니다. 나를 도구로 사용하여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원하시지만, 나를 변화시켜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뜻이 나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 나갈 때, 그것은 언제나 나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언제나 환영할만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흔들어 놓습니다. 때로 손해를 감수하도록 요청하시며, 때로 나의 것을 내놓기를 원하십니다.
때때로 그 희생과 손해는 감당하기 힘든 것일 경우도 있습니다. 마리아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점에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좋은 면만 생각하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고 고백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이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고백의 무게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고백은 내 삶의 주권이,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진실하게 한다면, 내 삶을 내 고집과 주관으로 붙들고 씨름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끌어 가도록 나를 열고 맡기는 일까지 감수해야 합니다. 이 고백을 진실하게 한다면, 내 존재와 내 소유를 모두 주님의 손에 맡기고, 주님의 뜻대로 사용되도록 맡기는 일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이 고백을 진실하게 한다면, 내 삶과 내 소유에 대한 야심과 욕심과 집착을 버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 시간과 돈과 지식과 경험과 재능을 내 욕심을 만족시키는 데에만 사용하던 삶을, 예수님께서 요청하신다면, 청산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 겁을 먹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과 소유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다 보면, 내가 감당해야 했던 손실과 상처와 희생이 수십배 혹은 수백배로 보상되고도 남는, 큰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주님의 뜻을 위해 드려질 때, 참된 자아 실현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내 욕심이 부정될 때,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소유가 주님의 손에 들려 사용될 때, 그 물질이 영원한 가치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비록 마리아처럼 미래에 당하게 될지도 모를 아픔 때문에 걱정과 염려가 없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주님, 어서 오십시오. 제 삶 속에 오십시오. 제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오늘, 우리는 ‘청지기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청지기’라는 말이 이제는 고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사용되는 말로 바꿔 보자면, ‘관리인’ 혹은 영어로 manager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관리인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시간도, 우리의 재물도, 우리의 건강도, 우리의 재능도, 우리의 지식도 그리고 우리의 경험도,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우리에게 맡기신 이유는 그것을 사용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라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가,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관리인임을 분명히 고백했습니다.
한 해가 저무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지나 온 삶에 대해 돌아 보십시다. 나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머물러 계셨습니까? 내가 그분에게 맡겨 그분의 뜻대로 사용하도록 한 내 시간, 내 물질, 내 힘은 얼마나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에 들어오셔서 얼마나 나를 흔들어 놓으셨습니까? 내 삶의 주도권은 얼마나 그분의 손에 돌아갔습니까? 그분을 향한 마음의 문은 얼마나 활짝 열려있습니까? 혹시나, 이것 저것 생각하니 불편하고 괴로워서,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사시는 것은 아닙니까? 잡았던 물질을 놓으면 뭔가 위태로울 것 같아서,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까?
이제 내년을 전망하면서, 이 시간, 다시금 마음을 새롭게 하여, 고백하고 결단하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우리 각자의 삶 속에, 우리의 침실에, 우리의 지갑 속에, 우리의 식탁에, 우리가 가는 골프장에 뚫고 들어오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에게 얼마나 자리를 더 내어 드리겠습니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자리가 넓어지는 것만큼 우리의 삶이 더 불편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질적인 손해와 희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령한 기쁨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제 한 주간 동안 이 문제에 대해 곰곰히 묵상하시며 기도하기를 빕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의 결단을 ‘사역의 봉헌’과 ‘재물의 봉헌’을 통해 표현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결심과 헌신은 구체적으로 표현될수록 더 잘 실천됩니다. 이 두 가지 영역에서의 여러분의 결단은 다른 영역으로 흘러 넘쳐서 여러분의 삶의 더 많은 영역이 주님께 드려질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그분의 것이었으니, 그분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헌신되고 봉헌된 만큼, 그만큼 더, 우리의 삶에는 영적인 진보가 이루어지고, 그만큼 더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
주인 행세 하려는 제 마음의 욕심을 제하여 주소서.
모든 것을 참 주인에게 되돌려 드리게 하시고
저희는 다만,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손에 붙들린 만큼만
참된 의미를 가짐을,
기억하게 하소서.
아멘.
강림절 두 번째 주일 및 청지기 주일
“반가운, 그러나 불편한, 그러나 복된 소식”
(Good, But Disturbing, But Blessed News)
--누가복음 1:26-38
1.
2천년 전 어느 날 밤, 그 밤은, 나사렛에 살던 한 여인 마리아에게는 잊을 수 없는 밤이 되었습니다. 그 날 밤의 일이 없었다면, 마리아는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살다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 날 밤의 일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날 밤의 일이 없었다면, 성당 입구 마다에 그의 성상이 세워지는 일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날 밤의 일이 없었다면, 천주교인들의 기도에서 그의 이름이 불려지는 일은 더 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그 날 밤, 마리아는 수 많은 유대 여인들 중에서 특별한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모르지만,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듣게 됩니다. 천사가 많은 여인들 가운데 마리아를 찾아온 것, 그것만으로도 미천한 마리아에게는 더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그를 만난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28절입니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 인간으로서 천사의 특별한 방문을 받았으니, 기뻐할 일이요,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마리아는 어리둥절해 있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말을 계속합니다. 30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아들을 낳을 것이라? 그런데 그 아들이 보통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야가 될 것이라? 32절과 33절에서 이어지는 말씀은 그 아들이 어떤 아들이 될 것인지를 예언합니다. “그는 위대하게 되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그는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 아, 이 얼마나 대단한 예언입니까? 이런 아들을 얻게 된다니, 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이란 말입니까?
옥스퍼스 대학교에서 가르치다가 지금은 영국 성공회에서 신부로 그리고 신학자로 일하고 있는 톰 라잇(Tom Wright) 박사는,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를 연구하고 나서 결론 짓기를, 당시 경건한 여인들은 임신하게 될 경우 “혹시나 내 태 중에 있는 아이가 메시야는 아닐까?”라는 기대를 할 정도로, 메시야가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렸다고 합니다. 아버지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 하에서 시달리면서,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속히 보내셔서 제 2의 출애굽을 이끌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경건한 유대인 아버지들은 자식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혹시나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다윗을 선택하여 왕으로 세우셨듯이, 자신의 자식들 가운데 하나를 메시야로 세우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아리따운 숙녀로 성장하면서, “아, 장차 내가 시집가서 애기를 낳았을 때, 그 애기가 하나님의 메시야로 선택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랬다면 가브리엘 천사의 이 소식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벅찬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유대 여인들 가운데 메시야의 어머니로 선택받는다는 일은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도 영예스럽고 모두가 다 부러워할 소식을 듣고도, 마리아는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야를 임신하고 낳아 기른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이지만, 문제는 마리아가 순결한 처녀의 몸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가브리엘이 만일, “장차 결혼하여 요셉의 아내가 되면, 그 때 메시야를 낳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순전한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요셉과 약혼을 한 후,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 순결하게 몸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런데 임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은 황당하고도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들은, “어떻게 남녀의 성적인 결합 없이 아들을 잉태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붙들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과학과 논리로 무장된 우리 현대인들만 그렇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미개해 보이는 마리아와 요셉에게도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4절을 보면, 마리아가 질문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히브리말로 ‘남자를 알다’라는 말은 성적인 결합을 한다는 뜻입니다. 마리아에게도 최소한의 상식은 있었고, 그 상식에 비추어 보아도 자신이 임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천사 가브리엘이 대답합니다. 35절입니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 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태초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마리아의 몸을 덮으면, 그 창조의 능력으로 인해 처녀가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보아라, 그대의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6-37절)고 말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넘어서서 당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브리엘의 소식이 주는 충격은 단지,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자연법칙 상 불가능하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이 사실을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닙니다.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은 처녀 생식이 과학적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 왔는데, 그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믿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마리아의 처녀 잉태설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고, 믿으려는 태도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없어도 믿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도 마리아가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자연 법칙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어려움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가 결혼을 약속하는 것인데, 이것은 주로 부모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법적 효력을 가지지는 못합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결혼할 나이에 이르면, 정혼이라는 것을 하는데, 결혼 생활을 위한 준비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혼을 한 다음 1년 동안 부부 관계는 허락되지 않지만, 법적으로는 신랑이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가집니다. 이 시기에 남편이 죽으면, 그 신부는 소위 ‘과부 처녀’(widow virgin)로 불립니다. 그렇게 1년을 잘 지내고 나면 마지막에 결혼을 하고 함께 살게 됩니다.
지금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 있습니다. 결혼식 날까지 몸을 정결하게 간수해야 할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혹은 결혼한 후에도 다른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가진 것이 드러나면, 율법은 그 여인을 사형으로 벌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 요셉이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고, “나는 아내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닙니다”라고 증언하면, 마리아는 영락없이 아이와 함께 비참하게 죽어야 합니다. 죽기 전에 당해야 할 모진 수치와 모욕과 박해를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마리아가 가브리엘의 소식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잉태하고 낳아 기르는 것은 너무도 가슴 벅찬 축복이요 은총인데, 그 은총을 받아 안고 나서 당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팔다리에 힘이 쪽 빠질 정도로 두려웠습니다. 아이를 낳기도 전에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천사의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는데, 그 물음 속에 숨겨진 그의 진짜 질문은 이런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제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낳으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합니까? 아이를 낳을 때까지 제가 살아남기나 할까요?”
3.
이 지점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해 보십시다. 성난 군중들이 마리아를 더러운 여자의 표본으로 여기고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 앞에서 욕보이고, 마구 폭행을 가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부모가 아무 죄도 없이 죄인으로 몰려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마리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을 그렇게도 사랑하고 아껴 주었던 요셉의 분노한 얼굴을 마주할 것을 두고 두려워하는 마리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주의 말과 함께 날아오는 무수한 돌에 맞아 서서히 죽어갈 운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상상을 해 보시면, 강림절의 소식이 마리아에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결국 그 모든 섭리에 대해 순명하기로 결심합니다. 38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말 그대로 생명을 맡기는 고백입니다. 그 옛날 에스더가 했던 말, “그러다 죽으면, 죽으렵니다”라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다는 고백입니다. “이제 저의 인생은 저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 놓겠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마리아의 위대성을 보여줍니다. 우리 개신교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신성시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를 중재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 호의를 입기 위해 성자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아니, 어떤 사람은 성자이고, 어떤 사람은 복자이며, 또 어떤 사람은 그냥 평범한 신자라고 믿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다 같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마리아를 숭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역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었다고 믿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하시려는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위험하고 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지를 알면서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다행히도,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과 상관하지 않고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조용히 파혼을 하기로 선택합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요셉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그로 인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the worst scenario)을 피하기는 했습니다만, 아이를 낳은 이후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할 때까지, 마리아의 삶은 고난과 아픔과 희생과 눈물로 얼룩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고, 저와 여러분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우리는 오늘 강림절 둘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강림절 혹은 대림절은 교회력의 시작으로서, 2천년 전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묵상하며,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강림을 축하하고 감사하며, 또한 장차 완전한 모습으로 임하실 재림을 기대하고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오늘 저는 마리아에게 임한 강림의 소식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 보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마리에게 임한 강림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남의 이야기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 전, 지금은 온누리교회를 담임하시는 하용조 목사께서 연예인 교회를 담임하실 때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성경 공부 시간에 하 목사님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떤 삐딱한 교인이 중간에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하신 일 중 좋은 일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그렇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다루시는 겁니까? 그런 얘기는 집어 치우고, 다른 말씀을 좀 들려 주십시오.” 그러자 하 목사님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해하기도 쉽고 고상한 가르침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분이 처녀의 몸에서 탄생했다는 교리는 받아 들여야 합니다”라고 답하시고는, 처녀 탄생설을 믿어야 할 이유들에 대해 계속하여 설명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많은 설명이 질문한 그 사람에게는 전혀 설득이 되지 않았던가 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믿지 않는 사람을 설득시킬 방도는 없어 보입니다. 그 사람이 다시금 중간에 말을 끊고, “거, 제발, 다른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없습니까? 저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순간, 긴장감이 좌중을 압도했습니다.
그 때, 그 자리에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코메디언 구봉서씨가 있었답니다. 나중에 그분은 장로가 되셨는데요. 그분이 갑자기 일어나서 질문한 그 사람을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핀잔을 주었답니다. “아니, 그 남편 요셉이 믿겠다는데, 당신이 뭔데 못 믿겠다 말이 많아? 당신은 제 3자야! 빠져!”
구봉서씨의 말씀대로, 우리는 모두 마리아와 요셉의 이야기에서 제 3자의 입장에 있습니다. 그 부부 관계의 일에 우리가 끼어들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마리아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제 3자로 남아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오늘도 성경 말씀을 읽는 이유는 당사자로서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응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늘 제 3자의 입장에서 성경을 읽으면, 늘 구경꾼의 입장에서 비판만 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마리아가 되어, 가브리엘이 전해 준 강림의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강림의 소식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고, 그 소식에 대해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하고 어떻게 응답할지 선택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5.
강림의 소식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 속에 들어오시겠다는 소식입니다. 위대하신 분, 더 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 조상 다윗의 왕위를 이을 분,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릴 분, 영원 무궁한 나라를 다스릴 분,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겠다는 소식입니다. 이 지구 위에 오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 만민에게 오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나에게, 바로 당신에게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집에, 내 마음 안에, 나의 침실 안에, 내가 운전하는 자동차 안에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내 삶 속에 뚫고 들어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여러분은 어떻게 여기십니까?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말했듯이, 이것은 알고 보면 참으로 기쁘고 복된 소식입니다. 28절에서 마리아에게 한 말씀, 즉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가 나의 삶에 개입하시겠다는 소식입니다.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내셨던 능력자가 내 삶에 관여하시겠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같은 사람을 기억하시고 나를 찾으시고 나를 보살펴 주시겠다는 소식입니다. 잠시, 이 소식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이 소식을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십니까? 무덤덤하게 느끼십니까? 아니면, 마음이 설레이십니까?
지난 주, 저는 캐나다 밴쿠버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었습니다. 마지막 날, 그 지역에서 목회하고 있는, 제가 가르쳤던 제자들을 불러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나중에 그렇게 말합니다. “저는 교수님이 저를 기억하시지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10년이 넘었는데도 기억해 주시니, 마음이 설레입니다.” 저같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보인 관심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마음 설레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나 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계시다는 사실은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거의 20년 가까이 지난 일이 생각납니다. 토론토에서 살 때의 일입니다. 그 때 제가 온타리오 호수에 가까운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때때로 밤에 호숫가에 나가 밤 하늘도 바라보고, 망망한 호수를 감상하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쏟아져 내릴 듯한 별들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내가 지금 발을 헛디뎌 호수에 빠져 죽는다면, 무엇이 달라질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저를 가까이 알고 있던 사람들은 한 동안 슬퍼할 것이고, 제 아내와 아이들은 여러 가지의 어려움을 당할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크게 보면, 저의 존재가 이 땅에 혹은 인류 역사에 아무런 차이를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조금만
크게 보면, 저의 존재는 제가 호수 안으로 던진 돌맹이 하나처럼,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저, 호숫가에 핀 풀 한 포기, 돌맹이 하나처럼 하잘 것 없는 저를, 하나님께서 불러 주셨고, 하나님께서 제 이름을 아셨고, 또한 제 삶에 관여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갑자기 눈물겨운 감사가 제 마음에서 흘러 넘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옛날, 다윗이 고백했던 기도,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시 8:4)라는 기도가 절로 제 입에서 나왔습니다.
6.
그런데 여기서 잠깐,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삶에 들어오실 때, 내가 감수해야 할 손해와 희생과 고난과 박해와 아픔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삶에 개입하기를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알라딘 램프에 나오는 지니가 아닙니다. 지니는 알라딘이 어떻게 살든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무리 비도덕적이라 해도, 그대로 순종합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내 삶에 들어와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여 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내 삶에 개입하시면,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이루어주시지만, 그와 동시에 내 삶을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틀어 놓을 수도 있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요청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으시지만, 있는 그대로 놔두지는 않으십니다. 나를 도구로 사용하여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원하시지만, 나를 변화시켜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뜻이 나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 나갈 때, 그것은 언제나 나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언제나 환영할만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흔들어 놓습니다. 때로 손해를 감수하도록 요청하시며, 때로 나의 것을 내놓기를 원하십니다.
때때로 그 희생과 손해는 감당하기 힘든 것일 경우도 있습니다. 마리아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점에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좋은 면만 생각하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고 고백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이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고백의 무게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고백은 내 삶의 주권이,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진실하게 한다면, 내 삶을 내 고집과 주관으로 붙들고 씨름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끌어 가도록 나를 열고 맡기는 일까지 감수해야 합니다. 이 고백을 진실하게 한다면, 내 존재와 내 소유를 모두 주님의 손에 맡기고, 주님의 뜻대로 사용되도록 맡기는 일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이 고백을 진실하게 한다면, 내 삶과 내 소유에 대한 야심과 욕심과 집착을 버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 시간과 돈과 지식과 경험과 재능을 내 욕심을 만족시키는 데에만 사용하던 삶을, 예수님께서 요청하신다면, 청산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 겁을 먹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과 소유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다 보면, 내가 감당해야 했던 손실과 상처와 희생이 수십배 혹은 수백배로 보상되고도 남는, 큰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주님의 뜻을 위해 드려질 때, 참된 자아 실현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내 욕심이 부정될 때,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소유가 주님의 손에 들려 사용될 때, 그 물질이 영원한 가치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비록 마리아처럼 미래에 당하게 될지도 모를 아픔 때문에 걱정과 염려가 없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주님, 어서 오십시오. 제 삶 속에 오십시오. 제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오늘, 우리는 ‘청지기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청지기’라는 말이 이제는 고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사용되는 말로 바꿔 보자면, ‘관리인’ 혹은 영어로 manager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관리인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시간도, 우리의 재물도, 우리의 건강도, 우리의 재능도, 우리의 지식도 그리고 우리의 경험도,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우리에게 맡기신 이유는 그것을 사용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라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가,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관리인임을 분명히 고백했습니다.
한 해가 저무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지나 온 삶에 대해 돌아 보십시다. 나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머물러 계셨습니까? 내가 그분에게 맡겨 그분의 뜻대로 사용하도록 한 내 시간, 내 물질, 내 힘은 얼마나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에 들어오셔서 얼마나 나를 흔들어 놓으셨습니까? 내 삶의 주도권은 얼마나 그분의 손에 돌아갔습니까? 그분을 향한 마음의 문은 얼마나 활짝 열려있습니까? 혹시나, 이것 저것 생각하니 불편하고 괴로워서,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사시는 것은 아닙니까? 잡았던 물질을 놓으면 뭔가 위태로울 것 같아서,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까?
이제 내년을 전망하면서, 이 시간, 다시금 마음을 새롭게 하여, 고백하고 결단하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우리 각자의 삶 속에, 우리의 침실에, 우리의 지갑 속에, 우리의 식탁에, 우리가 가는 골프장에 뚫고 들어오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에게 얼마나 자리를 더 내어 드리겠습니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자리가 넓어지는 것만큼 우리의 삶이 더 불편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질적인 손해와 희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령한 기쁨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제 한 주간 동안 이 문제에 대해 곰곰히 묵상하시며 기도하기를 빕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의 결단을 ‘사역의 봉헌’과 ‘재물의 봉헌’을 통해 표현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결심과 헌신은 구체적으로 표현될수록 더 잘 실천됩니다. 이 두 가지 영역에서의 여러분의 결단은 다른 영역으로 흘러 넘쳐서 여러분의 삶의 더 많은 영역이 주님께 드려질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그분의 것이었으니, 그분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헌신되고 봉헌된 만큼, 그만큼 더, 우리의 삶에는 영적인 진보가 이루어지고, 그만큼 더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
주인 행세 하려는 제 마음의 욕심을 제하여 주소서.
모든 것을 참 주인에게 되돌려 드리게 하시고
저희는 다만,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손에 붙들린 만큼만
참된 의미를 가짐을,
기억하게 하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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